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범도, 윤봉길 그리고 일제의 당파성론
    [컬렉터의 서재] ‘도시락’으로 살펴보는 한일 관계
        2021년 08월 26일 09:4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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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15일 광복절, 그가 돌아왔다.

    유해 봉환을 위해 대한민국 정부가 파견한 특별기 KC-330MRTT는 그가 78년간 잠들어있던 제2의 고향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상공을 천천히 몇 차례 선회한 후 고국을 향했다. 5,000Km를 날아 특별기가 대한민국 영공으로 진입하자 6대의 공군 전투기들이 나타나 엄호 비행을 시작했다. 대한민국 공군은 현재 운용하는 모든 전투기 기종을 망라한 비행단을 꾸려 그에 대한 최고 예우를 표했다. 특별기를 사이에 두고 전투기가 좌우 3대씩 엄호 대열을 갖춘 후 방주원 소령은 전투기를 대표하여 그에게 고국의 첫 인사를 전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신
    홍범도 장군님의 귀환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지금부터 대한민국 공군이 안전하게 호위하겠습니다.
    필승!!

     [사진] 왼쪽은 홍범도 장군의 생전 모습(인터넷사진), 오른쪽은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 특별기가 호위 비행을 받으며 귀환하는 모습(대한민국 공군 사진)

    전투기 조종사들 모두 거수 경례로 홍범도 장군을 맞이했다. 이어 전투기들은 장군을 위한 예포를 쏘았다. 우리나라가 해방되면 꼭 고국에 데려가라던 장군의 유언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서울공항에서는 장군을 직접 맞이하기 위해 검은색 정장 차림의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공항에서 거행된 유해 봉환식 후 장군의 유해는 국립 대전현충원으로 모셔졌다. 그 시절 불렸던 애국가 선율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장군은 해방된 고국에서 다시 영면에 들었다. 언젠가 통일이 되어 그의 고향인 평안도 양덕에 돌아가는 꿈도 꾸었을 것이다.

    홍범도, 윤봉길 그리고 도시락

    2021년 8월 대한민국을 가장 뜨겁게 달군 인물은 단연 여천 홍범도 장군일 것이다. 그는 봉오동전투·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끈 대한독립군 사령관이었으며, 이후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지역 고려인들의 정신적 지주였다. 해방된 조국을 보지 못하고 그가 사망한 것은 1943년. 전설의 독립군 사령관은 당시 카자흐스탄 어느 극장 수위로 일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의 오랜 노력 끝에 사망 후 78년이 되는 올해 그는 드디어 이국의 묘역에서 국내로 돌아온 것이다.

    그런데 독립운동가 중 홍범도 장군 귀환 전에는 윤봉길 의사가 단연 국민들의 관심 대상이었다. 전직 검찰총장이 2021년 6월 29일 제20대 대선 출마 선언을 서울 양재동 윤봉길기념관에서 했기 때문이다. 파평 윤씨라는 성씨 외에는 윤봉길과 삶의 궤적 면에서 별반 공통점을 찾을 수 없는 그가 왜 하필 출마 선언을 윤봉길 기념관에서 했는지에 대해 사람들은 갸우뚱했다. 그때는 3·1절도 게다가 8·15 광복절도 가깝지 않은 6월 말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에 맞서 폭탄을 투척했던 윤봉길 의사의 이미지에 문재인 정권의 ‘폭정’에 맞서 폭탄을 던지는 이미지로 자신의 모습을 투사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서울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향후 대선 국면에서 충청권 표심을 공략하기 위한 장기적 포석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정말로 같은 파평 윤씨라는 점을 어필하기 위해서였을까?

