• 가장 비겁한 토론회에
    배경음악을 입힌다면?
    [기고] 민주당 차별금지법 토론회
        2021년 11월 26일 03:2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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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념할 만한 멋진 순간, 이것이 영화의 한 장면이라면 어떤 음악을 배경으로 입힐 수 있을까 생각해 보곤 한다. 예를 들어 지금도 진행 중인 전두환의 장례식장인 세브란스 병원 앞에는 하루 종일 ‘님을 위한 행진곡’이 거친 민중가요 풍으로 울려 퍼졌으면 좋겠다.

    이 노래가 5월항쟁 시민군 대변인이었던 윤상원과 노동운동가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을 위한 축가로만 알려져 있지만, 영혼결혼식을 계기로 유가족들을 한자리에 모아 5월 항쟁의 정신을 알리고 전두환 군정 종식 논의를 이어가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이 노래가 세브란스 병원 앞에서 울려 퍼진다면 전두환의 영혼은 혼비백산할 것이다.

    이미지=정의당

    어제 정의당은 차별금지법 연내 제정을 주장하는 농성을 시작했다. 이 농성장 기자회견에는 ‘베토벤 삼중협주곡’의 2악장이 조금 빠르게 삽입되면 좋을 것이다. 바이올린, 피아노, 첼로의 3중 협주지만 첼로의 높은 음을 주인공으로 삼은 작품이다. 돌아가신 고 노회찬 의원이 사랑했던 악기인 첼로는 대체로 중저음의 무게감으로 감정을 밀고 오지만, 이 협주곡에서 첼로는 높은 음역으로 영감을 일으킨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제이미 폭스’가 주연한 영화 <솔로이스트>에 이 음악이 사용된 장면의 인상이 차별금지법 농성장의 분위기에 어울릴 것만 같다. 이 음악이 흐르면서 주인공 나다니엘은 자신을 찾아온 누이에게 ‘우리 삶이 참 파란만장 했지?’ 라고 묻는다. 논의만 20년째 이어온 차별금지법, 문재인 대통령도 후보시절에 약속했고, 이재명 후보가 지난 대선의 경선후보일 때도 제정을 약속했었다. 이 파란만장한 배신의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적절한 선택일 것이다.

    어제 국회에서 차별금지법 토론회가 있었다. 차별금지법 제정에 찬성하는 인권 활동가 5명과 반대하는 5명이 각각 찬반 토론자로 나섰다. 민주당이 주최했지만 10명의 토론자 중 민주당 인사들은 아무도 없었다. 민주당은 인권을 위한 싸움에서 선수이길 거부했다. 정치가 싸우지 않으니 10명의 토론자가 거친 말을 주고 받았다. 차별금지법을 위해 노력해 왔던 인권 운동가들에게는 인생 최대의 모욕적인 순간이었을 것이다. 반대편의 패널들은 예상치 않게 민.주.당.(국민의힘이 아닌)이 깔아준 주단 위에서 자신들의 평소 생각을 가감없이 말할 수 있는 드문 기회였을 것이다.

    이 토론회에 BGM을 깐다면 무슨 음악이 적절할까 며칠 전부터 생각해 보았다. 어떤 순간의 비겁함이나 우유부단함을 드러내는 음율이 뭐가 있을까? 그러다 문득 생각나는 영화가 있었다. BGM이 없는 영화, 총천연색 칼라도 없는 흑백영화, 비겁함으로 충만한 가운데 빛나는 연대로 마무리된 서사, 2018년을 특별하게 했던 그 영화, <로마>였다.

    민주당 차별금지법 토론회에는 BGM이 없어야 그 순간의 참담함과 비겁함을 정확하게 제대로 보여줄 수 있겠다. 현장에 있지 않았지만 이종걸의 숨소리는 떨리고 거칠었을 것이다. 아마도 겨우 참아냈지만 울먹임을 다 숨기지는 못했을 수도 있다. 이 숨기지 못한 울먹임까지 포착하여 사운드를 살려야 그 장면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전환치료를 주장했던 이요나 목사의 혐오발언은 당당하고 자신감이 있었을 것이다. 역사는 대체로 신의 이름으로 사랑을 말하는 자의 목소리보다, 증오와 혐오를 내뿜는 자의 목소리가 더 당당했음을 가르쳐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조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BGM 따윈 필요없다.

    멕시코 원주민이자 입주가정부인 클레오는 페르민과 사랑에 빠지고 그의 아이를 임신하지만 페르민은 그 소식과 함께 클레오를 외면한다. 홀로 출산하기로 한 클레오는 아이 침대를 사기 위해 시내에 나섰다가 ‘성체축일의 학살’에 가담한 페르민과 조우한다. 그는 민주주의에 총을 겨눈 극우파의 일원이 되어 있었다. 영화 <로마>에서는 이 모든 서사에 음악을 입히지 않았다. 메마르고 까실한 현장음만으로 충만함, 배신, 비겁함, 혼란, 연대와 사랑의 정서를 모두 잡아낸다.

    역사상 가장 비겁한 토론회를 위한 배경음악은 없는 것이 낫겠다. 이재명 후보는 연일 큰절을 해대며 반성과 사과를 이어가고 있다. 억강부약의 이재명은 왜 사회적 약자에게 실제로는 이토록 강자인가? 민주당 박완주 전 정책위의장은 국민의힘이 정당간 토론회에 응하지 않았다고 변명했다. 법사위 야당 간사인 박주민은 야당이 진지한 논의와 검토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 딱 맞는 BGM은 없지만, 어울리는 금언은 하나 있다. 민주당에서 박주민·이상민·권인숙 의원이 차별금지법을 발의했다. 이재명 후보의 말 한마디에 침묵을 이어가고 있는 세 분은 더 새겨야 한다. 수첩을 펴고 맨 앞장에 받아 적으시라.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말이다.

    “결국 우리는 적의 말이 아니라 친구의 침묵을 기억할 것이다.”

    “In the end, we will remember not the words of our enemies, but the silence of our friends.”

    필자소개
    정의당 심상정 선대위 상임공동선대위원장. 전 관악구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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