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제인 차민수,
    파란만장한 드라마 인생
    [현대바둑 사이드스토리] '갬블러'
        2021년 08월 20일 11:1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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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바둑 사이드스토리] “천하제패 꿈꾸었지만 미생으로 끝난 윤기현”

    1989년 제2회 후지쯔배 세계바둑대회의 미국대표가 선발되자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에 술렁거렸다. 미국대표로 선발된 인물은 한국계 미국인 차민수(지미 차) 4단(한국기원)이었기 때문이었다. 4단이라는 자격도 차민수가 미국에서 한국프로의 이름으로 바둑 보급에 공헌한 이유로 한국기원이 특별승단해 준 것이다.

    당시만 해도 일본기원은 노장기사나 유학을 겸한 젊은 기사들의 미국 진출을 경제적으로 후원하고 미국 주요 도시에 일본기원이 지원하는 기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기원은 일본바둑의 세계화를 위해 “GO’라는 간판을 달았고 국제 바둑의 표준어로 밀고 있었다. 이민 전, 차민수는 한국기원 초단이 전부였다. 일본기원 7단이 기원을 운영하는 것이 현실인데, 초단인 차민수는 미국인 아마추어들이 보기에는 설득력이 떨어질 수 있었다. 한국기원은 사상 처음으로 규약을 개정해 차민수를 특별승단해 주며 체면치레를 했다.

    후지쯔배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오픈전이 아니라 나라와 대륙에 인원이 배정된 대회였다. 최초의 세계대회라는 위상에 집착한 일본기원은 유럽과 미주에도 한 장씩을 배정했다. 일본기원이 아마추어 수준에 불과한 대륙에 배정한 것은 복안이 있었다. 세계대회라는 명칭을 포장하는 동시에 숨겨둔 흥행카드가 있었기 때문이다.

    피아노를 치며 표창을 던지던 승부사

    미국에 있는 일본기원에서 미국인 한 소년이 발군의 실력을 보이자 책임자는 부모에게 일본유학을 권유했다. 13살 당시 데이비드 레이몬드의 기력은 프로와 석점에 고미(석점과 넉점 사이)였다. 흔히 말하는 아마 최고수 수준이었다. 한국으로 말하면 13살 미국인 아마국수가 등장한 것이다. 부모들은 생경한 나라에 가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일본기원의 도움을 받아 아예 이민을 결정했다.

    차민수

    데이비드 레이몬드는 조금씩 파란을 일으키며 기대대로 일본기원에 입단했다. 일본바둑의 세계화에 상품성 있는 인물이 등장한 것이다. 후지쯔배가 시작되자 일본기원 소속인 데이비드 레이몬드는 미주예선에 참가했다. 소속 논란이 일어났지만 일본기원은 이를 가볍게 무시했다. 하지만 일본기원의 발상은 처참하게 무너졌다. 한국기원 소속인 차민수가 레이몬드를 가볍게 누르고 미국대표로 후지쯔배 본선에 나타난 것이다. 차민수가 공식대국을 한 것은 무려 15년 만이었다.

    엉뚱하게도 후지쯔배 흥행의 주역은 차민수였다. 차민수는 32강전에서 일본의 중견 최강 중 한 명인 야마시로 히로시 9단을 시작부터 코너로 몰며 백기를 받아냈다. 설마가 사람을 잡았다. 16강전에서 일본기원의 최대 기전인 기성전 도전자로 유력시 되던 오히라 슈조 9단마저 가볍게 따돌렸다. 8강의 상대는 공교롭게도 조훈현이었다. 바둑이 중반전까지 팽팽하게 흘러가자 조훈현은 주특기인 흔들기에 나섰다. 천하의 모두가 무너지는 조훈현의 흔들기에 차민수는 반격으로 나서며 역으로 진압에 나섰다. 관전을 하던 한국기원 관계자들의 입에서는 “조훈현의 패배로 끝난 것 아닌가”라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후반부에 프로라면 이해하기 어려운 차민수의 실책이 나오며 자멸했다. 대국이 끝난 후 차민수가 일부러 져준 것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왔다.