    전직 검찰총장은 이후에도 윤봉길 의사에 대한 존경심을 자주 드러내었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돌아오던 8월 15일에는 자신의 SNS에 윤봉길 의사의 유언과 함께 “제76주년 광복절인 2021년 8월 15일 윤봉길 의사의 그 깊은 뜻을 담은 술 한잔 올려 드립니다”는 글을 올렸다. 술을 바치는 자신의 사진과 함께.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때 올린 사진은 윤봉길에 대한 글 내용과 달리 안중근 의사에게 술잔을 올리는 장면이었고, 윤봉길 의사의 유언 날짜도 잘못 적어 이 사람이 진짜 윤봉길 의사를 존경하는 게 맞는지 의문을 불러 일으켰다. 그 얼마 전에 부산을 방문해서 87년 6월항쟁과 79년 부마항쟁을 구분 못하는 듯한 발언을 한 그였던지라 실수가 아니라 진짜로 윤봉길과 안중근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일 수 있다는 주장도 나름 설득력을 얻었다.

    돌이켜보면 대선 출마 당시 발언 내용도 이상하긴 했다. 그는 문재인 정부가 이념에 치우쳐 “죽창가를 부르다 한일관계가 망가졌다”며 문재인 정부의 대일 정책을 반일적이라 강도 높게 비판했는데, 한일관계의 냉각 책임을 전적으로 한국 정부에 묻는 그런 메시지를 왜 굳이 항일 운동의 상징인 윤봉길 기념관에서 했는가 하는 점 말이다.

    지난 여름 윤봉길 의사를 소환한 것은 전직 검찰총장만이 아니었다. 지난 7∼8월 코로나 시국에 잠시나마 위안을 주었던 도쿄 올림픽 역시 윤봉길 의사를 소환했다. 다른 이들은 모르겠으나 적어도 컬렉터에게는 그랬다.

    2021년 도쿄 올림픽은 때아닌 도시락 문제로 시끄러웠다. 발단은 올림픽에 출전한 한국 대표팀이 선수들의 안전을 고려하여 경기장 주변 호텔 하나를 통째로 빌려 자체 급식 센터 운영을 추진하면서 시작되었다. 한국 대표팀은 이 시설을 통해 한식 도시락을 만들어 한국 선수들에게 제공하고자 했다. 이는 강제사항은 아니며, 선수들은 원할 경우 일본이 운영하는 올림픽 선수촌 식당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게 했다.

    일본은 이런 한국의 조치에 강하게 반발했다. 먼저 일본 정부는 한국선수단을 위한 급식센터가 ‘풍평피해(風評被害;근거 없는 소문 때문에 특정 개인이나 단체가 피해를 봄)’를 조장한다면서 한국 외교부에 적절한 대응을 요구했다. 그들은 한국이 도쿄 올림픽 선수촌 급식에 들어가는 후쿠시마산 식자재를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체 급식 센터를 운영하는 것으로 보았다.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산 식자재는 안전이 확보돼 있다면서 오해를 초래할 수 있는 한국선수단의 행동을 개선해달라고 한국 측에 요구했던 것이다. 어차피 자체 급식소를 운영하는 행위는 그것이 누가 됐던 상대방에 대해 완전한 신뢰를 하지 못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므로 그들은 한국의 조치에 대해 서운함을 표현할 수 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유감이다”라거나 “불쾌하다”는 반응은 그럴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딱 그까지다.

    [사진] 2021년 도쿄 올림픽 당시 한국과 일본은 ‘도시락’ 문제를 가지고 갈등하였다. 사진은 한국 대표단의 급식 지원 센터에서 도시락을 준비하는 모습이다. (연합뉴스 사진)

    그러나 일본의 반응은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예민하고 신경질적이었다. 다음의 몇 가지 사실만 따져보더라도 한국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도를 넘는 것이었다. 먼저 한국 선수단의 자체 급식 시설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 2008년 베이징 올림픽부터 계속 운영해 왔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 반발이 무색하게도 일본 역시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 때 한국의 위생을 믿을 수 없다며 자체 급식 시설을 운영한 사실이 있다. 게다가 이번 올림픽에 자체 급식 시설을 운영한 것은 한국만이 아니었다. 미국도 자국 선수들을 위해 7만 2000파운드(약 32톤)에 해당하는 식자재를 운반해 와서 7000식을 제공한다고 밝혔다. 미국 선수단 급식 지원 센터는 동경 세타가야구에 설치되었으며 대회 개막식에 앞서 식품과 음료 등이 미국 콜로라도에서 도쿄로 이송되었다. 그런데 일본은 자체 급식시설을 운영한 미국에 대해서는 별반응을 보이지 않으면서 한국에 대해서만 문제 삼는 이중적 태도를 보였다.

