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군 장정의
    안착지를 마련한 류즈단
    [중국 현대인물 열전⑦] 34세 전사
        2021년 09월 01일 10:4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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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현대인물 열정] 생사의 고비에서도 시를 지은 문무겸비, 천이

    류즈단의 생애 – 전사하여 더욱 알려진 인물

    류즈단은 우리 나이 서른 넷에 전사한 인물이다. 그는 중국이 선정한 군사가 36명 중 하나이며 신중국 건설에 공이 있는 100대 인물 중 한 사람이다. 그가 태어난 산시(陝西: 산시山西성과 구별하기 위해 이후 섬서성으로 표기)성 바오안(保安)현은 그의 이름을 따서 즈단현으로 개칭되었다. 도시나 지명에 사람 이름을 붙이지 않는 중국에서는 매우 드문 사례이다.

    류즈단

    류즈단은 1903년 테어났다. 1922년에 우리로 치면 고등학교인 류린(榆林)중학에 입학하였다. 그는 학생회 주석으로 학생운동을 이끌며 봉건 군벌들의 통치에 저항하였다. 1924년에 중국 사회주의 청년단에 가입하였으며 다음 해에는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당은 막 가입한 그에게 황푸군관학교에 입학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때 황푸에는 저우언라이가 정치부 부주임으로 재직하는 등 공산당은 군사간부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류즈단은 황푸를 졸업하고 국민혁명군 간부로 북벌에 참가하였다.

    1927년 장제스가 상하이에서 정변을 일으키자 류즈단은 탈출하여 후베이, 안후이, 섬서성에서 기의를 조직하였다. 1928년 그는 동지들과 함께 섬서성 시안의 동쪽 지역에서 웨이화(渭華)기의를 일으켰다. 그는 서북 공농혁명군 군사위원회 주석으로 무장투쟁을 이끌었다. 웨이화 기의는 일시 성공하여 농촌 40여개 지역에 소비에트 정부를 건립하며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국민당 3개 사단의 반격을 받아 열흘 만에 궤멸적 타격을 입고 친링산맥으로 피신하였다.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류즈단은 서북 반제동맹군을 조직하여 부총지휘 겸 참모장을 맡았다. 그후 반제동맹군은 중국 공농홍군 섬감(섬서성과 간쑤성 지역) 유격지대로 발전하였으며 류즈단은 부총지휘를 거쳐 총지휘에 임명되었다. 1932년 홍군 26군이 설립되자 류즈단은 군장으로 임명되었다. 1935년 홍군 제26군과 25군을 합쳐 15군단을 설립하자 부군단장 및 참모장을 맡게 되었다. 이때는 장정 중에 있던 마오쩌둥과 1방면군이 섬북의 근거지로 접근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류즈단은 이 무렵 각지로 원정하여 눈부신 전과를 쌓고 있었다. 1935년 5월에 그는 서북 혁명군사위 주석 겸 총지휘를 맡아 두 달 동안 6개 현성을 격파하였다. 적의 약한 곳을 공격하고 구원 오는 적을 섬멸하는 기동작전으로 두 차례에 걸친 국민당군의 포위토벌을 깨뜨렸다. 특히 섬서 간쑤 소비에트에 대한 옌시산군의 토벌에 맞서 승리한 결과 섬북과 섬감 소비에트가 하나로 합쳐졌다. 마오쩌둥의 1방면군은 물론 각 방면의 장정부대가 안착할 근거지를 마련한 것이다.

    간난신고 끝에 근거지 확대와 군사력 증강을 달성한 뒤 류즈단은 모함에 걸려들었다. 당시 공산당 섬감진(섬서, 간쑤, 산시성 관할) 서기 및 군사위원회 보위국장 등을 맡고 있던 다이지잉(戴季英)은 잔혹한 숙청으로 악명을 얻었다. 그는 15군단 내 지휘관들을 숙청하고 류즈단도 잡아 들였다. 이때 다이지잉은 류즈단을 허리띠로 마구 구타하고 류즈단의 5세 딸도 노동대에 편성했다고 한다. 다이지잉의 심판 아래 죽은 지휘관이 수십명에 이르고 류즈단의 목숨이 경각에 이르렀을 때 마침 마오쩌둥의 장정 1방면군이 섬북에 도착하였다. 마오쩌둥이 보니 기가막힌 일이 아닌가? 섬북의 근거지를 개척한 주요 공신인 류즈단이 잡혀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때 저우언라이가 직접 나서 류즈단 등을 석방시켰다.