    이 대국을 놓고 차민수는 10년 동안 인터뷰가 있을 때마다 매번 질문에 시달렸다. 귀찮아진 것일까. 아니면 사실이었을까. 후일 차민수는 “조훈현을 이기는 것이 부담은 되었다”고 회고했다. 져준 것은 아니지만 충분히 이길 수도 있었다는 뉘앙스였다. 파란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8강으로 차기시드를 받은 차민수는 3회 대회 1회전에서 조치훈을 만났다. 차민수는 조치훈 특유의 실리 후 세력 폭파작전을 무력화시키며 완승했다. 조치훈은 머리를 쥐어 잡으며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조치훈은 주요 대국에서 자신이 불리하거나 실착을 확인하면 그런 행위가 습관이었지만 이날 대국은 유독 극심했다. 차민수가 화제의 주인공으로 오르자 바둑 외의 차민수 직업이 부각됐다. 텍사스 홀덤 전미 챔피언. 언론들은 연일 차민수를 소개하며 ‘포커 세계챔피언’, ‘세계 8강’이라는 닉네임을 수여했다.

    차민수는 영등포의 엄친아였다. 모친은 영등포의 갑부 중의 갑부였다. 영등포의 랜드마크인 경흥극장과 그 일대 알짜배기 건물의 소유주였다. 남편과 일찍 사별한 모친은 차민수에게 엘리트 코스를 가르쳤다. 피아노와 바이올린 등 음악을 배우게 했고 만일을 위해 쿵푸와 미술학원에도 보냈다. 후일 차민수는 회화 개인전을 열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음악교습은 고액의 개인선생을 두었다. 24시간도 모자란 차민수에게 작은 일탈이 두 개 있었다. 동네 형들을 따라 뒷산에 표창을 던지러 다닌 것이다. 얼마 후 동네 형들은 그가 던지는 표창 실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사람을 살상할 수준의 실력을 보여준 것이다.

    가장 큰 일탈은 따로 있었다. 인생이 호기심 자체였던 차민수는 남는 시간을 이용해 영등포의 한 기원에 출몰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본격적으로 바둑을 두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쩌다 두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어깨 너머로 관전할 뿐이었다. 잠시 후에는 피아노를 배워야 하는 시간이었고 무술학원에 가야 했다. 장시간을 할애해 바둑을 두는 것은 불가능한 인생이었다. 모친의 기대대로 대학을 입학한 차민수는 우연히 대학바둑 최강전에 참가해 덜컥 우승을 차지해 버렸다. 그러자 주변에서 프로 입단도 가능하다면서 도전해보라고 부추겼다. 자신의 기력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했던 차민수는 단순히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대회에 입단대회에 참여했고 슬그머니 한국기원 초단에 이름을 올렸다. 해마다 단 두 장인 입단증을 차지하기 위해 전국의 고수들은 목숨을 걸고 해마다 대국에 임했지만 차민수는 취미 겸 호기심으로 입단해 버린 것이다.

    입단 얼마 후 차민수는 공군(방위)으로 입대를 했다. 공교롭게도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조훈현이 공군에서 현역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보라매 공군본부의 배려로 두 사람은 무려 수백 판을 두었다고 한다. 당시만 하더라도 군복무 중에도 부대의 배려가 있으면 영리행위가 가능했다. 군복무 중에 바둑대회에 참여하는 것이 가능한 시절이었다. 연습 상대가 없었던 두 사람은 하루가 멀다 하고 대국을 하며 신수와 변화도를 실험했다. 누구보다 조훈현을 잘 알고 있는 차민수가 후지쯔배에서 어쩌면 이길 수도 있었던 이유였다.

    프로 갬블러가 되다

    방위를 끝낸 차민수에게는 수많은 선택지가 있었다. 하지만 운명은 차민수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다. 어린 시절부터 알던 여자 친구가 예기치 않은 임신을 하게 되었고 탐탁지 않았던 모친은 두 사람을 누나가 있는 미국으로 이민을 보내버렸다. 계획에 없던 이민에 차민수는 적응하지 못했다. 카지노를 돌아다니면 돈을 탕진했고 마약에도 손을 대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가정마저 파탄이 나자 귀국을 선택했지만 모친은 단호했다. 모친은 공항에서 편도 비행기표 한 장과 얼마간의 돈을 건네며 미국으로 다시 보내버렸다. 사실상 추방이었다. 차민수는 공항 바닥에 돈을 던지고 모친에게 생전에는 다시 보지 않겠다며 비행기에 올랐다.

    낡은 자동차 한 대가 재산의 전부인 차민수는 노숙자나 마찬가지였다. 차에서 쪼그려 잠을 자고 햄버거 하나로 하루를 때우며 거리를 전전했다. 운명은 다시 기원이라는 간판을 보면서 반전됐다. LA 구석에 자리 잡은 나성기원 간판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일시적으로 버틸 공간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기원에는 한인들만이 아니라 일본인들도 많이 들락거렸다. 차민수는 기원에서 개미굴을 파기 시작했다. 기원에 출몰하는 일본인 중에는 아마 5단 이상의 고수들도 상당수였다. 차민수는 그들을 상대로 내기바둑을 두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 5단에게 두 점을 접어 줄 테니 내기바둑을 두자고 하면 열이면 열이 걸려들었다. 차민수는 담장을 걸으며 교묘하게 대국을 연출했고 진실을 모르는 개미들은 계속해서 굴로 빠져들었다.

