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컬렉터와 그림 수집,
    어떤 그림이 좋은 그림인가?
    [컬렉터의 서재] 내게도 박수근 그림 한 점이 있다
        2021년 09월 20일 08:0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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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역사 자료를 주로 수집한다. 그래서 스스로를 ‘역사 컬렉터’로 부른다. 이와 달리 미술품을 수집하는 이들도 있다. 보통 ‘컬렉터’라고 하면 이들을 지칭하는데, 나는 이들을 ‘아트 컬렉터’라고 따로 부른다. 나의 수집 행위와 구별되기 때문이다. 역사 컬렉터가 옛 자료들 속에서 역사적 의미를 찾는다면, 아트 컬렉터는 예술 작품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는다. 역사 컬렉터는 남겨진 자료 속에서 역사의 단서를 찾아내어 그 시대와 대화하고자 한다면, 아트 컬렉터는 작품에서 발견한 미(美)의 바다에서 영감을 얻고 그 속에서 유영(遊泳)을 즐기려는 사람들이다. 둘은 서로 다르면서도 닮았다. 그들은 현실 속 얼어붙은 감성을 깨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시간과 아름다움을 찾고 대면하려는 자들이다.

    그런데 세상만사가 그렇듯 일도양단으로 이 둘을 정확히 구분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수집을 하다 보면 그 경계가 불명확해지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예를 들면 조선 후기 민화의 경우 그건 역사 자료이면서 예술 작품이다. 옛 떡살의 경우도 그렇다. 보통 나무로 만드는 떡살은 조선시대 생활사의 한 영역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아름다운 목조각품이기도 하다. 이런저런 이유로 역사 컬렉터인 나도 많지는 않지만, 약간의 그림과 글씨, 조각품들을 소장하고 있다. 이번 글은 추석을 앞두고 무거운 역사 이야기는 잠시 내려놓고, 나의 그림 수집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내가 처음 소장한 그림들

    나는 오래 전부터 그림 감상을 좋아했다. ‘그림 수집’은 안목은 둘째치고 상당히 많은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에 입문 자체가 녹록치 않다. 10대부터 나는 좋은 그림이 인쇄된 달력을 오려 액자에 넣어 걸어두거나 전시회 포스터를 모으는 걸로 그 욕구를 대신했다. 그러다가 대학 졸업 후 직장을 얻고 월급이 생기면서 원화(原畫), 즉 진짜 그림을 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진짜 그림을 사서 집에 걸어두고 싶기는 한데, 그 방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나도 처음에는 그랬다. 그림을 살 수 있는 방법은 많다. 갤러리에서 열리는 전시회에서 그림을 사거나, 매년 정기적으로 열리는 아트 페어(art fair)에 가서 구하는 방법, 경매를 통하는 방법, 아니면 작가의 연락처를 구해 직접 구입할 수도 있다.

    직장인이 된 지 약 10년을 조금 넘겼을 즈음, 컬렉터는 새집에 입주하면서 아내와 의논했다. 아마 2004년도였을 것이다. 거실에 벽걸이TV를 설치하면 가족 간 대화가 줄어들 테니 TV를 없애는 대신 그 돈으로 그림을 몇 점 사서 거실에 걸자고. 그림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TV 보기는 더 좋아하지 않던 아내도 흔쾌히 동의했다. 당시 어디서 그림을 사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목동 어느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그림을 전시해 놓고 파는 행사를 우연히 보고, 거기서 TV 설치 비용만큼 원하는 그림들을 구입할 수 있었다. 88올림픽 예술 감독을 맡았던 이만익 화백의 10호 크기의 그림 두 점, 펜화가 김영택의 경복궁 영제교 해치 펜화 1점, 황규백 화백의 메조틴트 판화 1점해서 총 4점의 그림. 이렇게 나는 ‘그림 수집’ 세계로 입문할 수 있었다.

