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아프간 철군의 교훈
    [국방칼럼] 20년 탈레반-미국 전쟁
        2021년 09월 06일 10:5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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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드디어 막을 내렸다. 지난 8월30일 11시59분(현지시간) 미 육군 82공수사단의 마지막 병력을 태운 C-17수송기가 카불공항을 이륙함으로써 장장 20년에 걸친 미국과 탈레반과의 전쟁은 이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2001년 미국은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의 목표로 오사마 빈 라덴의 제거와 알 카에다의 와해를 위해 이들의 사상을 아프가니스탄에 구현한 탈레반정권을 무너뜨렸다. 2011년 미국은 해군특수전전단 ‘네이비 실’이 빈 라덴을 사살함으로써 아프간에서 철수할 명분을 확보했으나 어렵사리 확보한 중앙아시아의 군사교두보에 계속해서 미련을 두다가 축출했던 탈레반의 재집권이라는 불명예를 떠안았다.

    ‘탈레반(학생들)’은 일사불란하고 중앙집권화된 조직체라기보다는 과격한 이슬람근본주의를 공통분모로 하는 반군연합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 연합체에는 알 카에다 못지않게 과격한 ‘하카니 네트워크’가 있는 반면에 최고위급 지도자인 ‘압둘 가니 바라다르’처럼 대화와 협상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물도 있다. 그러나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실패한 이유를 이러한 탈레반세력의 확산을 저지하지 못한데서만 찾는 것은 허울뿐인 분석에 불과하다. 그보다는 아프간이 가진 특수하고 복잡한 상황에 대한 미국의 전반적인 대응력 부족을 먼저 지적해야 할 것이다.

    지도 : 2021년 CIA의 자료에 따르면 70%의 아프간인이 구사가능한 타지크족의 ‘다리어’와 50%의 아프간인이 구사가능한 파슈툰족의 ‘파슈토어’가 국가공용어이다. (Dennis Walter Coyle)

    파키스탄의 정치분석가인 ‘아브라 아메드’에 따르면 아프가니스탄의 특수성으로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은 ‘파슈툰’ 중심주의와 ‘비파슈툰’ 민족주의의 대립이다. 원래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말이 ‘파슈툰의 땅’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만큼 1747년 아프가니스탄에 ‘두라니 왕조’가 탄생한 이후 아프간 정치의 주도권은 파슈툰족이 행사해왔다. 1970년대 말 아프간의 집권당이었던 인민민주당 수뇌부가 소련이 요구했던 ‘인민전선전술’의 채택을 거부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아프간에서 파슈툰족의 권력 독점은 사회주의자들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1989년 소련군의 철수 이후 비로소 타지크, 하자라, 우즈벡 등 비파슈툰 민족들이 아프간 정부 수립에 참여하기 시작하였으나, 연정의 경험이 없는 아프간에서 파슈툰과 비파슈툰 사이의 권력투쟁은 내전으로 비화되었다. 파슈툰이 주도하는 아프간 정치질서의 재확립을 열망하는 정서는 파슈툰족을 기반으로 하는 탈레반의 성장으로 표출되었으며 비파슈툰족은 탈레반의 점령을 파슈툰족의 침략으로 간주하고 이에 저항했다.

    미국이 후원한 ‘하미드 카르자이’와 ‘아슈라프 가니’ 정권은 파슈툰 일부와 비파슈툰에 기반한 북부동맹이 참여한 소수파 정부였다는 점에서 다수파의 지지가 결여된 아프간 정권은 태생적으로 불안정할 수밖에 없는 정치지형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소수정권 안에서도 파슈툰과 비파슈툰 간의 반목과 분열은 일상화된 것이었다.

    두 번째 특성으로 파슈툰족 내부의 경쟁 구도를 들 수 있다. 파슈툰은 수 백개의 부족과 씨족으로 이루어진 느슨한 연합체로서 ‘두라니’와 ‘길자이’부족은 파슈툰을 대표하는 양대세력이다. 이 중에서 아프간의 역사를 주도한 것은 남부의 평야지대를 주무대로 하는 두라니부족이다. ‘샤’라고 불린 역대 왕들과 인민민주당의 지도자들 상당수가 두라니 파슈툰이었다.

