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젊은 소설가 2인의 소설에 관한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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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12월 16일 09:1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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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주목받고 있는 젊은 두 작가의 소설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젊은 작가들이 2006년을 나는 몸짓까지 읽어야 진정 올해를 보낼 준비를 마치는 게 아닐까 합니다.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이기호 소설, 문학동네

    이기호의 단편 소설집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에는 ‘소설-되기’의 곤란함에 대한 물음표들이 여기저기서 돌출한다. 작가 스스로 소설을 시험에 들게 하거나, 소설이 작가와 독자를 시험에 들게 하거나 하는 식으로.

    하지만 의문부호들은 의미 없이 널려 있지 않다. 버나드 쇼의 묘비문구 “갈팡질팡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를 자신의 소설 제목으로 삼은 이기호는 “갈팡질팡”의 무늬를 형성하도록 의문부호들을 배열해 놓고 있다. 소설과 현실에 대해서 묻고, 작가와 독자에 대해서 묻고, 끝내는 이야기의 존재론에 대해서 묻는 방식으로 의문부호들은 흘러간다.

       
     

    소설집에 실린 첫 번째 단편 「나쁜 소설-누군가 누군가에게 소리내어 읽어주는 이야기」를 보자. 작가는 소설과 현실, 작가와 독자의 경계 지우기를 겨냥하면서 이야기가 존재하는 방식을 유쾌하게 그린다.

    자, 우선 작가는 무엇때문에 소설을 ‘소리내어 읽으라’고 주문하는 것일까? 그는 지금 근대적 소설 그 이전의 원형적 형태, 곧 이야기에 대해서 쓰고 있는 것이다.

    “소설이라는 게 원래 그랬잖아요. 누군가의 목소리를 타고 흘러나오는 이야기, 들려주는 사람에 따라 끊임없이 변형되고 각색되는 이야기, 그게 소설의 진정한 참맛이잖아요. 이 소설도 읽어주는 사람에 따라, 그의 말에 따라, 계속 변하고 뒤바뀌고 출렁거려, 누가 진짜 이 소설의 원작자인지 모를 지경까지 흘러가길 원합니다. 나는 그런 것엔 하나도 서운하지 않으니까요.”(p.10)

    곧 텍스트 바깥을 떠돌며 누군가의 목소리에서 또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로 흘러가는 이야기의 자유로운 놀음에 대한 아이디어가 「나쁜 소설」의 시작점인 셈이다.

    소설이 시키는 대로 이야기를 읽어 줄 상대를 찾다가 결국에는 여관방 주인이 불러준 여자에게 “아, 아니…… 내 말은…… 그냥 내가 읽어주는 소설을…… 들어달라는 건데……”(p.37) 라고 말하는 우리의 주인공. 소설이 시키는 대로 허리띠도 풀고 바지 지퍼도 내리고, 묵직한 느낌을 주기 위해 마침내는 여자의 몸 위로 올라가게 되는 장면을 보라.

    “당신의 몸이 …… 따뜻해 ……집니다 …… 어두운 터널을 ……걸어갑니다……” “어어……” “당신의 신경…… 마디마디에…… 따스한 기운이 …… 따스한 기운이……” “오빠 ……이거 진짜 ……소설 맞아……?” “소설 …… 맞다니까요……” “아, 씨발, 뭐 이리…… 나쁜 소설이 다 있냐……”(p.43)

    이야기는 결코 이야기만으로 머물지 않는다. 순서대로 말하자면, 이야기 속으로 먼저 들어가야 여자의 몸 속으로도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작가는 2인칭의 화자로 하여금 주인공을 이야기의 최면으로 밀어넣었다가 도로 그것에서 빼내온다.

