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노동의 최전선,
    종속적 자영업자에서 플랫폼 노동까지
    [책소개]『노동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들』(전혜원(지은이)/ 서해문집)
        2021년 11월 13일 07:0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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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 :
    사람이 생활에 필요한 물자나 화폐를 얻기 위해 육체적·정신적 노력을 들이는 행위

    우리는 모두 노동자다. 사전이 그리 정의할뿐더러 현실에서도 그렇다. 오늘날 자본주의 세계에서 ‘사람의 가치’는 그가 가진 ‘노동의 가치’와 연동된다. 한 사람의 사회적 지위를 좌우하는 것은 개인의 노동에 매겨지는 가치(임금)다. 값비싼 노동자일수록 촉망받는 인재로, 각광받는 결혼 상대자로, 존경받는 부모로 살아가기 쉽다. 반면 노동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저임금 노동자, 나아가 실업자는 최소한의 권리와 존엄조차 누리지 못할 때가 많다. 이 책은 노동의 가치를 사람의 가치로 환산하는 오래된 현실이 합당한지에 대해 애써 판단하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 크고 머나먼 차원의 일이다. 대신에, 좋든 싫든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과 일터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들에 주목한다.

    저자의 짧은 이주 노동 경험으로 시작되는 이 책은, 모두가 노동자인 사회에서 근로기준법을 비롯한 노동법의 보편적 보호망이 왜 어떤 노동자에게는 미치지 않는지를 묻는다. 내가 하는 노동이 다른 이의 노동과 같을 때 적용되어야 할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이 왜 작동하지 않는지 묻는다. 수년째 ‘공정’을 명분으로 벌어지고 있는, 들어갈 자격(공채 정규직)과 일할 자격(숙련된 비정규직)의 다툼에 숨은 차별의 구조를 묻는다. 쿠팡과 타다 등 신산업의 총아들이 뽐내는 ‘혁신’이 실은 ‘약탈’의 다른 이름이 아닌지 묻는다. 기술이 일자리를 잠식하며 숙련공들을 노동시장 밖으로 내몰 때, 공동체가 지녀야 할 태도와 처신에 관해 묻는다. 왜 우리는 일터에서 날마다 명복을 빌어야 하는지 묻는다. 그 죽음들을 멈추기 위해 만들어진 법과 제도의 공과를 묻고 또 묻는다. 요컨대 이 책은, 플랫폼 노동에서 중대재해처벌법에 이르기까지 우리 시대를 압축해 보여주는 9가지 질문으로 엮어낸 ‘밀레니얼 한국의 노동여지도’다.

    우리 시대 노동의 공통분모, 숙련의 해체

    질문을 던지는 이는 저널리스트 이력의 과반을 노동 현장에서 채워온 1988년생 시사주간지 기자다. 그는 반(反)신자유주의나 시장주의 같은 거대하고 추상적인 관념에서 답을 찾지 않는다. 선악의 이분법을 따르지도 않는다. 두 눈과 두 발로 겪어온 취재현장이 그에게 ‘노동은 결코 신성하지 않으며, 노동 문제는 이해를 달리하는 행위자들 간 합리적·비합리적 상호작용의 산물’이라고 규정하기 때문이다. 거대담론을 뒤로한 채 개별 노동자와 조직 노동, 기업과 정부, 해묵은 관행들과 제도의 역학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이 책의 문제의식은 기술발전과 고도 분업이 가져온 ‘숙련 일자리의 감소’라는 전 지구적 현상으로 집약된다.

    오랫동안 기업이 정규직을 뽑는 이유는 ‘숙련’이라고 알려져 왔다. 일을 오래 해서 숙련 노동자가 될수록 생산성이 높아진다. 그럼 기업은 해당 노동자를 오래 고용할 유인이 생긴다. 오래 일할수록 숙련이 쌓인다고 가정하고 근속연수에 따라 높은 임금을 주는 시스템이 바로 호봉제다.

    이러한 숙련이 해체되고 있다. 우리 시대에 논의되는, 언뜻 서로 무관해 보이는 노동 문제들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숙련 해체라는 공통분모와 곧잘 마주치게 된다. 기업은 점점 숙련이 필요 없는 업무를 밖으로 털어낸다. 자영업이 요구하는 숙련을 갖지 못한 자영업자는 가맹비와 노동력을 제공하는 대신 가격 책정을 비롯한 경영의 핵심을 프랜차이즈 본사에 맡기고, 본사는 점포 확장의 비용과 리스크를 가맹점주에 넘긴다. 프랜차이즈라는 ‘혁신’이 만들어낸 새로운 노동관계다(1장). 저숙련 인력을 그나마 고용이라도 하던 기업들은, 하청을 주는 것을 넘어 아예 플랫폼 노동자, 특수고용 노동자, 프리랜서 같은 이름의 개인사업자와 계약을 맺어도 되게 되었다.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고용하지 않고도 일의 수행 여부를 실시간으로 추적하고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으니까(2장).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군 ‘타다’와 택시를 둘러싼 갈등은, 길 찾기라는 택시기사의 숙련을 내비게이션이 해체한 것과 관련이 있다(3장).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반대하고 나선 인천공항 정규직 노조가 내세운 것이 자신들의 ‘숙련(일할 자격)’이 아니라 ‘공채(들어갈 자격)’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에서 자원이 배분되는 방식이 숙련과는 거의 무관한 다른 것(입직 과정)이라는 사실을 폭로하기 때문이다(7장). _(본문 19~20쪽)

