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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 논만 보면 애가 끓는다
    [낭만파 농부] 갈 길 가야지 어쩌랴
        2021년 09월 27일 09:0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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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도 저 논만 보면 애가 끓는다. 하루가 다르게 누런빛으로 물들어 넘실대야 할 그 곳은 허여멀겋게 또는 칙칙한 잿빛으로 시든 벼이삭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삭이 팰 무렵 가을장마가 보름 넘게 이어지면서 심각한 병충해가 온 들녘을 휩쓴 것이다.

    태풍 오마이스가 순하게 지나간 직후만 해도 “벼이삭은 거의 다 올라왔고 비바람의 피해도 없어 보인다, 다행이다”고 낯술판 벌이며 “술맛 떨어질 일은 없겠구나” 까불었던 이 손가락을 부러뜨리고 싶다.

    한두 가지를 빼고는 그야말로 작년 이 맘 때와 판박이. 지난해는 두 달 넘는 장마와 잇달아 덮친 태풍이 ‘백수현상’을 낳았다면, 올해는 장마에 따른 다습한 환경이 ‘목도열병’으로 짐작되는 병해를 불렀다. 그것 말고 피해실태와 돌아가는 정황, 그리고 심란한 마음까지도 그대로다.

    이태를 연달아 ‘반타작’을 가늠하고 있지만 그래도 널부러져 있을 수만은 없어 일주일 남짓 예초기를 돌려 우거진 논둑 풀을 쳐냈다.

    “등에 짊어진 예초기가 그렇게 무거울 수 없고, 굉음은 귀가 따갑고, 칼날은 자꾸만 돌멩이에 부딪힌다. 쉬는 사이 눈에 들어온 희멀건 벼이삭에 속상하고 기운이 빠져 도무지 일할 맛이 나지 않는 것이다. 저도 모르게 땅이 꺼지도록 새어나오는 한숨. 그 일주일이 어찌나 힘에 겹던지.”

    지난해의 기록을 그대로 옮겼는데 어쩌면 이리 똑같을 수 있을까. 논둑 치는 와중에도 벼이삭에 눈길이 갈 수밖에 없는 노릇이라 녹색 보안경을 끼고 작업을 했더니 그나마 고스러진 이삭의 허연 빛깔이 눈에 띄지 않아 우울한 심사를 가눌 수 있었다. 겨우겨우 기운을 추슬러 추석을 하루 앞두고 논둑치기를 모두 마칠 수 있었다. 이를 핑계로 엇비슷한 심정의 벼농사두레 이웃들이 모여 술잔을 나누며 서로를 다독이지 않았더라면 더없이 씁쓸한 한가위를 맞았을 게 뻔하다.

    하지만 언제까지 고스러진 이삭 붙들고 냉가슴 앓을 순 없는 노릇이다. 갈 길 가야지 어쩌겠는가.

    논둑친 논배미

    눈이 부시게 파란 하늘

    안 그래도 날이면 날마다 눈이 부시게 파란 가을이 펼쳐지고 있다. 어제는 뭉게구름이, 오늘은 조각구름이 코발트 빛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시절.

    뒷산에 오르면 잘 여물고 씨알도 굵은 알밤이 후두둑. 잘 하면 능이버섯도 딸 수 있지만 그걸 알아볼 눈이 없으니 그림의 떡이다. 그래도 가을 숲이 내뿜는 향긋한 바람은 찌든 잡념을 씻어내고도 남음이 있다.

    추석 다음날에는 내친 김에 화암사에 올랐다. 절집으로 통하는 계곡에는 그새 내린 비로 하여 물소리를 조잘댄다. 깊은 숲은 더 짙은 향기를 풍긴다. 승방 적묵당 툇마루에 편히 걸터앉아 비스듬히 올려다본 하늘은 얼마나 아련하던지.

    적묵당 툇마루에서 바라본 모습

    시방, 그렇게 가을이 깊어가는 것이다. 그러니 논배미 사정은 그만 잊기로 하자.

    ‘황금물결’은 어차피 글렀지만 반타작이나마 거두어들일 건 남아있다. 지난해에 이어 ‘풍년잔치’는 못하더라도 작은 위로마당은 열어 봐야지 않겠나. 윤기 자르르 흐르는 햅쌀밥 잔치도 벌여야겠지. 가래떡도 넉넉히 빼서 여기저기 돌리고.

    그래도 굶어죽을 일은 없을 것이다. 벼농사 지어 화천대유 대박 칠 일도 아니고, 무슨 영화 볼 일도 없지 않은가. 굶어죽지 않고, 자연과 더불어 누리면 그것으로 되었다.

    필자소개
    시골농부, 전 민주노총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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