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라이트, 파시즘의 추억에 살다
        2006년 12월 04일 06:1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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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9는 단순한 학생운동, 5.16은 혁명, 유신은 구국의 결단, 광주항쟁은 지역폭동, 5공화국은 사회혼란을 수습한 정권…”

    뉴라이트가 ‘대안’ 교과서랍시고 만든 역사책의 내용이 언론에 공개되자 현대사를 바라보는 이들의 ‘새로운’ 시선에 대해 보수언론들조차 ‘심각한 우려’를 금치 못하고 있다. 급기야는 굵직굵직한 뉴라이트 행동단체들이 성명을 내고 ‘우리와 관계없음’을 강변하는 자중지란에 빠져버렸다.

    철모르는 초등학생들조차도 그림일기 쓸 때는 숙제검사를 빙자해 일기를 검열하는 선생님에게 잘 보이려고 뺄 건 빼고 고칠 건 고친다. 그런데 하물며 사회운동 하겠다는 사람들이 사회적 파장을 고려해 자기주장의 수위를 조정하는 전략적 사고도 없이 자기 속내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아마도 그렇게 하면 세상 사람들이 칭찬해줄 줄 알았던 모양이다.

    지금쯤 교과서의 집필진들은 뜻하지 않은 여론의 싸늘함과 믿었던 동지들의 배신 앞에서 당혹해 하거나 아니면 한국사회를 장악한 좌파들의 ‘지배이데올로기’가 얼마나 강고한지 절실히 깨달으며 대한민국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정말 그렇다면 이 뉴라이트라는 사람들, 생각보다 순수한 사람들이런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종교적 신화에 가깝기 때문이다. 신앙심은 원래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법이다.

       
      ▲ 5월 혁명과 4.19 학생운동??? 뉴라이트가 탄생시킨 왜곡된 역사관에 많은 이들이 분개하고 있다. 
     

    뉴라이트조차 당혹시킨 새역사관

    지난 2년간 뉴라이트 운동은 눈부시게 성장했다. 우리가 만약 사회현상이나 세력에 판돈을 걸 수 있다면 뉴라이트야 말로 블루칩  중의 블루칩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뉴라이트운동에 대해 이런 저런 해석은 있었지만, 이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지에 대해서는 공론화 된 것이 없다. 우리에게 합의된 것은 술자리에서 뉴라이트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최대한 냉소적인 표정을 지어줘야 한다는 것 정도다.

    하지만 이야기가 달라졌다. 그간 뉴라이트운동은 주장은 있었지만 구체적인 행동은 미비했다. 또한 다른 사회운동 영역과 충돌하거나 그런 조짐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뉴라이트 운동을 “말만 많지 사실은 한나라당에서 한자리 차지하려는 사람들, 혹은 세력들에 불과”하다고 단정 짓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학교 교과서를 바꾸겠다고 나서고 있다. 대공장에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조직을 결성하고 있다. 이미 여러 대학에 재생산 구조를 갖춘 학생조직을 만들어 놓고 있다. 호기심 반 궁금증 반으로 그들을 바라보던 시절은 이미 끝났다. 대책이 필요할 때다.

    물론 이번 교과서 논란을 통해 드러난 그들의 아마추어리즘과 무계획성을 보면 대책이랄 것도 없이 그냥 내버려두면 알아서 붕괴해 버리지 않을까하는 상상도 하게 된다.

    구체적 실천에 나선 뉴라이트

    사실 따지고 보면 뉴라이트 운동이란 게 참 고독한 길이다. 그분들의 사고방식을 무단으로 도용해 현실에 대입해보면 사방이 적이다. 대통령만해도 그렇다. 김대중, 노무현 두 전현직 대통령이야 공인된 좌익이고, 그분들이 신주단지처럼 모시는 박정희는 좌익 부역자 출신이다. 그 운동의 간판급 대표선수들 대부분이 80년대 변혁운동의 양대 정파에서 이름깨나 날리던 인물들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국민들도 마찬가지다. 4천만 명 중에서 지난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를 찍은 사람, 효순이, 미선이 사건 때 촛불 한번이라도 든 사람, 금강산 한번이라도 다녀온 사람, 특정지역 출신들, 노동조합 가입한 사람들, 진보정당에 가입한 사람을 제외하면 도대체 몇 명이나 남을까?

    뉴라이트가 꿈꾸는 이상사회는 아무래도 지금의 대한민국 국민들 가지고는 가능해보이지가 않는다. 차라리 홍길동이 그랬던 것처럼 뉴라이트 열성분자들을 이끌고 외딴 섬에 가서 율도국을 만드는 게 현실적인 방법이 아닐까 싶다.

    개인적으로는 독도를 권해드리고 싶다. 아마도 그 이상 사회는 밥 먹을 때 왼손으로 수저를 들지 못하게 하고 아이들이 태어나면 글공부를 시키지 않을 것 같다. 예부터 글 좀 읽으면 세상에 대해 삐딱해지기 마련이었으니까.