    내기바둑만 둔 것은 아니었다. 약간의 실탄을 마련해 숨통이 트인 차민수는 기원에 오는 사람들을 상대로 지도대국을 두어주었고 복기를 해주었다. 기원이 흥행하자 원장은 잠자리와 먹을 것을 챙겨주었다. 탈출구를 마련한 차민수에게 운명의 여신이 찾아왔다. 어느 날 미국인이 기원을 찾아왔는데 원장의 환대가 다른 사람과는 달랐다. 원장의 부탁으로 대국을 하면서 기력을 물어보자 5급 정도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아마 고수인 줄 짐작했던 차민수는 허탈했다. 차민수가 7점이라고 말하자 미국인은 원장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7점으로도 이기는 사람이 있느냐는 표정이었다. 7점은 무의미했다. 대마가 몰살하며 대국은 싱겁게 끝났다. 두 번째 판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인은 조언을 요청했지만 복기를 해주어도 이해할 기력이 되지 않았다. 몇 판을 더 둔 미국인은 다시 오겠다며 기원을 빠져나갔다.

    차민수는 미국인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원장의 답변은 그가 프로 수준의 갬블러라는 것이었다. 도박에도 프로대회가 있다는 사실도 놀라왔지만 주 대회 상금이 몇 만 달러 이상이라는 이야기는 더 충격이었다. 전미대회 상금은 십만 달러라는 소리에 차민수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80년대 초에 우승상금이 십만 달러라니 상상도 되지 않았다.

    차민수에게 포커의 확률을 가르쳐준 UCLA 수학박사 그린스틴

    차민수는 새로운 세계에 도전하기로 결정했다. 바둑을 배우려는 갬블러에게 바둑을 가르쳐주고 전문적으로 포커를 배우기로 한 것이다. 천재 끼가 다분했던 차민수는 빠르게 흡수를 했고 주 종목을 가장 베팅이 난무하는 텍사스 홀덤으로 결정했다. 하지만 포커를 직업으로 삼는다는 것은 그 이상이 필요했다. 승부사에게 목표가 생기면 길은 보이기 마련이었다. 캘리포니아주립대 포커학 교수인 치프 존슨의 취미가 바둑이었다. 갬블러도 배운다는 포커학 교수에게 바둑을 가르쳐주고 포커의 이론을 체계적으로 공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민수는 지역대회를 석권했고 텍사스 홀덤 전미대회를 우승하며 화려하게 탈각했다. 삶의 여유가 생기자 취미였고 자신을 다시 구원해 준 바둑을 틈틈이 돌아보았다. 그 때 운명처럼 후지쯔배 미국 대표 선발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승부사인 차민수는 참전을 결정했다.

    ** 차민수가 프로 갬블러로 연간 백만 달러를 번다는 것이 과장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오해를 조금 정리하면 차민수가 활약한 시기는 80년대 초중반이었다. 대회의 숫자가 너무 많아지자 데이터를 정리하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이후였다. 성공과 후지쯔배로 화제를 모은 차민수는 이후 국내를 오가며 다른 길을 찾기 시작했다. 포커가 다시 취미가 된 것이다. 간간히 참여한 90년대 중반 이후의 메이저 대회에서도 차민수는 5위권에 근접하는 성적을 기록하기도 했다. 1996년에는 수퍼볼 슬림진 토너먼트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취미 그 이상이 아니었던 차민수가 기원을 틈틈이 들르는 어느 날, 교복을 입은 더벅머리 학생이 기원에 나타났다. 서봉수였다. 모친 탓에 삶이 버라이어티 했던 차민수는 대학 입학을 앞둔 고등학교 3학년이었고, 집안일을 도우며 하루하루를 살아야 했던 서봉수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서로 바쁜 두 사람이 우연히 조우하는 날은 한 시간에 다섯 판을 둘 정도였다. 석 점이던 서봉수는 몇 개월 만에 차민수를 정선까지 따라잡았다. 두 사람은 여전히 자신들의 아마 최고수 수준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대학입시를 준비해야 했던 차민수는 더 이상 남은 시간이 없었다. 차민수가 더 이상 출몰하지 않은 얼마 후 대방동 단칸방의 흙수저였던 서봉수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프로바둑 우승상금이 집 한 채 값이라는 이야기였다. 서봉수는 가방에 교과서 대신에 바둑책을 넣고 학교에 등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명의 고등학생 서봉수는 차민수보다 먼저 조용히 한국기원에 초단으로 이름을 올렸다. 스승이 없었던 서봉수의 스승은 차민수가 혹시 아니었을까. 두 사람이 운명처럼 다시 만난 것은 18년 후인 후지쯔배였다.

