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파 이익 함몰된 자들의 감정 싸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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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02월 03일 12:1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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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소위 386과 반유신 세대 사이에 낀 세대다. 다 같이 하는 놀이로서의 데모는 몇 번 참여 해 보았지만, 교수가 되고 싶어 운동권의 길을 애써 외면하고 유학길에 오른 자다.

    소위 역사학을 한다는 사람이 갖는 자괴감, 오랫동안 부채의식으로 남아 귀국하여 교수가 되면서 사회운동을 시작하여 지금은 부산 지역에서 아시아의 반전과 평화 구축을 위한 한 작은 엔지오의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민주노동당 당원이다.

    내가 민주노동당에 입당한 이유

    한국 정치가 왜 이 모양일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난 – 내가 조금이라도 바꾸는데 기여할 수 있는 범주의 일을 기준으로 볼 때 – 두 가지가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 가운데 하나는 정당 가입에 관한 것이고 또 하나는 진보 정당 역량 강화에 관한 것이었다.

    둘 다 책상물림에다 병약한 지식인의 패배주의라는 세간의 관점을 염두에 둔 것이라, 출발점부터 너무 한 쪽에 치우친 것이라 할 수 있고, 분명한 한계를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주는 것은 민주노동당 입당이었다. 단 돈 1만원이라도 당비를 내고, 단돈 얼마라도 후원금을 내야, 그것도 반드시 정기적으로, 시혜적 차원에서가 아닌 ‘돈’을 내야 그걸 기반으로 정치인들이 정치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야 정경 유착과 부패의 고리를 끊을 수 있지 않겠는가가 그 또 첫 번째 이유다.

    다음의 이유는 예측 가능한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내 정치적 입장을 외부에 알려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여론조사라는 신화와 그를 바탕으로 하는 대세론이라는 허구가 더 이상 한국 정치를 좌지우지하지 하는 비극은 막을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여러 가지 면에서 나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날카로운 평론을 많이 해 온 조희연 교수께 감히 반론을 드리는 것 또한 이러한 차원에서이다. (신문 기고를 무슨 죄짓는 것같이 싫어하는 사람 – 자신을 드러내는 것 같다는 소심한 생각과 댓글이나 반론 뜨는 게 너무 무서워서 – 입장에서 한 동안 망설였으나, 때가 때인 만큼 잠시 일탈의 용기를 내 글을 쓰기로 결심을 했다.)

    정치 평론가는 병아리 감별사도 아니고, 족집게 점쟁이도 아니다. 그런데 보통의 경우, 정작 하는 일이란 특정 정치 현상에 대한 예측이 그 대세를 이루고 한 발 더 나아간다면 고작 결과 분석 정도라고나 할까? 게다가 보통의 경우 그 예측이나 분석의 대상으로 든 예는 자세히 볼 필요도 없을 정도로 그 주장이 허술한 경우가 허다하다.

    문국현이 정동영과 합쳐졌다고 뭐가 나아지나

    문제의 핵심을 벗어난 것이라 해서 길게 이야기 하지 않는 게 보통이지만 전체 맥락을 결정하는 요소로 볼 때 오류임은 분명하다. 문국현 후보가 지금 이 꼴이 되었는데, 그렇다고 소위 정동영 후보와 합쳤다면 지금 그 꼴이 더 나아졌겠는가?

    TV를 안 봐서 TV에서는 어떻게 표현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진정으로 신검이 아버지를 유폐시키고 왕권을 잡아서 백제가 패망했다고 생각하는가? 길게 이야기 할 필요도 없이, 몰역사적 분석이고, 반주체적 분석일 뿐이다. 정치 현상에 대한 공학적 수준의 예측이다. 이러한 현상이 자주 반복되다 보니, 전문 정치인이나 전문 평론가나 일반 대중이나 그 정치 분석이라고 내놓은 수준이 크게 다를 바가 없게 되어 버렸다.