    역사를 전공한 컬렉터는 여러 가지 상황을 심사숙고한 결과 그들의 지나친 반응은 일제 강점기 윤봉길 의사의 도시락 폭탄 트라우마가 아니고서는 설명하기가 힘들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일본은 ‘도시락’으로 한국과 악연이 있는 것 같다. 1932년 4월 29일 한인애국단원 윤봉길은 “나는 적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야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서하나이다”라고 쓴 선서문을 가슴에 붙이고 마지막 기념 사진을 찍은 후 상하이 홍코우 공원에서 열린 일본 천황 생일을 축하하는 천장절 행사에 ‘도시락 폭탄’(정확히 말하면 물통 폭탄. 도시락과 물통을 동시에 투척하였으나 도시락은 불발탄이 되었고, 터진 것은 물통임)을 던졌다. 이 투탄 의거로 일본 육군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와 거류민단장 가와바타를 폭살하고, 일본군 중장을 비롯한 고위 인사 10여 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뒷날 1945년 9월 미주리호 선상에서 일본을 대표하여 항복 문서에 서명하러 나올 때 불편한 다리로 지팡이를 짚고 나왔던 외무 대신 시게미쓰 마무로(重光葵)도 홍코우 사건 당시 주중 일본공사로 행사에 참여해 한쪽 다리를 잃었던 인물이다.

    어쨌든 윤봉길 의거 후 약 90년만에 한일 간 다시 ‘도시락’ 문제가 터진 셈인데, 일본 정치인들은 여야를 가리지 않고 ‘도시락 때리기’에 나섰다. 일본 집권 자민당 소속 사토 마사히사 참의원은 “선수촌에 공급하는 식자재는 대접하는 마음을 담아 상당히 신경쓰고 있다”라며 “(한국의 급식 센터 운영은) 후쿠시마 주민의 마음을 짓밟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후쿠시마현을 지역구로 둔 입헌민주당 부대표 겐바 고이치로는 “이렇게 하면 모욕”이라고 발언한 후 이어서 “한국에 대해 ‘감정이 앞선다’,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가 서투르다’라는 목소리도 나온다”라고 비판했다. 에둘러 표현하긴 했으나 핵심은 “조선인들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못한다”고 규정한 것이다. 이건 마치 우리가 “일본인들은 민족성이 사악하고 교활해서 방사능 지역의 농산물을 전세계인들에게 먹이고자 한다”라고 비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정책이나 사안을 가지고 비판 또는 유감을 표하는 것하고, 그 문제를 민족성의 문제로 확대하여 비난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고정불변의 민족성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 컬렉터는 겐바 고이치로의 발언에서 일제 강점기 경성제대 교수 호소이 하지메를 떠 올렸다. 겐바 고이치로의 발언 속에는 식민지 시대 조선을 통치했던 제국주의자들과 식민사관의 논리가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당파성론과 호소이 하지메

    “일본 제국 지배하 한국인들은 잘 싸웠다.”

    정말로 그랬다. 일부 한국인들이 식민 지배에 협조한 대가로 부와 권력을 누리고 있을 때, 그 한편에서는 국내외 각지에서 풍찬노숙하며 독립을 위해 싸운 이들이 있었다. 김원봉 같은 이들은 의열단을 조직하여 암살, 파괴 활동 등을 전개하기도 했고, 홍범도·김좌진·지청천 같은 이들은 독립군 부대를 조직하여 일제와 교전을 벌이기도 했다. 대한독립군, 북로군정서, 한국독립군, 조선의용대, 한국광복군 등 우리들에게는 외우기도 힘들 정도로 비슷 비슷한 이름들의 많은 독립군 부대들이 있었다.

