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오늘 팟캐스트 -       ▒       <편파티비> 유튜브 -       ▒      


  • 반상 위의 전신 등장하다
    [현대바둑 사이드스토리] 조훈현①
        2021년 10월 25일 09:51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서사가 쓰이려면 가끔은 우연이라는 심술쟁이가 끼어들 때가 있다. 반상 위의 전신(戰神), 조훈현의 삶이 그렇게 시작됐다.

    조훈현의 전남 목포 집은 아담한 2층 양옥이었다. 부친의 기력은 기원 7급 수준이었지만 손에서 바둑돌이 떨어지는 날이 없을 정도의 애기가였다. 2층 서재에서는 날마다 대국이 열렸고 어린 조훈현은 어깨너머로 관전했다. 한두 번으로 그칠 줄 알았던 부친은 어린 조훈현이 꼬박꼬박 2층으로 올라오자 묘한 생각이 들어 바둑을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

    사촌매형의 조언과 부친의 결단

    4살 조훈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부친을 턱밑까지 추격했다. 우연히 이 사실을 알게 된 사람은 사촌매형이었다. 고등학교 교사인 사촌매형은 이런 일은 흔한 경우가 아니라며 기원에 데려가 기력을 알아보는 것이 좋겠다고 부친에게 조언했다. 흔한 동네 바둑 수준의 기력이지만 부친도 신기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조훈현은 담배 자욱한 유달기원에 출입하는 최연소 인물이 되었다. 조훈현의 바둑을 본 기원 원장은 재기가 있다고 판정했다. 바둑으로 대성할 가능성이 있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작은 불행이 찾아왔다. 부친의 사업이 기울어지면서 집까지 내놓으며 길거리에 나앉게 생긴 것이다. 부친은 가족들을 데리고 출가해 서울에 살고 있는 큰딸 집으로 상경했다. 조훈현이 바둑에 재기가 있다고 말한 것을 기원 7급 부친은 직접 확인해보기로 했다. 큰딸 집에 짐을 풀자마자 부친은 조훈현을 데리고 당대의 최고수 조남철이 운영하고 있는 명동의 송항기원을 찾아갔다. 송항기원은 서울의 아마 고수만이 아니라 지방의 최고수들이 서울로 올라올 때면 항상 들리는 ‘당대 최고의 바둑 사랑방’이었다.

    조남철은 조훈현과 지도대국을 두어본 후 짤막하게 “바둑을 전문적으로 배우는 것이 좋겠다”라는 판정을 내렸다. 아마추어 고수가 될 자질을 넘어 프로기사로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조훈현 부모는 시장 한구석에서 가게도 없이 탁자 몇 개만 가져다 놓고 장사를 하는 난전(亂廛)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부친은 매일 난전을 열어 놓고 후 조훈현을 데리고 보문동 산언덕에서 명동 송항기원으로 향했다. 저녁이면 다시 조훈현을 데리고 돌아오는 일을 반복했다. 전철도 없던 시절, 6살 소년이 버스를 갈아타고 집으로 혼자 돌아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부친이 시간이 되지 않으면 큰딸이 손을 보태곤 했다. 간혹 늦게 데리러 갈 때면 부친은 조급한 마음이었지만 조훈현을 그렇지 않았다. 바둑 기보를 놓고 혼자 바둑을 두면서 삼매경에 취해 주변은 보이지도 않았다. 아마고수들은 신기한 듯 팔짱을 끼고 옆에서 쳐다보는 장면이 흔하게 연출됐다.

    1962년 조훈현이 프로기사로 입단했다. 나이 9살 7개월이었다. 해마다 단 두 장이 걸린 입단대회에서 전국의 아마고수들을 모두 제압하고 입단한 것이다. 신문에서는 조훈현의 파천황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했지만 한국기원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아직도 깨지지 않는 세계 최연소 입단, 한국기원은 눈으로 보고도 이게 가능한 일인가 자문하며 조훈현의 다음 행마를 모두 궁금해 했다.

    쓰라린 패배와 바뀐 운명

    기라성 같은 프로들이 진을 치고 있었지만 조훈현 초단은 턱걸이로 가을야구에 진출할 정도의 성적을 거두었다. 한국 바둑에 천재가 등장했다는 소식을 들은 일본기원은 묘한 궁금증이 발동했다. 일본기원은 조남철을 통해 우리도 천재 초단이 한 명 있으니 대국을 추진해보자고 제안했다. 한국프로가 일본프로에게 최소 반 점 이상은 약하다는 주장이 공공연하게 떠돌았다. 1963년 1월 6일, 세계 최초의 국제전화 대국이 시작됐다. 상대는 일본기원의 이시다 요시오 초단. 조훈현이 훗날에 보여 줄 ‘부드러운 바람, 빠른 창’, 전투의 화신(戰神)의 모습은 보여주지도 못하고 완패했다.