    차가운 머리, 따뜻한 심장으로 쓴 노동 이야기

    저자와 이렇다 할 인연이 없음에도 이 책에 치밀한 비평과 질정을 건넨 소설가 김훈은 그러한 문제의식이 “‘정의란 무엇인가?’라기보다는 ‘무엇이 정의인가?’에 가깝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이 책은 ‘이념의 깃발로 펄럭이지 않으며, 질문이 추구하는 정의는 실용적이며 생활적이다. 이 책의 질문들은 가치중립적이되, 탈가치가 아니라 충돌하는 여러 가치들을 함축하는 넓은 시야를 가졌다. 이를 통해 원리가 아니라 방법으로서,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작동되는 정의의 모습을 힘겹게 그려내고 있다.’

    꼰대 또는 지독한 허무주의자라는 세상의 평가가 무색하게 노동, 특히 산업재해 문제에 천착하며 울림 깊은 문장과 호소를 쏟아내고 있는 이 노작가의 말마따나 이 책에는 ‘사이다’가 없다. 극성맞은 비판과 손쉬운 대안 대신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가며 벼려지는 저자의 생각은, 넌지시 혹은 노골적으로 기업 편을 드는 보수 진영과 충돌할뿐더러 노동을 ‘선량한 피해자’로만 그리는 진보 진영과도 곧잘 불화한다.

    훨씬 논쟁적이고 풍부한 이야기들이 공론장에 많이 나와야 한다고 믿었다. 예컨대 로켓배송과 인공지능 기술이라는 ‘혁신’을 경제지가 소개하고, 그로 인해 파편화되는 노동의 아찔함을 진보지가 지적할 때, 나는 그 빛과 어둠을 모두 보고 싶었다(5, 6장). 톨게이트 수납원 해고 사건에서 ‘하이패스가 있어서 수납원이 필요 없는데 왜 세금으로 정규직화해야 하느냐’는 포털사이트 댓글의 물음에 정면으로 답하고 싶었다(4장). 형사처벌을 전제한 중대재해처벌법이 경영진에게 ‘안전 의무’를 지나치게 포괄적으로 묻는 것 아니냐는 보수 쪽 의문을 피해가지 않으려 애썼다(8장). 인천공항 정규직화 갈등이나 호봉제, 정년연장에 대해 진보 언론이 좀처럼 말하지 않는 바를 들여다보려 했다(7, 9장). _(본문 22쪽)

    ‘인천공항 사태’로 대표되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문제에서 저자는, 유사 신분제의 특권층으로 군림하는 공공부문 정규직을 비판하면서도 진보가 죄악시하는 ‘자회사 방식의 정규직화’를 고민해볼 만한 대안으로 제시한다. 타다 서비스와 택시 업계의 충돌에 관해서는 혁신(사납금 폐지, 승차거부 등 택시 업계의 부조리 해소)과 약탈(노동법 위반)이라는, 신산업의 출현이 일으키는 사회변동의 모순을 입체적으로 포착해낸다. 잇따른 산재 사망 사건의 처방으로 마련된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김용균법)과 중대재해처벌법의 한계를 하나하나 짚으면서도 ‘김용균 없는 김용균법’이라는 미디어의 섣부른 평가와는 분명한 선을 긋는다. 노동계와 진보진영에서 주장하는 정년연장과 주휴수당이 실제로는 노동시장의 약자들에게 전혀 이로운 정책이 아님을 폭로한다.

    숙련 해체의 시대, 소멸하는 일자리에 대한 치열한 관찰과 모색이라는 점에서 이 책은 한 세대 전의 고전 《노동의 종말》(1996)을 잇고 있다. 그 숙련 해체를 주도해온 기술 혁신의 은밀한 착취 구조를 고발한다는 점에서는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1963)의 통찰을 닮았다. 일터에서 모멸받고 쫓겨나는 이들의 인간적 상처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난쏘공》(1978)이나 《전태일 평전》(1983)의 리부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책은 ‘노동계급을 위한 진혼곡’이 아니다. 노동자와 그들의 일자리가 겪어온 좌절과 고난에 가슴 아파하면서도 추상화된 거대담론과 진부한 구호에만 머물러온 진보-보수의 통념을 부끄럽게 만든다는 점에서, 이 책은 무엇보다 불세출의 경제학자 알프레드 마셜이 한 세기 전 당부한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심장’으로 써내려간 이야기다. 소설가 김훈이 이 책에 붙인 추천사의 마지막은 이렇다.

    “선악의 구분을 넘어서려고 했다지만, 결국 그도 가치판단을 완전히 내려놓지는 못한다. 인간이, 사회적 관계를 설정하는 일은 윤리의 범주를 저버릴 수 없다는 것을 전혜원 기자는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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