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지털은 좌우 넘어선 새로운 정치적 징후인가
    By
        2006년 12월 09일 09:45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디지로그’라는 말이 유행이다. 디지털 더하기 아날로그를 뜻하는 단어다. 한때는 디지털‘이다’라며 너도나도 디지털 전도사를 외치더니 벌써 그 바닥이 드러난 것일까. 이어령을 비롯한 많은 논자들이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공존을 주장하고 있으니 말이다.

    누가 나를 지배하는지 모르는 세상

    그러나 디지로그는, 한편으로는 디지털이란 것이 여전히 현실 한복판에 있는 주요 문제임을 보여 주는 말이기도 하다. 기존의 문제 설정으로는 문제가 있기에 다른 모색을 하는 것일 테니 말이다. 그런데 이런 논의에서도 디지털은 그다지 잘 이해한 뒤 사용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저 모호한 언어와 막연한 기대(또는 실망)로 휩싸여 있다.

    이어령의 말을 들어 보자. “기존 정치 풍토와는 달리 좌파, 우파로 가를 수 없는 새로운 정치의 징후가 일어나고 있다”며 아날로그 정치가 밟지 못한 전인미답의 영역에, 이도 저도 아닌 ‘제3의 길’에 디지털이 있음을 역설한다(실은 얼버무린다).

    저런 식으로 어중간하게 자리매김되는 것들은 대개 규정하기 어려운 속성을 갖고 있을 때가 많다. 규정하지 못한다는 건 아직 완전히 소화된 것이 아님을 뜻한다. 그것이 점차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 그것의 실체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기이한 상황.

    그러니, 그것이 왜 문제이고, 현재 그것이 야기한 문제 중 어떤 것이 중요하며, 또 어떤 논쟁이 펼쳐지고 있는지 살펴보기 이전에 디지털이란 녀석의 개념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디지털 문화: 튜링에서 네오까지』 찰리 기어 지음, 임산 옮김, 루비박스

    찰리 기어는 『디지털 문화』에서 앞에서 거론한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구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에 정확한 구분을 세우려 하는 것은 잘못이다. 디지털 문화에서 중요한 것의 대부분은 아날로그 현상에서도 그렇다. 대개 이 둘을 구별지으려는 사람들은 디지털이라는 것이 연속적 가치들보다 이진법의 가치들로 코드화된 것이라는 사실에 집착한다.”(p.283)

       
     

    0과 1로 이루어진 세계는 진짜 세계와는 다르다는 게 우리의 통념인데, 찰리 기어는 그것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특히 디지털 문화가 컴퓨터의 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컴퓨터가 이 디지털 문화의 산물이라는 점을, 그리고 모더니티와 산업자본주의를 특징짓는 모든 추상화와 조직화의 과정을 지시하는 데 ‘디지털’ 개념을 사용해야 한다.”(p.282) 저자의 부연 설명이다.

    그의 견해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이렇다. “인간의 거의 모든 문화는 디지털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p.16) 디지털을 소재나 주제로 삼는 일반적인 이야기들의 골자와는 다른 이색적인 주장이다.

    “디지털 문화는 특정 형식을 지닌, 역사적으로 불확정적인 현상이다. 그것의 다양한 구성요소들은 처음에는 근대 자본주의의 절박함에 대한 반응으로서, 그 후 20세기 중반 전쟁의 요구로 인해 함께 대두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그것의 촉매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로 인해 근대적인 일렉트로닉 디지털 이진법 컴퓨터가 등장했으며, 냉전의 상황 속에서 컴퓨터는 광범위하게 인지된 형식으로 발전했다. 테크놀로지는 현대 디지털 문화의 발전에 기여하는 수많은 원천들 중 하나이다.”(p.16~17)

    찰리 기어는 위에서 보듯 디지털을 기술적 개념으로 다루지 않고 문화적 개념으로 다룬다. 그에게 디지털은 특정한 시대 문화의 양상이 아니라 18세기 후반 이후를 아우르는 문화적 속성으로 보인다(저자는 19세기 후반에 발명된 타자기와 20세기 초 튜링의 기획에서 그 근원을 찾는다. 보다 거슬러 올라가 18세기 이후 자본주의의 특성이 표준화·추상화였다고 말하며, 바로 이 점에서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가상의 기호로 처리하는 디지털 문화와 닮아 있다고 주장한다).

    디지털 기술은 원인이 아니라 디지털 문화의 한 결과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저자 스스로 밝히듯 “기계는 기술적이기 이전에 항상 사회적이다. 사용되는 기술적 요소들을 선택하거나 배치하는 사회적 기계가 항상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들뢰즈의 생각을 빌린 것이기도 하다. 기술을 기술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로 확장하여 바라보는 저자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찰리 기어의 색다른 주장은 디지털에 대한 기존의 통념을 무너뜨리고 새롭게 이해하도록 돕는다. 특히 오늘날은 디지털 문명이라고 거론될 만큼 새로운 역사 시기로 불리는 것이 일반적인데, 저자에 따르면 디지털은 자본주의의 산물이면서 자본주의의 성장에 기여한 도구가 된다.

