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사연 모델의 ‘죄와 벌’
    2006년 12월 18일 01:5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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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손석춘 원장은 「엄숙한 ‘주홍글씨’들(판갈이, 12월 10일)」이라는 칼럼에서 나의 글 「사회적 시장경제 vs 노동 중심 국민경제(레디앙, 11월 27일)」를 비판하였다.

“온갖 ‘마녀사냥’이 판치는 한국사회에서 주홍글씨는 곳곳에 있다. 문제는 마녀사냥에 맞서야 할 진보세력 안에서도 주홍글씨가 마구 쓰여 지는 데 있다. 우리는 이미 몇몇 주홍글씨들이 진보적 먹물들을 어떻게 갈라놓고 있는지 서로 뼈저리게 체험하고 있다.

……논쟁은 창조적 사고를 자극하고 더 나은 방향을 찾는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때로는 비생산적 논쟁처럼 보이더라도 길게 보면 의미 있는 열매를 맺을 수 있다. 하지만 전혀 비생산적 논쟁도 있다. 주홍글씨가 그것이다.

   
  ▲ 손석춘 원장
 

대표적 보기가 <레디앙>에 실린 「사회적 시장경제 vs 노동 중심 국민경제」라는 글이다. 이재영 기획위원은 ‘새사연 모델’이 ‘노동 중심에 대한 강조가 개별적 경제 투입 요소로서만 반복되고, 정치사회적 집합 주체로서의 노동계급은 부정되거나 간과된다’면서 ‘이런 이데올로기와 현 실태는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과 조선노동당이 지배한 국가에서 이미 보았던 것’이라고 비판했다.

생활인들이 십일조를 내어 설립한 연구소에서 기껏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히틀러의 ‘나찌’를 의미한다) 곧 파시즘을 추구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과연 그러한가. 정확한 본문 인식 없는 비판이 무의미하거나 소모적임은 말할 나위 없다. 그것이 진보세력 내부라면 더 그렇다. …… 진보세력 안에서 엄숙한 주홍글씨는 이제 그만 쓰길 간곡히 제안한다.”

문제의 발단이 된 내 글 5,000자쯤에서 새사연 모델에 대한 주관적 평은 500자 정도 된다. 사실, 단편적 감상을 크게 넘지 않는 그런 촌평에 대해 정색을 하고 ‘주홍글씨’라는 반박을 하니, 외려 당혹스럽다. 그런데 나는, 손석춘 원장의 칼럼을 읽으며, 새사연이 왜 이리 격앙된 반응을 하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게 되었다.

손석춘 원장은 ‘생산적 논쟁’과 ‘비생산적 논쟁’을 나누고, 나의 글이 비생산적인 것이라고 판정한다. 질리도록 많이 들은 이야기다. 의견이 갈리거나 할 때마다 ‘비생산적이다, 작은 차이를 뛰어넘자, 실천을 앞세우자’는 식의 구태의연한 이야기를 들어오지 않았던가.

모든 논쟁은 ‘비생산적’이라는 혐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논쟁의 비생산성을 판별하는 유일한 기준은 자기 주장대로 실천에 돌입하기만 하면 된다는, 자기 확신과 타아 불신의 주관성으로부터만 도출될 수 있다. 또는, 덮어놓고 뛰어보자는 비이성적 경험주의 뿐이다.

물론, 내일 모레 있을 단체협상안을 놓고, 자본주의 국제 시장 동향을 논한다면 다분히 비생산적이겠지만, 10개 연구소가 찾고자 하는 것이 ‘대안’이고 따라서 그 공간적 시간적 지평이 대단히 넓고 멀다면, 논의 초입에서 논쟁의 생산성과 비생산성을 논하는 것 자체가 대안을 포기하는 것이지 않나?

내 촌평이 ‘엄숙한 주홍글씨’인 것이 아니라, 논쟁이랄 것도 없는 그 정도 촌평에 질겁하는 새사연이 ‘엄숙한 운동권 금기’에 사로 잡혀 있는 것은 아닌가?