    “일본 제국 지배하 한국인들은 정말 잘 싸웠다.”

    일제 강점기 하 식민 통치자들도 한국인들을 이렇게 규정했다. 물론 독립을 위해 싸웠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였다. 한국인들끼리 모이기만 하면 싸운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이후 식민사관 중 당파성론으로 이론화되었다. ‘조선인들은 끊임없이 싸웠다, 그들의 역사를 보라, 당파싸움(당쟁)의 역사였다’는 논리였다.

    그런데 이 논리가 위험한 것은 조선인들의 정치를 ‘당파싸움’이라는 현상으로 파악했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현상의 원인을 ‘민족성’의 측면에서 찾았다는 점이다. 민족성은 선천적인 것이라 쉽게 바꿀 수가 없다. 이 관점에서 역사를 보자. 조선인들의 민족성에는 ‘당파성(黨派性)’이란 것이 있다. 이 당파성 때문에 조선인들은 2명 이상만 모이면 어김없이 당파를 만들어 싸운다. 그러니 그들 스스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정치를 잘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 논리는 이런 식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조선인들의 정치적 무능력을 강조하면 할수록 일본의 식민지배가 합리화된다.

    일본 학자 미시나 쇼에이(三品彰英)은 『조선사개설』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당파성론에 충실한 논리였다.

    유력한 권위 아래 모이고 당벌을 결성하는 것은 조선의 국민성, 민족적 결함이다. 붕당의 항쟁 시간은 세계적 기록이다.

    경성제대 교수였던 호소이 하지메(細井肇)는 지나치게 열정적인 성격 때문이었던지, 아니면 애매한 설명 방식을 스스로 참지 못했던지 조선인들의 당파성을 소위 ‘과학적인’ 방법으로 설명하려고 나섰다. 그는 조선인들의 혈액 샘플을 각 도별로 채취한 후 혈액을 분석했다. 그가 『붕당사회의 검토』라는 책에서 내린 결론은 이랬다. 조선민족의 피 속에는 다른 민족에 없는 검푸른 색소가 있어서 피 자체가 다른 민족과 달리 거무튀튀하다는 것이다.

    조선인에겐 특이한 더러운 피가 흐른다. 희대의 영웅도 붕당의 악폐는 근절시키기가 어렵다. 그 피를 어쩔 것인가.

    난감하게도 그는 과학을 핑계로 소설을 쓰고 말았다. 사람의 피가 인종이나 민족에 따라 어떻게 다를 수 있겠는가? 사실 인종이나 민족의 우열을 따져 타자를 대상화하고 지배를 합리화하는 역사는 오래되었다. 합리적 이성을 강조했다는 18세기 유럽의 계몽주의자들도 이런 인식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볼테르는 “흑인종은 사냥개와 똥개가 다른 것처럼 우리와는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다”라고 하여 흑인종을 열등한 인종으로 규정했다.

    인종, 민족뿐이 아니다. 여성의 열등성을 부각시켜 남성 우위의 질서를 합리화하는 것도 이의 확장판이었다. 독일 학자 파울 율리우스 뫼비우스는 남녀의 뇌 무게를 따져 남녀의 우열을 논했다. 그는 뇌 무게가 가벼운 여성은 지적으로 무능하고, 약한 뇌를 가졌기 때문에 여성이 지적 작업에 몰두하면 신체를 상하게 되고 그것은 결국 정신의 균형을 파괴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1900년에 그가 쓴 책 제목도 『계집들의 정신박약』이다. 호소이 하지메가 ‘과학적 연구’를 통해 민족의 우열을 증명해 보이고자 했다면, 그도 같은 방식으로 남녀의 우열을 증명해보이고자 했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 엽서 2매- ‘훤화(喧嘩)’와 ‘노동자의 낮잠’

    이와 관련하여 내가 소장하고 있는 흥미로운 엽서가 두 장 있다.