    지도 : ‘듀라니’는 하늘색 지역, ‘길자이’는 연두색 세로지역이 근거지이다. (Dennis Walter Coyle)

    동부의 산악지대를 근거지로 하는 ‘길자이’부족은 ‘두라니’가 주도하는 정치질서를 뒷받침하는 보조적인 역할에 머물러 왔었다. 이러한 질서가 붕괴한 이후 ‘길자이’ 파슈툰은 탈레반을 통해 아프간의 권력을 장악하게 되는데 최초 지도자인 ‘무하마드 오마르’를 비롯한 탈레반 전사들이 바로 ‘길자이’부족 출신이다

    미국은 당연히 ‘두라니’와 ‘길자이’ 간의 잠재된 경쟁관계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했으나 당혹스럽게도 ‘두라니’와 ‘길자이’ 역시 단일부족이 아니라 여러 하위부족과 씨족으로 이루어진 연맹체(confederation)였다. ‘두라니’는 크게 ‘지락’과 ‘판즈파이’라는 두 하위부족(branch)으로 나뉜다. ‘두라니’의 주도권은 항상 ‘지락’이 행사해왔고 2014년까지 재임한 카르자이 전 대통령을 배출한 부족인 만큼 구 아프간정권을 지지하는 경향이 강했다. 반면에 경쟁관계인 ‘판즈파이’는 현 탈레반의 최고지도자인 ‘히바툴라 아쿤다자’의 출신 부족으로 탈레반의 중요한 지지기반이 되었다.

    하지만 ‘지락’과 ‘판즈파이’ 역시 여러 개의 씨족(Clan)으로 나누어지고 서로 경쟁한다는 점에서 아프간 정치의 복잡성을 엿볼 수 있다. 결국 ‘길자이 파슈툰’에서 파슈툰족 전체로 확산된 탈레반의 지지세를 미국과 구 아프간 정권은 막아내지 못하였다. 현지인이 중심이 된 탈레반이 부족, 씨족 간의 역학관계 이용에 좀 더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8월 12일 밤(현지시간) 듀라니 파슈툰의 중심지인 아프간 제2도시 칸다하르의 함락은 탈레반의 화려한 귀환을 예고하는 전주곡이었다.

    세 번째 특성은 중앙 집권과 지방 분권 간의 갈등이다. 1990년대 내전 이전의 아프간에서 구성원 간의 민족, 언어, 종교의 간극이 넓었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문제가 없었던 것은 중앙의 힘이 지역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산악지형이 많아 지역 간의 교류가 수월치 않은 지리적 특성도 한몫했다. 역대 아프간 왕조는 지방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각 지역에 재원을 공평하게 분배함으로써 정권의 안정을 확보했으나 직접적인 영향력은 수도 카불 주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지역의 토착세력도 중앙에서 별다른 간섭을 하지 않는 한 그 권위에 도전하지 않았다.

    사진 : 최근 국민일보에 등장했던 사진으로 ‘로렌스 브런’이 1972년 카불에서 찍었다. 유의해야 할 점은 당시 아프간 사회의 일상적인 모습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당시 여성의 히잡 착용을 둘러싼 일부 여성계와 이슬람세력 간의 갈등으로 정치적 혼란이 야기되었다.

    아프가니스탄은 여전히 신라 왕조의 화백회의와 같은 전근대적인 방식의 정치제도에 의존하고 있다. 개별 부족과 씨족, 공동체의 문제는 부족의 원로회의인 ‘지르가’의 결정에 따르는 전통을 고수한다. 탈레반정권의 축출 이후에는 아프간 전체 부족장회의인 ‘로야 지르가’를 개최하여 과도정부의 수반 선출과 내각 승인, 신헌법을 검토하였으며 지금도 헌법기관으로 격상된 ‘로야 지르가’를 통해 국가 중대사안을 결정한다.

    ‘파슈툰왈리’라는 전통적인 가치관이 근대적 사고체계에 우선한다. 특히 ‘명예’와 ‘복수’는 ‘파슈툰왈리’의 핵심가치이다. 개인, 가족, 씨족, 부족의 명예가 불의하고 부당한 행위에 의해 훼손되었을 경우 목숨과 재산보다 더 중요한 사람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복수(badal, revenge-killing)’를 해야만 한다. 그러나 복수는 보복을 낳고 보복은 또다른 피의 복수(vendetta)를 낳는 악순환이 되풀이된다는 점에서 이러한 가치관으로 인해 전쟁을 정당화하는 풍토가 조성되고 국민들은 국가보다는 부족에 대한 충성을 우선하게 된다.