    세계최초의 국제전화 바둑 대국. 전화로 착점을 알려주고 있는 사람이 조남철

    조훈현이 한국바둑을 쓸어 담으며 독재자로 군림하고 세계 최강의 자리까지 올랐지만, 이시다 요시오는 그냥 초단이 아니었다. 이시다 요시오는 일본기원에서 활동하던 린하이펑(임해봉)에게서 혼인보를 빼앗으며 일본기원을 열광하게 했다. 최연소 혼인보 타이틀 보유자였고, 이후 5연패를 기록하며 혼인보 슈호라는 명예를 차지했다. 별칭은 ‘컴퓨터’였다. 젊은 날이라면 이창호와 계산, 끝내기에서 밀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조훈현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상세한 과정은 알려져 있지 않다. 조남철이 조훈현의 부친에게 제안을 했다는 것이 아직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어쩌면 거꾸로일 수도 있지 않을까. 10살 소년에게 패배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아마도 소년 조훈현은 부친에게 떼를 썼을 것이고 난감한 부친은 조남철에 상의를 한 것이다. 부친이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은 일본 유학비였지만 조남철은 일본은 도장 체계이고 숙식을 포함해 모든 무료라는 해답지를 내놓았다.

    1963년, 조훈현은 조남철의 손에 이끌려 현해탄을 건넜다. 비행기 등 만만치 않은 비용은 박순조라는 재일교포가 지원해주었다. 조남철은 기타니 미노루의 제자이고 애초의 목적지도 기타니 도장이었다. 기타니의 윗길 대접을 받는 세고에 겐사쿠를 인사차 방문하면서 조훈현의 운명이 뒤바뀌고 말았다. 갑자기 세고에가 10살 소년을 보고 호기심이 동했는지 바둑판을 가져오라고 말하자 주변 사람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세고에는 일 년에 지도대국을 한판 둘까 말까 한 한 마리 고고한 학(鶴)같은 인물이었다. 석 점으로 시작된 대국은 두 점이 되어도 세고에의 비수를 모두 받아내며 조훈현의 완승으로 끝났다. 대국이 끝나자 세고에는 내제자로 받겠다고 선언했다. 조남철은 난감했지만 대선배의 추상 같은 선언을 거부할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고 이것도 운명이라고 받아들였다.

    세고에의 제자는 오청원과 하시모토 우타로 중-일 두 명이 전부였다. 관서기원을 창립해 일본기원과 대립한 하시모토는 50대였고, 살아있는 기성 오청원은 50대 중반의 나이였다. 내제자는 조훈현뿐이었고 유일한 한국인 제자인 동시에 마지막 제자였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천하의 오청원과 하시모토는 조훈현의 사형이었다. 세고에는 대국을 통해 조훈현을 가르치지 않았고 기보를 연구하며 철학을 가질 것을 주문했다. 어린 조훈현이 이해할 수 없는 가르침이었지만 기보 삼매경은 조훈현의 전공이었다. 장서라고 해도 좋을 바둑책과 기보들이 조훈현의 동반자였다.

    제자를 받지 않는 세고에 도장과 달리 기타니 도장은 훗날 바둑역사를 하나씩 쓰게 되는 이무기들로 가득했다. 상대 세력을 지우는 최고봉 ‘폭파전문가’ 조치훈, 극단적 실리파로 유명한 ‘지하철’ 고바야시 고이치, 바둑은 모양이라는 철학을 가진 ‘미학(美學)’ 오타케 히데오, 당대 최고의 전투력 ‘대마 킬러’ 가토 마사오, 모두가 공배라고 생각하던 시절 중앙에 철학이 있다고 선언해 세계를 제패한 ‘우주류’ 다케미야 마사키, 계산과 끝내기는 이창호에 필적한다는 ‘컴퓨터’ 이시다 요시오 등이 있었다. 조훈현은 스스로 철학을 세웠지만 세고에 도장에서 수학했다면 또 어떤 괴물이 되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세고에 도장 시절의 조훈현. 왼쪽 두 번째가 도장의 실제 살림을 맡은 며느리 마마짱. 그 오른쪽이 조훈현을 물심양면으로 후원한 재일교포 박순조씨다 맨 오른 쪽이 세고에 겐사쿠.