    [사진] 2004년 컬렉터가 처음 구입한 그림 중 한 점인 펜화가 김영택의 경복궁 영제교 해치 그림이다. 돌덩이가 생명을 얻어 살아 움직이고 있는 듯하다. 김영택 화백은 올 1월 지병으로 별세하였다. 화가는 갔지만 이 그림은 오랫동안 남을 것이다. 종이에 먹펜, 36×48cm, 2004년 작품 (박건호 소장)

    그림을 좋아하고 수집하는 세계에 입문하는 첫 통과의례는 바로 자신의 돈으로 직접 구입해보는 것이다. 그림이 싸든 비싸든 자신의 돈으로 그림을 한 점 사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큰 차이가 있다. 그림을 사는 순간 미술은 관념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다가온다. 그때부터 미술은 저 멀리 천공을 떠도는 천사가 아니라 내 주변을 배회하는 친한 친구가 된다. 미술과 친구가 되는 순간부터 그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알아가기 위한 공부도 시작될 것이다.

    반기문을 추억함

    제19대 대선을 앞둔 2016년 2월 1일 반기문 전 UN 사무총장이 돌연 대선 불출마 선언을 했다. 애당초 그에게 대통령 자리는 노욕이었다. UN 사무총장이라는 자리 프리미엄으로 과분하게 평가된 것도 문제지만, 당시 그가 국내 정치에 던졌던 메시지는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새마을 운동에 대한 지나친 찬양도 문제였지만, 사무총장 퇴임 후 국내에 와서 터뜨린 제일성 “정권 교체가 아니라 정치 교체”도 순수하지 못한 것이었다. 국민들은 그런 추상적이고 정치공학적인 이야기를 기대한 게 아니었다. 한국의 국정 농단 사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이나 비전의 제시, 아니면 최소 국민들에 대한 위로 정도가 차라리 나을 뻔했다. 그의 대선 행보는 명예로운 길이 있음에도 노욕을 부린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외교관으로서의 그의 능력은 뛰어났을지 모르나, 정치인으로서 그는 함량 미달로 보였다. 당시 『한겨레신문』은 사설에서 반 총장을 이렇게 비판했다.

    반 전 총장의 실패는 불분명한 노선과 비전이 불러온 자가당착의 결과다. 반 전 총장은 자신의 정체를 ‘진보적 보수주의자’라는 형용 모순으로 감추려 했다. 진정성 없이 궤변만으로 국민 다수의 지지를 얻어보겠다는 생각이 통할 리가 없다.

    그런데 나는 반기문 전 UN 사무총장에게 빚을 진 적이 있다. 딸아이 미국 유학 비용을 대주신 분이다. 그래서 나는 개인적으로 반 전 총장을 미워할 수가 없다.

    반 총장이 유학 비용을 대주셨다니….?

    그 사연은 이러하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화가는 박항률 화백이다. 그의 그림에는 깊은 명상과 사색에 빠진 소녀와 승려풍의 남자가 등장한다. 때로는 신비스러운 신화 속 동물들도 나온다. 가장 즐겨 그리는 소재는 측면으로 앉아 고요히 사색하는 소녀의 모습이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영원의 시간을 담고 있는데, 몽환적이기도 하다. 다수가 <기다림> 아니면 <새벽>이란 제목을 달고 있다. 무엇을 저리 절실히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그림 속의 소녀를 보노라면 내 마음도 같이 고요해진다. 왜 이런 소녀 그림을 그리는지에 대한 박 화백의 설명은 이렇다.