손석춘 원장은, “생활인들이 십일조를 내어 설립한 연구소에서 기껏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 곧 파시즘을 추구하고 있다는 주장”이라고 항변한다. 먼저, 나는 새사연이 파시즘을 추구한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

나는 분명히, “가장 심각한 괴리는 ‘노동 중심’에 대한 강조가 개별적 경제 투입 요소로서만 반복되고, 정치사회적 집합 주체로서의 노동계급은 부정되거나 간과된다는 점이다. 이런 이데올로기와 현실태는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과 조선노동당이 지배한 국가에서 이미 보았던 것이 아닌가?”라고 말했다.

나는 새사연이 파시즘을 추구하고 있다고는 결코 판단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우려하는 것은 주체 의지로부터 독립돼 있는 역사적 객관, 그리고 소망스럽지 못한 역사적 객관에 무의식적으로 호응하는 주체의 잘못된 선택이다. 예컨대, 소련이나 북한의 국가 기획자들이 체제의 붕괴나 인민의 고통을 기획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잘못된 선택이나 기획이 그런 상황에 일조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생활인들이 십일조를 내어 설립한 연구소’라는 사실은 그런 오류를 피할 수 있는 아무런 보장이 되지 못한다. 100명의 생활인들이 십일조를 거두어 새사연을 설립한 것과 마찬가지로, 8만 명의 생활인에 의해 훨씬 견고한 민주주의 시스템을 가지고 운영되는 민주노동당의 7년 역사는 수많은 오류, 심지어는 악행으로 점철돼 있다. 하이데거가 나찌의 끔찍한 인종주의를 발명하지는 않았다. 그는 노동 중시 ‘생활정치’라는 개념의 최초 발명자다.

기왕에 나온 이야기를 조금 더 진전시켜 보자. 다만, 이 글에서는 ‘통일민족경제’ 등은 제외하고, ‘노동 중심 국민경제론’만을 다루겠다. ‘새사연 모델’의 현실 인식은 대단히 독특하다.

“새사연은 지난 세기말부터 일어난 기술혁명에 대해, 그것의 사회과학적 핵심 함의에 대해 ‘정신기술노동이 선도하는 질적 생산의 시대’로 정의함. 이런 정의에 기초하여 모든 사회 대안모델 구상에서 ‘질적 측면’을 중시하고, 정신기술노동에서 가장 전형적으로 표현되는 ‘노동창의성’을 중시하며, 이들에 의해 파생되는 생산과 생활에서의 ‘자율성 / 다양성 / 협력성’을 중시함.

…… 새사연이 구상하는 ‘노동주도형 국민경제모델’은 일면에서는 현재 한국의 주주자본주의 / 신자유주의에 대한 적극적인 안티테제로서 구상되기도 했지만 바로 ‘정신기술노동이 선도하는 질적 생산의 시대’를 진테제로 적극 반영하여 세운 경제대안모델인 것임.

…… 포드주의적 소품종 대량생산시대를 지나 다품종 소량생산시대 돌입. 기계가 대체할 수 있는 단순노동이 아닌 지식, 기술, 창의성과 결합한 유연한 노동이 가치와 생산성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가 됨. 생산수단, 설비를 틀어쥔 자본 중심에서 노동창의성 중심으로.

20세기 후반기부터 세계는 급속도로 지식기술혁명 경험. IT혁명을 필두로 바이오, 나노혁명이 잇따르면서 첨단 지식과 기술이 산업 전반을 재편하고 경제의 핵심 부가가치를 창출. 즉, 인간의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지식기술 노동이 생산력 발전의 관건이 되는 시대를 맞이함.”

이런 인식은 미래학적 관점을 주로 소개하는 경제신문이나 교양 출판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김영삼과 김대중, 노무현의 비전 모델에서 핵심적인 이론적 근거로 애용되기도 한다. 이런 이론적 조류의 함의는 ‘노동력의 고급화가 노동의 창의성과 주체성을 고양시키고 있으며, 따라서 현재의 자본주의는 과거의 전통적인 착취 자본주의가 아니다’라고 설파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노동에 필요한 지식의 습득과 숙련에 더 많은 자원이 동원되는 것은 사실이고, 노동의 결과물이 지식의 질과 양에 의해 좌우되는 것도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가 노동의 양태 변화를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런 자연사적 법칙을 새삼스레 재확인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런 변화가 노동과 자본의 생산관계를 변화시키고 있는가를 진단하기 위해서이다.