    뒤로 가는 역사책, 과거를 향해 열린 상상력

    하지만 뉴라이트 진영은 외딴 섬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나름의 율도국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그 첫 시도로 학생들의 교과서를 바꾸겠다고 들고 나온 것이다. 지금의 국민들 대다수는 좌익 오염도가 너무 높아 손을 쓸 방도가 없으니 미래의 자라나는 새싹들은 균형잡힌 시각과 우리 현대사에 대한 자긍심이 담긴 교과서로 공부해 뉴라이트형 신인간으로 키우겠다는 장기적이고도 근본적인 프로젝트인 셈이다.

    그러나 이들의 대안교과서는 어디를 봐도 새로울 것이 없다. 역사를 해석하는 다른 방법이나 시각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대안이라고 부를 만한 구석이 없다. 무엇보다 표절에 가까울 만큼 옛 문헌을 그대로 베껴오고 있다는 점에서 저작권 같은 법적인 문제와 함께 윤리적인 하자도 있어 보인다.

    뉴라이트가 선보인 대안 교과서는 광주민중항쟁을 폭도들의 파괴 행위로 정의하지 않았다는 점만 빼면 5공화국 시절 사용한 문교부판 국사 교과서와 토씨 하나 다를 게 없다.

    아무리 새롭다는 수식을 덧붙이려 해도 뉴라이트가 들고 나온 새역사 교과서는 새롭기는커녕 역사에 대한 반동에 불과하다. 역사를 역주행시키려는 모든 행위가 다 그렇듯이 이런 반동적 시각은 사회에 위해가 되는 요소다.

    과거와 단절하지 못한 ‘뉴’라이트

    뉴라이트의 간판급 인사들이 아무리 인터뷰나 강연을 통해 자신들이 ‘옛 보수’와 얼마나 다른지 강변하고 다녀도 결국 자신들이 꿈꾸는 이상이 낡은 것으로의 회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에게 전통은 신군부, 유신, 쿠데타, 친일파로 거슬러 올라가는 한국 현대사의 흐름 속에 있다.

    결국 한국의 뉴라이트는 그들이 모델로 삼고 있는 미국의 네오콘이나 이들을 비판할 때 거론되는 일본의 네오콘들처럼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어떤 의미에서든 옛 보수주의와 차별화된 내용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과거로만 열린 상상력 속에서 이 땅의 뉴라이트들은 철학의 빈곤을 구호의 요란함으로 메우려 하고 있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철학은 없으면서 구호만 요란하다’는 게 뉴라이트가 이른바 좌익을 비판할 때 쓰는 주된 논거라는 점이다.

    또한 뉴라이트는 철학의 빈곤이 낳은 전망의 부재를 ‘타자’에 대한 비판, 즉 적에 대한 과도할 만큼의 반대로 메우고 있다. 뉴라이트의 주의주장을 눈여겨보면 자신들이 꿈꾸는 미래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고 오직 대통령을 비롯한 현재의 정권과 진보운동과 개별인사들에 대한 혐오에 가까운 비방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속에서 꺼내든 운동의 첫 성과물이 고작 ‘5공화국’ 교과서인 것이다.

    수년간 연구했다는 성과가 고작 20년 전 교과서

    역사를 되돌아보면 정말 무서운 것은 반동이 일어나는 순간이 아니라 반동을 막지 못했을 때 그 결과로 대다수의 사람들이 입게 되는 참혹한 피해다. 반동의 물결이 거세서 진보적인 정당이 무너지거나 운동이 패배하는 것은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한 반동이 적절하게 제어되지 못했을 때 그 여파는 시대를 묵묵히 살아가는 인민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갔다.

    또한 역사가 뒷걸음질 치게 만든 책임은 반동적인 세력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혁신적인 세력에게 있다. 어찌 보면 역사를 뒤로 돌리는 것은 반동적 세력의 맡은 바 임무다. 그런 반동이 성공한다면 그건 그들이 자신들의 본질에 그만큼 충실했다는 의미다. 반면 반동의 물결로부터 사회를 지켜내고 역사를 어떻게 해서든 앞으로 전진시키는 것은 혁신세력에게 부여된 임무다.

    ‘반동이 나쁜 게 아니라 반동을 막아내지 못하는 게 더 나쁘다’는 주장이 낯설지 몰라도 파시즘이 서유럽을 장악하는 과정과 그 참혹한 결과를 보면 수긍이 갈 것이다. 멀리 갈 필요도 없다. 뉴라이트 교과서가 어떻게 4월혁명을 바라보고 있고 5.16쿠데타를 평가하고 있는지 보자.