    제가 시골에 있던 시절, 같은 동네에 사촌 누이동생이 살았습니다. 제가 사실 그 전에는 공부도 잘 안하고 그랬었는데 누이동생은 상당한 문학소녀여서 책 읽는 것을 참 좋아했어요. 그래서 저도 누이동생의 영향을 많이 받아 책도 많이 읽곤 했습니다. 그 후 누이동생은 저와 함께 서울로 올라왔었는데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어요. 그래서 그녀가 제 추억 속에 항상 가장자리에 자리하게 되었고 제 작품에서 그리는 소녀의 이미지가 누이동생을 많이 닮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새와 나비, 꽃, 과일 등이 소녀와 함께 작품에 등장하는 것도 이런 소재들이 그녀의 이미지와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또한 그림 속에서 제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인간의 명상적인 측면인데요. 생각에 잠기고 우리 인생을 반추해보는 그런 이미지들을 제 그림에 담고 싶다는 생각이 아마 소녀와 꽃, 새와 나비 등의 소재와 함께 어우러져 제 그림에서 표출되었던 것 같습니다.

    _ 네이버 Logo×Art 프로젝트 ‘박항률’ 편 _

    다 자기 나름의 선호하는 그림 취향이 있는 법이다. 이미 그림 수집에 입문해 있던 나는 2005년 큰마음 먹고 한 달 월급을 털어서 박항률 화백의 전시회를 찾아 그림 한 점을 사고 말았다. <부석사>라는 작품인데, 박항률 그림의 일반적인 패턴을 벗어난 그림이었다. 의상대사와 선묘낭자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푸른 색조를 바탕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듬해에는 내친 김에 <부석사>에 이어 박 화백 그림을 한 점 더 구입하였다. 이번에는 <새벽>이라는 작품이었다. 거실 벽에 걸린 이 그림들을 아침 저녁으로 감상하면서 나는 행복감에 빠졌다.

    보통 아트 컬렉션을 시작할 때 한두 달치 월급 정도 되는 가격부터 시작한다고 한다. 나는 이를 충실히 따랐다. 컬렉션의 세계는 돈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아주 고상한 취미도 아니다. 돈 아껴서 TV 한 대 사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그렇고 그런 취미일 뿐이다. 돈은 다른 데서 아끼면 되는 것이다. 골프를 안하고, 담배를 안하고, 술을 조금 줄이면 그 정도 돈은 마련할 수 있다.

    [사진] 컬렉터가 잠시 소장했던 박항률 화백의 그림. 왼쪽은 <부석사>. 오른쪽은 <새벽>이라는 작품이다. 오른쪽 그림이 박항률 화백이 가장 즐겨 그리는 양식의 그림이고, 왼쪽은 이런 양식에서 벗어난 그림이다. 모두 30호 크기이다.

    어쨌든 그렇게 박항률 화백 그림 두 점을 구입해 1∼2년 정도 소장하고 있었는데, 2007년부터 갑자기 박항률 화백 그림 가격이 뛰기 시작했다. 나도 처음에는 그 이유를 몰랐다. 2007년은 미술시장이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을 누렸다고 평가되던 시기다. 그런데 유난히 박 화백 그림이 많이 오른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데, 그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2007년 취임하면서 미국 뉴욕에 있는 관저 4층 벽에 박 화백의 그림을 걸었기 때문이다. 한복을 단아하게 입은 소녀가 앉아있는 그 그림은 매우 한국적인 느낌을 주었기 때문에 한국인 UN 사무총장의 관저에 잘 어울리는 그림이었다. 박 화백 그림이 거기 걸렸다는 뉴스 보도가 나오자 이것이 그림에 대한 컬렉터들의 수집욕을 자극한 것이 분명했다.