    이렇듯 근대화된 국민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는 ‘위로부터의 개혁’을 지지하는 세력은 카불과 같은 대도시의 지식인들에 국한되어 있다보니 1920년대 터키의 ‘케말 아타튀르크체제’를 모델로 한 세속주의개혁, 1970년대 말 소련의 ‘스탈린체제’를 모델로 한 사회주의개혁과 21세기 미국을 모델로 한 서구식 민주주의 개혁은 모두 실패로 끝났다. 지난 20년간의 교육체계 근대화의 결과로 전체 인구의 10%가 되지 않았던 문자해독능력을 가진 인구 비중을 43%까지 끌어올렸으나 여전히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다.

    네 번째 특성은 인도와 파키스탄의 갈등이다. 1893년 체결된 아프가니스탄과 영국의 ‘듀랜드 라인 협정’으로 아프가니스탄과 영국령 인도의 국경선이 획정되었다. 이 협정으로 인해 파슈툰족의 거주지는 아프가니스탄과 영국령 인도로 분할된다. 인도의 독립 과정에서 영국령 인도의 파슈툰족 거주지는 파키스탄에 편입되었고 이에 반발한 아프가니스탄은 전통적으로 친인도 노선을 펼쳐왔다.

    지도 : 파슈툰 지역을 분단한 듀랜드 라인 (출처-내셔널지오그래픽)

    동파키스탄(방글라데시)의 독립으로 인도와의 경쟁에서 생존에 위협을 받던 파키스탄은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소련에 대항하는 냉전의 전초기지로 주목 받으면서 도약하게 된다. 이웅현 교수에 따르면 파키스탄은 미국의 지원으로 서남아시아에서 위치가 견고해지면서 비동맹국인 인도와의 대결에서 큰 힘을 얻게 되었다. 파키스탄은 무자헤딘에 대한 지원을 통해 아프가니스탄에 탈레반과 같은 ‘친파키스탄 세력’을 육성하여 아프간 정치에 개입했고 독립을 요구하는 ‘파키스탄 파슈툰’의 관심을 아프가니스탄으로 돌리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

    김찬완 교수에 따르면 ‘테러와의 전쟁’으로 탈레반정권이 축출되자 인도에게는 기회가 열렸고, 파키스탄은 안보 위협을 느꼈다. 아프가니스탄은 인도가 중앙아시아로 진출하는 데 꼭 거쳐야만 하는 관문이다. 미국 오바마 행정부는 이 지역의 경제재건을 위해 중앙아시아의 에너지자원을 아프가니스탄을 통해 인도와 파키스탄에 공급하는 ‘신실크로드전략’을 추진했다. 미국의 이해관계는 인도의 전략과 일치했다. 그러나 중국은 이를 미국이 주도하는 반중포위망 구축의 일환으로 보고 ‘일대일로’전략을 추진하여 특히 파키스탄과의 경제동맹에 힘을 쏟아왔다.

    지도 : TAPI 가스관 사업(출처 Stratfor) 이 사업이 성공할 경우 이란은 투르크메니스탄과 가스 수출을 경쟁해야 하며, 중국은 파키스탄, 인도와 가스 수입을 경쟁해야 한다. 러시아는 투르크메니스탄과 유럽의 가스 거래 중개에 타격을 입게 된다.

    파슈툰은 파키스탄 인구의 15%를 차지하고 있으며 2,600Km에 이르는 아프가니스탄과의 국경지대에 거주하고 있다. ‘파키스탄 탈레반 운동(TTP, Tehrik-i Taliban Pakistan)’과 비폭력 저항인 ‘파슈툰 타하푸즈 운동(PTM, Pashtun Tahafuz Movement)’의 활동에 파키스탄 정부는 늘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지아 울 하크 전 파키스탄 대통령의 표현을 빌린다면 파키스탄의 국익은 아프가니스탄이라는 주전자의 물이 넘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주전자를 계속해서 끓게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아프가니스탄의 민족과 부족 갈등, 그들과 연계한 외세, 봉건적인 사회체계라는 모순이 복합적으로 누적되어 나타난 것이 흔히들 아프가니스탄 정권 붕괴의 배경으로 주목하는 부패, 마약, 군벌의 문제이다. 이들 요소 중에서 아프가니스탄 마약의 역사를 보면 원죄는 미소 냉전에 그 원인이 있다. 소련군은 무자헤딘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농토와 관개시설을 파괴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미국 CIA는 식량생산이 어려워진 농민들이 재배한 양귀비를 무자헤딘이 밀매하는 것을 지원했다. 소련과의 냉전이 끝나자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의 마약산업을 그대로 방치했고 내전이 지속되면서 아프간 농민들이 생존을 위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분홍양귀비꽃 밖에 없었다.

