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프가니스탄의 슬픔,
    탈레반 집권에 대한 어떤 망상들
    [시선] 민족주의는 '안경'이 아닌 '안대' 같은 역할
        2021년 08월 19일 10:4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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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 나는 페이스북을 읽다가 이런 글을 보았다. “아프간이 처한 작금의 상황을 두고 반제해방투쟁의 승리라 말할 이들이 나올까 무섭다.” 사람들의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고’, 실제로 그런 주장들이 나오고 있다.

    “현재의 사태는 미국 입장에서는 패배요 철수지만 아프간 민중의 입장에서는 외세 지배를 끝내고 자력으로 독립을 성취한 것으로 평가될 만하다.” 민중의 소리라는 매체에 실린 주장이다. 나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왜 ‘민족 자주가 최고의 가치’라는 시각에서 바라보면 안 되는지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아프가니스탄의 역사에 대한 간략한 고찰

    참혹하지 않은 전쟁이란 없을 것이지만, 아프가니스탄 땅에서 일어났던 전쟁은 참으로 길고도 참혹했다. 역사를 살피면,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땅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군대, 다양한 이슬람 제국들, 칭기스칸의 몽골 제국, 제국주의 영국 등의 침공을 받았었다. 현대에 그 땅은 영국의 지배를 받다가 1919년에 독립을 쟁취했다. 그들이 영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제국주의 국가들의 힘이 빠진 상태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무함마드 자히르 샤는 1933년~1973년까지 아프가니스탄 왕국의 왕이었다. 그의 40년의 재위 기간에 아프가니스탄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다. 그는 1960년대에는 입헌군주제를 도입했고, 출판과 정당 설립의 자유를 인정하는 등 이슬람 왕국치고는 진보적인 정책들을 펼쳤다.

    아프가니스탄의 내전은 1973년에 시작되었다. 1973년에 자히르 샤가 병을 치료하기 위해 이탈리아에 갔었는데, 그때 무함마드 다우드를 중심으로 한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아프가니스탄 왕국의 왕 자히르 샤는 왕위에서 폐위되었고, 그는 29년 동안 이탈리아에서 망명 생활을 하였다.

    쿠데타로 집권한 세력은 정통성을 인정받기 힘들기 마련이고, 그 나라는 다양한 부족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각각의 부족들은 무력을 갖추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 아프가니스탄 내전이 시작되었다. 혼란이 계속되었는데, 1978년에는 사회주의 세력이 권력을 잡게 된다. 누르 모하마드 타라키가 이끄는 사회주의 정부는 근대화 개혁을 시도했다.

    그런데 전통 무슬림 세력들이 이를 받아들일 리 없었고, 이들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사회주의 정부는 이러한 반동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저항 세력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무려 2만 7천여 명이 처형당했다. 1979년 4월에 아프가니스탄 대부분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사회주의 정부는 통치력을 상실했다.

    아프가니스탄 사회주의 정부는 이러한 상황에서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소련)에 지원을 요청했고, 소련군이 1979년 12월에 아프가니스탄 내전에 개입했다. 1979년부터 1987년까지 소련군과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을 한 축으로 하고, 미국, 영국,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중국 등이 지원하는 다양한 반군을 다른 축으로 하는 내전이 이어졌다. 반군 세력은 무자히딘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어린 시절 나는 아프가니스탄의 비극은 전혀 알지 못했지만,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 한국이 나가지 않았다는 것과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동구권’이 불참했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1948년 이후 올림픽 보이코트가 벌어진 것은 1980년이 처음이었고, 지금 생각하니 그만큼 아프가니스탄의 내전은 현대사에 있어 커다란 일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1985년에 소련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던 고르바초프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할 계획을 세웠고, 서방 진영과의 여러 협상을 벌인 후 1989년에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을 철수한다. 소련군이 철군하자 아프가니스탄 내전은 이제 카불 정부군과 이슬람 반란군 사이의 싸움이 되었고, 사회주의 정부는 1991년에 붕괴하였다.

    하지만 내전은 멈추지 않았다. 무자히딘 세력은 균일하지 않았고, 그들 사이의 싸움이 계속되었다. 학생이라는 뜻을 가진 작은 단체 탈레반이 그 와중에 만들어졌는데, 이들은 파키스탄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고, 1996년에는 수도 카불을 점령하고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을 세웠다. 그들은 아프가니스탄 영토 대부분에 대한 장악력을 행사했지만, 2001년 9. 11 테러의 주범이라고 지목된 오사마 빈 라덴에 대한 미국의 복수극에 휘말리게 되었고, 미국과 영국 등에 의해 패퇴하게 되었다.