    나는 박 화백 그림을 두 점 가지고 있던 터라 <부석사>를 메이저 경매회사인 서울옥션에 내놓기로 했다. 팔려고 산 것은 아니지만 당시 딸 아이를 미국에 유학 보낼 기회가 생겨 그 비용을 마련해야 할 상황이었다. 경매 결과 <부석사>는 박 화백의 다른 작품보다 월등히 비싼 가격에 낙찰되었다. 구입가의 4배를 약간 넘는 가격이었다. 이 돈으로 딸아이 1년 유학 비용을 댔으므로 나와 아내는 그때부터 딸아이를 ‘반기문 장학생’이라고 불렀다. 위에서 반기문 총장이 딸아이 유학비용을 대주셨단 말은 이 때문이다. 재미를 붙인 나는 1년 뒤 박 화백의 나머지 작품 <새벽>도 경매에 내놓아 구입가의 3배 정도로 팔았다. 가격이 많이 오른 것에 마음이 혹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2점의 그림을 다 팔아버리고 나니 ‘내가 이러려고 박항률 그림을 샀나’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그래서 2010년 나는 다시 박 화백 전시회에 가서 <기다림>이라는 작품을 새로 구입하게 되었다. 가격이 처음 구입했을 때보다 두 배나 오른 상태였다. 이 그림은 지금까지 11년째 소장하고 있다. 이 그림은 팔지 않을 것이다. 나중에 ‘반기문 장학생’이 시집가면 그때 선물로 줄 계획이다.

    이렇듯 나에게 반기문 전 총장은 같이 박항률 화백의 그림을 좋아하는 동호인으로서의 교감도 있고, 딸아이 유학 비용을 대주신 인연도 있기 때문에 자연인으로서의 그를 미워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는 주변의 부추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깨끗이 대통령 선거 불출마를 선언하지 않으셨던가? 그는 나라를 위해 다른 방법으로 크게 기여하실 일이 있을 것이다.

    20대 대선을 앞둔 2021년 9월 반기문과 같은 ‘전직 총장’의 직함을 가진 이가 야권 대통령 후보 지지율 1,2위를 다투고 있다고 한다. 그는 문재인 정부의 검찰총장 출신이다. 검찰 재직시 그는 새로 임명되는 법무장관 가족을 멸문지화에 이르게 했다. ‘공정 사회’의 이름으로 포장했지만, 본질은 검찰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조직 이기주의 또는 수구적 저항에 다름 아니었다. 그는 정의로운 검사 행세를 했다. 야당 정치인 중에서 뚜렷한 대안을 보여주는 이도 마땅치 않던 때 그는 보수 우파의 새로운 희망으로 떠올랐고, 부동산 정책 실패로 인한 정부에 대한 반감까지 겹치면서, 여론 조사에서 그는 연일 높은 지지율을 갱신해 나갔다. 이때가 그에겐 가장 좋은 시절이었다.

    높은 지지율에 취했던지 그는 검찰총장 자리를 박차고 나오더니 일사천리로 얼마 후 대선 출마까지 선언하게 된다. 그는 정치적 비전 제시보다는 줄곧 자신이 몸담던 정부 때리기에 몰두하며, 정권교체를 주장했다. 그러나 유능한 검찰총장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정치인으로서는 전혀 준비가 안돼 있었다. 그 누구도 아닌 스스로가 그것을 증명해 나갔다. 그의 언설에는 증오와 차별과 배제· 기득권 옹호로 가득 차 있는데 반해, 희망과 연대 그리고 포용이 없다. 또한 그는 동시대 사람들의 정서와 희망· 염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노동의 의미, 민주화의 역사, 인문학의 존재 이유, 약자에 대한 배려 등 정치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지적 소양이나 미덕을 갖추지 못했다. 그는 철저하게 구시대 정치인이며, 새 시대를 이끌어가기에는 역량이 많이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대선 출마 후 그가 보인 ‘1일 1실수’는 안쓰럽기만 하다. 처음에는 실수인가 했는데, 그것이 반복되다 보니 그것이 그의 세계관이며 그의 본질이었다. 게다가 그는 자신에 대한 의혹 제기는 모두 ‘정치 공작’으로 몰아부친다. 자신이 검찰총장으로 있을 때 그런 식으로 공작을 해오지 않았는가하는 의심도 든다.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으로 세상을 해석하기 때문이다.

