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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바둑 사이드스토리] 서봉수-2
        2021년 10월 07일 11:1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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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바둑 사이드 스토리] 처절한 승부사, 서봉수-1

    조훈현의 천하통일을 저지한 서봉수는 곧바로 최고위전 도전권을 획득하고 조훈현에게 영토 하나를 다시 내어 놓으라고 윽박질렀다. 왕위전을 내주며 내상을 입은 조훈현의 칼은 흔들렸고 서봉수는 그 틈을 찌르며 최고위마저 손에 넣었다. 이때 조훈현이 서봉수에게 최고위를 내주지 않았다면, 1989년 조훈현이 제자인 이창호에게 최고위를 내주기까지 15년 연패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울 수도 있었다는 것을 이때는 누구도 몰랐다. 그런데 사람들은 잊고 있었다. 부드러운 바람, 빠른 창이라는 조훈현의 다른 별칭이 전신(戰神)이라는 것을.

    1980년대가 들어서면서 바둑기전은 총상금이 늘어나는 등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고, 5전 3승제이던 운영방식도 7전 4승제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 서막을 연 것은 왕위전이었다. 우승상금을 2천만 원(이후 4천만 원)으로 대폭 인상하고 1위 기전을 표방했다. 기성전과 최고위전도 7전 4승제로 운영방식을 변경했다. 서봉수가 최고위를 차지한 이듬해 도전자로 다시 나타난 사람은 조훈현이었다. 전신의 모습으로 돌아온 조훈현의 창은 더 매섭고 잔인했다. 서봉수는 힘 한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최고위를 내주고 말았다.

    조-서 대전, 낭만이 사라진 관철동

    1982년 왕위전 도전자는 다시 조훈현이었다. 서봉수는 배수진을 치고 처절히 저항했지만 7국까지 가는 접전 끝에 왕위를 조훈현에게 다시 내주었다. 조훈현의 2차 천하통일이었다. 서봉수는 절규했지만 잡초처럼 다시 일어나 낡은 포니를 몰고 관철동으로 진군했다. 1983년 MBC 제왕전이 시작되자 서봉수는 거침없이 예선과 본선을 돌파해 결승에 진출했다. 결승 상대는 서봉수 다음이라고 불렸지만 결국 서봉수를 넘지 못한 장수영이었다. 서봉수는 장수영을 손쉽게 제압하고 우승을 차지했다.

    제왕전을 차지했지만 조훈현의 천하통일을 무너트렸다고 생각하는 기사는 관철동에 아무도 없었다. 속기전인 제왕전은 다른 기전과 달리 우승자의 도전자 방어권이나 시드 배정을 허용하지 않았다. 우승자라도 해도 매년 예선부터 참여해야 하는 대회였고 우승상금이 적은 미니기전이었다. 관철동의 기사들은 공식타이틀인 MBC와 KBS의 속기기전을 공식타이틀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강했다. 게다가 조훈현의 천하통일이 무너졌다는 기사 역시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았다.

    1983년 명인전이 시작되자 서봉수는 본선을 질주한 끝에 도전권을 획득하자 언론들이 움직였다. “서봉수 7단(당시), 조훈현 9단의 2차 천하통일을 끝낼 것인가?”, “서명인, 명인전을 다시 차지할 것인가?”하는 기사들이 속속 등장했다. 관철동의 분위기는 비관적이었다. 철옹성 같은 조훈현의 바둑은 더 진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잡초 서봉수의 바둑도 조훈현을 통해 진화하고 있다는 것을 관철동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 7차전까지 가는 난전 끝에 서봉수 아니, 서명인은 조훈현의 2차 천하통일 다시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서봉수는 여세를 몰아 기왕전까지 차지하며 조훈현의 제국에 저항하는 변방의 군주임을 선포했다.