    입단, 신인왕, 그리고 귀국

    일본기원은 조훈현의 초단 자격을 인정하지 않고 연구생 4급을 부여했다. 승급을 하려면 7할 승률을 올려야 하고 1급 연구생이 되어야 입단 대회에 참가할 수 있었다. 구조적으로 불리한 대우였지만 조훈현은 이무기들 사이를 거침없이 질주하며 1966년 입단에 성공했다. 일본에 건너온 지 2년 7개월만이었다.

    조훈현이 실전을 쌓은 곳은 도장이 아니라 괴물 후지사와 히데유키(슈코)가 세운 연구회였다. 슈코라는 별칭은 혼인보 가문의 후계자만이 ‘슈’자를 쓸 수 있기 때문에 아무나 사용하는 것은 금기였다. 후지사와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연구회에는 오청원의 제자인 임해봉, 기타니 도장의 오다케 등 도장을 뛰어넘은 차세대들이 가담하고 있었다. 후지사와의 실전은 오로지 초속기 바둑이었다. 찰나의 순간에 수를 읽어내는 능력을 키우지 못하면 아무리 많은 시간을 주어도 소용없다는 것이 후지사와의 철학이었다. 당시 혼인보와 명인전 같은 거대 기전은 대국을 이틀에 걸쳐 진행하는 초장기 바둑이었다. 하지만 순간에 승부가 갈리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게다가 후지사와는 고고한 학과는 거리가 먼 실전파인 탓에 연구생들과 하루에도 10여 대국 이상을 두는 일도 흔한 일이었다.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후지사와는 알콜 중독, 도박, 경륜 등으로 거액의 우승상금을 번번이 날리기로 유명했는데 대회가 시작되면 거짓말처럼 술을 끊고 방에 틀어박혀 연구에만 몰두했다. 1977년 요미우리 신문사가 3천4백만엔이라는 천문학적인 우승상금이 걸린 기성전을 신설하자 1회 대회를 후지사와가 차지했다.

    이후 6연패를 달성하며 명예기성에 오른 후지사와의 7회 대회 상대가 바로 조치훈이었다. 후지사와는 “(7전 4승제) 4판만 가르쳐 주겠다”라고 말하자 조치훈은 “3판만 가르침을 받겠습니다”라고 응수했다. 조치훈이 3연패를 기록하며 모두가 아직은 어렵구나 라고 말할 때를 시작으로 4연승을 하며 드라마처럼 우승을 차지했다. 만년에 후지사와는 아침에 일어나 허전하면 “켄쿤(조훈현의 일본이름)이 보고 싶군”하며 무작정 공항으로 간 후 서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예기치 않는 방문이지만 조훈현은 후지사와를 모시고 이곳저곳을 다니며 담소를 나누었다. 운전은 언제나 아내 차지였다. 입문한 적은 없지만 조훈현은 후지사와를 언제나 스승이라고 불렀다.

    조훈현에게는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있는 두 가지가 없다. 하나는 운전면허증이고 다른 하나는 핸드폰이다. (신용)카드도 없었지만 체크카드 시대가 정착되면서 어쩔 수 없이 만들었다고 한다. 조훈현은 하루에 담배(거북선)를 서너 갑씩 피우는 체인스모커였는데 좀 덜 독하고 오래 피울 수 있는 장미 담배로 바꾸었다. 얼마나 맛있게 담배를 피우며 대국(당시에는 대국실에서 담배를 피웠다)을 하던지 모델로 픽업되었다. 천하의 조훈현도 고치지 못하는 병이 하나 있었는데 다리를 떠는 것이었다. 얼마나 심한지 대국실 밖에서 조훈현의 달달 떠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줄담배를 피워대며 정신 사납게 다리까지 떨었던 탓에 대국자가 적응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다행인 것은 조훈현이 천하를 통일하면서 대국자가 몇 명으로 제한되었다는 점이다.

    일본기원에 입단을 하자마자 조훈현은 신인왕을 차지했고 거의 해마다 승단했다. 일본기원의 승단은 까다롭기 유명해서 해마다 승단하는 인물은 새로운 명인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일본기원의 승단대국은 같은 도장 문하생과는 두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었다. 승단대국 때마다 조훈현은 이무기가 득실거리는 기타니 도장 출신들과 주로 대국을 벌여야 했다. 입단 후 6년, 조훈현은 5단까지 승단했다. 5단 이하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명인전과 기성전 본선 문턱까지 진출하자 일본기원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후지사와는 조훈현을 보면 “아이고, 우리 차세대 명인께서 오셨구만”이라며 시간문제라고 단언했다.