    민주노동당의 문제를 정파 이익에 함몰되어 있는 일부 과격 이데올로그들의 비현실적 감정싸움으로 보지 않아주기를 나 또한 ‘절박한 심정으로’ 부탁드린다. 민주노동당의 문제는 진보 정당이 과거 지식 담론의 틀에서 얽매여 그 목표를 집권 정당이 되는 것으로 상정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 기본 시각이다.

    그 안에서 지난 총선에서 비록 비판적 지지의 수준이었지만 폭넓은 지지를 받은 게 역설적으로 화근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권력에 다가서는 정치 집단으로는 발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회 변혁을 꾀하는 정치 집단으로는 퇴보의 길을 걸었다.

    자, 그렇다면 지금 현재로서는 대중의 지지도가 7%면 어떻고, 3%면 어떻겠는가? 그게 그렇게나 중요하다는 말인가? 정작 중요한 것은 그런 정도의 역사 의식을 가지고, 그런 정도의 정치 문화를 가지고 있는 집단과 어떻게 향후 10년 후, 아니 그 이후라도 한국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든다는 사실이다.

    동지로서의 애정이 아직은 그리고 앞으로도 있으리라 생각하여, 일정 부분 금도를 넘기 싫어서 외부에 공개하는 것을 모두들 자제하고 있지만, 도저히 이대로는 같이 갈 수 없지 않느냐는 그 처절한 좌절감을 존중해야 한다. 그것이 진보의 자세이다.

    이혼을 해야 하는 여성의 입장, 부모로부터 떨어져 나와야 미래가 보이는 버려진 아이들의 입장, 성전환 수술을 해야 스스로 인간임을 확인할 수 있는 성소수자들의 입장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다면 이해해 주시겠는가? 언제까지 통일만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고, 승리만이 우리가 쟁취해야 할 것이며, 통합만이 우리가 견지해야 할 방편이 될 것인가? 이제 그 옛 틀을 깨봐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무당파 박쥐다

    나는 서두에 잠시 꺼냈듯, 운동권 출신도 아니고, 그러니 그 득시글거리는 감옥 갔다 온 경력조차도 한 줄 없다. 그러다 보니, 친한 사람은 몇 있지만, 선후배 계통도 없고, 어느 정파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박쥐다.

    그제는 자민통에 속해 있는 한 사람을 만났다. 정당 활동을 처음 시작하면서 내가 속한 지역위원회 사람으로 내 정치의 첫사랑이다. 그 사람과 만나 이야기하면서 눈물이 북받쳐 오르는 것을 애써 참았다. 신문에 나오는 그 사람 어록을 통해 난 그 사람이 말이 안 통하는 꼴통 자주 쪽임을 알 수 있었지만, 평소 하는 정치 활동과 그 생각의 배경으로는 도저히 그 사실을 알 수 없었다.

    주민 활동에 정말 열심이고, 활동가 조직과 교육 사업에 정말로 헌신적이고, 민주노총과의 연대 사업에 그렇게 열심인 걸 보면 참 좋은 재목감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안에서 나는 그 쪽과 또 다른 그 쪽의 차이를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물론 대중들은 더 찾기가 어려울 것이고, 이것이 ‘신당파’가 안고 있는 최대의 딜레마임도 알고 있다)

    그리고 어제는 이미 탈당을 결행한 동지를 만났다. 노동 현장에서 평생 일을 하면서 진보 정당 구축에 헌신을 한 민주노동당 역사의 장본인이 탈당을 결행할 수밖에 없었던 그 이야기를 들어보면 또 다시 눈물이 나올까봐 안절부절이다. 진보라는 것이 갖는 의미, 사회 변혁의 꿈과 현재 당내 정치 문화의 후진성 …

    그 두 사람에게 난, 이쪽에다가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저쪽에다가는 저런 이야기를 했다. 전형적인 통합을 향한 양비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비겁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겠다. 외부자를 위한 것과 내부 사이에서의 말은 그 무게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화살이 시위를 떠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외부자가 해야 할 일을 무엇인가? 이미 헤어지게 다 되어 있는 부부를 앞에 두고 다시 한 번 생각해 봐라 붙잡으려 애쓰면서 결국, 고개를 떨구면서 애써, 처연해하지 말고, 좀 더 비장하게 ‘그래, 잘 살아라. 다만, 한 가지 좋았던 감정마저 지우진 마라’ 이 정도 해 줄 수는 없는가?

