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물 콧물로 찍어낸 백선생의 이야기 소설
        2006년 12월 07일 07:1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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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발자국만, 한 발자국만 밀어내보자. 한 발자국만 더 밀어내보다 쓰러지자. 여기서 주저앉으면 패배보다도 더 끔찍한 나락이다. 한 발자국만 더 밀어내보자. 바서질 때 바서지더라도……."

    거짓말을 못하고 그저 착한 것이 병인 ‘어진’이라는 한 소년이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어진이가 남을 도와주려 할수록 가혹한 형벌을 가했다. 운동권 선배를 안다는 이유로 빨갱이가 되고, 사람의 목숨을 살리려다 도리어 살인범이 되고, 동료를 구하려다 건강과 직장을 잃고, 결국 보증으로 또 모든 걸 잃고 만다.

    그럴 때마다 어진이는 다짐했다. 한 발자국만 더 밀어내보자고. 남을 원망하는 대신 다시 스스로 용기를 내어 한 발자국만 더 밀어내며 그렇게 평생을 살았다. 백기완(73·통일문제연구소장) 선생이 눈물과 콧물을 찍어내며 온 몸으로 ‘어진’이의 삶을 구연했다.

    6일 저녁 7시 서울 대학로 소극장 ‘갈갈이홀’에서 입으로 빚는 그의 ‘이야기 소설 창작발표회’가 열렸다. 이날 행사는 KTX 여승무원, 장기 파업중인 노동자들, 전노련 및 개인적으로 신청한 일반 시민 180여명이 함께 했으며, 서로의 숨소리마저 느끼게 해주는 소극장의 작은 공간은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물어 버렸다.

       
      ▲ 이날 관객들은 백기완 선생과 함께 행사에 앞서 ‘님을 위한 행진곡’ 을 불렀다.
     

    입으로, 몸짓으로, 아우성으로 빚는 ‘말림'(이야기 소설). 오늘의 소설 형식이 있기에 앞서 우리에겐 온 몸으로 빚는 이야기 소설, 다시 말해 ‘말림’ 이 있어왔다.  컴퓨터가 등장하면서 또 다시 일어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이야기 소설의 ‘숨결’이 그에 의해 올올히 되살아났다. 

    그는 이미 1969년과 1970년 두 차례 ‘말림’을 기획했다. 그러나 1969년에는 박정희 정권의 삼선개헌에 맞서느라, 또 1970년에는 전태일 열사의 뜻을 살리느라 번번이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이번에 선보인 이야기 소설 ‘따끔한 한잔’은 오늘의 현대 문명이 한 착한 아이를 어디까지 쭉정이로 만드는지 그 잔혹한 과정을 담담히 보여주고 있다. 어진이는 첫 사랑을 위해 학비를 내주고, 운동권 선배의 행방을 숨기고, 깡패와 대신 싸워 목숨을 구해주고, 동료의 빛 보증을 서주는 등 매번 계산 없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걸고 남을 도와준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배신과 상처뿐. 첫 사랑도, 선배도, 깡패도 모두 세상이 변했으니 이젠 사람이 변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아무런 불평이 없는 어진이에게 힘이 되어 주는 건 따뜻한 무릎을 빌려준 젊은 거지와 일을 해 열 손가락이 닳아버린 노파뿐이었다. 

    이런 어진이의 삶에도 잠깐 빛이 들어오는가 싶으면 그는 먼저 흥이나 즉흥적으로 노래를 뽑았다.  또 어진이의 삶이 고달파지면 백씨의 어깨는 분노에 들썩이며 그의 얼굴은 이내 눈물과 콧물로 뒤범벅이 됐다. 

