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정규직 담론은 정치권력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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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12월 21일 03:2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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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시장에 대한 내 생각

    ‘시장’이라는 말을 우파들이 쓸 때 내가 혼자서 생각해보는 기준이 있다. ‘무조건 시장’이라고 말하면 꼴통이고, 시장이 가지고 있는 제도적 속성에 대해서 여운을 남기면 합리적 보수라고 생각하면 거의 정확하다. 신고전학파 경제학이라는, 좌파들이 ‘근대경제학’이라고 하는 그 학문에는 시장에 대한 공식적인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꼴통과 합리적 보수를 구분하는 방법

    시장은 거래인가? 혹은 장소인가? 그 어느 것도 아닌 굉장히 추상적인 개념이다. 어쨌든 윌리암슨류의 신제도학파까지 포함한다면 시장은 제도 중의 하나일 뿐이다. 이를 제어하거나 반대되는 개념으로 조직, 위계 혹은 정치 같은 것을 거론하기도 하고, 혹은 마케팅에 의해서 움직이는 문화나 기타 등등. 하여간 그런 것들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면, 어쨌든 교과서에 충실한 우파이다. 그렇지 않다면? 꼴통일 가능성이 높다.

       
      ▲ 영화 <레지던트 이블 2> 포스터
     

    하여간 이 꼴통들은 시장이 100%이면 좋은 사회가 올 것이라고 말하기는 하지만, 내가 보장하건데 100% 시장으로 돌아가는 사회는 지옥이 된다. 영화 속에서 이와 가장 유사하게 그려진 사회가 로보캅의 배경이 된 <델타 시티>가 있고, 조금 각도는 다르지만 2부까지 공개된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전자오락을 영화화한 ‘착한 몸매’의 앨리스의 눈요기거리 정도로 생각하는 영화지만, 다국적기업 중 한 번도 제대로 영화가 공격해보지 못한 화장품 회사와 생명공학 계열의 회사들을 정면으로 노리고 찍는 영화이다.

    공개된 2편의 마지막 장면은 다국적 기업이 비밀을 은폐하기 위해 핵폭탄을 날려 양민을 학살하는 부분까지 세상에 나와있다 (4편으로 예정되어 있는 이 시리즈가 제대로 촬영되어 공개될지가 요즘 초미의 관심사다.)

    비시장 부문의 존재가 시장을 멀쩡하게 해준다

    100% 시장인 사회가 지옥이라면, 반대로 100% 조직 혹은 종교에 의해서 움직이는 사회도 지옥일 수 있다. 물론 인류는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왔지만, 이미 돈맛을 볼만큼 본 인류가 경제적 부문을 완전히 기억 저편으로 넘기기는 어렵기 때문에, 대단히 잔인하고 잔혹한 사회가 열리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는 편이다.

    어렴풋한 내 생각을 말하면, 나는 시장이 70%에서 80% 정도, 그리고 그렇지 않은 비시장적 관계가 나머지 부분을 채워서, 두 다른 영역이 긴장을 하면서 움직이는 사회가 현재 생각할 수 있는 모습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물론 이런 생각은 내가 이론 작업을 할 때 설정하는 작업가설 수준이고 아직 정형화된 것은 아니다. 그럼 이게 사민주의인가? 나는 경제학 하는 사람이라서 그런 복잡한 건 잘 모른다. 그러나 시장과 긴장관계를 가지고 있고, 시장에 기계적으로 환원되지 않는 무엇인가가 존재할 때 시장도 멀쩡할뿐더러 사회가 최소한의 인간적 얼굴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2. 임금에 대한 생각

    임금과 가격의 비밀을 알면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맑스는 생각한 것 같은데, 이미 임금이 그렇게 결정되는 것도 아니고 또 그 결정과정을 과학화한다는 것은 기계론적인 생각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갖는다. 임금이 도대체 얼마에서 결정되는가? 이건 임금의 절대수준과 사회적 수요 같은 것들만이 관계하는 게 아니라 임노동관계의 사회적 틀에 의해서 상당 부분 영향을 받게 된다.

    복잡한 단어를 썼지만 정규직인가 비정규직인가는 생각보다 중요한 문제이다. 경제학자들은 절대 임금에 대해서만 얘기하는 경향이 있지만, ‘안정성(security)’이라는 중요한 변수가 개입하게 되니까, 이 두 개의 다른 제도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비정규직 노동자는 결혼도 하기 어렵다는데야… 굳이 이 차이를 이론적으로 설명한다는 것도 바보같은 일이다. 세상 사람들 다 아는 일을…

    3. 정규직에 대한 생태적 사유

    들뢰즈가 얘기한 노마드(유목민)와 한국 자본주의가 포착한 ‘노마디즘'(유목주의)은 분명히 다르다. 그리고 경제인류학이나 생태인류학에서 종종 등장하는 ‘원시 노마드’도 분명히 개념적으로는 다른 존재이다.

