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와대 조중동을 닮아가나
        2006년 12월 07일 01:15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노무현 대통령은 계몽 군주같다. 매사에 국민을 가르치려 든다.

    취임 후 몇 차례 가진 ‘국민과의 대화’도 그랬다. ‘대화’가 아니라 국민을 상대로 한 ‘교육’에 가까웠다. 영화배우 이준기는 스크린쿼터 얘기를 꺼냈다가 "한국영화, 그렇게 자신없어요"란 말을 들었다.

    한미FTA 문제도 그렇다. 노대통령이 그리는 미래 구상에 따르면 꼭 체결해야 하는데 국민들이 이해하지 못해 답답하다는 투다. 지금은 물러나고 없는 이백만 전 홍보수석의 어이없는 치어 리더역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그는 국민들에게 "한미FTA 태극전사를 성원하자"고 했었다. 한미FTA를 반대하는 여론이 들끓던 때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며칠 전 노대통령은 ‘연정론’을 다시 꺼내들었다. 박용진 민주노동당 대변인은 ‘연정론’을 담은 노대통령의 편지를 ‘강의노트’라고 했다. 적확한 표현이다.

    ‘연정론’에 대한 청와대 관료들의 주석에선 공통적인 정서가 발견된다. 사람들이 노대통령의 ‘진정성’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피해의식이다. 소문상 정무비서관은 "이를 권력투쟁이라는 한마디로 손쉽게 매도해버리는 안이한 접근으로는 대통령의 고뇌와 제안, 그 진정성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양정철 홍보기획비서관도 같은 날 <경향신문> 등에 대해 "하이에나 행태로는 정론지가 못 된다"며 "바보 노무현의 연장선에서, 정치의 대의명분과 원칙에 충실하려는 순수성을 함부로 훼손하지 말라"고 했다.

       
     
     

    청와대와 ‘조중동’의 닮은 점

    노대통령과 그 주변 사람들은 ‘진정성’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는 원인을 상당분 잘못된 언론 보도에서 찾는 듯하다. 그게 이 정부가 종종 언론 매체와 요란한 싸움을 벌이는 배경일 것이다.

    물론 이런 피해 의식이 근거없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수구언론의 존재다. 이들은 자신의 입맛대로 여론을 왜곡하는가 하면 정부의 주장을 자의적으로 발췌하고 비틀어서 본 뜻과는 달리 전달하기도 했다. 비판이라기보다는 물어뜯기에 가까운 경우가 적지 않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고 했다. 정부와 언론의 대립상에도 이 말은 들어맞는다. 그런데 그 과정은 그리 간단치 않다.

    이를테면 다른 매체들이 조중동의 보도 행태를 닮아가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게 아니다. 청와대가 조중동과 물어뜯고 싸우면서 조중동의 행태를 닮아갈 때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 최근 청와대 브리핑을 보면 이 과정은 거의 완료된 것으로 보인다.

    지난 6월 한미FTA를 선동하기 위해 대학생 인터뷰를 조작한 게 대표적이다. 한미FTA 반대론자를 ‘폐쇄적인 민족주의와 낡은 종속이론’에 물든 사람들로 몰아가는 것도 ‘친북 좌파’를 전가의 보도로 휘두르는 수구언론의 행태 그대로다.

    <경향신문>의 6일자 보도를 "한나라당이 입만 열면 쓰는 정치공세"로 규정한 것도 툭하면 "북한의 논리와 같다"고 진보진영을 공격하는 수구언론의 수법과 그대로 닮았다.

    청와대와 조중동의 다툼이 ‘논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소모적인 말싸움에 그치는 것은 공통의 준거점이 없기 때문이다. 민주사회에서 그 대표적이고 유력한 준거점이란 ‘민심’이다. 민중들의 생각이다. 물론 민심이 단일한 것은 아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여론을 경청하는 자세일 것이다. 그런데 두 집단 모두 자신의 도그마 혹은 정략에 갇혀 민중들을 가르치려고만 든다.

    양 비서관은 “정략적 태도로 일관하는 몇몇 신문들의 그런 행태야 정치의 계절, 대선시즌이면 어김없이 반복되는 지긋지긋한 일이라 놀라울 것도 없지만 균형을 중요한 가치로 내세우던 신문들조차 자극적이고 표피적인 비방대열에 합류한 것은 개탄스러운 일”이라며 <경향> 등을 비판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볼 수는 없는 것일까. "조중동은 그렇다 치고, 그래도 균형을 잡고 신문을 만들던 곳에서까지 이런 식으로 청와대를 공격 또는 비판하고 나온다는 건, 한번쯤 우리를 되돌아보라는 신호는 아닐까."라고. 이런 태도야말로 스스로의 진정성을 얘기할 수 있는 토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토론의 달인

    노무현 대통령은 토론과 논쟁을 좋아한다고 한다. 물론 노대통령이 좋아하는 건 ‘말싸움’에 가까워 보인다. 말싸움도 싸움인 이상 이겨야 한다. 그럴려면 논리에 강해야 한다. 논리가 직선적이고 힘이 있어야 한다. 노대통령이 그렇다. 사람들은 노대통령을 ‘토론의 달인’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논리’에 함정이 있다. 어떤 맥락에선 논리적으로 맞는 말이 맥락을 달리하면 틀린 말이 되기도 한다. 논리의 내부에 갇히면 독선에 빠진다. 독재라는 게 다른 게 아니다.

    그래서 항상 자기 논리의 외부를 의식하고 그와 소통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이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장치다. ‘참여정부’에 없는 ‘참여’야말로 민주주의의 핵심 가운데 하나일 터다.

    그런데 노대통령은 민중들의 생각을 듣고 자신의 견해를 수정하기보다 자신의 뜻대로 민중들의 생각을 뜯어고치려고만 든다. 위험천만하고 난감한 일이다.

    노대통령을 ‘진정성의 정치인’이라고 부른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선한 의도가 악행으로 귀결된 사례는 수 없이 많다. 외려 역사적인 참사는 잘못된 ‘진정성’이 원인이 된 경우가 많다. 히틀러에겐 진정성이 없었을까. 부시 대통령의 기독교 근본주의적 ‘진정성’ 때문에 지금 세계가 얼마나 피곤한가.

    ‘진정성’을 갖고 민심을 외면하는 지도자와 ‘진정성’은 불확실해도 민심에 반응하는 지도자 가운데 굳이 하나를 고르라면, 기자는 후자를 택하겠다. 그게 민주주의적 가치에 훨씬 부합하기 때문이다.

    필자소개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