    국제인 차민수, 그리고 마지막 도전

    천안문 항쟁이 시작되자 중국의 기득권들은 전방위적으로 진압에 나섰다. 기득권들은 무력 진압에만 집중하지 않았다. 국제 여론을 의식해 다방면으로 항쟁을 왜곡하기 위해 저명한 소설가, 시인들을 동원했다. 그 중에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중국의 바둑기사들이 포함되었다. 총 앞에 중국 기사들은 무력했다. 그런데 장주주 9단이 시위에 나서면서 연인인 루이나이웨이와 함께 수배령이 내려지자 둘은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결혼한 이들은 일본기원에서 활동하기를 원했지만 중국과의 관계가 부담스러운 일본기원은 결정을 유보했다.

    우연히 이 사실을 알게 된 차민수는 한국행을 주선했다. 2000년 국수전은 충격 그 자체였다. 본선에서 유창혁을 제압한 루이나이웨이는 도전자 결정전에서 이창호마저 누르고 도전권을 획득했다. 파란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전신(戰神) 조훈현을 상대로 난전을 거듭하며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여성기사가 우승을 차지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녀에게는 철녀(鐵女)라는 칭호가 수여됐다.

    1997년 모친의 건강이 악화되자 차민수는 그날의 다짐을 뒤로 하고 갬블러 생활을 청산하고 국내로 돌아왔다. 그리고 애증의 관계였던 모친의 곁을 묵묵히 지켰다. 모친이 세상을 떠나자 차민수가 다시 움직인 것은 카지노였다. 그 방식은 다분히 미국식(?)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외국인 전용 카지노’의 설립을 주장하는 편지를 연신 보낸 것이다. 이 독특한 상소문을 접한 참모 중 한 명이 차민수의 경력을 파악해보고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라고 판단했다. 노무현은 차민수를 한국관광공사 상임이사로 임명하고 외국인 전용 카지노 설립을 전담하도록 했다. 서울 힐튼호텔과 부산 롯데호텔에 외국인 카지노가 설립되었고 차민수는 매장과 영업 등 초창기 업무를 직접 챙기며 외화벌이에 나섰다. 임기가 끝난 차민수는 카지노인터내셔널그룹을 설립하고 카지노 컨설팅을 마지막 직업이라고 생각하고 일에 전념했다.

    왜? 2020년 새해 벽두, 한국기원 프로기사들이 모두 반문했다. 일흔 살의 차민수가 프로기사회장에 출마했기 때문이었다. 한국기원의 임원이라면 또 모를까, 할 일이 산적한 기사회장에 출마한다는 것을 모두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부와 명예를 다 가진 사람이 잘해야 본전도 안된다는 기사회장에 출마하는 것은 모두에게 뜻밖이었다. 독이든 사과나 마찬가지인 기사회장은 의욕적으로 누가 출마하기보다는 중견기사들이 논의를 거쳐 총대를 메는 자리였다.

    그런데 차민수가 기사회장에 출마한 이유는 다소 특별했다. 후배 기사들과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아직은 도전의 기회가 있는 한 젊은 기사가 고깃집에서 일한다는 소리를 듣고 충격에 빠졌다. 생활이 어려운 기사들이 많다고는 하지만 그 정도일 것이라고 차민수는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기사회장에 출마하면서 차민수는 두 가지를 대표공약으로 내세웠다. 대국료 제도의 부활이 맨 상단을 차지했다. 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대회에 참가해 대국을 하면 이기든 지든 대국료라는 것이 지급됐다. 우승상금 5천만원, 준우승상금 2천만원인 대회의 총 비용이 3억 원인 이유는 다른 비용도 있었지만 대국료가 차지하는 비용이 높았다. 예선은 당연히 조별 풀리그였고 한 판에 대국료는 십만 정도였지만 본선에 진출하지 못하더라도 풀리그의 특성상 여러 판을 두어야 하기 때문에 생활비 수준은 되지 않지만 반찬값 이상은 되었다. 대국료는 숨을 쉴 수 있는 통로였다. 본선에 진출하게 되면 대국료는 더 올라갔다. 도전권을 획득하지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 성적을 내면 시드 배정으로 본선에 잔류할 수 있게 된다. 대국료가 사라지면서 기사들에게는 최저생계비가 사라진 것이다. 연구를 해야 할 시간에 부업을 해야 하고 유망주는 도전의 기회에서 멀어졌다.