    새로운 국가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이 탄생했으나 내전은 멈추지 않았다. 탈레반은 파키스탄에 새로운 거점을 둔 채로 끝없는 전쟁을 이어갔다. 그리고 며칠 전에 다시 수도 카불을 장악했다.

    탈레반의 ‘승리’에 대한 어떤 시선들

    먼저 황대권이라는 이의 글을 인용한다.

    아프가니스탄 해방

    일제로부터 해방된 광복절인 오늘 아프가니스탄이 미제로부터 해방되었다.

    탈레반 지지자도 이슬람 교도도 아닌 내가 오늘의 역사를 기뻐하는 이유는 단 하나, 민족의 자주권 옹호 차원에서다. (중략)

    ‘민족의 자주권’ ‘미제’라는 단어가 나오면 사람들은 “엇, 주사파다!”하고 바로 색안경을 낀다. ‘자주’와 ‘제국주의’는 정치학에서 가장 빈번하게 사용하는 일반 명사인데, 북한이 자주 쓴다고 하여 남한에서는 금기어가 된 참 억울하기 짝이 없는 용어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북한 사람이 먹는 밥도 먹지 말고, 북한 사람이 타는 자동차도 타면 안 된다. 21세기에 이 무슨 코미디같은 일이 버젓이 횡행하고 있는지… 사실은 지금까지 이 나라의 지도층이 ‘비자주적인 제국주의 이념’에 따라 통치해왔기에 이 말만 나오면 자지러지는 것이다. 그나마 현집권당은 ‘친미자주’를 해보려고 애를 쓰고는 있으나 중국과 패권을 다투고 있는 미국은 그마저도 용인하질 않는다. 결국 남한에서는 익숙한 ‘비자주적 친미’ 노선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안전빵이다. 월남 패망 직후 박정희가 극단적 반공체제인 ‘유신체제’를 가동했듯이, 아프가니스탄을 잃은 미국은 다음 대선에서 ‘비자주적 친미 정권’을 강력히 바랄 것이다. (중략)

    한 나라(민족)의 운명은 힘이 어디로 쏠리고 있는지를 잘 보는 데에 달려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은 패퇴하고 말았지만, 향후 국제 정세의 요동에 따라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럼에도 민족의 자주권만큼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가치이다.

    사실 “그나마 현 집권당은 ‘친미자주’를 해보려고 애를 쓰고는 있으나”라는 부분을 보면 이 글을 쓴 이의 정신이 그리 맑지 않음을 알 수 있지만, 한국 사회에서 가장 큰 힘을 가진 세력중 하나(집권세력이 된 ‘운동권’ 출신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글이라고 생각해 긴 인용을 했다.

    민족의 자주권이라는 것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가치’라고 그는 말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가치도 있다. 생명을 이어갈 권리, 그리고 두려움을 느끼지 않으며 살아갈 권리이다. 심지어는 외출을 할 수 있는 권리도 없는 세상이 아프가니스탄에 다시 돌아왔다. 이 철없는 민족주의자에게 아프가니스탄의 한 여성은 말하고 싶을 것이다.

    자리파 가파리(29)는 아프가니스탄의 최연소 시장이자 최초의 여성 시장이다. 여성 인권 운동가 출신으로 2018년부터 중부 마이단와르다크주 주도 마이단샤를 이끌고 있다. 지난해엔 미국 국무부가 주는 용기 있는 국제 여성상도 받았다.

    그런 그는 자포자기 심정에 빠져 있다. 지난 15일(현지시간) 아프간이 이슬람 무장 단체 탈레반의 수중에 넘어가면서다.

    가파리 시장은 최근 영국 아이뉴스와 인터뷰에서 “탈레반이 죽이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심경을 밝혔다.

    “그들(탈레반)이 오길 기다리고 있어요. 저나 제 가족을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가족과 함께 앉아 있을 뿐이죠. 그들은 저 같은 사람들을 찾아와 죽일 겁니다. 전 가족을 떠날 수 없어요. 어디로 가겠어요?” (관련 기사 링크)

    철없는 민족주의자가 또 하나 있다. 황대권이라는 이는 페이스북에 위의 글을 올렸고, 그의 영향력은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민중의 소리’라는 이름을 가진 언론은 SNS에 글을 올리는 개인보다는 더 큰 책임감을 느껴야 할 것인데, 이런 글을 올렸다.