    이제 미국의 아프간 철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째 국가가 전쟁을 독점하던 시대가 지나갔다는 점이다. 가장 큰 이유는 AK47소총, RPG-7발사기, PKM 7.62mm 기관총과 같이 저렴하고 다루기 쉬운 무기체계들로 인해 전쟁비용에 대한 부담이 경감하여 비국가조직들의 전쟁 수행 진입장벽이 낮아진 것이다. 이러한 조직들은 전쟁을 통해 상대를 굴복시켜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는 국가 간 전쟁의 기본원칙에서 자유롭다. 이들은 전쟁의 승패에 연연하지 않는다. 탈레반 같은 무력집단은 미국군이 스스로 물러날 때까지 세력을 유지, 확장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둘째 한국 정부의 한반도 위기 관리 능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패권국인 미국은 약소국과의 관계에서 대화와 협상보다는 전쟁을 선택할 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개전 시 대부분 승리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이런 특성을 감안한다면 한반도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다. 미국의 역대 정권이 북한과의 전쟁 가능성에 대한 검토를 진지하게 해왔다는 점에서 한국 정부의 외교 역량 강화가 요구된다. 미국과의 긴밀한 소통도 필요하지만 평화를 지키겠다는 결기도 대단히 귀중하다.

    셋째 데이비드 에델스틴 교수에 따르면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이후 ‘점령 딜레마(Occupation Dilemma)’에 빠졌다고 한다. ‘점령 딜레마’는 점령국이 강점한 국가에서 새로운 정부를 수립한 후에 철수할 것을 계획한 순간부터 직면하게 된다. 점령지에서 새로운 국가 건설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점령군의 장기주둔이 필요하지만 그렇게 되면 점령 당한 나라의 국민들의 저항에 부딪히게 되는 모순에 빠진다. 이것이 바로 ‘점령 딜레마’이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국가 건설에 돌입함과 함께 점령지역에 대한 군사작전인 ‘대반란작전(COIN, Counterinsurgency)’을 전개했다. 미 국방부는 이 작전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점령지 인구 1,000명 당 20~25명 가량의 군인이나 경찰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북한에 ‘급변사태’가 발생하여 한국군이 투입되었다는 가정도 해볼 수 있다. 북한의 인구를 2천5백만 명이라고 예상할 때 한국군 최소 50만 명 이상이 점령지의 군사작전이나 점령정책을 순화해서 부르는 이른바 ‘안정화작전’을 전개해야만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일정 부분의 병력은 현지 충원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예비군의 투입이 불가피하다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미소 냉전 시기 CIA의 아프간 작전책임자였던 찰스 코건은 미국군과 나토연합군의 탈레반과의 전쟁을 ‘창문(파키스탄 국경)을 열어놓고 에어컨(전쟁)을 가동하는 것’에 비유했다. 소련의 고르바초프 서기장 취임 직후 동독주둔사령관인 자이쩨프 장군도 무자헤딘의 지원통로인 파키스탄 및 이란의 아프간 접경지역을 폐쇄하지 않는 한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승리는 불가능하다고 보고서에서 주장했다고 한다. 이 지점에서 북한의 조선노동당을 탈레반에, 중국을 파키스탄에 대입해보면 한국군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북중 국경을 확보해서 중국이 조선노동당의 지원통로가 되는 것을 차단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 모두 이러한 작전에 실패했다는 점에서 한국군의 유사시 북중 국경 확보가 과연 실현 가능한 것인지 의구심이 든다.

    아프가니스탄은 러시아와 영국, 소련과 미국 사이의 ‘완충국(Buffer Zone)’의 지위였을 때 가장 안정적이었으나, 패권국들의 세력 팽창에 희생되면서 혼란의 혼란을 거듭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을 ‘반면교사’로 삼는다면 우리 사회 일각에서 거론하는 ‘북한 급변사태’ 시나리오라든지 ‘북한 정권 붕괴’는 환상에 불과할 뿐이다. 외세에 대한 경각심이 매우 강하고 조선노동당을 중심으로 결속되어 있는 북한의 특성상 위기 상황에서도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은 지난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북한을 통치하는 조선노동당의 실체를 인정하고 그들을 협상의 길로 이끌어 스스로 총을 내려놓게 하는 것이 매우 힘든 과제라 하더라도 남북관계의 현실적인 방안이라고 생각된다.

    필자소개
    국방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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