    다이지잉은 중국에서도 류즈단 등을 잡아 가둔 천하에 나쁜 놈으로 아는 사람이 많다. 억울한 숙청의 책임을 묻는 저우언라이에게 그는 끝까지 정당한 숙청임을 항변했다고 한다. 기가 막힌 저우언라이는 “당신처럼 하다가는 진짜 혁명 때 쓸 사람이 남아 나겠느냐?”고 꾸짖었다. 하지만 그 일로 처벌을 받은 일이 없으니 그런 일이 흔했던 모양이다. 다이지잉도 일생을 바친 혁명가이다. 다이지잉은 악예환(후베이, 허난, 안후이) 근거지를 개척한 공신이고 장정 때 4방면군을 이끈 주요 지도자이다. 그는 신중국 성립 후 허난성위원회 서기를 맡았다. 자신의 공이 크다고 생각한 그는 논공행상에 불만이 있었던 모양이다. 대놓고 불평하다가 1952년 공산당에서 제적 축출되었다. 그러다 1984년이 되어서야 복권되었는데 92세까지 장수하였다. 그래도 다이지잉은 여전히 류즈단을 핍박한 인물이 되어 있으니 그로서는 좀 억울할 것이다. 류즈단의 업적이 빛날수록 그는 이상한 사람이 된다. 한번 나쁜 인상이 박히면 그만큼 씻기가 어려운 것이다.

    인민의 지도자, 민족의 영웅

    석방된 류즈단은 다시 서북 군사위 부주임 겸 북로 원정군 총지휘를 맡았다. 1936년 4월, 류즈단은 원정군을 지휘하여 동쪽을 치러 갔다. 섬북의 공산당 근거지를 튼튼하게 굳히기 위한 원정이었다. 그는 섬서성의 동쪽인 산시성 중양현에서 전투 중에 전사하였다. 그의 죽음을 놓고 아직까지 여러 이야기가 분분하다. 등 뒤에서 총탄을 맞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불과 오백여명의 공격군을 직접 지휘하여 위험을 자초했다는 주장도 있다. 어쨌든 28군의 군장임에도 병사들 앞장에 서서 싸우다 전사하여 동지들의 안타까움을 더했다.

    류즈단을 추모하는 마오쩌둥의 글씨

    마오쩌둥은 류즈단의 전사 소식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섬북에 와서 한 번 만난 뒤 그가 훌륭한 공산당원이라는 것을 알았다. 류즈단 동지가 희생된 것은 참으로 뜻밖이다. 그의 충심은 당과 국가의 정신에 그리고 인민들 사이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마오는 또 간부대회에서 이런 말도 하였다. “누군가 죽었을 때 군중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아야 한다. 류즈단 동지가 희생된 뒤 섬북의 인민들이 크게 상심하였다. 그가 진정한 인민의 지도자였음을 알 수 있다.”

    마오쩌둥은 류즈단의 묘비에 이렇게 썼다. “인민의 지도자이고 민족의 영웅이다.” 저우언라이는 거기에 더하였다. “오천년 역사에 영웅은 많지만 인민의 영웅은 류즈단이다.”

    그가 죽고 일년 뒤 중공은 그의 고향인 바오안현을 즈단현으로 이름을 바꿨다. 1943년에는 능원을 조성했으며 1943년에는 ‘류즈단 열사 사회장’을 치렀다. 이 사회장에는 서북국 서기인 가오강을 비롯하여 주더, 런비스, 천방셴, 런비스 등 공산당 고위 지도자들이 참가하였으며 마오쩌둥, 저우언라이는 만장을 보냈다. 죽은 지 팔 년만에 다시 그의 공적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한 것이다. 5월에 그의 유체가 고향인 즈단현에 도착하자 다시 ‘만인 사회장’이 개최되었다. 서북 지역에서 류즈단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컸던 것이다. 류즈단의 묘는 1947년 후쫑난이 옌안 등 섬북을 점령했을 때 파괴되었다가 다시 중건되었다. 지금은 혁명성지가 되어 공산당원과 시민들의 교육기지로 활용되고 있다.