    따라서 자본주의 이후 인간과 세계를 압축적으로 요악하고 있는 것이 디지털과 컴퓨터라고 하는 책의 논리를 따라 가다 보면, 디지털 문제를 다루는 각종 미래학 서적과 보고서들이 제대로 헛다리 짚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지기도 한다.

    『동시대 문화의 이해를 위한 20세기 문화 지형도』 코디 최 지음, 안그라픽스

    코디 최가 쓴 『동시대 문화의 이해를 위한 20세기 문화 지형도』는 디지털 관련서라고 말하기는 곤란하다. 저자 말마따나 “동시대 문화contemporary culture라고 불리는 문화 현상과 문화 이론을 이해하기 위한 밑그림”(p.7)을 그린 책이다.

       
     

    저자의 관점이 무엇인지는 거의 살펴볼 수 없는 평면적인 서술이 지배적이다. ‘사이버네틱스’ ‘사이버리아’ 등의 개념과 함께 책 후반부에 디지털 문제가 잠깐이나마 언급되고 있는데, 폴 비릴리오의 이론을 다룬 장이 그것이다. 저자가 정리한 폴 비릴리오의 생각은 이렇다.

    “정보 통신과 네트워크의 혁명으로 시작된 새로운 시대는 과거 ‘역사의 소멸 또는 종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네트워크의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통해 타자와의 거리를 심리적으로 좁혀 주며 과거에 갖고 있던 지리적 위치의 개념을 망각하게 함으로써 결국 ‘지리적 위치의 소멸’을 가져온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네트워크 혁명을 통한 지리적 위치의 소멸은 국가 간의 경계마저도 무의미한 것으로 전락시키며, 지리적 영토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던 통치권에 의해 형성되었던 국가 권력, 즉 전통적 근대 국가의 권력에 도전하게 된다고 전망한다.”(p.229)

    기존의 국가 권력과 그것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이 횡단하는 네트워크의 대결. 다만 비릴리오는 이렇게 경고한다. “네트워크의 혁명으로 생겨난 사이버 공동체와 같은 집단을 통해 사적인 정보가 공적인 대상으로 변질될 수 있으며, 이는 결국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경계를 소멸시키게 만든다. 이러한 정보 사회의 현실 속에서 과학과 문화는 엄청난 속도로 가속화되어 사이버 공간과 같은 새로운 문화 공간을 확장해 가지만, 동시에 사이버 공간에 정보의 공유라는 관점이 인간에 대한 감시라는 현상으로 전락될 수 있으며, 이에 따른 통제도 고도화되며 증가할 수밖에 없다.”(〃) 비릴리오는 사이버 세계의 명암을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코디 최가 소개한 비릴리오의 주장 중 ‘지리적 위치의 소멸로 인한 국가 권력에 대한 네트워크의 도전’이라는 대목을 좀 더 음미해 볼 필요가 있겠다. 국가 권력에 대한 네트워크의 도전은 과연 성공하고 있는지, 또 비릴리오가 말하는 국가 권력과 네트워크의 관계는 여전한 것인지 의문을 갖게 된다.

    『인터넷 권력전쟁』 잭 골드스미스, 팀 우 지음, 송연석 옮김, 뉴런

    한편 ‘디지털’ ‘네트워크’ ‘인터넷’ 등의 개념 또한 가치중립적이지 않고 정치적일 것이라 추측해 볼 수 있는데, 최근에 간행된 잭 골드스미스와 팀 우의 『인터넷 권력전쟁』에 대한 두 언론의 서로 다른 평가가 이에 대한 좋은 사례로 보인다.

       
     

    각기 보수와 진보를 대표하고 있다는 『조선일보』와 『한겨레』의 기사를 가져 왔다. 먼저 『조선일보』의 기사(10월 28일자). “결국 인터넷의 성공은 국가의 안정성에 의존하는 것이다. …… 또한 ‘국경 있는 인터넷’은 다양한 가치체계와 언어·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공존할 수 있게 해 준다. …… 무정부주의적 사이버 자유주의자들과 정부·기업들이 엎치락뒤치락 펼치는 역동적이고 치열한 ‘전쟁’이 인상적이다.”

    이제 『한겨레』의 기사(10월 27일자). “흥미로운 점은 저자들이 영토를 기반으로 한 정부나 국가의 인터넷 통제를 결코 부정적으로만 바라보고 있진 않다는 것이다. 그들은 정부의 인터넷 통제는 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폭발적으로 사용자가 늘어나고 있는 인터넷의 존립 기반이자 발전을 위해 치러야 할 대가, 일종의 공생 관계의 산물로 파악한다.