    상대는 천하의 조훈현이었다. 이듬해 창을 다시 더 날카롭게 갈고 돌아온 조훈현은 서봉수가 가지고 있던 명인전과 기왕전을 탈환했다. 무관으로 전락한 서봉수는 다시 변방을 떠돌았다. 변방을 떠돌던 서봉수는 주요 기전의 도전권을 획득해 조훈현의 제국을 무너트리기 위해 분전했지만 처참하게 패퇴했다. 관철동에서는 “조훈현의 도전자가 누구인지가 관심사일 뿐, 1인 천하가 열렸다”는 비관론이 지배적이었다.

    상대는 관철동으로 가는 버스표 두 장과 짜장면 한 그릇을 가지고 자신의 인생을 건 잡초, 서봉수였다. 1986년 서봉수는 국수전 도전권을 획득해 조훈현의 모든 창을 무력화시키면서 타이틀을 차지하며 2연패에 성공했다. 1987년 명인전 도전권을 획득한 서봉수는 기세를 앞세워 조훈현을 몰아붙이며 타이틀을 다시 차지했다. 1988년 서봉수는 국기전과 기왕전을 차지했다. 후일 기왕전은 우승상금 3억 원의 LG배 세계기왕전으로 화려하게 거듭났다. 그 사이 서봉수는 국수전과 명인전을 조훈현에게 다시 내주어야만 했다.

    조훈현은 대국 중에 특이한 버릇이 있었다. 장고에 들어가면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것이 습관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천하제일인과 바둑을 두는 상대방은 신경이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서봉수는 달랐다. 조훈현이 장고에 들어가면 서봉수는 드러누워 휴식을 취하거나 가져온 잡지를 뒤적거리며 대응했다. 규정에 없기는 하지만 바둑책을 들여다보기도 해 한국기원과 기사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두 사람은 스타일 자체가 물과 기름이었다.

    두 사람의 타이틀전이 열릴 떼마다 기사들은 관전하기 위해 결승전 대국장인 운당여관에 몰려들었다. 주인공이 바뀌지 않는 10년이 넘는 결전에 관철동의 기사들은 질려버렸다. 두 사람은 창을 찌르고 방패로 막으며 처절하게 싸웠지만 둘만의 리그에 관철동은 지쳐갔다. 어느덧 결승전이 열리는 운당여관에 기사들이 참관하는 발길이 끊어졌다. 두 사람만의 오랜 대국 탓도 있었지만 조금은 다른 이유도 있었다. 조-서 이전 시대에는 결승이 끝나면 우승자가 관철동에서 1박 2일 술값을 쏘는 것이 관례였다. 대표적인 기사가 김인이었다.

    조훈현은 한때 체인스모커처럼 담배를 입에 달고 살았지만 술은 전혀 마시지 않았다. 조훈현은 알콜 알러지가 있어 술을 아예 먹을 줄 몰랐다. 서봉수는 내가 왜 그런 술값을 내야 하지 하는 자린고비파였다. 대국이 끝나면 두 사람은 싹싹하게 자리를 떠났다. 운당여관의 관전자는 점점 사라졌고 우승자가 골든벨을 울리는 시대는 막을 내렸다. 사람들은 관철동의 낭만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80년대가 저물면서 서봉수도 무관의 제왕으로 전락했다. 그의 빈자리는 조훈현의 내제자 이창호가 차지했다. 1989년 KBS 바둑왕전을 우승이 그 신호탄이었다. 나이 13세 6개월이었다.

    후지쓰배와 제2회 응씨배

    1988년, 대만의 부호 응창기씨가 우승상금 40만 달러(약 4억 5천원)가 걸린 바둑 세계대회를 개최한다고 발표하자 한중일 바둑계는 충격에 휩싸였다. 그 유명한 응씨배였다. 최초라는 타이틀에 조급해진 일본기원은 응씨배에 앞서 후지쯔배 세계대회 개최를 발표했다. 우승상금은 약 1억 8천만 원이지만 응씨배가 4년마다 개최하는 것에 비해 해마다 개최한다는 점을 내세워 “세계 최대 규모의 바둑대회”라고 자화자찬했다.