    그가 홀림의 상태에서 깨어났을 때는 여자도 사라지고 없다. 그리고 비로소 작가는 이야기의 효용 혹은 소설의 존재의미를 말할 수 있게 된다. “불쌍한 사람, 내 한 걸음에 달려가 소설을 읽어주고픈, 당신. 쓸쓸한.”(p.44)

    작가의 이야기론은, 「누구나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정식 야채볶음흙」 편에서 ‘야채볶음흙’의 레시피(조리법)를 통해서 그 구성요소가 무엇인지를 드러낸다. 흙을 파먹고 사는 남자는 흙이 일용할 양식으로서 썩 괜찮은 먹을거리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흙은 음식일 수 없다는 공식에서 빠져나오는 것. 그리고 상상력을 총동원하여 흙의 맛을 그려보는 것. “단언컨대 상상력이 없는 사람들은 새로운 요리법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자기의 입맛 또한 자기의 것이 아니죠. 그저 남들이 해놓은 상상을, 남들이 일방적으로 주입한 상상을, 멍청하게 받아먹을 뿐이죠. 자기의 입맛도 남들에게 맞추면서 말입니다.”(p.49)

    이전에 없던 새로운 요리인 ‘야채볶음흙’에 대한 호소는 이내 소설이 갖추어야 할 이야기의 형식과 서사적 문법에서 자유와 자율을 얻고 그와 동시에 새로운 소설의 가능성을 발화하게 하는 지점인 ‘상상력’에 대한 호소와 동일해진다.

    또 다른 단편 「국기게양대로망스-당신이 잠든 밤에 2」도 역시 그러한 호소를 변주하고 있다. 국기게양대와의 로맨스를 위해서는 ‘국기-국기게양대-국가’로 이어지는 고정된 연상 작용의 메커니즘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자, 우선요. 말을 하시면 안 돼요. 말도 하지 말고, 눈도 뜨지 않는 게 제일 중요합니다. 아예, 말 같은 건 다 잊어버렸다고 생각하시는 게 좋습니다.”(p.188) “그러니까 눈을 뜨지 마시라는 거예요. 눈 감으면 국가도 싹, 사라진다니깐요.” “그렇게 기다리면 되는 거예요. 천천히, 참을성 갖고.”(p.189)

    서사의 규칙과 이야기의 운용방법에 얽혀 있는 한, 이기호의 이야기를 즐기는 데 있어서 상당한 곤란이 따른다. 표제작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에서 작가는 소설 제목을 정하는 어려움을 토로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건 단순히 작가의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인 것이 아니라 “우연을 대하는 각자의 자세”(p.267)와 관련돼 있다는 것이다. 우연에 대하여 답하는 것, 작가에게 있어서 이것은 소설에 대해서 답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이야기이다.

    근대소설은 곧 “우연으로 시작해서 필연으로 끝나는 장르”(p.268)이며 논리 위해 구축된 단단한 구조물이기 때문이다. 우연을 어떻게 지배하여 우연 아닌 것으로 만들 것인가, 근대소설이 이 대목을 고민한다면, 작가는 혹은 소설의 주인공 소년은 대체 우연을 무슨 수로 지배하는가 하는 점을 묻는다.

    ‘단구동 무지개’ 일당들에게 두들겨 맞고 경찰서에서 피해자 진술서를 쓰게 된 주인공 소년은 난감하다. “문제는 역시 왜, 였다. 왜, 왜, 왜, 왜……? 왜라니? 그것은 나도 궁금한 것이었다. 도대체 왜 하필 나에게.”(p.275)

    그것은 소년 뿐 아니라 ‘단구동 무지개’ 일당들도 “그냥요…… 쟤가 마침 거길 지나가고 있었으니까요……”(p.275)라고 답할 뿐이다. 물론 진술서가 허용하지 않는 대답이다. 경찰관 아저씨만이 그 정답을 안다. “그냥은 무슨 그냥이야! 금품갈취를 위해서지! 다들 그렇게 써!(p.276)