    분열한다고 망하는 것 아니다

    그렇다, 분열한다고 해서 망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좀 더 냉정하게 이야기 하면 보는 기준에 따라서는 망하는 길에 가깝지만 그 ‘망한다’는 것은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다는 말이 더 옳을 것이다.

    인도에서 힌두교를 박차고 나온 불교가 대중화에 성공하여 크게 흥했지만 결국 그 흥함이 망함의 다른 표현이었듯이 (그 불교는 결국 힌두교와 동일하게 인식되어, 힌두교에 흡수되어 버렸다. 지금은 존재도 없다) 지금 민주노동당의 문제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진보라는 것이 무엇인가? 궁극적으로 말 할 때, ‘진보’는 모순의 개념이다. 그것은 진보를 이루는 두 축이 변화와 소수이기 때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우선적인 것은 변화다. 즉, ‘진보’ 안에는 어떠한 신조나 교조가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는 결국 진보가 소수여야 한다는 명제와 연결된다. 그래서 일견 모순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진보는 어떠한 형식으로든 정권을 잡을 수가 없다. 진보가 정권을 잡으면 그것은 이미 다수가 되어 버리기 때문에 더 이상 ‘진보’가 될 수 없다는 의미이다.(책상물림이라 말은 잘 한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 말이라도 하면 이렇다)

    따라서 진보는 계속 분열을 획책해야 하고, 그것이 내부 동력으로 모아져야 한다. 그래서 진보주의자는 분열이나 정파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야말로 소수를 지향하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진보적이다. 그래서 진보주의자는 자발적 소외주의자여야 한다.

    이런 시각으로 보면 지금의 민주노동당 ‘사태’는 아무런 문제가 될 수는 없다. 발전적으로 분열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세포 분열이라고 하면 훨씬 이해하기에 편하리라 본다. 조희연 교수 예상대로, 그 이후 또 다른 분열이 생길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진보’가 취해야 하는 당위성을 다수와 대중성에서 잠시 떨어져 있는 것을 허용하고, 멀리 떨어져 볼 수 있는 각오만 서 있다면 그리 비관적인 것만은 아닐 것이다.

    발전적 분열이 필요하다

    다만 한 가지, 분열을 발전적으로 대해야 한다. 어설픈 인정 논리로 ‘동지애’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진보 정당의 우군으로서 서로 선의의 경쟁을 하자는 것이다. 이미 소위 자민통 안에서도 이제는 우리도 달라지자, 이렇게 바꿔 보자, 내가 맡는다면 이렇게 해보겠다는 밝은 기운이 터져 나오고 있다.

    신당은 말할 필요도 없을 테고. 그러니 이를 긍정적으로 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어렵겠지만, 웃고 헤어지자. 떠나는 자들은 남아 있는 자 – 수로만 다수지 씻기 어려운 상처를 받은 지금은 소수다 -들의 억울함과 서러움을 특히 배려해야 한다. 제발 부탁인데, 침 뱉고 가지 말아 달라. 그래서 두 축이 중심이 되어 한국 사회의 변혁을 한 번 이루어 보자.

    정말 달리는 기차 위에는 중립은 없는가? 지금 ‘우리’는 달리는 기차 위에 있다. 누군들 뛰어내리고 싶겠는가? 눈물로 호소해보기도 하고, 꾸짖어보기도 해보고 했지만 결국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다. 당신 같으면 그대로 앉아 있겠는가, 뛰어 내리겠는가? 그 어떻게든 결단을 하는 양쪽에게 배려와 격려를 내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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