    일제 강점기 제작·판매된 이 엽서들은 조선의 풍속을 소개하는 일련의 엽서들 속에 포함되어 있다. 첫 번째는 ‘훤화(喧嘩)’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엽서로 전형적인 조선인 복장을 한 3명의 인물들이 싸우는 장면을 담고 있다. 영어 설명문은 ‘Quarrel of Corean’이라고 되어 있다. 또 한 장은 ‘노동자의 낮잠’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데, 지게꾼이 한낮에 지게에 기대어 낮잠을 자는 장면이다. 영어 제목은 ‘Midday hap of Laborea’로 되어 있는데, 끝의 ‘Laborea’는 ‘Labor’와 유사한 스페인어로 보인다.

    이 엽서들은 겉으로는 조선인들의 풍습을 다룬다고 하면서, 엽서를 보는 이들에게 특정한 메시지를 발신하고 있다. 이 엽서들은 조선 풍속이라는 제목을 붙였을 뿐 조선인들의 민족성이 싸움을 좋아하고 게으르다라고 규정하고 거기에 맞게 사진을 연출해 찍은 것이다. 엽서들을 다시 보자.

    [사진] 조선시대의 풍속을 소개한 일제 강점기 엽서. 위는 조선인의 싸움을, 아래는 조선 노동자의 낮잠을 담았다. (박건호 소장 엽서)

    먼저 싸움하는 장면을 담은 엽서.

    이 엽서 속에는 서로 뒤엉켜 싸우는 조선인 3명의 모습이 매우 과장되어 있다. 특히 제일 오른쪽에 돌을 들고 머리를 치는 남성의 자세는 부자연스럽기 짝이 없다. 실제 싸움 장면을 찍었다기보다는 연출된 사진임이 분명하다. 다음 지게꾼의 낮잠 엽서. 이 엽서에는 낮잠 자는 지게꾼을 엽서 가운데 배치되어 있고, 그 뒤에 아내로 보이는 한 여성과 자녀로 보이는 아이들 6명이 굳이 배경으로 세웠다. 그리하여 단순히 편히 오수를 즐기는 한 지게꾼의 낮잠 풍경이 아니라 특정한 시각으로 이 장면을 보도록 했다. ‘굶주리는 처자를 아랑곳하지 않고 무책임하게’ 낮잠이나 자는 게으르고 무능력한 가장의 모습을 읽도록 했다. 능력도 없는 사람이 자식은 또 왜 저렇게 많이 낳았을까. 이 사진 역시 연출한 것임이 분명하다. 이처럼 그들은 조선의 풍속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불순한 의도를 섞고 재가공해서 하나의 편견을 심어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엽서들도 조선인들의 열등함을 설파했던 식민지 권력의 이해와 의도를 충실히 구현하고 있다. 이 세상 어디에 싸움을 안하는 민족이 있으며 (세계사는 전쟁사이기도 하다), 또 낮잠을 자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가? 지중해 연안이나 라틴 문화권의 나라들에서는 시에스타(Siesta)라는 풍습도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민족의 특징을 선천적인 특징으로 규정해서 비하나 우열의 증거로 삼는 모든 언설은 사실과도 부합되지 않을뿐더러 그 의도 또한 불순하다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민족성을 들먹이면서 민족의 우열을 논하는 이런 논리가 옛 시대의 유물이 아니라 지금도 어디선가 면면히 계승되고 있었던 것이다. 도쿄 올림픽 당시 한국 자체 급식 센터 운영에 대해 “조선인들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못한다”라던 겐바 고이치의 비아냥이 가볍게만 들리지 않았던 이유이다.

    충격과 설레임

    컬렉터가 식민지 시대 일본인들이 조선인의 민족성을 어떻게 규정했는지 그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것은 사실 오래되었다. 위에서 소개한 엽서 2매도 그래서 수집했던 것이다. 그런데 저 엽서 2매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자료를 수집한 일이 있다. 다음은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다.