    “그 모든 것들은 예감이나 전조 없이, 느닷없이 나를 찾아왔다”(p.295)는 진술, 그것은 이기호의 소설을 ‘이기호의 소설답게’ 만드는 거의 유일한 해답이다. 혹은 육하원칙을 압도하는 이야기의 놀이 방식이다. 법칙 없이 출몰하고, 제멋대로 휘어지거나 구부러지며 모양을 갖지 않는 이야기. 법칙을 쫓지 않고, 휘어지고 구부러진 이야기의 경사각을 재지 않고, 갈팡질팡하는 이야기의 놀음에 그저 잘 홀리기. 이것이 작가가 자신의 소설들을 통해서 제안하는 소설을 쓰는 자와 소설을 읽는 자가 만나는 새로운 방법이다.  글/ 조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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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정의 픽션』 박형서 소설집, 문학과지성사

    『자정의 픽션』은 박형서의 두 번째 작품집이다. 제목이 주의를 끄는데,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은 ‘자정의 픽션’이 수록된 단편의 이름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대개 수록된 단편 중 표제작을 꼽는 것을 감안할 때 이 점은 꽤 흥미롭다. 따로 작품의 주제와 내용을 포괄하는 제목을 지정해야할 만큼 어떤 일관성을 의도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목을 풀이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자정은 밤과 아침의 교차점이다. 하루의 종언을 고하고 다른 하루가 시작되기 전의 모호하고 중립적인 시간이다. 또한 픽션은 소설을 의미하므로 소설에 굳이 소설이라는 제목을 달았다는 것은 소설에 관한 소설이라는 말이 된다.

    정리하자면 밤으로 대변되는 과거의 소설과 새벽으로 대표되는 미래의 소설 사이의 의미중립적인 메타픽션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마침 작품집 말미에 제목에 관한 작가의 변이 있다. 인용해본다.

    “나는 현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자정의 픽션』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내가 생각하는 ‘자정’이란 가라타니 고진이 그리워하는 ‘요란했던 근대’ 이후의 시간이다. 동시에 서사문학이라는 대가족 안에서 소설이 태동하던, 태아처럼 웅크린 채 자신의 미래에 대해 홀로 자문해보던 근대 이전의 저 먼 ‘새벽’을 의미하기도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자정’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얕은 꿈을 꾸거나 혹은 잠을 이루지 못해 고단하게 중얼거리는 시간이다. 어느 쪽이든, 아침은 바로 거기서 시작된다고 믿는다.”(p.281)

    위의 인용문으로 미루어볼 때 ‘자정의 픽션’이란 제목은 이 작품집이 근대 소설과 탈근대소설의 교차로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근대소설과 탈근대소설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근대소설이 긴밀한 서사와 개연성의 축조를 바탕으로 주제를 선명하게 표현한다면 탈현대소설은 서사를 파괴하고 개연성을 무시하며 작품에서 주제를 읽어내려는 독자를 비웃는다. 근대소설이 사회의 모순을 총체적으로 드러내려 한다면 탈근대소설은 개인의 내면을 파편적이고 유희적으로 표현한다.

    이와 같이 근대소설과 탈근대소설은 서로 다르다. 하지만 작가의 말을 감안해 볼 때 『자정의 픽션』은 근대소설과 탈근대소설의 양극적 특성이 공존하는 작품집일 듯하다. 텍스트를 들여다보자.

    「진실의 방으로」는 열거한 특질들이 엿보이는 단편이다. 이 소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O는 낡고 거대한 건물에 들어선다. 그곳에서 그는 두 남자를 만난다. 한 사람은 사십대 중반의 경감이고 나머지 사람은 감금된 채 진실을 말할 것을 강요당하는 사람이다.

    경감은 O에게 그의 시계를 풀러줄 것과 혐의자에게서 자백을 받아낼 것을 요구한다. O는 경감이 시키는 대로 폭력을 휘둘러 혐의자에게서 진실을 얻으려 한다. 그러나 혐의자는 O에게 책상서랍 속에 진실이 있다며 열어볼 것을 권한다.

    서랍 속에는 수많은 시계들이 있었다. O의 시계도 있었고 혐의자의 시계도 있었다. 다만 혐의자의 시계는 거의 멈춰가고 있었고 O의 시계는 아직 멀쩡했을 뿐이다. O는 시계 초침 소리를 들으며 혐의자를 죽이고 경감에 의해 또 다른 혐의자가 된다.