    ** 웹툰 미생의 매회 등장한 바둑 장면이 제1회 결승국이다. 대국자는 조훈현과 중국의 네웨이핑이다. 조훈현이 드라마 같은 역전승으로 응씨배 첫 우승을 차지했다.

    혈혈단신으로 출마한 조훈현이 우승을 차지하자 고민에 빠진 것은 한국기원이었다. 세계대회 우승자를 배출한 한국기원이 세계대회 하나 주최하지 못한다는 비난이 곳곳에서 몰려들었다. 동분서주한 한국기원은 동양증권을 후원사로 동양증권배 세계대회를 개최할 수 있었다. 우승상금은 1억 원이었지만 후지쓰배처럼 해마다 개최되는 것을 감안하면 상당한 규모의 대회였다.

    1989년 1회 대회에는 작지 않은 규모인 대회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일본의 정상급 기사들이 불참하면서 세계대회라는 이름이 빛이 바랬다. 특히 일본기사들의 경우 국내기전의 우승상금이 1억 수준이라 정상급 기사들의 참여가 더 저조했다. 한국기사들에게는 더없는 호재였지만 대회는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중국과 일본의 기사들이 한국 간판기사들과 서로 물고 물리면서 모두 자멸한 것이다. 조훈현과 서봉수, 이창호마저 탈락하자 흥행 참패에 한국기원은 초상집 분위기였다. 결승에 오른 기사는 뜻밖에도 양재호와 장수영이었다. 1회 동양증권배 우승은 양재호에게 돌아갔다. 국내외 기전을 모두 포함해 은퇴할 때까지 처음이자 마지막 우승이었다.

    1990년 2회 동양증권배가 시작되자 무관의 제왕 서봉수가 다시 꿈틀거렸다. 반상 위에 놓이는 서봉수의 돌이 무엇인가 달라져 있었다. 싹싹하게 판을 닦았고 이렇다 할 고비 없이 질주했다. 관철동 사람들은 서봉수의 바둑이 “한 점 늘은 것 같다”라는 말을 시작했다. 프로 최정상급인 서봉수에게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믿었다. 서봉수가 결승에 선착하자 관철동이 들썩였다. 결승 상대는 스승을 밀어내고 올라온 이창호였다. 관철동 하마평의 추는 이창호에게 많이 기울어져 있었다. 하지만 서봉수는 한판만 내주며 완승을 거두었다. 1992년 서봉수는 국기전 도전권을 획득해 접전 끝에 조훈현을 3대 2로 누르고 국내기전 무관의 제왕에서 다시 벗어났다. 후일 사람들은 이때를 복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70살이 되어도 매일 공부를 하는 기사는 서봉수가 유일할 것이라고.

    1992년 제2회 응씨배가 시작되면서 다시 모든 이목이 집중됐다. 사석에서 술에 취하면 서봉수는 툭하면 응씨배 타령이었다. 서봉수는 에둘러 말하는 것이 습관인 탓에 사람들은 그 의미를 세계 1인자 자리에 오르지 못한 한풀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서봉수가 그리워한 것은 40만 달러였다. 2회 응씨배를 앞두고 주최 측은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1회 대회에 한국에 배정된 시드는 한 장이었는데 그 한 장의 주인공인 조훈현이 우승을 차지하자 시드 배정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사건은 엉뚱한데서 일어났다.

    주최 측이 연인 사이인 장주주, 루이나이웨이 두 사람에게 미주 시드를 배정하자 중국기원이 폭발한 것이다. 장주주는 천안문을 진압한 중국 지도부를 비난하고 미국으로 망명한 인물이었다. 중국기원은 두 사람을 제외할 것을 요구했지만 주최 측은 불가하다고 회신했다. 곧바로 중국기원은 불참을 통보했다. 갑자기 시드 자리가 남아버린 것이다. 주최 측은 한국에 다섯 장을 배정했다. 애초의 예상은 최대 세 장이었고 서봉수의 출전은 불분명했다. 랭킹으로 이창호와 유창혁이 앞서 있기 때문이었다.