    현재의 사태는 미국 입장에서는 패배요 철수지만 아프간 민중의 입장에서는 외세지배를 끝내고 자력으로 독립을 성취한 것으로 평가될 만하다. 탈레반은 카불 입성 하루 만에 항만과 공항, 국영방송을 통제하며 행정을 장악했고, 정부군의 해산을 명령했다. 여성들의 교육과 일자리에 대한 접근도 약속했다. 과거 집권 기간엔 여성 억압과 반문명적 행태로, 교전 중에는 민간인 인질극 등의 반인권적 행태로 악명을 떨쳤던 탈레반이 다소 변화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프가니스탄의 운명은 아프가니스탄 국민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데는 누구도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외세의 간섭과 전쟁은 피억압국의 민중에게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스스로도 끝내 성공할 수 없다. 미국이 돌아봐야 할 교훈은 여기에 있다. (관련 기사 링크)

    “아프간 민중의 입장에서는 외세지배를 끝내고 자력으로 독립을 성취한 것으로 평가될 만하다.”라고 그들은 썼다. 소위 사설에서. 이 어처구니없는 주장의 근거는 이것이다. “(탈레반은) 여성들의 교육과 일자리에 대한 접근도 약속했다. 과거 집권 기간엔 여성 억압과 반문명적 행태로, 교전 중에는 민간인 인질극 등의 반인권적 행태로 악명을 떨쳤던 탈레반이 다소 변화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약속했다고? 그들이 약속했으니 변화하였다고 보인다고?

    탈레반이 집권할 당시만 해도 미국은 옛 소련의 영향력에서 아프간을 빼낸다는 쪽에 무게를 둬 경계를 하지 않았었다. 실제 당시 탈레반 정권은 민주적 투표로 집권한 것은 아니었지만 정통성이 있는 정권으로 인정을 받았다. 국제사회의 공인은 몇몇 나라에서 받는 데 그쳤으나 아프간 내 지지율은 60% 이상이라는 조사결과가 외신에 소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집권 뒤에는 탈레반의 극단적 이슬람 근본주의 정책이 도마에 올랐다. 부정부패를 청산하는 숙청작업에 그치지 않고 언론을 탄압하고 거의 대부분의 방송국을 폐쇄했으며 서방 문화를 전파하는 언론 활동을 엄금시키고 종교 자유를 억압했다.

    특히 국제사회를 경악하게 한 것은 여성의 교육을 전면 엄금시키고 모든 여성들을 집안에 감금시킨 탈레반의 조치였다. 힐러리 클린턴 당시 미 대통령 부인 등이 나서서 국제무대에서 탈레반을 비판했던 원인은 바로 탈레반의 여성탄압 정책이었다. 탈레반은 부르카(얼굴과 온몸을 가리는 검은 옷) 착용을 의무화한 것은 물론, 여성들의 사회활동을 전면 금지시키고 심지어 집 밖에 여성이 혼자서, 혹은 여성들끼리 외출하는 것도 막았다. 남성이 특정 여성을 간통했다고 지목하기만 하면 여성을 유죄판결에 돌로 때려죽이게 하는 끔찍한 사형제도도 국제사회의 지탄을 받았다. 특히 아프가니스탄은 예로부터 여성들이 남성들과 동등한 교육을 받았고 사회활동도 다른 이슬람권 국가들보다 훨씬 활발하게 벌였던 지역이었기 때문에 여성들에 대한 이같은 탄압이 가져온 충격은 더욱 컸다.

    2001년 3월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된 바미얀 석불을 폭파시켜 아프가니스탄과 전 세계를 경악에 빠뜨렸고 탈레반의 극단적인 이슬람 근본주의는 같은 이슬람주의를 내세운 이란에서도 비판을 받았다. (관련 글 출처)

    바미얀 석굴

    이런 사람들이 개과천선할 것이라고 민중의 소리는 믿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일까? ‘민족해방’이라는 가치는 소중한 것이지만, 민족은 언제나 내부적으로 갈라져 있음 또한 잊으면 안 된다. 민중의 소리가 민족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100% 확신할 수는 없지만, 99.9%는 확신할 수는 있는데, 그들의 정의를 따른다고 해도 전두환과 박근혜와 이건희와 이재용 모두 나와 같은 민족이다. 쿠팡의 악마들과 카카오의 대리 기사와 택시 기사들의 등골을 뽑으려 하는 경영진도 나와 같은 민족이다.

    민중의 소리는 탈레반 또한 파키스탄 등의 ‘외세’의 지원을 받았다는 것에는 침묵한다. 그러면서 탈레반의 제스쳐에 속아 넘어간다. 혹은 일부러 속는 척한다. ‘민족해방’이라는 지고한 가치를 위해서는 이런 행동도 정당화되는 것이다.

    아마도 그의 외모 때문에 언론들이 대서특필했겠지만, 아프가니스탄에 뿌리를 둔 미국 시민권자이자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 모델의 얘기는 민중의 소리보다는 훨씬 진솔하다.

    비다 인스타그램 캡처

    미군의 철수와 탈레반의 수도 점령 등으로 대혼란에 빠진 아프가니스탄의 상황과 관련해,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모델 비다가 “나라가 거꾸로 간다”며 개탄했다.