    이 작품에서 시계는 일원적인 의미를 상징한다. 현실에서 시간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흐르지만 ‘단위’는 그 순간을 분과 초와 시로 나누고 재단한다. 그 단위에 의거해 제작된 시계의 바늘은 한 방향으로만 돈다. 이런 시계를 찬 사람들은 사회를 대표하는 경감에 의해 시계를 빼앗기고 자신과 같은 상황에 처한 이들에 의해 폭행을 당하거나 살인을 한다.

    다원적이고 천변만화하는 세상에 맞지 않게 폭력적이고 맹목적으로 자신의 진실을 타인에게 강요하다 희생당하고 만다. 이와 같이 박형서는 근대소설의 일원적인 주제의식과 의미론의 폭력성을 알레고리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을 더 재치 있게 표현하는 것은 「논쟁의 기술」이다. 이 단편의 화자는 인문학 교수다. 그는 논쟁을 즐겨 한다. 부친의 강요로 식탁에서 매일 논쟁을 벌이던 화자는 어느 날 아버지를 이기게 되고 승리의 쾌락을 깨닫게 된다. 타인을 짓뭉개는 언어폭력의 희열을 맛보게 된 것이다. 그는 순간 행복했지만 거기에 만족하지 않는다.

    아버지를 언어의 망치로 때리고 또 때려 납작하게 만들어 버린다. “내 안의 무언가가 끊임없이 다른 종류의 행복을 요구했다. 그리고 그건 아버지가 내게 가르쳐준 것이었다. 며칠 후 나는 식탁에 앉자마자 굶주린 듯 논쟁거리를 끄집어냈다. 나는 더 이상 어리지 않았다. 약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이기는 방법까지 알고 있었다. 어렵지 않게 아버지를 패퇴시켰다. 더 큰 수모를 피하려고 개처럼 배를 드러내며 누운 아버지를 거칠게 모욕했다. 그리고 다시는 고개를 빳빳이 쳐들지 못하도록 깊고 깊게 밟았다.”(p.35)

    화자는 아버지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상대를 찾아 나선다. 이번에 만난 적수는 동아시아 포럼에서 만난 현교수이다. 화자는 현교수와 ‘은근히 겁주기’, ‘무시하기’, ‘얄밉게 웃기’, ‘몰아세우기’, ‘말허리 자르기’ 등의 기법을 주고받으며 논쟁을 벌인다.

    그러다가 ‘서둘러 결론내리기’에 의해 패할 위기에 처하자 현교수를 살해한다. 하지만 그의 이성은 자신의 패배와 비이성적 행동을 용인하지 못한다. 그래서 논쟁 속에 등장한 장군의 환상을 등장시켜 자신의 살인을 정당화한다.

    이와 같이 「논쟁의 기술」은 일원적인 논리의 싸움이 살인으로 귀결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논리와 이성이 갖는 맹점을 노골적이고 유희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두달 전에 나는 은밀한 성적 메타포가 내포된 언어를 집중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슈퍼컴퓨터의 언어연산 능력을 가진 한 여교수를 울린 적이 있다. 나는 그녀가 성도착자임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다.”(p.14)

    위에 언급한 단편들이 근대소설의 단점을 비판하면서도 근대소설적 기법인 알레고리와 서사를 사용하고 있는 반면, 개연성이 해체된 작품도 있다. 「날개」가 그런 작품이다. 이 소설은 2005년에 170년 후의 사람들을 보는 화자의 이야기이다.

    이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화자는 그것에 대한 과학적 근거나 이성적인 설명을 하지 않는다. 이런 작법은 내용과 관련이 있다. 소설은 여자가 거인과 연애를 하면서 시작된다. 하지만 그는 높으신 분에게 말을 놓았다는 이유로 다른 행성으로 보내진다.

    그와 그녀는 연애를 하기 어려운 환경에 놓인다. 그러나 거인은 만나기가 불가능한 날임에도 그녀를 찾아온다. 거인은 날아서 왔다고 하지만 그녀는 믿지 않는다. 그 후에 거인은 쌀알행성의 심연에 갇히고 그녀는 거인의 유전자로 아이를 만들어 키운다.

