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닉슨과 FBI가 입국을 막은 '불온한 좌파'
        2006년 12월 09일 01:3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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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을 위한 노래를 만들고 싶습니다.”
    – 존 레논 (1971년 타리크 알리, 로빈 블랙번과의 인터뷰)

       
    "Some Time in New York City"
    John Lennon & Yoko Ono
    1972년

    Disc 1
    1. Woman Is the Nigger of the World
    2. Sisters, O Sisters
    3. Attica State
    4. Born in a Prison
    5. New York City
    6. Sunday Bloody Sunday
    7. The Luck of the Irish
    8. John Sinclair
    9. Angela
    10. We’re All Water

    Disc 2 – Live Jam
    1. Cold Turkey
    2. Don’t Worry Kyoko
    3. Well (Baby Please Don’t Go)
    4. Jamrag
    5. Scumbag
    6. Au

    12월 8일은 존 레논의 기일이다. 그가 뉴욕 자신의 아파트 앞에서 살해당한 것이 1980년이니 올해로 26주년이 된다. 추모를 겸해 그의 활동 기간 중 발표한 작품 중 가장 급진적인 앨범인 1972년작 ‘언젠가 뉴욕에서Some Time in New York City’를 소개한다.

    우선 이 음반은 존 레논과 오노 요코 부부의 ‘합동작품’이다. 둘은 1968년과 69년에 모두 3장의 실험음악 앨범을 공동명의로 발표했다. 그러나 이 음반들에 담긴 음악은 전위적인 음악가들조차도 당혹스러워할 만한 것들이었다.

    더 많은 대중들이 듣기를 기대하고 만든 음악은 처음부터 아니었던 셈이다. 이후 이들 부부는 서로의 녹음 과정에 함께 했지만 자기가 만든 노래는 자기 이름의 앨범에 모아서 발표했다.

    ‘언젠가 뉴욕에서’는 존 레논과 오노 요코가 함께 작곡한, 혹은 서로의 작품을 하나의 레코드에 담은 최초의 작품집이다. 녹음에는 뉴욕의 언더그라운드 밴드인 ‘엘레판트 메모리 밴드’가 동원됐다.

    또한 이 앨범은 이들 부부가 1971년 9월 급작스럽게 영국으로부터 뉴욕으로 거주지를 이전한 후 제작한 첫 번째 작품이다. 존 레논은 살 곳조차 정하지 않은 채 도망치듯이 영국을 떠났다.

    주된 이유는 이들 부부의 재혼 후 일본인인 오노 요코에게 쏟아진 영국인들의 인종주의적인 편견이었다. 여기에 군주제가 여전히 살아있는 계급사회 영국의 숨 막히는 답답함이 존 레논으로 하여금 ‘자유로운 땅’을 찾는 보헤미안처럼 떠나게 만들었다.

    행선지가 뉴욕이었던 이유는 재혼하기 전 오노 요코가 예술활동을 벌이던 무대이기도 하고, 존 레논의 표현을 빌리면 ‘우리시대의 로마’가 바로 뉴욕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로마는 이방인들을 받아들일 의사가 전혀 없었다. 존 레논과 오노 요코가 단순한 체류가 아니라 영주권을 획득하기 위해 미국에 왔다는 사실을 확인한 FBI와 닉슨행정부는 이 ‘불온한 좌익인사’가 미국에 둥지를 트는 것을 결코 용인 할 수 없었다.

    이민국은 60년대 레논의 약물관련 체포혐의를 들어 영주권은 고사하고 미국으로부터 추방할 것을 결정했다. 이때부터 시작한 법정투쟁은 1975년 레논 부부의 승리로 끝났다. 추방명령을 둘러싼 4년간의 투쟁은 얼마 전 ‘미국정부 대 존 레논The U.S. Versus John Lennon’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로 제작돼 개봉되기도 했다.

    미국 정부가 존 레논을 국외로 내쫓으려고 기를 쓴 이유는 물론 그의 약물관련 전과 때문이 아니다. 비틀즈의 멤버라는 그의 대중적 영향력을 베트남 반전운동이나 좌익활동에 결합시킬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존 레논이 공항에 내린 날 부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 FBI는 그가 미국에 와서 새로 사귄 친구들이 애비 호프만이나 제리 루빈 같은 신좌익운동의 지도자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마당에 레논 부부가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내놓은 앨범이 당시까지의 대중음악사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선동가요집이니 미국정부가 얼마나 경악했을지 짐작이 간다.

       

    ▲ 지난 가을 공개된 다큐멘터리 영화
    "미국정부 대 존 레논"의 포스터.

     

    앨범의 첫 곡은 성차별주의를 다룬 ‘여성은 세상의 깜둥이Woman Is the Nigger of the World’이다. 앨범에서 유일하게 싱글로도 발매된 곡이지만 제목의 ‘깜둥이’라는 단어가 논란이 되어 많은 방송국에서 거부당했다.

