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환경운동가, 츠즈쿠 켄의 특별한 이력
    By
        2006년 12월 08일 09:04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2006년 12월7일 노령의 일본인 환경운동가 한 사람이 한국을 방문하여 에너지전환의 회원들을 대상으로 일본의 시민태양광발전운동을 소개하는 작은 강연회를 열었다.

    그는 전형적인 일본 노인의 아담한 풍모를 가진 츠즈쿠 켄(都筑 建, 65)이다. 츠즈쿠 켄씨는 현재 PV-Net(Photovoltaic Owner Network)의 사무국장이자, <일본재생가능에너지촉진포럼 : REPP>의 이사장이다. 그가 특별히 나의 관심을 끈 이유는 그 스스로 강연 서두에 밝힌 특별한 이력때문이다.

    몽골에서 태어나 피폭 도시 나가사키에서 살다

    츠즈쿠 켄씨는 1942년 중국 내 몽골지역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이듬해인 1943년 나가사키로 부모를 따라 이주했다. 1945년 바로 그곳에 미국이 원폭을 투하하였다. 그는 자신이 나가사키 출신이라는 점이 현재 환경운동을 하게된 원점(原点)이라고 밝혔다.

    츠즈쿠 켄씨는 1960년 와세다 대학에 입학해서 전기를 전공했다. 대학에서 연극부 활동을 했던 그는 연기만 잘했다면 아마도 지금과 같은 환경운동가가 못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는 다행히 연기를 못했다고 한다.

    그가 대학에 입학했던 1960년은 전학련(全學連, 전국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이 주도한 이른바 ‘안보반대투쟁’으로 일본 정국이 소란스러웠던 때이다. ‘안보반대투쟁’은 불평등한 ‘미일안보조약’을 반대하여 일어났다.

    전학련의 분열 이후 전공투(全學共鬪會議)를 중심으로 재결집한 학생운동권은1964년은 동경대, 와세다대, 교토오대, 니혼대를 비롯한 전국 대학에서 학내분쟁을 시작하였고, 이러한 분쟁은 미일안보재개정 운동으로 확대되어 나갔다.

    츠즈쿠 켄씨는 1960년 대 급진적인 일본 학생운동의 대명사가 된 전학련, 전공투의 주요 거점이었던 와세대대학에서 대학시절을 보낸 것이다. 그는 직접적으로 밝히지 않았지만 구지 자신의 대학시절 안보반대투쟁을 이야기하므로 자신이 전공투세대임을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급진파 학생운동가에서 대기업 엔지니어로

    대학을 졸업하고 츠즈쿠 켄은 1968년 일본 유수의 전자회사였던 도시바에 입사하여 비디오와 컴퓨터 부문 엔지니어로 일하기 시작했다. 1971년부터 그는 도시바에서 노조활동을 시작했다. 1974년 그는 노동자생활운동으로서 이른바 ‘비누운동(石鹸運動)’을 벌이기도 했다.

    그가 노조활동을 하던 당시 일본은 두 차례의 석유파동을 겪게된다. 1973년 1차, 1979년 2차 석유파동을 겪으면서 일본은 본격적으로 원자력발전을 확대하기 시작했고, 또 한편으로는 1974년에 재생가능 에너지를 기존 전력선과 연계하는 계통연계 구상이 제안되기도 했다. 츠즈쿠 켄씨는 노동운동을 하면서 한편으로 1979년부터 반핵운동을 전개했다.

    츠즈쿠 켄씨가 일하던 도시바는 강력한 노조의 활동으로 폐업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츠즈쿠 켄을 비롯한 노조활동가들은 노동자 자주관리를 시작했다. 노조는 1982년부터 1990년까지 약 8년간 노동자 자주관리로 공장을 운영했는데 그때 당시 최첨단의 제품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고 한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사고가 발생하자 당시 노동자 자주관리를 하고 있던 도시바는 츠즈쿠 켄씨가 주도가 되어 ‘방사능측정기’를 만들었다. 츠즈쿠 켄씨는 이 측정기를 일본 전역 핵발전소 지역의 활동가들에게 8만엔에 배포하고 이들을 네트워크로 묶었다.

    노동자 자주관리로 공장 운영

    이때 만들어진 조직이 ‘R-DAN’이다. 그는 ‘R-DAN’을 통해 수집된 객관적인 데이터를 무기로 반핵운동을 할 수 있었다. 이 당시 그는 체르노빌뿐만 아니라 일본 전역의 원전을 조사했다.