    밑천이 너무 빨리 드러났던지 그를 중심으로 불었던 바람은 이제 잦아들었고, 대세론도 점차 약화되고 있다. 이제 본격적인 경선 레이스가 시작되고, 후보자 토론이 이어지면 그의 지지율은 더욱 하락할 것이다. 나는 이쯤에서 그가 반기문 전 총장의 길을 따라 조국과 민족을 위해 중도 사퇴하시길 바란다. 대통령의 꿈이 간절하다면 수신제가 후에 다시 도전할 수 있다. 누가 알겠는가? 9수 끝에 고시를 합격한 신화를 만들었듯이, 9수 끝에 대통령에 당선될지.

    내게 가장 소중한 그림

    다시 그림 이야기.

    사람들은 박수근의 그림과 김환기의 그림이 몇 억 혹은 몇 십억에 팔렸다는 뉴스가 나오면 지나치게 비싸다고 이야기한다. 미쳤다고도 한다. 나도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안중근 의사의 붓글씨가 10∼15억 정도로 거래된다. 박수근 그림도 10억 이상 때로는 몇십 억원에 이른다. 강남 아파트 한 채 가격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화가로 평가되는 이의 그림이 강남 아파트 한 채 정도 가격이라면 그것은 결코 비싼 가격이 아니다. 최고의 예술가에 대한 평가나 대우치고는 그렇게 높은 것이 아닌 것이다. 미국이나 유럽 등에서는 최고의 예술가들의 작품 가격이 수백 억에 낙찰된다. 심지어 1천억 가까이 낙찰되는 경우도 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라는 대한민국에서 최고 화가의 그림 이 강남 집 한 채 가격이라면, 그렇게 높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멀지 않은 미래에 가격은 분명히 더 올라갈 것이다.

    빈말이 아니다. 몇 년 전 대한민국 최고 현대 화가인 김환기의 작품이 홍콩 경매에서 85억이 넘는 가격에 낙찰되더니, 2년 전 2019년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김환기의 1971년 <우주 05-IV #200>라는 작품이 한국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에 팔렸다. 낙찰가는 약 132억원(8800만 홍콩 달러)이었다. 구매수수료를 포함한 가격은 약 153억 5천만원. 드디어 낙찰가 기준 100억원을 넘는 기록이 최초로 나왔다. 이는 끝이 아니라 시작일 것이다. 분명이 200억, 300억을 넘는 기록으로 이어질 것이다.

    [사진] 2019년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132역원에 낙찰된 김환기의 1971년 [우주 05-IV #200], 100억 이상의 가격으로 낙찰된 한국 최초의 미술 작품이다. 254X254cm, Oil on cotton (환기미술관 사진)

    그런데 컬렉터에게도 박수근 그림이 한 점 있다.

    놀라지 마시라.

    진품이 아니라 500개 한정품으로 복제해 만든 작품 중의 하나이다. 에디션 넘버는 317번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박수근의 진품보다 더 소중한 가치를 가지고 컬렉터의 서재를 장식하고 있다. 이 그림에는 나의 가족사와 관련된 특별한 사연이 있다. 이 그림에 관해서는 언젠가 아내가 썼던 글을 옮기는 것이 낫겠다. 그 그림을 산 것이 아내이기 때문이다.

    딸아이가 11개월 즈음이었을 때

    미술을 좋아하는 남편과 호암갤러리에 박수근 그림 전시회를 갔다.

    전시회 관람 후 기념품 샵에 박수근 그림 중에

    남편이 좋아하는 [아이 업은 소녀] 복제 그림을 판매하고 있었는데

    그 시절 남편 월급은 70만원 내외, 판화 가격은 15만원이었다.

    우리 부부는 그냥 보기만 하고 나왔다

    아쉬워하는 남편 표정이 집으로 돌아와

    저녁 밥을 하는 내내, 잠자리에 들어서도

    지워지지 않아 다음날 아이를 업고 갤러리로 향했다

    지하철역을 나오니 비가 세차게 내렸다.