    비다는 17일 오전 MBC 라디오 ‘시선집중’에 출연해 “아프가니스탄 시골에서는 12살 여자(아이)를 탈레반에게 결혼시킨다”며 이같이 말했다. 비다는 아프가니스탄 출생의 미국 국적이다.

    비다는“믿을 수 없는 상황”이라며 “아직도 친척들은 아프가니스탄에 있다. 내가 아는 사람이 집에서 못 나가는 상태니까 더 슬프다”라고 언급했다. 이어 “아프가니스탄은 희망이 거의 없어지는 느낌”이라고도 했다.

    탈레반 측은 수도 카불을 접수하면서 ‘히잡을 쓰면 여성의 권리를 존중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비다는 “절대 믿을 수 없다”며 “내가 아는 사촌 동생들이 지금도 집에서 못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출처: 중앙일보] 韓사는 아프간 출신 모델 “탈레반, 12살과 강제결혼” 폭로 (기사 링크)

    여성이 집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사회, 12살 여자아이가 탈레반 구성원과 강제로 결혼하게 되는 사회, 여성들이 돌팔매질을 당해 죽는 사회. 이런 사회가 ‘민족 자주’를 이루었다는 이유만으로 친미 정권보다 나을 것이라고 말하는 자들은 도대체 머리가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이데올로기는 사람의 눈을 가리곤 한다. 한때는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서 동지였지만, 나는 이런 이들과 함께 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믿는다.

    같은 뿌리를 갖는 이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기독교를 숭상하는 제국주의자들

    1600년대부터 세계 곳곳을 원주민들의 피로 물들였던 유럽의 제국주의 세력은 모두 가톨릭, 성공회, 개신교를 믿는, 혹은 믿는다고 선전하던 이들이었다. 600년대부터 중동 지역과 서아시아, 동남아시아까지 뻗어 나갔던 여러 이슬람 제국들은 이슬람을 믿는, 혹은 믿어야 한다고 선전하던 이들이었다.

    유대교와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일신교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사실은 한 뿌리에서 나왔다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의 유사성을 지닌다. “이슬람의 경전은 꾸란(코란)이며, 이는 예언자 무함마드가 천사 가브리엘(아랍어: جبريل)로부터 받은 알라의 말을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 (관련 글 링 크)

    심지어는 천사의 이름조차 같지 않은가?

    일신교는 저항 운동을 할 때 탁월한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저항 세력이 권력을 잡은 후에는 민중을 억압하는 것에도 탁월한 역할을 했다. 예수 사후의 고대 로마 제국의 역사를 비롯하여 지금까지의 유럽의 역사는 기독교를 빼고는 전혀 설명할 수 없으며, 이 기독교는 마녀사냥과 같은 것을 통해 자국민들을 죽이고, 종족이 다른 이들은 ‘이교도’로 몰아 죽이고 그들의 것들을 빼앗는 일에 이용되었다.

    무함마드 이후의 중동 지역을 비롯한 서아시아의 역사 또한 비슷한데, ‘무슬림’들은 이교도를 죽이다 못해 종파별로 나뉘어 서로를 죽이는 일을 수백 년 동안 이어왔다.

    종교 자체가 사람을 마구 죽이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일신교를 신념으로 하는 이들은, 혹은 그 종교를 지배의 도구로 활용하는 이들은,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는 것을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의 비극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여성을 겁탈하려는 욕망에 신의 이름을 붙이는 자들, 돈을 벌고자 하는 욕망에 신의 이름을 붙이는 자들, 이런 자들은 서로가 적이라고 부르며 세상을 전쟁으로 물들이지만, 사실 그들은 같은 뿌리에서 나온, 사실 본질적으로 같은 자들이다.

    빈 라덴(왼쪽)과 조지 부시

    아프가니스탄의 민중들이 진정으로 해방되는 날은 당분간 오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겪은 일들을 보건대 전쟁도 없고 종교도 없는 세상이 와야만 평화와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인데,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님은 자명하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도 비극은 진행 중이다. ‘민족’이라는 것은 균일한 집단이 아니다. 주 120시간 노동을 주장하는 자, 페미니스트가 남성들을 억압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자, 이재용을 풀어주는 자, 이런 이들 모두 나와 같은 민족의 구성원이다. 우리는 아프가니스탄으로 달려갈 수 없을 것이나, 우리 ‘민족’ 내부의 일을 해결하는 것이 아프가니스탄 민중들과 연대하는 하나의 수단이 될 것이다. 한국 사회의 모든 불의한 일들에 맞서 싸우자. 우리 자신을 위하여, 아프가니스탄의 12세 소녀를 위하여.

    필자소개
    레디앙 기획위원. 도서출판 벽너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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