    1회 대회보다 2회 대회는 더 드라마틱했다. 16강전에서 조훈현과 이창호, 유창혁이 탈락하는 대형사건이 일어났다. 단장으로 참여해 선수들의 불편함을 챙기던 김인은 충격으로 말을 잇지 못할 정도였다. 이창호는 마녀 루이나이웨이의 공격 일변도의 화려한 필살기에 적응하지 못했다. 선수단의 한 관계자는 “천하의 돌부처가 흔들리는 것을 처음 보았다”고 말했다. 8강에 진출한 것은 서봉수와 양재호였다. 양재호는 동양증권배 세계대회 우승자라는 캐리어로 마지막 시드를 잡을 수 있었다. 양재호의 8강 상대 역시 루이나이웨이였다. 양재호는 마녀 공격에 단칼에 무너졌다.

    서봉수의 8강 상대는 우주류로 유명한 다케미야 마사키였다. 중국식 3연성을 기반으로 “중앙에 천하가 있다”는 철학으로 일본기원을 뒤흔든 다케미야였지만, 실리만이 살길이라는 평범한 철학을 가진 서봉수와는 상극이었다. 서봉수는 실리를 차지한 후 다케미야의 세력을 조금씩 지우면서 항서를 받아내고 4강에 진출했다. 4강의 상대는 불행하게도 대삼관 조치훈이었다. 일본기원의 최대 명예는 한해에 기성전, 명인전, 혼인보(본인방)를 동시에 달성하는 것으로 이를 대삼관이라고 호칭한다. 최초의 대삼관에 오른 것은 조치훈이고 두 번째 대삼관은 무려 30년 후였다.

    천하의 조치훈을 상대로 서봉수는 초반 포석부터 밀리기 시작했고 중반이 되자 형세는 비극적이었다. 국내에서 중계해설을 하던 노영하는 특유의 냉정한 말투로 “던질 곳을 찾아야겠죠”라며 승부가 사실상 끝났다고 선언했다. 그때, 셔터를 내려야 할 조치훈이 작은 욕심을 내며 느슨한 행마를 하자 서봉수는 돌을 끊으며 전면전을 선택했다. 50수 이전에 제한시간을 다 쓰기로 유명한 초장고파인 조치훈은 남은 시간이 부족하자 흔들렸고 서봉수는 대마를 잡으면서 극적으로 결승에 오르는 드라마를 연출했다.

    ** 바둑은 흑이 먼저 두는 것이 통계적으로 유리한 것으로 나타났다. 때문에 흑은 돌 5집 반(무승부를 막기 위한 가공은 반집)을 백에 제공한다. 시간이 흘러도 흑이 유리하다는 통계가 나오면서 현재는 6집 반으로 굳어졌다. 바둑 용어로 덤이라고 부른다. 응창기씨는 대부호지만 바둑연구가로도 유명하다. 덤이 5집 반인 시기에 응씨배 덤을 8집(7집 반)으로 결정했다. 이 규정은 참가 기사들에게 심한 부담감으로 작용했다. 흑을 잡으면 덤에 대한 부담 때문에 자신의 스타일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제한시간 규정이 또 독특했다. 제한시간 3시간이 일반적인 시대에 응창기씨는 제한시간에 대해 손을 대지는 않았다. 그런데 30초 초읽기 3회 대신에 20분 추가시간을 도입하고 페널티로 2집을 공제하는 지금도 바둑 역사상 유일한 규정을 도입했다. 추가시간은 2회까지 가능하고 시간이 초읽기가 없기 때문에 자동패가 된다. 대마를 잡아 바둑을 끝낼 수 있다면 페널티 4집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2회 응씨배 결승대국 장면. 오른쪽이 오타케 히데오.