안타깝게도 새사연의 인식과는 달리, 노동의 창의성과 주체성이 확대되는 것이 아니라, 지식노동의 자본 종속성이 강화되는 것이 냉혹한 현실이다. 장인길드에서 포드주의적 공장으로, 그리고 ‘다품종 소량생산 시대’로의 변화는 자본이 설계하고 주도하고 통제하는 육체적 정신적 노동과정의 포섭 강화로 일관되고 있다.

벤처 연구소의 연구 과정조차도 엘빈 토플러의 책이나 트렌드 드라마에 나오는 것과는 달리 연구 계획의 입안에서 생산 적용까지가 자본의 이윤 설계에 의해 일거수 일투족, 인간 사고의 방향성까지 규정된다. 또, 새사연의 인식과는 달리 상품 생산에서 노동 의존도는 줄고, 자본 투자와 설비 투자에 대한 의존도가 늘어나는 것이 명백한 사실이다.

   
  ▲ 피터 드러커
 

새사연이 인용하고 있는 피터 드러커의 인식론 – ‘지식혁명, 지식사회, 지식생산성, 주주 중심 가치 부정, 피고용자에서 동업자로’ 등은 새사연 모델의 창안에 참여한 386 벤처 경영자들의 ‘지식경영’에는 적합할지 몰라도, 진보적 대안 도출을 위한 정치경제학적 인식으로는 대단히 부적절하다.

새사연의 ‘노동 중심 국민경제’가 무엇인지는 불분명하다. 새사연은, “국민적 노동의 창의성을 지속적, 안정적으로 고양시킬 수 있는 시스템을 국가의 핵심엔진으로 삼아 성장을 구현함으로써 국민경제의 성장과 균형적 발전을 기하는 경제모델 …… 노동을 관료주의적 지시와 통제의 대상으로 삼거나(국가중심 – 계획경제) 자본의 필요성에 따라 소모해 나가는(자본중심 – 노동시장 유연화) 과거의 낡고 한계에 부딪힌 모델을 대체할 새로운 대안 모델 …… 세계사적으로 신자유주의 경제 모델을 대체할 보편성, 시대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인적 자원이 풍부한 한국에 가장 부합되는 모델”이라고만 밝히고 있다.

정통의 맑스주의나 유럽 사회민주주의가 아니라면, ‘노동 중심 모델’은 세 가지로 추정할 수 있다. 첫째, 불변자본의 비율을 낮추기 위해 노동 투입을 증대시키는 리카르도 모델, 둘째, ‘잘 살아보세’든 ‘고난의 행군’이든 실제에 있어서는 노동 투입 최대화를 위한 동원 모델, 셋째, 평등공산주의나 무정부주의 모델.

세 번째 모델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대단히 강력한 집합 주체로서의 노동계급이 구조적으로 전제되어야 하는데, 사민주의를 넘어서겠다는 새사연 모델 어디에서도 그런 구상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고용국가책임제’와 ‘공동결정제’라는 오래된 사민주의 제도 외에는 ‘노동이 주도할 것이다’라는 식의 동어반복만이 거듭되고 있을 뿐이다.

“노동의 힘이 타협의 한 주체로 서기에는 무력해졌다”고 판단하는 새사연 모델에서 ‘노동 중심’의 압도적 분포는, 지난 번 글에서 지적한 바 그대로 피터 드러커식의 ‘현대자본주의 노동 특이성’이다. 그것을 나는 노동이 “개별적 경제 투입 요소로서만 반복된다”고 지적한 것이다.

게다가 새사연은 ‘분배론’을 부정하기까지 한다.

“성장-보수, 분배-진보의 등식은 …… ‘민중이 사회의 중심적 문제에 대한 이니셔티브를 쥐고 나라를 책임지겠다’는 진보의 핵심적 취지에 정면으로 위반됨. …… 새사연의 경제대안은 이 문제를 ‘경제발전의 주도성(이니셔티브)을 중심에 놓고’ 대안을 모색해 보고 있음. 누가 / 어떤 힘이 한국경제를 주도할 것인가 하는 관점에서 성장문제를 풀어 본 것임. 국가주도 -> 자본주도 -> 노동주도라는 새사연의 대안 모델은 성장엔진을 주동성의 관점에서 흡수해 보려는 시도이기도 함.”