    벌써 20년이 지난 2000년대 초반 나는 경매에서 얼핏 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책자를 만나게 되었다. 한참 수집에 재미를 붙이고 있던 시기 그 책은 한마디로 나에게 ‘충격과 설레임’이었다. 『조선인의 사상과 성격』이라는 제목의 이 책은 1927년 조선총독부가 한국에 대한 효율적인 식민통치를 위해 만든 비밀 자료였다. 책 표지 왼쪽에는 ‘秘’라고 쓴 도장이 찍혀 있었다.

    [사진] 조선총독부가 1927년 대외비 자료로 만든 『조선인의 사상과 성격』 표지(박건호 소장)

    이런 ‘비밀 자료’들은 컬렉터들을 설레게 한다. 컬렉터는 남들이 가지지 못한 자신만의 컬렉션을 구성하는 데 열일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그것은 삶의 기쁨이자 즐거움이다. 흥분한 나는 수십 만원의 가격으로 낙찰받고 얼마 후 책을 우편으로 받아 보게 되었다. “조선을 이해하는 데는 조선인의 사상과 성격을 살피는 것이 가장 우선적인 조건이다”라는 서문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부산중학교’ 소장인이 찍힌 것으로 보아 총독부에서 각 학교 교장들에게 배포한 것으로 추정된다. 표지에 쓴 ‘대외비 조사자료 제20집’이라는 설명을 보아 총독부가 통치의 기초자료로 삼기 위해 만든 일련의 책자 중 하나로 보였다.

    일본어로 된 이 책자는 도쿄 제국대학 출신의 일본 학자 무라야마 지쥰이 엮은 것이었다. 책의 주요 목차는 다음과 같았다. 1편은 ‘조선인 개관’이라는 제목 하에 조선인의 자랑, 러시아인이 본 조선인, 미국 관광단이 받은 인상, 조선인의 건강, 시베리아의 조선노동자, 일본 내의 조선노동자, 조선인의 사상적 경향이라는 소제목으로 구성되었다. 2편은 ‘조선인의 성격’이라는 제목 하에 일반적 성격, 조선인의 성격관 예시가 밑에 붙어있다. 3편은 ‘조선의 사회적 경향’이고 그 밑에 사회운동, 사상의 추세, 결합과 협력, 조선의 세태가 있고, 4편은 ‘정치 및 경제 사상’이라는 제목 하에 정치사상, 구시대의 정치현상, 경제부진의 원인, 소(牛)와 양반, 경제적 악습이 있고, 5편은 ‘신앙사상’, 6편은 ‘조선의 문화사상’, 마지막 7편은 ‘조선의 문예사상’으로 마무리되고 있다.

    나는 이 책을 혼자 보기가 아까웠다. 일단 번역을 해보고 내용이 괜찮으면 광복절을 즈음해서 약간의 해제를 붙여 책으로 펴낼 창대한 계획까지 수립하고, 번역자를 물색했다. 나의 초보적인 일본어 실력도 실력이거니와 그 책을 번역할 시간도 부족했다. 당시 KAIST에 다니던 제자 P양이 일본에 살다 와 일본어가 능한 친구라고 J군을 소개하여 그에게 번역을 부탁하였다. 번역은 두어 달만에 끝났는데, A4용지 80페이지 정도 분량으로 한 장당 1만원씩 계산해 80만원을 지불했다. 번역 원고를 대략 검토해 보니 꽤 괜찮은 내용이었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의미있는 책 하나를 낼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마음이 설레였다. 광복절까지 시간이 촉박했다.

    그로부터 얼마쯤 지났을까.

    헌책방에 갔다가 나는 다시 충격적인 책을 발견했다. 책 서가에 꽂혀있는 책, 제목은 『일제식민관료가 분석한 조선인–사상과 성격적 측면』 (S출판사, 하00 옮김)!

    헉!

    들춰보니 총독부 대외비 조사자료 제20집 『조선인의 사상과 성격』이 분명했다.

    이게 번역본으로 이미 나와 있었다니…..

    나는 지난 두 달 동안 무엇을 한 것인가. 그리고 KAIST의 J군은 무엇을 했던 것인가.