    이어 어진이의 삶이 무거워 관객들이 의기소침해 질 때면 "도둑질도 손 바닥이 맞아야 한다"며 "왜 박수를 안 치냐?  덕지덕지 묻은 내 주접이 추접스러워 타락한 영감처럼 보이냐?"라며 이내 호통을 치면서 관객들을 가만히 두지를 않았다. 처음엔 주춤한 관객들도 백 씨의 몸 짓에 동화돼 “옳소”,“좋다”라고 추임새를 넣어주며 울다 웃기를 반복하였다. 

    “수십 년 굶어보면 기름이 찰찰 흐르는 쌀밥에다 따끈한 미역국이 먹고 싶기보다도 ‘따끔한 한잔’이 먹고 싶어. 너무 많이 굶으면 속에서 열이나. 한잔을 먹어야 열도 없어지고, 또 온 몸이 쑤시는 것도 사라지지.”

       
     ▲ 보통 사람 어진이의 삶에 대해 얘기하며 슬픔에 잠긴 백기완 선생.
     

    노파에게 ‘따끔한 한잔’을, 난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얻어먹은 어진이는 죽는 순간에도 젊은 거지들을 보며 “강추위를 안주로 삼아 따끔한 한잔을 사줘야 하는데”라고 남 걱정을 하며 눈을 감는다. 따끔한 한잔은 그에게 영혼을 위로하는 한잔이었다. 아주 오랜 시절 굶으며 목이 말랐던 어진이에게 고된 삶을 위로 받는 ‘한 잔’이었다.

    "참 사람은 배고플 때 참지 않아. 참는 건 비겁한 짓이야. 술 한 잔이라도 외치고 쓰러져야 돼! 근데, 또 남에게 술도 살 줄 알아야 돼. 배고픈 사람, 길거리에서 사는 사람, 직장에서 짤린 사람들에게 먼저 술을 사주는 사람이 바로 참 사람이야."

    아파도 아프다고 단 한번도 말하지 않던 어진이가 젊은 거지에게 ‘참사람’에 대해 유언을 남겼다. 이 평범한 말의 울림은 어진이의 따끔한 불씨를 관객들의 가슴 속에 심어놓았다. 어떤 이는 기립 박수로, 어떤 이는 말없는 눈물로, 또 어떤 이는 환호성으로 어진이의 삶에 힘찬 응원을 보냈다.

    특히, 백선생의 초청에 화답하기 위해 준비한 KTX 승무원의 ‘고향설’ 합창은 평생 떠돌다 스러져간 어진이의 삶을 환기시켜 공연장의 분위기를 숙연하게 만들기도 했다.  

    전국노점상협회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민주노동당 전서울시장 후보 김종철(36)씨는 “후배로서 마음이 따끔했다. 연세도 많으셔서 쉽지 않을텐데, 저희가 해야 할 일을 지금도 대신해 주고 있는 것 같아 책임감을 느낀다”면서 “우리 사회의 보통 사람인 어진이 같은 인물이 희망이 될 수 있도록 더 열심히 뛰어야겠다”고 관람 소감을 전했다.

    신문 광고를 보고 직접 신청해서 참석한 김장권(43)씨는 “오래전부터 존경해왔던 백기완 선생의 변하지 않은 여전한 모습이 좋았다. 앞으로도 많은 사람을 일깨워 줄 수 있는 따끔한 말들을 계속 해 주셨으면 좋겠다”면서 “백 선생의 말을 듣는 사람이나 우리 사회도 이젠 그 말에 호응 할 수 있게 함께 성숙하고 역량을 키웠으면 한다”고 말했다.

    스스로 "세계 최초의 이야기 소설가" 라고 자신을 소개한 백선생은 앞으로도  제 2, 3의 ‘말림’ 을 발표할 예정이며, "오랫동안 무지랭이들의 삶 속에 굶이쳐오던 ‘말림’을 다시 살려보겠다"노라고 다짐했다. 이 다짐을  확인하기 위해 관객들과 백선생은  무대를 옮겨 깊어가는 겨울  밤을 안주 삼아 ‘말림’  꽃을 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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