    철학적인 논의야 논외로 한다고 하더라도, 한국 자본주의가 ‘유목주의’라고 광고하는 그 존재는 주5일제를 맞아 SUV를 LUV로 바꾸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죽어라고 일하고 휴가를 떠나는 존재일 뿐이다.

    열심힌 일한 자 떠나라는 ‘노마디즘’의 비밀

    이 한국형 유목주의의 인간은 마케팅의 노예이고, 전화와 차에서도 TV를 보게 하고, 잠시 눈감고 쉬고 싶은 고속버스나 고속열차에서도 쉬지 않고 광고를 보게 해야 마케팅의 힘이 정상적으로 작동한다. 드라마나 뉴스, 하다못해 문화나 정치 프로까지 사실은 광고를 보거나 광고를 진지하게 즐기게 만들기 위한 작은 소품에 불과하다.

       
      ▲ 광고의 한장면…
     

    노동의 노마디즘? 당신 같으면 그런 거 하겠냐? 연봉 2억쯤 받을 뭔가가 있는 0.01% 이하에게 해당하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일이다. 그렇게 잡아도 4,600명이나 나온다. 공지영 정도는 되어야 감히 노동의 노마디즘 얘기할 수 있고, 쉬다가도 4할 타율은 나오는 타자, 아니면 눈감고 찍어도 수익률 200% 나오는 ‘황금의 손’ 아니면 비정규직 노마디즘은 말도 안 되는 얘기다.

    한국 자본주의에 대한 생각에서 생태주의는 마케팅이 제공하는 욕망의 포로에 노획된 노마디즘이나, 노동의 편익을 철저히 대변하는 노동의 유목주의를 반대한다. 물론 찬성할 가능성이 있기도 하다. 전국민이 동시에 노동을 반대하는 무정부의적 총파업 혹은 전격적인 문명의 거부에는 찬성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정규직 노동에 노동시간의 획기적 단축과 유연한 노동시간제 그리고 이를 상쇄하기 위한 임금의 감축에 찬성한다. 나야말로 폴 라프그의 ‘게으름의 권리’의 찬미자이기 때문이고, 이 상태에서 노동시장과 사회 그리고 국토 생태 사이의 적절한 긴장과 균형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는 편이다.

    4. 왜 한국 자본가들은 비정규직에 열광하는가?

    대량생산 대량소비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 포디즘은 당연히 ‘숙련노동’을 위한 정규직제와 이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가능하게 해주는 높은 임금이라는 틀 내에서 움직인다. 아무 데나 포디즘의 공정라인이 옮겨가지 못하는 것은 이런 생산 방식도 일종의 사회적 제도에 해당하고, ‘숙련도’라는 계측하기 어려운 변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문제의 비밀, 노동자 권력 뺏기

    국부 지식(tacite knowledge)-정형화되지 않은 지식-과 공정상에서 발생하는 ‘연성혁신(soft innovation)’에 대해 한국 자본주의의 맹신자들이 죽어라고 입을 다무는 일은 좀 놀라운 일이다. 지식경제라는 말의 원형을 만들었던 경제성장론의 폴 로머나, 오스트리아학파의 혁신 이론 중에서 핵심에 해당하는 얘기들은 쏙 빼놓고, 디지털이니 IT니, 그야말로 지들 입맛에 맞는 얘기만 가지고 오면서, 정규직 체계가 왜 중요한지에 대한 얘기들은 어디다 버리고 왔는지…

    경제학이야말로 이데올로기라는 말은 이 때에 딱 적합하다. 돈은 조금 주고, 죽어라고 쥐어짜면 된다는 발상은 포디즘의 역발상인데, 포디즘 체계는 가지고 왔지만 왜 테일러주의에서 포디즘으로 전화하게 되는지 사회적 관계는 가지고 오지 못한 셈이다. 이런 사회가 포스트 포디즘을 만나니까 그야말로 가관인 세상이 열렸는데, 그게 딱 노무현 시기에 ‘말로만 민주주의’ 386들과 제대로 만나면서 비정규직 법안이 생겨난 셈이다.

    이 법안을 보면서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사람을 보면, 난 진짜 그 사람 영혼의 깊은 곳에 악마가 살지 않을까라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TV 볼 때, 욱하고 TV 부수지 않기 위해서 혼자서 "처키"-공포영화 주인공 인형-라는 주문을 외운다. 그리고 보면 정말 처키처럼 보이고, 저들이 말하는 비정규직 법안의 진짜 내용이 잘 보이게 된다.

