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절한 승부사 서봉수①
    [현대바득 사이드스토리] 어떤 소년
        2021년 09월 10일 09:26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1972년 제4회 명인전 결승 4국, 천하통일의 제왕 조남철은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며 진을 쳤지만 진은 바람처럼 흔들리며 무너졌다. 이윽고, 조남철이 나지막이 말했다. 없군. 불계패, 바둑돌을 던진 것이다. 입단 2년 차, 대국 도중에 초단에서 막 2단으로 승단한 스무 살의 서봉수가 조남철을 무너트리고 명인전을 차지한 것이다. 한국바둑역사의 획을 긋는 파천황의 사건이었다.

    우승 후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서봉수는 “정석을 잘 몰랐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대국장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시간이 되면 더벅머리 소년은 영등포기원에 나타났다. 소년은 담배 자욱한 기원에서 따닥따닥 바둑 몇 판을 두고 총총히 사라졌다. 호기심이 동한 기원의 고수들이 져줄 요량으로 짜장면 내기를 자청했다. 어느 순간, 기원의 고수들은 이기려고 해도 이기지 못하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동네 고수들은 이 사태를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짜장면 한 그릇, 버스표 두 장

    영등포기원의 원장은 나이든 동네 애기가가 아니었다. 두 번이나 프로 입단 본선 대회에 나갈 정도의 최고수였다. 이를테면 한강 이남에서는 국수급 아마추어라고 해도 좋았다. 원장은 입단이 좌절된 후 3년간 군대를 다녀온 후 이리저리 떠돌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영등포에 자리를 잡았다. 동네 바둑 터줏대감들이 들락거리며 텃세 아닌 텃세를 부렸지만 원장은 비위를 맞춰주며 호의를 베풀었다, 간혹 바둑을 두었지만 자주는 아니었고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했다.

    동네기원이 성행하던 시절, 아마추어들의 기력은 흔히 ‘기원 몇 급’으로 불렸다. 기원에는 터줏대감들도 상당수 있었지만 그 지역 사람이 아닌 경우도 자주 들락거렸다. 새로운 사람이 출몰하면 원장은 몇 급이냐고 묻고 비슷한 기력의 사람과 대국을 주선해 주는 식이었다. 동네기원에 널린 것은 3급과 5급이었다. 그 때문에 4급이든 6급이든 대국을 주선해 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기원의 기력은 한국기원에서 무슨 인증서를 준 것도 아니기 때문에 동네마다 조금씩 차이가 존재했다.

    동네기원의 대국이 그냥 친선이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내기가 문제였다. 기료(기원 이용료)를 시작으로 짜장면 내기로, 판내기로, 방내기로 변하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아는 사람도 아닌 모르는 사람이 주장하는 기력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을까. 새로운 등장인물은 기력을 말하지 내기를 말하지 않는다. 언제나 내기를 먼저 말하는 것은 터줏대감들이다. 그래도 작은 사고들만 생길 정도다. 영등포 원장은 이런 문제를 잘 관리하며 기원을 운영했다. 속된말로 기원 물이 좋았다.

    ** 기료는 기원에 가면 내는 입장료다. 짜장면 한 그릇 가격이면 하루종일 바둑을 둘 수 있었다. 동네 토박이면서 직원 한두 명인 자영업자들이 많았다. 인근 당구장 사장이 매일 기원에 출근하고 기원 원장이 당구장에서 살기도 하는 일이 흔한 풍경이었다. 판내기는 한 판을 이기면 얼마인 식이었다. 짜장면 한 그릇 정도였고 하루 열 판을 두어 세 판만 이기더라도 큰 타격은 아니었다. 문제는 방내기였다. 열 집 이하로 지면 짜장면 한 그릇, 스무 집 이하로 지면 두 그릇, 91집을 지면 열 그릇, 흔히 말하는 ‘만방’이다. 몇 판을 지더라도 적게 지고 한 판을 이기더라도 많은 수입 올리기 때문에 동네기원의 골칫거리였다.

    원장의 시야에는 언제나 소년에게 있었다. 정석은 약하지만 빠르게 균형을 맞추는 능력이 뛰어났고, 중반 전투에서 밀리는 것 같지만 오히려 그 과정에서 역전하고, 형세판단이 부족하지만 쉽게 무너지지 않고 지지 않는 바둑. 원장은 소년이 가공만 제대로 하면 어떤 보석을 보여줄지 모르는 원석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원장은 소년에게 조금 더 체계적으로 배워볼 것을 권유했다. 교복을 입은 소년의 답변은 한결같았다. 생계를 위해 집안일을 도우러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방동 단칸방에 사는 소년에게 원장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바둑책들을 소년이 언제든지 빌려갈 수 있도록 해 줄 뿐이었다.