    존 레논은 흑인은 몇몇 나라에서만 인종차별을 받지만 여성은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차별당함을 지적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노랫말 자체가 맘에 안 드는 방송국 입장에서는 좋은 핑계거리였던 셈이다.

    “여성은 노예 중의 노예다, 그녀가 노예이기를 거부하면 우리(남성)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질책한다, 만약 그녀가 현실을 직시하면 남자가 되려고 애쓴다고 비난한다.” 발표된 지 30년이 지났지만 노래가 묘사하고 있는 광경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이어지는 곡도 여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모든 자매들에게Sisters, O Sisters’는 오노 요코가 만든 페미니즘 행동주의의 찬가다. 70년대 초반 오노 요코는 급진적인 페미니즘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었다.

    그가 ‘언젠가 뉴욕에서’에 바로 이어 발표한 솔로 앨범 ‘아마도 끝이 없는 우주Approximately Infinite Universe’는 지금도 페미니즘 락의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아티카 주립교도소Attica State’는 1971년 발생한 아티카 교도소 폭동사건의 희생자들을 돕기 위한 공연에서 처음 선보였다. 아티카는 뉴욕의 주립교도소로 알카트라즈 이후 나쁜 의미에서 가장 유명한 수용시설이었다.

    폭동 당시 이미 흑인과 남미계 수형자의 비율이 60%를 넘어갔고 인종차별과 인권 유린으로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결국 작은 사건이 불씨가 돼 교도소가 수형자들에 의해 점령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공화당 소속의 넬슨 록펠러 주지사는 협상보다 경찰 투입을 선택했고 진압 과정에서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언론은 “하루 동안의 무력충돌로는 남북전쟁 이후 최대, 최악의 규모”라고 평했다.

    사건 이후 “아티카”라는 구호는 경찰의 폭력성을 상징하게 됐다. 존 레논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바로 ‘아티카 교도소’라고 노래하고 있다. 무자비한 폭력이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 상황을 해결하는 방법은 “당신이 운동에 동참해 인권의 기준을 높이는 것” 뿐이라고 역설한다.

    레논의 시각을 이어받아 오노 요코 역시 “우리는 감옥에서 태어나 학교라는 이름의 감옥에 보내지고 결국 감옥 속에서 살다가 죽는다”고 주장한다. (‘감옥에서 태어나Born in a Prison’) 이 앨범은 같은 주제를 놓고 남편과 아내가 하나씩 만든 노래가 계속 짝을 이루고 있다.

    다음 주제는 아일랜드 해방투쟁이다. ‘피의 일요일Sunday Bloody Sunday’은 1972년 1월 30일, 일요일, 주일미사를 마치고 시민권 행진을 벌이는 가톨릭계 주민들을 영국 공수부대가 무참하게 학살한 사건을 다루고 있다. 아일랜드인들 뿐만 아니라 영국인들에게 충격을 준 이 사건에 격분한 존은 단숨에 영국제국주의자들에 대한 분노를 담은 곡을 완성했다.

    “너희 앵글로색슨 돼지들이 북아일랜드를 식민지로 만들고 피 묻은 유니온 잭을 자랑스럽게 흔들지만 (…) 아일랜드를 아일랜드인에게! 영국놈들은 바다로 쓸어버리자!”

    아일랜드 해방투쟁과 아일랜드공화군IRA에 대한 그의 연대의식은 다음 노래 ‘아일랜드인의 운명The Luck of the Irish’에서도 이어진다. 이 앨범에서 가장 아름다운 발라드이지만 가사는 슬프다 못해 처절한 느낌마저 준다. “당신이 아일랜드인의 운명을 타고 났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여길 겁니다. 다음 생에는 영국인으로 태어나고 싶어 하겠지요. (…) 세상에 영국인 같은 사람들이 또 있을까요. 주님의 이름으로 학살을 저지르고, IRA와 아일랜드 꼬마들에게 죄를 덮어씌웁니다.”

    영국 정보국은 존 레논이 IRA에 자금을 제공했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런 ‘추정’을 미국의 정보국에 제공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를 입증할 증거는 발견된 것이 없다. 설혹 그가 아일랜드의 무장투쟁에 연대선언 이상의 물질적 지원을 했다 하더라도 영국 정부는 뭐라 할 자격이 없다.

    1972년 ‘피의 일요일’ 학살이 얼마나 끔찍했는지는 정치문제에 초연한 폴 매카트니 조차도 ‘아일랜드를 아일랜드인에게 돌려주라Give Ireland Back to the Irish’라는 싱글을 발표하게 만들 정도였다. 매카트니의 노래는 발표 즉시 BBC로부터 방송금지 당했다.

       
    ▲ ‘언젠가 뉴욕에서’ 앨범의 커버는 뉴욕타임즈 지면을 패러디하고 있다. 노래 제목은 기사제목으로 기사 내용은 노래가사로 바뀌어 있다. 사실 앨범의 제목도 신문의 이름을 뒤집은 것이다.
     