    … 90년대 말까지는 국가가 국경을 넘나드는 인터넷 정보 유통을 통제할 수 없고 저작권 등을 둘러싼 분쟁이나 범죄에 대해 일국의 법 집행이 불가능하다고 봤으나 지난 10여 년간 국가와 정부는 그 한계를 돌파했다.”

    『한겨레』는 ‘공생 관계의 산물로 파악한다’는 표현을 쓰는 등 책의 내용을 차분하게 설명하고 있는 편이다. 반면 『조선일보』의 기사는 책의 내용의 특정 부분을 확대해 인터넷과의 대결에서 국가가 승리했다고 잘라 말한다.

    어느 쪽이 책의 내용을 과장하고 있느냐는 차치하고, 이 책을 대하는 양 신문의 상반된 태도는 네트워크 또한 정치적인 산물일 수밖에 없음을 시사해 준다(물론 현실에서의 보수/진보가 인터넷에도 고스란히 해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조선일보』의 태도는, 근래 들어 이 신문이 지속적으로 ‘포털 사이트의 폐해’를 주장해 온 것을 염두에 둘 때 좀 더 명확해진다(일례로 그 이름 자체로 상징적이고도 이율배반의 한 사례로 꼽을 만한 변희재는 이 신문 칼럼에서 “전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포털의 언론 권력 관련 기사는 포털에서 좀처럼 찾아볼 수가 없다”는 불평을 늘어놓았다. 물론 포털에 문제가 없는 건 아니겠지만, 자신의 주장이 펼쳐지고 있는 지면의 이름은 그새 까먹은 것일까).

    『인터넷 권력전쟁』은 두 신문 공히 말하듯, ‘새로운 세상을 열어젖힐 힘’으로 각광받아 온 인터넷에 대한 기대와 가정이 대부분 잘못되었다고 지적한다.

    “90년대 인터넷이 민족국가의 통치에 어떻게 도전장을 내밀었는지, 이 국경 없는 거대한 매체의 통제권을 쥐기 위해 각국 정부는 어떤 투쟁을 벌였는지, 그리고 지역적 구분을 영원히 없애버릴 사이버 자치 커뮤니티 건설의 꿈은 어떻게 무너져 내렸는지 그 역사를 담고 있다.”(p.5)

    결국 ‘국경 있는 인터넷’이 인터넷에 대한 허황된 믿음을 사라지게 했다고 저자들은 보고 있다. 그리고 그 장점들 또한 많다고 한다. “국경 있는 인터넷은 서로 다른 지역 사람들 간에 실제로 존재하는 이런 중요한 차이점들을 수용하고 있으며 그 결과 인터넷은 더 효과적이고 유용한 통신 수단이 되어가고 있다.”(p.6) 한편 “국경 있는 인터넷에는 안 좋은 점도 있다. 정부가 통제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그 정부가 가진 단점이 인터넷에도 고스란히 반영되기 때문”이라며 그것이 가진 문제점 또한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두 가지다. 하나는 저자들이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드는 사례가 대부분 ‘야후’ ‘이베이’ 등 인터넷 자본이라는 점이다. 네티즌들의 자유로운 정보 공유조차 ‘파일 공유’ 정도로 국한한다. 저자들의 주장대로 ‘국경 있는 인터넷’이 드러내는 다양한 문화와 차이가 세계가 분명 있다면, 한국에서 일어났던 사례들은 저자들의 주장을 반박할 만한 사례가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예를 들면 ‘황우석 사태’ 당시 실험의 거짓을 증명했던 익명의 인터넷 과학자들).

    또 하나의 문제는 『조선일보』도 그렇지만 『한겨레』도 이 책의 주요한 논의를 놓치고 있다는 점이다. 다음의 문장을 보자. “세계화를 열광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이 이런 부분을 간과하기 쉬운 이유는 이들이 대개 괴상한 기술운명론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즉 인터넷을 아무도 막지 못하는 커다란 힘, 낡고 시대에 뒤떨어진 인간 조직의 핵심 요소들을 짓뭉개버릴 무서운 힘으로 보는 것이다.”(p.305)

    다시 말해서 저자들이 언급하고 있는 ‘국경 있는 인터넷’의 반대항은 세계화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인터넷이다. 단지 위의 문장뿐만 아니라 이 책에서는 지속적으로 ‘세계화’의 문제를 거론하고 있다. 이런 논의가 각 언론사의 입장에 딱 들어맞지 않아서 언급을 피한 것인지, 아니면 책을 보지 않고 보도자료를 바탕으로 기사를 쓴 것인지는 평가 유보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