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와서 데카르트와 리영희 선생 원망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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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12월 12일 08:4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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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세화 선생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나는 경험상 아주 잘 알고 있다. … 사람은 자기 생각을 고집하는 동물이다. 생각을 바꾸는 것은 그 때까지의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일이기 때문에도 바꾸지 않는다. 기존의 생각과 반대되는, 새로운 사실을 만나도… 잘 알다시피 사람은 합리적 동물이기보다 합리화하는 동물이다.”

    “에이 선생님,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런 노골적인 말씀을 점잖기 그지 없으신 선생님께서 그렇게 쉽게 하셔도 되는 겁니까? … 아니, 아닙니다. 그 말씀은 분명히 맞습니다. 선생님께서도 오래 오래 생각하셨겠지요. 저도 실은 그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횡설수설 큰소리로 떠들고 싶은 어지러운 심정이다.

    사람이 합리적인 동물이 아니라는 걸 진즉에 알았다면 조금은 덜 마음에 상처를 받지 않았을까? 지금 와서 데카르트를 원망하고 리영희 선생을 원망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 아니 홍세화 선생을 붙들고 넋두리를 한들 무엇 하랴? 그저 또다시 깨달음의 변증법적인 뒤집힘을 감당하고 자기 검열의 고통을 인내하는 수밖에.

    집착이 없으면 고통도 없다. 새삼스럽게 시인 유치환처럼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救)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愛憎)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낀”다고 엄살을 떨 일도 없다. 다만 인간에 대한 실망을 여하히 내면화하여 다시 존재에 대한 사랑으로 되살려낼 것인가를 고민할 따름이다.

    그런 고민 끝에 한용운은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라고 해놓고도 곧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라고 썼던 거다.

    슬프게도 인간은 합리적인 동물이 아니다. 이성적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생존에 필요한 만큼만 이성적이다. 그래서 인간은 이성적이기보다는 이기적이다. 지극히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철저히 자기 입장에서 사물을 바라본다. 그래서 대화와 토론은 이루어지지 않고 패거리끼리의 힘의 대결만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다.

    나라 전체, 아니면 계급 전체, 당 전체나 노동조합 전체의 이해(利害)라는 시야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건 그래서 매우 어렵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인간에게 합리적인 동물이 될 것을 요구하고 그 무지(無知)를 꾸짖기만 해왔다. 그러나 이젠 전체의 이익이 곧 나의, 내가 속한 작은 집단의 이익이 되기도 하는 경험을 하게 해야 한다.

    “사회주의는 곧 합리주의요, 인간 이성에 대한 믿음이다.” 15년 전에 종이 조각에 갈겨썼던, 지금도 내 수첩에 넣어 다니는 젊은 날의 신앙 고백이다. 그러나 그건 청춘의 기념일 뿐. 인간 이성이란 믿어야 할 신(神)이 아니라 고작 이기적인 목적으로만 사용되는 하찮은 물건임을 인정할 지라도 사랑의 노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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