    섬북의 작은 마오쩌둥

    류즈단은 열렬하고 충성스러운 사회주의 혁명가이자 군사가이다. 그는 현실적이고 유능한 조직가이기도 하였다. 그의 행적을 보면 신중국 건립 전의 마오쩌둥과 여러모로 닮았다. 마오쩌둥도 신중국을 세우기 전까지는 나무랄 데 없는 훌륭한 지도자였다. 약간 호색한 점(필자의 시각)을 제외한다면 그만큼 정력적이고 헌신적이며 유능한 지도자를 찾을 수 없다. 거기에 비하면 류즈단은 성인군자라고 할 만하다. 그는 열다섯에 할아버지가 맺어준 통구이룽(同桂荣)과 조혼하였다. 마오쩌둥이나 린비아오 같은 이는 부모가 맺어준 처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달아났다. 거기 비하면 류즈단은 전통혼례를 치렀을 뿐 아니라 탈 없이 잘 살았다.

    류즈단의 부인 통구이룽

    통구이롱도 남편이 요절한 뒤 평생 재혼하지 않고 혁명사업에 힘썼다. 통구이룽은 마오쩌둥이나 저우언라이 등의 헝겊 신(중국 사람들이 신는 얇은 전통 신)을 지어 주었다. 사람이 소탈하고 부지런해서 마오쩌둥의 세 번째 처인 허쯔전이 늘 언니라고 부르며 따랐다고 한다. 통구이룽은 남편이 국민당에서 잡아 죽이려 혈안이 된 혁명가인 만큼 위험을 달고 살았다. 국민당군의 섬북 토벌 때는 일가권속을 이끌고 산속에 들어가 열흘간 물과 건량을 먹으며 버티기도 하였다. 그녀는 무학이었지만 독학으로 글자를 익히고 독서로 견문을 넓혔다. 그녀는 유아 교육사업에 종사하였으며 94세까지 장수하였다. 나중에는 전국 인민대표대회 대표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류즈단은 중국에서도 가장 가난하고 낙후한 섬북에서 성장하였다. 섬북은 황토 고원지역이 많아 아직도 요동에서 사는 사람이 있을 만큼 낙후한 지역이다. 류즈단은 가난과 수탈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참상을 보며 항상 마음 아파하였다. “봉건질서를 깨뜨리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온 그는 자연스럽게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27년 장제스가 정변을 일으켜 노동자와 공산당원들을 학살하자 그는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붓만 가지고 혁명을 할 수 없다.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죽고 우리는 혼란에 빠지지 않았나? 우리에게는 총이 없었다.” 마오쩌둥도 그 무렵 공산당 회의에서 똑같은 말을 주장하였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그후 류즈단은 혁명 무장을 창건하고 무장력으로 투쟁하는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후 그는 공산당 섬서성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웨이화 기의(폭동)를 조직했는데 난창 기의, 추수(후난 장시성 경계) 기의, 광저우 기의 후 첫 번째 기의였다. 류즈단은 무장투쟁과 토지혁명을 결합하며 근거지를 확대해 나갔다. 농촌에 소비에트 정권을 세우면 토지개혁을 실시하고 인민들의 지지를 얻어 세력을 굳힌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도적처럼 떠돌아다니면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당내 좌경 모험주의를 겪으며 점차 마오쩌둥이 걸어간 길을 비슷하게 밟아갔다.

    그는 “약하고 분산된 무장역량을 차츰 결집시켜 유격대를 건설해야 한다. 그 뒤에 정규 홍군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만주사변이 발생하자 그는 부대를 서북 반제동맹군으로 개편한 후 중국 공농홍군 섬감유격대로 발전시켰다. 그후 류즈단은 고향인 바오안으로 돌아가 합법적인 투쟁방법을 채택하였다. 백색 무장인 현의 민단을 혁명무장으로 개조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대담하게도 국민당군에 들어가 혁명무장으로 바꾸려 시도하였다. 그러다가 여러 차례 체포되었는데 지역의 저명한 인사들에 힘입어 석방되기도 하였다.

    그는 또 산적이라 칭하는 녹림부대에 사람을 보내어 쓸만한 사람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류즈단은 “본래 양민들이 군벌이나 토호, 그리고 열신들에게 떠밀려 양상군자가 된 것이다. 공산당원의 지도와 교육이 있으면 충분히 혁명의 길로 인도할 수 있다.”고 말하곤 하였다. 마오쩌둥이 징강산에서 산적이던 왕줘와 원원차이를 혁명의 길로 인도한 일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류즈단의 실사구시는 혁명 근거지 개척에서도 나타났다. 그는 웨이화 기의가 실패한 뒤 “정강산에서 배워야 한다. 공농무장으로 할거해야 한다.”고 제기하였다. 섬북에 가까스로 근거지를 마련한 뒤 이렇게 주장하였다. “꾀가 많은 토끼는 세 개의 굴을 판다. 우리도 그처럼 해야 한다.” 그에 따라 그는 섬북에 세 곳의 근거지를 창건하였다. 섬북 근거지와 난양(南梁)을 중심으로 한 섬감변 근거지를 만든 것이다. 나중에 마오쩌둥은 이렇게 감탄하였다. “류즈단은 꾀가 많다. 섬감변 근거지는 꾀 많은 토끼가 판 굴이다.”

