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만 관람 한국영화
    19편에 대한 철학적 분석
    ['추천의 말' 기고] 『대중의 철학이 된 영화』
        2021년 10월 05일 01:1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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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2019년 기간 동안 천만 명이 넘게 본 대중영화는 27편이다. 그 중 SF영화가 주류인 할리우드 영화 8편을 제외하고 19편이 모두 우리나라 영화이다. 가히 <한국영화 전성시대>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스크린 쿼터제로 보호받던 지난 시절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이젠 우리나라 영화가 할리우드 영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2019년 개봉된 영화 『기생충』은 2020년 ‘자본주의 문화의 꽃’이라 할 만한 미국 아카데미상을 휩쓸었다. 올해엔 영화『미나리』가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그만큼 2000년대 들어서 한국 영화의 비약적 성장은 가히 놀랄만하다. 특히 천만 대중영화는 한국 사회 시대 모순을 투영한 작품으로 당대 문화 정치적 사건으로 기억할만하다.

    지난 9월에 출간된 『대중의 철학이 된 영화』는 바로 천만 대중영화를 철학적으로 그리고 인지생태학적으로 깊이 있게 해부한 책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심광현 교수(영상이론)와 부인 유진화 님이 함께 쓴 책으로 지난 해 출간된 『인간혁명에서 사회혁명까지』(2020)의 후속작인 셈이다. 공저자는 『대중의 철학이 된 영화』에서 천만 대중영화가 당대 민중의 간절한 열망이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집단적으로 분출된 사건으로 해석한다. 다시 말해 천만 대중영화의 등장이 한국 사회 문화 정치적 대사건으로 분석될 만큼 진보적인 문화 현상으로 해석한다.

    먼저 1부에서 심광현 교수는 프로이트 정신분석학과 인지생태학 이론을 활용해 의식과 무의식을 매개하는 영화 스토리텔링장치에 대한 과학적인 이해를 돕는다. 나아가 프랑스 철학자 폴 리쾨르의 「삼중 미메시스의 순환이론」을 통해 천만 대중영화가 어떻게 대중의 철학이 될 수 있는지를 시도한다. 그리고 영화의 내러티브보다 이미지를 철학적 사유로 더 중시했던 프랑스 철학의 대가 질 들뢰즈의 영화철학을 소개하면서 영화가 다른 매체 예술과 확연히 구분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 시청각을 활용해 이미지를 생생하게 구현하는 데 있다고 분석한다.

    다음 2부에서 심광현 교수는 19편 천만 대중영화에 깃든 문제의식을 변증법적으로 분석한다. ‘몰락기의 예술’과 ‘이행기의 예술’이라는 독창적인 관점에서 불의한 「제도정치」에 맞서 「광장의 정치」가 등장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설명한다. 바로 2014년 세월호 참사의 트라우마와 그 해 개봉된 영화 『명량』을 접목시켜 대중영화의 문화 정치적 사건이 어떻게 고양되고 진화돼 2016년 촛불시민혁명으로 대중의 의식을 성숙시켜 나갔는지를 명쾌하게 논증해 낸다.

    ‘국가는 왜 존재하는가’라는 트라우마는 세월호 참사가 가져온 절망이자 슬픔이고 국민적 분노였다. 단원고 학생 250명을 비롯해 304명이 고스란히 수장되는 걸 전 국민이 지켜보았다. 그 절망과 비탄 속에 사람들은 국가의 존재 이유를 물으며 분노했다. 2014년 7-8월 개봉돼 1,700만 명이 넘게 본 이유를 심광현 교수는 그렇게 해석한다. 영화 『명량』에서 이순신이 모함을 받아 고문을 당하며 만신창이가 된다. 그런가 하면 수백 척 왜선에 맞설 수 있는 거북선조차 불태워지고 일부 장수들은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며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도망친다. 외롭게 고립된 이순신은 절망 한 가운데에서 장수로서 카리스마와 용기를 잃지 않는다. 그리고 백성들과 연대하는 속에서 왜선 수백 척을 물리친다. 세월호 참사 당시 대통령 박근혜가 보인 행동과 너무나 대조되는 장면이다.