       
      ▲ 지난달 30일 오후 국회 본회장에서 민노당 단병호 의원이 임채정 의장의 비정규직 관련 법안 직권상정에 대해  항의하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일본말로 ‘중후장대형 산업’이라고 하는, 아직도 우리나라 산업의 30% 이상을 차지하는 대규모 작업장의 경영분석표 같은 것들을 보면 임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 안되고, 주요 원가는 원료와 연료비가 차지한다. 실제 거의 완벽하게 자동화 공정이 이루어진 이런 곳에서 임금 압박 때문에 비정규직으로 노동자들을 전환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통계표를 서로 들이대면, 몇 % 차이가 나오기는 하겠지만, 진짜로 이들이 원하는 것은 노동자의 힘으로부터 자유로와지고 싶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말로 원하는 것은 ‘노조없는 세상’ 그리고 조직화되거나 노동법의 보호를 받는 노동자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비정규직으로 바꾸다보면 실제로는 노동숙련도와 연성혁신에서 문제가 생겨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싫은 것은 1년에 한 번은 크게, 그리고 작게 수시로 노동자들의 대표와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해야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말 잘 듣는 자식이 예뻐보인다"와 같은 가부장제로 운영되는 "한 가족" 시대의 전설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이지만, 역사는 그렇게 뒤로 잘 돌아가지는 않는다.

    그래서 비정규직이 해법이라고 한국 자본가들이 그렇게 손을 들어서 반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기업을 한 단위의 조직으로 본다면, 이 안에서 임금과 생산성 사이에는 그다지 큰 관계가 높지는 않다. 어떻게 작업자들의 적극적 협력을 이끌어낼 것인가라는 문제인데, 비정규직으로 전환하면 협력이 아니라 완벽한 지시가 이루어지게 된다. 그런데 그 ‘지시’만 가지고 세계화 시대의 국제적 경쟁이 어려울 것이라는게 최근의 이론이지만, 하여간 한국 자본주의는 이 비정규직 복음에 열광한다.

    분명히 포스트 포디즘이라는 한국 경제에 던져진 숙제를 풀기는 해야겠지만, 한국 자본주의는 퇴행적 선택을 내린 셈이다.

    5. 우리은행 은행의 경우…

    우리은행에서 비정규직 직원을 정규직으로 전환했다. 그야말로 사회적 관계와 ‘내부화’ 그리고 생산성이라는 몇 가지 변수로 간단하게 모델링 해볼 수 있는 사건이기는 한데, 이 사건은 큰 사건이다.

    위기 즉 디폴트(dafault) 상태에서 긴급경영의 터널을 지나야 하는 업체와 그렇지 않은 업체의 경영목표가 분명히 다른데, 우리나라에서는 사회적 관계의 재구조화라는 그야말로 자본의 통치 이데올로기의 관점에서 비정규직 노동이라는 것을 다룬 셈이고, 급격한 비정규직화로의 재편은 경제의 문제라기 보다는 정치적 영역의 문제에 가깝다.

    급격한 비정규직화는 경제 문제 아니라 정치 문제

    이 시점에서 생각해보면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이 정말 ‘악질’이었던 것은 그들을 지지했던 국민들을 철저하게 통제와 조작의 대상으로 보았다는 점이다. 결국 노동수입 외에 없는 국민들을 비정규직으로 적극적으로 전환시키고 소득 보장을 해주면 고마워할 것이라는 이 얕은 통치술은 경제의 영역이 아니라 정치의 영역이다. 이 사람들이 일제의 총독부라면 정치의 경제적 해석일 수 있지만, 투표로 당선된 국민의 대표라는 점에서 보면 경제적으로는 해석이 안 되고, 정치적으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그 사이에 발생한 우리은행의 정규직화 전환은 구체적인 맥락을 뛰어넘어 큰 사건이다. 다음 차례를 생각해보면 외환은행이 맥락에서는 가장 가까운 경우지만, 경영 결정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까 더 많은 사회적 목소리와 지지의 힘이 필요할 것이다.

    월급이 줄고, 노동시간이 줄고, 그 대신 더 많은 사람들이 정규직 체계로 들어오고, 이 속에서 사회적 타협이 이루어지고, 조금 더 욕심을 낸다면 ‘노동자’ 외의 소수자도 함께 권익을 누리면 살 수 있는 사회…

    이 첫 출발이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최소한의 해법 제시와 함께 시작한다. 그래서 나는 생태주의자이고, 또 대부분의 주류 – 운동권을 포함해서 – 목소리에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정규직 체계를 지지한다. 그래서 우리은행의 작은 사건이 그렇게 작아 보이지 않는다.

    정규직 체계에 대한 이해가 다른 사람은 나와는 한국 사회에서 정치적 견해가 다른 사람들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정규직 체계에 대한 이해가 사실상 소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비정규직을 지지하는 한 줌의 자본가, 일제 시대 조선총독부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는 극소수의 노무현 지지자, 그리고 상층의 귀족들을 대변하는 꼴통들만이 비정규직의 증가를 보면서 즐거워하지 않을까? 이 사람들은 인구의 5% 미만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 지금 한국 사회에서 정규직 체계가 필요한 것일까? 이걸 설명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가장 중요한 이론적 작업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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