    그런 어느 날 소년은 궁금증이 생겼다. 사람들이 왜 프로기사가 되려고 기를 쓰는지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소년의 의문은 프로바둑기사가 되면 돈(월급)을 얼마나 주냐는 의미였다. 원장은 그런 것은 없고 오로지 실력에 의해 돈을 받는 것이 프로라고 답변했다. 하지만 우승을 하면 서울 시내 고급 양옥 한 채 가격을 받을 수 있다는 답변에 소년은 충격을 받았다.

    서봉수의 부친은 대전에서 작은 기원을 운영했다. 그 당시 기원이라는 게 절반은 적자고 잘 운영해야 입에 풀칠을 하는 수준이었다. 부친의 기원은 잘 되는 쪽은 아니었고 모친은 다른 벌이에 나서야 했다. 대전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상경한 서봉수 가족의 생계를 전담한 것은 모친이었다. 부친은 날마다 동네 기원에 출근했다. 모친이 일손이 필요하면 어린 서봉수는 아버지를 찾아 기원으로 향해야 했다. 바둑이라는 것이 빨리 끝나는 것도 아니어서 서봉수는 기원 구석에서 기다려야 했고 젊은 원장은 오목부터 가르쳤다. 한번 빠지면 끝을 보는 성격인 탓에 서봉수의 기력은 고수인 원장도 놀랄 정도로 빠르게 늘었다.

    가난했던 서봉수에게 영등포 원장의 조언은 강력했다. 틈틈이 집안일을 도우며 영등포기원에 출몰하던 동네 아마추어 서봉수는 1970년 조용히 한국기원에 입단했다. 전국의 고수들이 해마다 모여 단 두 장인 입단 티겟을 놓고 겨루는 대회에서 무명의 서봉수가 등장하자 관철동은 호기심으로 소년을 바라봤다. 서봉수는 대방동에서 관철동으로 오가는 버스표 두 장과 짜장면 값만 가지고 날마다 출근했다. 이것으로 관철동에서 밥벌이를 마련하고 돌아오지 못하면 날마다 죽는다는 절박한 심정이었다. 서봉수에게 관철동은 먹고 살기 위한 전쟁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유학파에 맞선 된장 바둑

    스무 살의 서봉수가 명인전을 차지하며 화려하게 입성한 관철동은 춘추전국시대였다. 국수전을 6연패 하면서 천하를 제패하던 김인이 윤기현의 칼에 맞아 타이틀을 내주며 휘청거렸고, 같은 일본 기타니 유학파인 하찬석이 곧 돌아오면 판도가 바뀔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밑도 끝도 없이 관철동을 떠돌았다. 생계형 바둑 서봉수는 욕심을 크게 갖지 않기로 결정했다. 명인전 수성과 그 이후 다른 영지를 조금씩 늘리는 전략을 선택했다. 일보전진을 위한 이보후퇴였다.

    한국기원의 설립을 주도한 조남철은 대회 운영방식을 일본기원에서 상당 부분 그대로 이식했다. 역사와 전통으로 치면 최강인 일본기원의 방식을 차용하는 것이 특별히 문제가 될 것도 없었다. 게다가 그런 방식에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1956년 처음으로 생긴 한국프로바둑의 정식기전은 국수전이었다. 무적이었던 조남철은 1회부터 9연패를 했다. 조남철이 당대 최강이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도전자 결정전’ 방식은 우승자에게 구조적으로 유리했다. 타이틀 홀더는 예선도 본선도 참여하지 않고 도전자와만 대국했다. 5전 3승제, 타이틀 홀더는 1년에 3번만 이기면 다시 우승할 수 있는 방식이었다.

    서봉수는 1년에 3번만 이기면 집 한 채가 다시 생기는 명인전을 목숨을 걸고 사수하기로 결정했다. 다른 대회도 당연히 출전했지만 명인전 본선이 시작되면 도전자의 바둑만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위기는 빠르게 찾아왔다. 명인전 3연패를 앞두고 나타난 도전자는 조훈현이었다. 일본기원에 활동하다 병역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귀국한 조훈현과 막 입단한 서봉수는 연배도 비슷해 이내 친해졌다. 시간만 나면 짜장면 내기를 두었고 서봉수는 조훈현의 유학바둑에 맥을 추지 못했다. 그런데 불과 2년 만에 조훈현이 명인전을 차지하기 위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짜장면 내기는 언제든 질 수 있지만 집 한 채 내기는 다른 문제였다.

    1974년 제6기 명인전은 반상 위에 붉은 피들이 낭자하면서 서봉수의 승리로 끝났다. 서봉수는 다 이긴 바둑을 마무리하지 않고 독수를 거듭하며 조훈현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 놓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서봉수는 결승전에서 관례인 복기를 하지 않고 대국장을 떠났다. 짜장면 내기는 더 이상 벌어지지 않았고 어쩌다 서로 마주쳐도 둘은 인사도 건네지 않았다.