    결승전 상대는 바둑은 미학이라는 철학을 가진 오타케 히데오였다. 오타케는 조치훈보다 먼저 같은 해 기성전과 명인전을 우승했지만 혼인보를 놓쳐 최초의 대삼관을 조치훈에 내준 인물이다. 30대 후반이 되면 권좌에서 모두 내려오지만 50살의 오타케는 세월을 거스르고 있는 기사였다. 2회 응씨배가 시작되기 전에 열린 5회 후지쯔배 우승자는 오타케였다. 결승 5국 중반, 형세는 비관적이었다. 서봉수는 어린 날 영등포 기원 바둑을 시작했다. 끊을 수 있는 돌은 모두 끊고 젖힐 수 있는 돌은 모두 젖혔다. 오타케가 강수로 대응하면 영등포 기원 동네내기 바둑의 초강수로 대응했다. 바둑은 혼전에 혼전이 계속됐고 오타케의 대마가 몰살했다. 대국이 끝나고 관계자들이 대국장에 들어왔다. 김인 단장이 들어오자 서봉수는 김인에게 나지막이 “나 좀 꺼내 줘”라고 말했다. 형식적인 복기를 할 정신도 체력도 없었던 것이다. 영등포 기원을 들락거리던 소년은 마침내 세계 1인자에 올랐다.

    서봉수의 또 다른 스승

    승리의 기쁨에 너무 도취했던 것일까? 40만 달러를 손에 넣은 비틀거렸고 가지고 있던 국내기전을 모두 내주며 다시 무관으로 전락했다. 국수전을 시작으로 명인전 등 주요 기전은 조훈현에게서 이창호로 넘어갔다. 서봉수는 도전권 근처에도 접근하지 못하고 변방의 야인을 떠돌았다. 관철동은 조-서 시대가 끝나고 조-이 시대가 시작됐다. 서봉수는 주요 기전의 본선 주요 멤버로 호명됐다. 서봉수의 시대가 저물고 있었다.

    세계 최강이 누구냐 하는 의문에서 응씨배가 탄생했지만 사람들은 한 명이 아니라 최강국가는 누구냐는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시작은 우연이었다. 1991년 SBS는 개국기념으로 여러 가가지 이벤트를 계획했다. 그 중 하나가 일회성인 SBS배 세계바둑최강전이었다. 한중일 기사들이 5명씩 출전해 우승팀을 가리는 방식이었다. 후원사는 진로그룹으로 우승상금은 20만 달러였다.

    대회 방식이 독특한 것은 이기는 사람이 계속 다음 대국을 두는 ‘연승전’이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조훈현이 1장으로 나가 14연승으로 대회를 끝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천하의 조훈현도 중국과 일본 최정상급에게 지는 경우도 자주 있었기 때문에 적절하게 순서를 배정하는 것이 중요했다. 옵션이 있었는데 3연승을 하면 1만 달러를 추가로 받는 규정이었다.

    1997년 제 5회 진로배 국가대항전 말석에 서봉수가 어렵게 승차했다. 팀 대항전의 특징은 최정상을 후반에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기력을 감안해 중간 순번에 배치된 서봉수는 중일 최고수들을 하나씩 지우며 9연승을 하며 우승을 결정지었다. 서봉수는 아마도 이번 판만 이기면 1만 달러가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서봉수는 우승상금보다 더 많은 연승 상금을 손에 넣었다.

    서봉수와 조훈현의 첫 대국은 1974년 5월의 명인전이었다. 최근 대국은 2021년 9월 19일 전자랜드배였다. 두 사람은 47년 동안 반상 위에서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모 프로기사가 바둑행사를 갔다가 우연히 상왕십리(한국기원)로 가면서 서봉수 차를 얻어 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모 프로기사가 “두 분의 라이벌 시대”를 물어봤다. 서봉수는 라이벌은 무슨 그냥 샌드백이었지라고 대답했다. 그런 서봉수는 이렇게 말했다. 조훈현은 내 바둑의 스승이라고.

    2021년 9월 24일 현재 서봉수의 전적은 2,736 전 1,721승 3무 1,012패 승률 62.97%이다.

    필자소개
    인문사회과학 서점 공동대표이며 레디앙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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