    대국료가 없을 경우 얼마나 허망한 일이 벌어지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얼마 전 끝난 농심신라면배 세계대회 선발전이었다. 한중일 세계대회인 농심신라면배는 5명씩 참가하는 팀전(우승상금 5억, 1인 1억)이다. 대회 방식은 독특하게도 이기는 사람이 계속 두는 연승전이다. 4대 천황 신박변신(신진서, 박정환, 변상일, 신민준)이 있는 한국이 우승하지 못하는 것은 여자양궁 단체전이 우승하지 못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문제는 선발방식이다. 국내랭킹 1위 신진서는 자동 선발되고, 예선을 거쳐 본선 3개조에서 우승한 3명이 선발된다. 1명은 후원사인 농심이 추천권을 행사한다.

    본선 최종전에서 최근 역주행하고 있는 30대 노장 원성진이 신민준에게 패하며 선발에서 탈락했다. 박정환과 변상일은 이미 자력으로 선발된 상태였다. 신민준은 져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대국이었다. 원성진이 선발되더라도 추천권은 99%가 아니라 100% 신민준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승부의 세계는 냉정했다. 신민준은 전면전을 마다하지 않았다. 예선부터 17연승을 하며 올라온 원성진은 1억은커녕 단 한 푼도 벌지 못했다. 대국료가 없는 현재 방식의 허점이 다시 확인된 순간이었다. 원성진이 추천될 가능성이 불분명한 것은 국내랭킹 앞 순위에 김지석과 이동훈이 있기 때문이다. 차민수는 최소생계비를 마련하는 안정장치와 이런 모순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메이저 기전이 생기면서 바둑팬들은 향수(鄕愁)를 호소했다. 실력만으로 대회 본선이 만들어지면서 과거의 전설들이 등장하지 못한 것에 대한 하소연이었다. 진로배(농심배 전신) 9연승의 서봉수를 보고 싶다거나, 해설가로 변신한 유창혁에게는 ‘우주류’를 다시 보고 싶다는 팬들의 이야기가 계속해서 늘어났다. 흥행 가능성을 직감한 한국기원은 기전 안에 시니어리그를 만들었다. 우승 상금은 절반도 안되지만 7단 이상만 참여하는 리그를 만든 것이다. 서봉수가 등판하고, 이창호까지 등판하자 판이 커졌다. 아마추어 팬들에게는 지존의 인기를 가진 손오공 서능욱, 최규병, 아마추어 고수를 상대로 조훈현이 넉 점을 접바둑을 둔다면 다섯점을 접는다는 ‘접바둑의 황제’ 김철중 등의 등장하면서 팬들은 열광했다. 거기에 유창혁이 이름을 올리자 차민수가 참전해 유창혁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는 일이 벌어졌다. 흥행이 성공하자 아예 시니어 대회가 만들어졌다.

    시니어 대회에 참전하던 승부사 차민수의 눈에는 다른 것이 들어왔다. 기전 본선에 나가지도 못하고 시니어 대회에 참가할 자격도 되지 않지만 과거 기대주로 불렸던 삼사십대 기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쩌면 이 기획은 고깃집에서 일하는 프로와 맥락이 닿아았다. 차민수는 ‘샌드위치 기전’을 만들겠다고 공약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공약이었다. 차민수가 기사회장 당선 후 코로나가 본격화되면서 활동범위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대국까지 비대면으로 전환되면서 바둑 전체가 위축되었다. 산적한 현안의 기사회에서 승부사 차민수는 또 어떻게 파고를 넘어 가는 승부수를 보여줄까.

    ** 2003년 SBS 드라마 ‘올인’의 실제 모델이 차민수다.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하는 드라마였기 때문에 노무현도 몇 편을 보았다고 한다. 일부에서는 누군가(?) 보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혹시 몰라 참모들이 드라마 내용을 요약보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후 차민수가 한국관광공사 상임이사가 된 것은 우연(편지)은 아닐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2028년 하계 LA올림픽에 포커게임의 백미인 텍사스 홀덤이 종목을 포함됐다. 차민수는 지금부터 준비가 필요하다고 단체들에게 충고하고 있다.

    드라마 올인 촬영 현장을 방문한 차민수(가운데)

    필자소개
    인문사회과학 서점 공동대표이며 레디앙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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