    도시바에서 8년간의 노동자 자주관리를 마감한 이듬해인 1993년 츠즈쿠 켄씨는 노동자 생산공동체인 와카즈 에코텍(Worker’s Ecotech)이란 회사를 만들고 대표로 취임했다. 와카즈에코텍은 고용과 피고용 구분이 없는 노동자 생산공동체로 기업 구성원들이 자유롭게 제품생산 제안을 할 수 있었고 구성원을 납득할 수 있다면 그 제품을 생산하는 체제를 갖고 있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제품을 그들은 ‘납득제품’ 또는 ‘자주상품’이라고 불렀다. 이때 츠즈쿠 켄씨가 제안하여 만든 자주상품 중에 태양광 측정기가 있었고 이것을 계기로 태양광 설비를 개발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스스로 만든 태양광 시설을 일본 최초로 주택지붕에 설치했고, 일본 전역에 걸쳐 400여 곳에 태양광 발전 시설을 설치했다.

    츠즈쿠 켄씨가 와카즈 에코텍을 만들던 1993년을 전후로, 1992년에 리우 환경회의가 개최되었고 일본에서는 주택에 설치된 태양광의 잉여전기를 판매할 수 있는 여유전력 판매제가 도입되었다. 1993년 일본정부는 대안에너지 개발을 위한 선샤인계획이 수립되었다.

    1994년에는 주택용 태양광주택에 대한 보조제도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다시 츠즈크 켄은 와카즈 에코텍과 별도로 1994년에 자연에너지사업 협동조합인 REXTA를 설립하여 대표가 되었다. 

    대안에너지 활동가로 변신 

    1997년 쿄토기후협약으로 유명한 교토회의가 개최되었는데 츠즈크 켄을 포함한 일본의 시민운동 세력은 리우회의와 교토회의에 대응하기 위해 ‘시민포럼2.1’을 구성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이때 동경전력이 일련의 획기적인 제안을 한다. 매년 1억엔씩 3년간 에너지 분야 시민운동을 지원한다는 제안이었다. 원자력발전을 강력하게 추진하던 동경전력이 자연에너지를 주장해온 시민운동을 지원한다는 제안은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긴장과 협력을 함께하는 ‘대립적 협력’이란 개념하에 시민단체들은 이를 받아들였고, 동경전력의 지원하에 ‘녹색가격제에 대한 연구조사’와 시민단체 주도의 ‘태양광주택 보급사업’을 전개했다. 단, 지원은 받되 사업은 철저히 시민단체가 자주적으로 전개한다는 합의하에 진행되었다.

    이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시민포럼이 1997년에 만든 단체가 <일본재생가능에너지촉진포럼 : REPP>이다. 츠즈쿠 켄씨는 현재 이 단체의 비상임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REPP의 활동은 현재 일본이 30만 주택에 태양광을 보급하게 되는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주택에 태양광을 설치한 사람들이 개별화되어 있는 상태를 타개하고 태양광 발전을 설치한 시민들을 조직하기 위해 2003년 츠즈쿠 켄이 주도하여 만든 단체가 PV-NET이다. 현재 PV-NET에는 1622여명의 회원들이 가입되어 있고, 이들이 소유한 태양광발전소가 1,540곳이 된다. 또한 회원공동출자로 만든 시민공동발전소가 80곳에 이른다. 현재 츠즈쿠 켄은 PV-Net의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운동적 긴장을 늦추지 않고 살아온 인생

    지금까지 간략하게 츠즈쿠 켄 자신이 들려준 그의 특별한 이력이다. 그는 중국에서 태어나 원폭이 투하된 나가사키에서 자랐다. 1960년대 급진적인 학생운동이었던 전공투 세대로 격랑의 대학시절을 보냈다. 이어 일본 유수의 하이테크 전자회사의 엔지니어가 된 후 본격적인 강력한 노동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다.

    또한 노동자 자주관리운동 뿐 아니라 생산자 협동조합운동을 시작하여 아직도 그 이상을 실현하고 있고, 반핵운동을 거쳐 지금은 태양광발전을 중심으로 한 자연에너지운동과 환경운동을 벌여나가고 있다. 그의 65년 인생 기간 동안 대학시절부터 지금까지 그가 살아온 시대의 주요한 사회적 이슈에 개입하였고 운동적 긴장을 놓치지 않고 살아왔다.

    그의 인생에 있어 각 시기의 운동들은 줄곧 단절되어 있지 않고 맥을 이루며 연결되어 있다. 아직 그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지 않지만 그에 대한 나의 관심은 더욱 커가고 있고 좀더 그에 대해 알고 싶어진다. 그리고, 눈을 돌려 우리의 노동운동 선배들을 떠올려본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