성장-분배 논쟁의 본질은 사회적 투자 우선 순위의 문제다. 그런데 새사연은 ‘민중 주도성’이라는 선언으로 그것을 대체해 버렸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생산과 분배 과정에 개입할 정치 사회적 집합 주체가 전제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주도’나 ‘중심’이라는 것은 결국 요소 투입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런 상황에서의 분배 부정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스타하노프 노선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나는, 새사연 모델이 스스로 인지하는지 여부와는 무관하게 구조적 접근보다는 주의주의적(主意主義, voluntarism) 구상에 치우쳐 있다고 판단한다. 10개 연구소 토론회 당일, 박세길 부원장은 “대안의 실현 가능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권이 수용할 수 있는가나 국민이 이해하느냐가 아니라, 필연성의 문제”라고 주장하였는데, 이 때의 ‘필연성’은 아무래도 경제구조적 필연성이 아니라, 주의주의적 신념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그런 구상이, “진보는 선진생산력을 대표한다”는 세계관과 결합할 때, 노동력 동원을 통한 생산력주의가 도출되는 것이다.

“‘실현경로’가 고려되지 않은 ‘대안모델’은 책상 위의 스케치일 뿐 현실사회과학이라고 할 수 없음.
 
…… 우리 사회의 대안이 ‘현재와 근본적으로 다른 사회조직원리, 사회운영원리’에 기초해야 한다면, 그것은 불가피하게 ‘과거와의 단절’이어야 하고 ‘새로운 사회운영원리에 대한 국민적 합의’와 ‘새로운 원리에 맞는 국가 정체성의 제도적 재정의’를 수반해야 함.

즉, 대안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반드시 경과해야 하는 경로로서 ‘정권교체 -> 제도교체 -> 사회 전 영역에서의 주도성 교체(경제에서의 자본주도 -> 노동주도, 정치에서의 엘리트 주도 -> 국민주도)를 고려해야 함.

이런 기조아래 새사연이 21세기 ‘대안 경로’를 구상하는 원칙은 1) 고비 고비의 결정적 국면에서 군대와 경찰에 의한 제압이 아닌, 국민의 직접 참여와 직접결정에 의한 정당성 부여 방안 2) 국가가 획일적으로 계획하여 만들어주는 개혁방식이 아니라, 국가는 헌법과 법률에 의해 보장하고 재정지원을 하며, 구체적 실행은 국민의 자율적 판단과 창조력에 의해 움직이게 하는 방안 3) 주도성을 확보하고 대안의 우월성을 통해 확산하는 방법, 파괴 후 창조 보다는 창조하면서 버리는 방안 (새로운 기업모델을 만들면서 과거식 기업을 줄여나가는 방안)임.”

인류 역사의 어떤 정치세력도,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국민적 합의, 주도성 교체, 정당성 부여, 우월성 확산’ 같은 것을 꾀하지 않은 집단은 없다. 어떤 힘을 가지고, 어떤 제도를 통해, 어떤 과정을 거쳐 그런 것에 도달할 것인가가 문제였지, 그리해야 한다는 것은 세상사의 ABC다.

이런 상식을 별스러운 양 열거하면서, “대안의 실현 경로에 대한 논의가 전무”하였다거나 “책상 위의 스케치”라고 폄하하는 것이 마뜩잖다. ‘생활인’의 상식적 가치 선호를 나열한 것이 경제모델로 작동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로, 대안 주체 형성에 함께 하지 못한 데서 오는 추상적 모호함을 ‘이행경로’라고 치장하는 것도 과도한 의미 부여다.

“주홍글씨. 19세기 미국 문학의 걸작이다. 작가 너새니얼 호손은 이른바 ‘청교도 정신’의 엄숙함이 인간의 싱그러운 삶을 얼마나 억압하는가를 생생하게 파헤쳤다. 물론, 주홍글씨는 청교도의 ‘원죄’만은 아니다.”

엄숙하지 못한 나는 주홍글씨를 찍은 적이 없다. 주홍글씨를 찍은 것은 간통의 가책에 시달리던 ‘엄숙한’ 목사 딤스데일 스스로였다.

‘죄와 벌’은 19세기 러시아에서 발표된 세계문학의 걸작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린 것이 서유럽에 대한 조롱인지, 기독교적 인본주의인지는 잘 모르겠다. 내게 남아 있는 기억은 대학생 라스콜리니코프의 과도한 자의식이다.

손석춘 원장의 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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