    그런데 아이가 날 수 있다고 하면서 그녀에게 자신이 나는 모습을 보여주려 한다. 그러나 여자는 믿고 싶지 않은 나머지 눈을 감아버린다. 그녀는 이성과 상식의 한계에 갇혀 소설 속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다. 현실 속 아이러니와 모순을 외면하기만 하는 것이다.

    “하늘을 난다는 건, 다른 시대로 간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중략… 불가능이라는 믿음은 너무 긴 세월동안 여자를 간섭해왔다. 이제는 이쪽과 저쪽 사이에서의 망설임조차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다.”(p.80)

    작가는 여자처럼 상식과 이성의 한계에 갇혀 텍스트를 읽는 독자들을 조롱한다. 「사랑손님과 어머니의 음란성 연구」가 그런 작가의 의도를 잘 보여준다. 주요섭의 「사랑손님과 어머니」를 해석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소설을 창조한다. 근대소설을 탈근대적이고 복합적인 의미를 가진 작품으로 바꿔놓는다.

    이 단편은 달걀을 통해 「사랑손님과 어머니」의 음란성을 파헤친다. “달걀을 달걀이라 말하지 못하게 하는 건 달걀이 성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중략… 달걀을 받아먹는다는 건 그 단백질을 자기 몸에 넣는다는 말이다. 즉 콘돔도 없이 벌어지는 성교를 의미한다.”(p.160~161)

    그리고 그런 논리를 바탕으로 전복적인 결론을 내린다. “이 소설은 단순한 성장기 소설이 아니라 성교를 중심으로 세계의 원리와 끝없는 갱신을 해명하고자 한 알레고리 소설이다. 옥희의 집은 평범한 가정이 아니라 한 남성을 두고 아귀다툼을 하는 매음굴이다. …중략… 따라서 작품의 의의는 재고되어야 한다. 우리는 모든 걸 도덕적이고 희망적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선량한 욕망과 투쟁해야 한다. 그 싸움에서 승리할 때 비로소 이 작품이 품은 강렬한 어둠이 우리 앞에 드러날 것이며, 세계의 명암은 보다 확고히 구분지어질 것이다.”(p.164)

    이렇게 「사랑손님과 어머니의 음란성 연구」에서는 변칙적 해석을 통해 다른 세계를 창조하는 탈근대적 메타픽션의 특성이 드러나고 있다. 근대소설의 세계를 의식하면서 변화를 꾀하는 탈근대소설의 양상을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예로 든 작품들을 통해 상식과 이성의 외연을 확장하고 아이러니와 모순을 포용한다. 작위적으로 의미를 강요하는 작법에서 벗어나 전복적인 상상력으로 텍스트를 재창조한다. 사회의 모순을 거시적으로 드러내는 총체성은 없지만 그 파편은 날카롭고 유쾌하다.

    상투적인 ‘무게’ 대신 가볍지만 참신한 ‘예리함’으로 승부한다. 그 신선한 매력은 이 작품집에 실린 「논쟁의 기술」이나 데뷔작인 「토끼를 기르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것들」로 증명된 바 있다. 그렇지만 자정은 어디까지나 모호한 시간이다.

    밤의 시각으로는 인공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고, 새벽의 관점에선 의미를 해체하는 의미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한 걸음이 중요하다. 밤으로 되돌아가든지, 새벽으로 전진하든지 둘 중에 선택해야한다.

    지나친 절충은 중용의 미덕보다는 엉거주춤의 악덕으로 주저앉기 쉽지 않은가. 근대소설이 작품의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 내용과 핍진성에 초점을 맞춘다면 현대소설은 작가의 독창성을 표현하기 위해 문체와 형식에 방점을 찍는다. 어느 쪽이든 작가의 미학적 선택이 필요한 시점이다. 방금 만든 피자도 식으면 맛이 없기 마련이니까.    글/ 배찬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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