    류즈단은 마오쩌둥처럼 중국혁명은 농민전쟁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토지혁명을 적극 실천하는 것은 물론 늘 농민들의 고통에 귀를 기울였다. 그 결과 농민들의 지지를 얻어 낙후한 섬북에 적지 않은 근거지를 만들 수 있었다. 그는 또 통일전선의 필요성을 깊이 느끼고 있었다. “혁명은 통일전선을 필요로 한다. 적은 적을수록 좋고 친구는 많을수록 좋다. 우리가 힘을 하나 더하면 적은 하나를 잃는 것이다.” 그는 지주계급은 견결히 소멸해야 하지만 보통 지주들의 생활 방편은 열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류즈단은 부농에게도 토지 일부를 남겨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근거지 주위의 민단과 지주무장들도 반동은 타격하고, 중간을 쟁취하며, 우호적인 세력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런 주장과 실천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다이지잉이 그를 우경 기회주의나 도망주의로 체포한 것도 이런 활동방식을 문제로 삼았을 것이다. 두 가지 모두 마오쩌둥이 소련 유학파 지도자들에게 받았던 비판이기도 하였다. 공산당이 2차 통일전선을 실행한 것은 그가 죽은 후인 시안사변 무렵이다. 지주나 부농에 대한 정책은 국공내전 후반 공산당이 승기를 틀어쥔 후에 비로소 실행했던 것이다. 류즈단은 그처럼 견결한 혁명가이지만 매우 실사구시적이고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류즈단은 근거지에서 은행을 개설하고 화폐를 발행하였다. 목장을 개척하고 시장과 무역을 권장하여 상인들을 끌어들였다. 근거지 경제의 회복과 발전을 통해 민생을 도모하려 한 것이다. 그는 또 교육을 중시하여 레닌 소학교 등 교육기관을 개설하여 대중들의 의식을 일깨우고자 하였다. 그런 여러 노력들이 모여 섬북의 공산당 근거지로 나타난 것이다.

    시중쉰이 류즈단을 추모하다

    시중쉰은 중국 공산당 총서기인 시진핑의 아버지이다. 그는 일찍이 류즈단과 인연을 맺어 고난을 같이 하였다. 시중쉰도 섬서성 출신인데 섬감변구 혁명근거지 창설에 힘을 보탰다. 시중쉰은 국공내전과 전란 후 건설과정에서 펑더화이의 조수로 고락을 함께 하였다. 그런데 운명이란 알 수 없어서 두 사람과의 인연 때문에 모진 탄압과 감옥살이를 겪지 않으면 안되었다. 시중쉰은 류즈단의 일생을 기록한 소설 사건에 연루되었으며 펑더화이와 가까워서 더욱 캉성이 그를 올가미에 얽어 넣었다. 시중쉰은 16년이나 감옥살이 등 박해를 받다가 1978년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나서 복권되었다.

    젊은 시절의 시중쉰

    시중쉰 일가 뒷줄 왼쪽이 시진핑

    1998년 쉬중신은 류즈단에 대하여 이렇게 회고하였다. “즈단 동지는 나보다 열 살이 위다. 우리는 함께 일하며 사이가 매우 좋았다. 그는 좋은 선생이자 지도자였으며 좋은 친구이자 형이었다. 그는 사방에 영향을 미치는 혁명가였다.”

    시중쉰은 13세에 공산주의 청년단에 가입했으며 15세에 공산당원이 되었다. 그는 1932년 섬감 유격대를 찾아가 류즈단을 처음 만났다. “나는 일찍부터 류즈단의 이름을 듣고 있었다. 그의 전설적인 혁명 활동도 알고 있었다. 그는 전설적인 인물로 알려졌지만 막상 만나니 평범한 전사의 모습이었다. 전사들과 함께 앉아 있는데 친근하기 이를 데 없고 모습이 소박해 보였다. 곰방대를 빨면서 이야기하는데 늘 웃었다. 주변 동지들이 그를 “류 형님”이라고 불렀다.