    아일랜드에 이은 주제는 미국의 양심수들이다. 존 싱클레어는 좌익예술가이자 ‘백표범당’의 활동가였다. 백표범당은 흑인급진주의 조직인 ‘흑표범당’을 지원-연대하기 위해 결성된 신좌익 단체다. 경찰은 마리화나 소지죄로 그를 투옥시켰다.

    마리화나 소지는 신좌익 활동가들을 체포할 때 경찰이 자주 수용한 수법이었다. ‘존 싱클레어John Sinclair’는 존 레논이 미국에 와서 처음 작곡한 곡들 중 하나다. 원래는 71년 겨울에 열린 싱클레어 석방촉구 공연을 위해 만든 것으로, 레논 부부가 앨범 녹음을 시작할 때는 이미 석방됐지만 레논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어 앨범에 포함시켰다고 한다.

    오노 요코는 흑인 페미니스트이며 미국공산당원인 안젤라 데이비스의 석방을 요구하는 노래를 작곡했다. 흑표범당 관련 정치범의 탈옥사건과 관련돼 FBI에 의해 전국에 지명수배 된  데이비스는 체포 후 18개월 동안 계속된 공판에서 결국 무죄로 풀려났다.

    안젤라 데이비스는 캘리포니아주립대 교수로 지금도 진보정당운동과 인권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레논 부부가 ‘안젤라Angela’를 쓰고 녹음할 무렵 영국에서는 롤링 스톤즈가 안젤라 데이비스를 지지하기 위한 노래 ‘사랑스런 흑인 천사Sweet Black Angel’를 발표하기도 했다.

    남은 두곡 중 ‘뉴욕시티New York City’는 준비도 없이 갑작스럽게 뉴욕에 도착한 후 겪은 일들을 경쾌한 리듬에 실은 노래고, ‘우리는 모두 물방울We’re All Water’은 재치있는 격언을 만들어내는 오노 요코의 재능이 가사에 유감없이 발휘된 곡이다.

    특히 ‘우리는 모두 물방울’은 모든 차이는 의지로 극복할 수 있다는 오노 요코 특유의 이상주의를 엿볼 수 있다. 레논에 비해 사상적으로 철저하지 못함(?)을 지적할 수도 있겠지만 “마오 주석이나 닉슨 대통령이나 벌거벗겨 놓으면 별로 다를 것도 없다”거나 “백악관이나 인민궁전이나 창문개수만 놓고 보면 별 차이도 없다”는 노랫말은 나름대로의 진실을 담고 있다.

    라이브 녹음을 담고 있는 두 번째 디스크는 일종의 보너스다. ‘금단증상Cold Turkey’과 ‘교쿄야 걱정마렴Don’t Worry Kyoko’ 두곡은 1969년 12월 유니세프 주최의 자선공연에서 녹음된 것이고 나머지 4곡은 1971년 6월 뉴욕에서 프랭크 자파와 함께 가진 합동공연에서 녹음한 것들이다. 특히 69년 유니세프 공연은 조지 해리슨도 함께 했는데 지금은 고인이 된 두 명의 비틀즈 멤버가 함께 공연한 마지막 기록이다.

       
    ▲ 앨범이 처음 발매될 때 보너스로 들어간 우편엽서. 자유의 여신상이 쭉 뻗고 있는 오른손을 잘 보라.

    ‘언제가 뉴욕에서’는 사실 존 레논, 오노 요코 부부가 ‘작정’하고 만든 앨범이었다. 미국 정부가 우려했던 바대로 이들은 자신들의 대중적 영향력을 사람들을 계몽하고 행동하게 만드는데 쓰려고 했다.

    그러나 평단의 오른쪽 펀치야 예상했지만 정작 대중들의 왼쪽 펀치는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전작인 ‘이매진Imagine’ 앨범이 워낙 큰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넘치던 레논은 팬들의 외면에 충격을 받았다.

    앨범 전반에 흘러넘치는 정치적 주장과 구호들도 사람들에게 소화 불량을 일으켰지만 무엇보다도 생경한 음악 형식이 문제였다. 오노 요코는 그의 음악활동 중 최대한 대중적인 작곡과 노래를 한다고 했지만 일반대중들의 귀에는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전위예술로 인식됐다.

    존 레논의 작품들도 마찬가지로 이 앨범에 실린 그의 작품들은 이전에 발표한 것들과 비교할 때 ‘의식의 과잉, 미학의 빈곤’이라는 혐의를 벗어나기 어렵다.

    존 레논은 1971년 혁명을 위한 노래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혁명을 노래할 수는 있지만, 노래로 혁명을 할 수는 없다는 사실은 이듬해가 되어서야 깨달았다.

    * 2005년에 나온 개정판CD는 프랭크 자파와의 라이브 연주 중 3곡을 삭제하고 1장짜리 CD로 재구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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