    1972년 기타니 도장으로 한국에서 한 통의 국제전화가 날아왔다. 입대영장이 나온 것이다. 망설이지 않고 조훈현은 귀국을 결심했다. 병이 완연했던 세고에는 말리지 않았지만 그의 선택을 안타까워했다. 조훈현이 귀국하고 얼마 후 절친한 친구인 <설국(雪國)>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세상을 떠났다. 세고에는 자결하는 방식으로 친구를 따라갔다. 그리고 두 통의 유서를 남겼다. 가족에게 남긴 유서에는 “자신을 병간호하는 고생을 덜어주고 싶다”라고 적었다. 제자들에게 남긴 유서에는 “조훈현이 병역을 마치면 꼭 다시 데려와 천하를 도모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이었다. 보라매 공군본부에서 조훈현은 밤마다 소리죽여 울었다.

    정창현 프로는 조훈현이 한강다리를 건너면(제대를 하면) 관철동(한국기원)이 초토화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조남철 시대를 끝낸 김인 역시 그의 기력이 궁금했다. 기타니도장 유학파인 김인은 해마다 승단하는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익히 알고 있었다. 현역 군인이 바둑대회에 참가할 수는 없었다. 우연히도 대대장이 바둑 광팬이었기 때문에 대국이 있는 날이면 외출을 할 수 있는 특혜를 주며 대회에 참가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한강다리를 건넌 조훈현은 한동안 물음표를 남겼다. 주요 기전의 본선에 올라가기도 했으나 타이틀을 차지하지 못하고 무너지기 일쑤였다. 그 기간이 2년 가까이 계속되자 관철동의 호사가들은 그 원인을 놓고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등장한 주장은 한국기원 기사들의 스타일이 생소하기 때문에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주장은 곧바로 설득력을 잃었다. 조훈현이 그런 주장을 잠재우듯이 쓰윽, 본선에 속속 진출했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을 얻었다. 주요 본선의 주요 멤버들이 일본 유학파라는 것이었다. 유학파들은 일본바둑의 신 정석과 행마들을 경험한 이들이었고, 그들은 파훼법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본선의 주요 멤버는 기타니 도장의 유학파인 김인, 하찬석, 윤기현이 항상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심지어 기타니 도장의 첫 유학파이자 이제는 서산에 지는 별인 조남철도 본선의 주요 멤버였다.

    신박한 주장도 있었다. 언어였다. 어린 나이에 유학을 떠난 조훈현은 우리말이 서툴렀고, 이 때문에 종종 당혹스러운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한국 현대바둑의 서사인 조남철에게 고개를 숙이고 정중하게 “밥 먹었냐?”라고 물어 주변 사람들을 경악하게 한 적도 있었다. 이런 일이 겹치면서 조훈현이 위축되어 실력 발휘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천하의 조훈현이었다. 초절정 고수들은 자신만의 루틴이 있다. 메이저리그 토론토의 류현진의 루틴은 거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스팀룸 온도가 정해져 있고, 마사지 시간과 스트레칭 시간도 정해져 있다. 등판하는 날에는 정확히 몇 시에 스트레칭을 얼마를 하고 런닝을 언제부터 언제까지 하는 게 단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다. 군대는 그 루틴을 가로 막았다. 하지만 군대는 군대였다. 상병이 넘어가자 조훈현은 자신의 루틴이 어느 정도 가능해졌고 우리말도 익숙해졌다. 1974년 세상에 가장 무서울 게 없다는(?) 상병 말호봉 조훈현은 최고위전 본선을 정면으로 돌파해 새로운 천하를 쓰고 있던 김인을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그리고 조훈현은 타이틀을 하나씩 가져가기 시작했다. 모두가 패퇴하고 절망하고 있을 때 그 앞을 서봉수가 가로막고 나섰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 조-서 시대(조훈현과 서봉수)의 시작이었다. 조훈현과 서봉수의 최근 대국은 2021년 9월 19일 전자랜드배였다. 혼전을 거듭한 끝에 조훈현이 한집 반을 남겼다. 두 사람은 반세기 동안 전투를 계속하고 있다.<계속>

    * ‘현대바둑 사이드스토리’ 칼럼 연재 링크

    필자소개
    인문사회과학 서점 공동대표이며 레디앙 기획위원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