    조훈현과 서봉수는 한번 화해를 하기도 했으나 무슨 이유인지 다시 관계가 악화되었다.

    조훈현의 공세를 물리친 탓에 한숨을 돌린 건지 그해 서봉수는 제1기 국기전을 접수했다. 이듬해 명인전 도전자는 마지막 불꽃을 태우던 조남철이었다. 조남철의 불꽃을 손쉽게 잠재운 서봉수는 왕위전에 쳐들어가 김인에게 항서를 받아냈다. 명인전 5연패 저지를 위해 도전자로 나선 것은 윤기현이었다. 살기 위해 반상 위에 모든 것을 건 서봉수의 앞길을 막기 위해 나타난 장벽은 하나같이 일본 유학파들이었다. 윤기현마저 진압하고 5연패에 성공하자 서명인이라는 명예로운 호칭이 그의 이름을 대신했다. 명예와 부를 차지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제 암흑과 지옥이 시작됐다.

    천하통일을 와해하기 위한 진법, 흉내바둑

    부드러운 바람, 빠른 창. 부드러운 조훈현의 정석을 따라가면 중반이 시작되기도 전에 바둑의 형세는 불리해지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대항하면 쏟아지는 창들에 의해 대국자들은 절멸한다. 창을 다시 저민 조훈현이 왕위전의 도전자로 서봉수에게 나타났다. 조훈현의 창을 피하며 최종전까지 몰고 간 서봉수는 마지막 창을 피하지 못하고 왕위를 내주었다. 흔들리고 있는 서봉수에게 곧바로 조훈현은 명인전 도전자로 나타났다. 조훈현의 창은 더 매서웠다. 서봉수는 피를 토하며 5연패 중이던 명인 자리에서 물러났다. 조훈현의 창은 서봉수의 독수 그 이상이었다. 서봉수가 더 이상 다가서지 못할 정도로 뼈를 부러트렸다.

    상대는 서봉수였다. 관철동으로 오가는 버스표 두 장과 짜장면 한 그릇이 삶의 전부였던 서봉수는 좌절하지 않았다. 다른 기전에는 집중하지 않았다. 삶의 출발점이었던 명인전에 모든 것을 걸었다. 1979년 명인전 도전권을 획득한 서봉수는 조훈현의 창을 모두 막아내면서 명인전 탈환에 성공했다. 한 판만 내준 서봉수의 완승이었다. 이듬해인 1980년, 명인전 도전자는 다시 조훈현이었다. 불행하게도 이때의 명인전은 그 어느 때보다 모든 시선이 걸린 대회였다. 조훈현이 명인전을 제외하고 모든 기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명인전이 조훈현의 손에 넘어가면 한국기원 최초로 전관왕이 탄생하는 것이다. 대국은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서봉수는 마지막 5국까지 끌고갔지만 다시 명인을 내주어야만 했다. 조훈현이 역사적인 전관왕, 천하통일을 하는 것을 눈앞에서 지켜보며 절규했다.

    상대는 서봉수였다. 잡초, 된장바둑. 날마다 이겨야 산다는 생계철학이 전부인 서봉수는 5개월 후 조훈현에게 왕위전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리고 바둑 역사의 한 획을 그은 ‘흑번필승 흉내바둑’이 등장했다. 서봉수는 흑을 잡으면 첫수를 천원에 두었다. 그리고 조훈현이 다음 수를 두면 정반대에 똑같이 돌을 놓았다. 조훈현이 날일자로 걸치면 정반대에 똑같이 날일자로 걸쳤다. 조훈현이 어떻게 두어도 바둑은 완벽하게 똑같은 모양이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모양을 바꿀 수 있는 것은 흑뿐이었다. 서봉수는 흑을 잡으면 어김없이 흉내바둑을 두었다. 천하의 조훈현도 마음이 흔들렸고 그 순간 서봉수는 흉내바둑을 멈추고 허점을 찔렀다. 조훈현의 천하통일은 흉내바둑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졌다.

    흉내바둑 : 1929년 일본기원 명인전에서 첫 등장한 흉내바둑. 흑을 잡은 오청원이 기타니를 상대로 공식기전에서 처음으로 흉내바둑을 선보였다.

    서봉수가 흉내바둑을 들고 나온 것은 조훈현의 마음을 흔드는 전략이기도 했지만 초반에 약한 단점을 메우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천하통일을 일시적으로 저지했지만 모든 바둑을 흉내바둑으로 둘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조훈현이 파훼법을 찾아낼 것도 분명했다. <계속>

    필자소개
    인문사회과학 서점 공동대표이며 레디앙 기획위원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