    새로운 우익운동의 본질은 반동

    뉴라이트 운동은 아직 초기 단계지만 운동의 성격은 분명히 반동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번 교과서 문제는 그들의 세계관을 자신들이 원했건 원하지 않았건 간에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세계관은 지극히 위험한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담고 있다.

       
     ▲ 지난 11월 9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뉴라이트 전국연합 창립1주년 기념대회에서 뉴라이트 지도부가 만세삼창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발표회장에서 4월혁명 관련단체 회원들에게 멱살이 잡힌 뉴라이트 인사들을 보면서 ‘고것 참 쌤통이다’고 비웃고 넘어갈 일이 아니다. 87년 6월항쟁의 성과들은 이제 너무 많이 훼손되고 부정돼서 열매가 열리기는커녕 가지들마저 말라 비틀어 버리기 직전이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용납할 수 없어서 기어이 꺾어버리고 말겠다는 사람들이 이제 우리 사회 안에서 하나의 세력으로 등장한 것이다.

    교과서포럼에 대해 같은 뉴라이트 단체들이 ‘성급함’과 ‘신중하지 못함’을 질책했을지언정 ‘대안’교과서를 만들어 일선 학교에 납품하겠다는 계획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앞으로 우리는 ‘반동의 시대’를 살게 될 것인가, 우리는 이 반동의 물결을 막아낼 힘과 지혜를 갖추고 있는가?

    진보적 대안 교과서의 부재

    주목해야 할 또 다른 대목은 뉴라이트가 목매달고 있는 것이 유독 역사 교과서라는 것이다. 학생들이 쓰는 교과서가 한둘이 아니다. 왜 뉴라이트는 사회과목 계통의 교과서들에 대해서는 관대한 것일까.

    간단하다. 현재 학교에서 쓰는 사회, 경제, 정치 관련 교과서들이 그들의 시각에서 만족할 만하기 때문이다.

    돌려 이야기하면 지금까지 이들 교과서는 진보진영의 시각에서 전혀 만족할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지금까지 ‘대안적 사회교과서’를 만들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을까. 혹은 그런 시도를 사회적 의제로 만들지 못했을까. 왜 세상을 노동과 평화와 평등의 눈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교과서 시안을 만들어 발표하다가 재향군인회 회원들에게 멱살이 잡히지 않았던 걸까.

    전교조가 얼마 있으면 20주년을 맞이한다. 진보운동에 함께 했던 교수들이 여러 영역으로 진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동안 대안적인 교과서를 만들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없다. 왜 그랬을까. 설마 뉴라이트의 주장대로 ‘좌익’들이 나라를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뭐든지 제 맘대로 할 수 있어서 그랬다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뉴라이트는 우리 사회의 짐

    4년 전 서울시청 앞에 모인 월드컵 응원단을 보면서 전체주의의 기억이 떠오른다고 했던 논객들이 있었다. 우리 사회가 집단적 광기에 취약한 구조로 변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경고였다. 절대적 다수가 보인 반응은 ‘걱정도 팔자다’, ‘사고가 굳어있다’, ‘대중을 믿지 못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황우석 박사 사건이 사회현상으로 나타났을 때 우리는 4년 전의 위험경고에 대해 어렴풋하게나마 수긍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우리 사회가 건강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우려였다. 여기에 사회양극화의 심화가 불러온 경제적 불만과 정치에 대한 염증이 겹쳐지고 있다.

    너무 세상을 비극의 무대로만 바라보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80년 전 뉴욕의 주식시장이 붕괴한 사건과 대서양 반대편 독일에서 히틀러가 나치 돌격대를 이끌고 거리행진을 벌인 사건이 서로 맞물려 돌아갈 거라고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뉴라이트들이 들고 나온 5공화국 교과서도 그 기원을 따지고 보면 이 나라가 친일파에 대한 불철저한 청산에서 출발했듯이 87년의 민주화가 파시즘에 대한 미온적이고 불완전한 청산이었다는 데 있다. 그건 다시 말해 뉴라이트가 어떤 말로 자신을 포장하건 그들이 지나간 파시즘의 추억에 기생하는 집단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런 과거에 대한 향수는 사회가 각박해질수록, 경제가 어려워질수록, 진보에 대한 믿음이 희미해질수록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된다. 뉴라이트는 새로운 시대정신의 대변자가 아니라 그런 사회 분위기에 편승한 기회주의 세력에 불과하다. 그런 의미에서 뉴라이트란 새로운(new) 라이트가 아니라 사회에 누(累)만 끼치는 라이트들이다.

    뉴라이트 교과서 사건은 이들이 세상의 짐이라는 것을 보여준 계기가 됐다. 따라서 더 이상 이들에 대해 침묵하거나 방치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군사파쇼의 잔재를 청산하는 임무는 파시즘의 후계자들에게 있지 않다. 그건 어디까지나 진정한 민주세력의 임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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