    전체 국민 세 명 가운데 한 명이 볼 정도로 영화 『명량』이 선풍을 일으킨 이유이다. 비록 픽션이지만 영화를 통해 대중들은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고 위로받으며 허구적 미메시스에 열광한다. 2014년 전후로 등장한 한국 사회 천만 대중영화인 『변호인』, 『암살』, 『택시운전사』, 『신과 함께1, 2,』 , 『극한직업』, 『기생충』 모두 불의를 단죄하거나 불평등한 사회변화에 대한 강한 열망을 영화 속 대중의 무의식으로 투영시킨 작품들이란 점에서 사회 진보에 기여한 문화 정치적 일대 사건이라고 명명할 수 있겠다.

    3부는 평범한 가정주부가 천만 대중 영화 11편에 담긴 대중 심리를 철학적으로 분석한 내용으로 매우 통찰력이 돋보이는 대중글쓰기의 전형을 보여준다. 천만 대중영화에 대해 영화평론가들이 보여준 천편일률적인 미사여구와 달리, 작품을 치밀하게 해석하며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는 일련의 글쓰기는 가히 여느 영화평론가의 전문적인 평론을 압도하고도 울림이 크다. 천만 영화평론가 유진화의 실험적 글쓰기는 벤야민이 시도한 철학적 에세이 형식을 취한다. 복잡하고 난해한 논증 형식의 글쓰기를 벗어던지고 짧은 문장으로 풀어쓰는 일종의 ‘트락타트’ 형식을 시도한다.

    천만 영화 『택시운전사』가 던지는 문화 정치적 사건을 트락타트 형식으로 간결하게 풀어쓴 대목의 일부를 잠깐 살펴보자.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평범한 택시기사 김만섭(송강호 분)은 시위대학생들을 두고 “호강에 겨워서 저런다.”고 비난하며 평소 「마음의 습관」을 내뱉는다. 오직 밀린 월세를 갚고 서울에 두고 온 딸아이를 걱정하며 홀로 광주를 빠져나온다. 그러나 김만섭은 서울로 귀경하던 도중 “뜨겁게 맥박 치는 판단력으로 고뇌에 빠지면서” 딸에게 전화를 건다.

    “은정아, 어떡하지? 아빠가 손님을 두고 왔어! 아빠 어떡해!”

    이 대목은 소시민으로 살아가던 택시운전사 김만섭이 “콘크리트처럼 자신을 단단하게 가둔 협소한 「마음의 습관」을 벗어나” ‘사회적 개인’으로 거듭나는 장면으로 명대사이다. “공포와 좌절, 절망에 빠진 광주의 진실을 다시 알리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광주로 돌아가는 택시운전사 김만섭은 “역사의 진실을 마주한 사회적 인간으로” 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리하여 “협소한 마음의 습관은 탁 트인 드넓은 들판의 자유와 풍요와도 같은 마음의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마음의 습관이 협소할수록 판단력도 축소된다. 역사의 진실을 마주하며 떨리는 관계 속에서 공감하고 연대할 때 인간의 잠재된 마음의 능력은 비로소 전면적으로 발달한다.”

    심광현 교수의 인지생태학적 해석과 루이 알튀세르, 안토니오 그람시, 미하일 바흐친, 발터 벤야민을 비롯해 마르크스주의 철학이론을 이해하기 쉽게 영화 대사와 장면 속에 녹여내 서술한 부분은 대중적 글쓰기의 본보기이자 정수이다.

    심광현+유진화의 『대중의 철학이 된 영화』는 천만 영화의 탄생을 역사적 배경과 함께 철학이론으로 치밀하게 해부한 책이다. 인간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인간다운 것인지를 일깨우는 ‘영화 인문학’ 서적으로 보기 드물게 잘 숙성된 책이다. 영화애호가들을 비롯해 깨어 있는 시민들이 틈을 내어 일독하기를 권한다.

    필자소개
    상암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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