    책은 출판 후 바로 절판되었던지 이전 검색했을 때는 분명 없었던 책이다. 아니면 급한 마음에 검색을 대충 했을 수도 있겠다. 헌책방에서 발견한 그 책은 광복 50주년인 1995년에 펴낸 것이었다. 황당함과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나는 책을 사서 서둘러 집에 왔다. 그리고 번역본의 서문을 펼쳤다. 옮긴이 서문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1984년 여름 쓰꾸바대학 도서관에서 옛 소장했던 서적 및 사료를 뒤적이며 조선총독부의 예산 관련 자료를 찾기에 혈안이 되어있던 나에게 충격과 설레임으로 마주쳤던 문서가 있었다. 바로 분류되지도 않은 채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던 『조선인의 사상과 성격』이란,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대외비 조사 자료였다. 1927년 조선총독부로부터 기증받았다는 표기와 함께 “조선을 이해하는 데는 조선인의 사상과 성격을 살피는 것이 가장 우선적인 조건이다”로 시작되는 서문을 읽고 나서 목차로 눈길을 돌렸다….

    [사진] 1995년 발간된 [조선인의 사상과 성격] 번역본. 수집 초창기 컬렉터에게 허망함과 함께 깨우침도 준 책이다. (박건호 소장)

    이렇게 초보 컬렉터의 무모한 도전은 허망하게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그런데 나는 당시 많은 시간과 돈을 쓸데없이 허비하고 말았지만, 그것이 완전 허사가 아니었다.

    충격과 설레임!

    서문에 분명히 이렇게 씌여 있었다.

    그도 이 책을 발견하고 나와 똑같은 느낌을 가졌구나.

    사실 수집 초기 내 수집 활동은 매우 외로운 것이었다. 가족을 포함하여 내 주위의 많은 이들이 옛 자료들을 모으고, 심지어 많은 비용을 들이는 그 일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이 책의 옮긴이 서문에서 수집 세계의 동지를 만났다는 것에 큰 위안이 되었다. 물론 그 번역자는 연구자일 뿐 수집가가 아닐 수도 있지만, 그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옛 자료를 보고 떨리고 설레고, 흥분하고 충격을 받으며 그것들과 교감하고 대화하는 이들이 주변에 같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내겐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것으로 80만원은 퉁치기로 했다.

    나와 비슷한 관심과 고민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을 만났다는 즐거운 경험만이 아니었다. 일단 몇 달간의 설레임과 흥분을 가져다 주었고, 번역한 학생에게는 큰 돈은 아니지만 아르바이트 자리가 생긴 게 어딘가. 게다가 그 일로 인해 지금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이런 글도 쓸 수 있는 것이다.

    따져보면 세상 사는 게 다 그렇고 그런 게 아니던가! 정해진 목표대로 일이 진행된다면 얼마나 무료하고 밋밋할 것인가? 이런 돌출과 일탈, 그리고 의외의 일들이 우리 삶을 훨씬 재미나고 풍부하게 한다. 분명 쓸모없는 일로 보이지만 결코 쓸모없는 일은 없는 것이다. 일찍이 장자(莊子)는 ‘무용지용(無用之用)’을 말한 적이 있다. ‘쓸모없음의 쓸모’라는 뜻이다.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의미가 깊다. 장자의 ‘무용지용’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장자가 혜자(惠子)에게 들려준 말이다.

    쓸모없음을 알아야 비로소 쓸모있음에 대해 함께 말할 수 있다네.
    무릇 땅은 넓고 또 크지만 사람이 걸을 때 필요한 것은 발 디디는 만큼의 크기라네.
    그렇다고 발 디딘 곳만 남겨두고 나머지를 파내 황천까지 이른다면,
    사람들이 밟고 서 있는 그 땅은 쓸모있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쓸모없는 것이 쓸모가 있다는 것 또한 분명하지 않은가?

    -『莊子』, ‘잡편’ 중

    [컬렉터의 서재] 연재 칼럼 링크

    필자소개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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