    소나기와 바람에 우산을 썼음에도 아이와 나는 어깨 위를 제외하고 온몸이 비를 맞았다

    판화 그림을 사야겠다는 생각뿐이어서 그런지 그날이 월요일이란걸 챙기지 못했던 것이다. 갤러리는 휴관이라 문이 닫혀 있었다.

    나는 갤러리 문을 두드렸다

    관리인 아저씨가 나와서 휴관일이라 입장할 수가 없다고 한다.

    “아! 어떻하지? 멀리 김포공항 쪽에서 왔는데~”

    난감해진 나는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그 당시 우리는 강서구 발산동에서 살았다.

    내가 경상도 사투리로 말을 하니 관리인 아저씨는 우리 모녀가 김해에서 비행기 타고 온 줄 착각하신 것 같았다. 위층 사무실 직원한테 전화 통화 하는 내용을 들어보니 그랬다.

    비를 맞은 채 아이를 업고 서 있는 모습에 우리 모녀가 안타깝고, 간절해 보였는지

    “원래 이래 판매하면 안 되는데…”

    하면서 직원이 내려와서 고맙게도 갤러리샵 문을 열어주고 불을 켜고, 그림을 건네 주었다.

    우리 모녀는 그렇게 남편과 아빠에게 그가 갖고 싶었던 그림을 깜짝 선물 하게 되었다.

    남편은 그 그림을 보고 무척 좋아했다.

    건강하게 잘 자라 지금은 의과대학에 다니는 딸아이는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저 그림의

    사연을 아직 모른다.

    언젠가 들려주겠지?

    있는 듯 없는 듯 익숙하게 걸려 있는 그림에 대한 사연을 알고 나면

    딸아이의 감정은 어떨까?

    따듯한 심성을 가지고 사람을 사랑하는 의사가 되기를 나는 늘 기도한다.

    [사진] 박수근 화백의 그림과 똑같이 재현한 작품으로, 아기를 업고 있는 소녀의 모습이다. 박수근은 김환기, 이중섭과 함께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현대화가이다.

    진품도 아닌 에디션 넘버 ‘371/500’의 이 재현품에는 이런 사연이 담겨 있다. 나는 아내가 아이를 업고 전시회를 찾아간 날이 정확히 언제였는지 궁금해서 검색해 봤다. 그 당시 호암갤러리의 박수근 전시회가 열린 시기는 1999년 7월 16일부터 9월 19일까지였다. 그 기간 중 휴관일인 월요일이 총 아홉 번인데, 그 중 서울에 엄청나게 비가 많이 온 날을 검색해보니, 8월 2일이었다. 이날은 태풍 ‘올가’가 북상하면서 서울에 200mm 정도의 비가 내렸고, 경기 북부와 강원도에는 500mm 이상의 폭우가 내린 날이었다. 그 폭우 속에 아내는 아기를 들쳐 업고 길을 나섰다. 아내는 오로지 남편이 가지고 싶어하던 ‘복제품 그림’ 하나를 사기 위해 그 번거로움을 감수했던 것이다.

    재미있게도 그 그림 내용도 아기를 업고 있는 소녀이다. 그 폭우 속 남편에게 그림을 사주려고 길을 나섰던 아내와 딸의 모습이 그대로 그림 속에 박제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그림을 보노라면 1999년 8월 2일 시청역에서 호암갤러리까지 폭우를 맞으며 걸어갔던 그날의 그 장면이 아릿하게 가슴에 남는다. 이런 사연을 담은 이 그림은 진품보다 더 값진 명품이 되어 집의 한 자락에 걸려 있다. 진정 가치 있는 그림은 꼭 수십억 수백억 그림이 아니라 자신있게 소중한 의미를 가지고, 감동을 주는 그림이라는 사실을 당당히 증명하며.

    * ‘컬렉터의 서재’ 연재 칼럼 링크

    필자소개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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