    처음 만남에 류즈단은 시중쉰의 손을 꽉 잡았다. 그때 시중쉰의 나이 19세였다. 투쟁경험도 부족하고 두 차례 봉기에 실패하여 매우 침울한 상태였다. 류즈단은 그에게 “실패를 두려워하면 다시 혁명할 수 있소? 실패한 경험이라면 내가 훨씬 많아요”하고 위로했다.

    시중쉰은 이런 말도 하였다. “그의 태도는 솔직하고 사람을 끌어당기는 게 있었다. 사람들에게 신뢰감을 주어 그가 오래된 친구처럼 여겨졌다. 그는 인물이 청수한 데다 코가 높았다. 눈빛은 빛나지만 온화하고 늘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류즈단은 시중쉰이 그전에 국민당 대대에서 당서기 자격으로 봉기를 일으키다 실패하고 뒤이어 군중 폭동을 일으키려다 실패한 것을 알고 있었다. “몇년 동안 섬감지구에서 70차례 국민당 부대 내 봉기가 있었소. 하지만 모두 실패하였소. 근본적인 원인은 병사운동이 농민운동과 결합하지 못해서였소. 그리고 혁명근거지가 없었기 때문이오. 우리가 마오쩌둥 동지처럼 징강산 같은 곳에 의지했다면 사정이 달랐을 것이오. 무장하여 할거하고 근거지를 세우고 차츰 대유격구로 발전시켰으면 우리는 근거지 내외에서 선회하며 싸울 수 있었을 것이오.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이 근거지를 마련하는 일이오.” 시중쉰은 류즈단의 견해에 탄복하였다. 그후 시중쉰은 이렇게 회고하였다. “류즈단 동지의 이야기는 우리들을 각성시켰다. 우리에게 혁명의 길을 분명히 제시한 것이다.”

    이처럼 류즈단은 혁명근거지 건립에 대한 분명한 견해를 갖고 있었다. “우리는 적의 통치가 약한 지방이나 관리가 안 되는 곳으로 가야 한다. 또 여러 세력이 각축하는 곳도 좋다. 그런 곳에 몇 개 유격구를 세운 뒤 점차 근거지로 발전시켜야 한다. 적이 공격해 오면 (근거지들이) 서로 협력하여 견제한다. 적이 이곳을 치면 우리는 저곳을 친다. 적이 지원을 오면 우리는 퇴각한다. 적의 병력을 분산시키고 약점을 잡으며, 기회를 보아 섬멸한다. 이것이 옛사람이 말한 “꾀 많은 토끼는 굴을 세 개 판다고 하는 것이다. 최근 두 해 동안 우리는 간쑤지역의 네 군데 지역에 유격구와 작은 근거지를 만들었다. 우리가 선회할 수 있는 곳은 매우 크다. 두 군데 근거지는 단검처럼 시안(西安)을 겨누고 있다. 적병을 견제할 수 있어 우리의 섬북 근거지 활동에 유리해졌다.” 시중쉰은 들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류즈단은 시중쉰을 보고 이런 말도 하였다. “지금 우리 당의 지도자 및 간부들이 대부분 중학생이나 대학생들이어서 실정을 잘 모른다. 기층 간부들은 대부분 일자무식이다. 당신은 중학생이고 농가의 자제다. 농민을 이해하니 큰 장점이다.” 류즈단은 시중쉰에게 사회조사를 권하고 각계각층을 단결할 수 있는 방법을 익히라고 하였다. 다른 의견들을 들으며 농촌에 깊이 들어가 민정을 살피라고 하였다. 노인을 보면 인사하고 앉아 농가의 생활을 듣고 가족처럼 대하라고 말했다.

    시일이 흘러 류즈단이 함께 있던 자오진(照金) 근거지를 떠나게 되었다. 류즈단은 그의 경호원을 시중쉰에게 붙여 주었다. “싸움은 민활해야지 무작정 강경하면 안되오. 적을 섬멸할 수 있으면 싸우고 여의치 않으면 싸우지 마시오. 유격대는 은폐를 잘해야 합니다. 평상시는 농민이고 모이면 유격대가 되는 거요. 그래야 적이 해치지 못합니다.”

    시중쉰은 이렇게 술회했다. “즈단 동지는 큰형처럼 업무나 생활에서 내게 관심을 기울였다. 그후 일생동안 나는 다른 의견이나 민주인사들의 의견을 들었다. 늘 통일전선에 관심을 가졌다. 모두 즈단 동지의 가르침과 그때의 경험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필자소개
    해남 귀농. 전 철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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