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인, 호랑이, 무궁화, 장구춤···
    한반도 지도 이미지의 변천사
    [컬렉터의 서재-6] 범은 왜 논란의 중심이 되었나?
        2021년 08월 06일 10:5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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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에게는 아직 오천만 국민의 응원과 지지가 있사옵니다.”

    2021년 7월 14일 도쿄올림픽 선수촌 한국 선수단 숙소 외벽에 걸린 현수막의 이 문구는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을 앞두고 선조에게 올린 장계에 썼다는, ‘금신전선 상유십이(今臣戰船 尙有十二)’ 즉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사옵니다”라는 말을 패러디한 이 문구는 경기에 임하는 선수들의 선전을 비는 마음을 담은 것이었다.

    이에 일본 극우단체가 한국 선수단 숙소 앞에서 욱일기 시위를 펼치고, 일본 언론이 정치적 메시지라고 문제 삼는 속에서 하시모토 세이코 도쿄올림픽 조직위원회 위원장은 “여러 가지 관점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치적 메시지로 인식되는 것들은 삼가야 한다”라는 논평을 냈다. 이런 상황에서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한국 선수단 사무실을 방문해 현수막 철거를 요청했다. 이어서 IOC는 대한체육회에 보낸 서신을 통해 “현수막에 인용된 문구는 전투에 참가하는 장군을 연상시킬 수 있다. IOC 헌장 50조에 위반되므로 철거를 해야한다”고 공식 요구한다. IOC 헌장 제50조는 올림픽에서는 정치적, 종교적, 인종적 행위를 금지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서한을 받은 대한체육회는 일본이 사용하려는 욱일기 역시 정치적인 것이니 욱일기 사용을 금지하는 조건으로 현수막 철거를 약속했다. IOC는 한국의 조건을 받아들여 올림픽 경기장에서 욱일기를 사용하는 것도 올림픽 헌장 50조를 적용해 판단하기로 약속했다. 갈등은 봉합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도쿄올림픽조직위원회가 “IOC와 한국의 상호 협의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욱일기 취급 방침에 변동은 없다. 욱일기 디자인은 일본에서 널리 사용되며 정치적 주장을 담고 있지 않다. 경기장 반입 금지 물품에도 해당되지 않는다”라고 밝히면서 논란은 재점화되었다. 그러나 도쿄 올림픽이 어차피 무관중 경기로 치러짐에 따라 욱일기의 경기장 반입과 응원은 실제로 실현되기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에 이후 이를 둘러싼 논란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 현수막은 설치 사흘 후인 7월 17일 결국 철거되었다. 다음 날인 7월 18일 대한체육회는 한국 선수단 숙소 벽면에 새로운 현수막을 설치했다. 세로로 길게 제작된 이 현수막에는 하늘 색을 배경으로 호랑이 형상의 한반도 지도가 그려져 있고, 그 상단에는 지난해 5월 발표된 후 큰 인기를 끌었던 이날치 밴드의 노래 제목 “범 내려온다”라는 문구를 적었다. 한민족을 상징하는 호랑이 같은 용맹한 기상과 정신으로 승전보를 올리라는 의미를 담았다고 한다.

    호랑이 한반도 지도 옆에는 태극기를 들고 응원하는 사람들이 여럿 보이고, 제일 왼쪽 귀퉁이에는 무궁화꽃들이 피어 있다. 제주도와 울릉도 부분에도 무궁화 꽃 표시를 넣었다. 물론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어렵게 열린 올림픽에서 같이 어려움을 극복하자거나, 일본에 대해 평화와 연대의 손을 내미는 메시지를 담았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친선과 화합, 평화 외에 “보다 빠르게, 보다 높게, 보다 강하게(Citius, Altius, Fortius)”라는 구호 아래 선의의 경쟁을 펼치는 것 역시 올림픽 정신이므로 호랑이와 무궁화를 모티브로 한 현수막에 딱히 문제는 없어 보인다.

    그런데 현수막은 새로운 시비에 휩쓸렸다.

    일부 일본인들은 이 현수막 역시 ‘이순신 현수막’처럼 반일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고 주장했다. 보도에 따르면 일본의 일부 누리꾼들은 “범 내려온다”는 글귀는 일본이 조선 호랑이를 멸종시켰다는 믿음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도쿄스포츠신문은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무장인 가토 기요마사에게 지시한 ‘호랑이 사냥’을 암시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일각에서는 현수막의 호랑이 지도에 독도가 표기되었다면서 “이는 혼란을 틈타 다케시마(독도) 소유권을 주장하려는 속셈”이라고 주장했다. 어떤 누리꾼은 “한국은 올림픽 정신보다 반일 정신이 우선시되는 나라”라며 “어린 시절부터 ‘일본은 적’이라는 반일 사상을 지속적으로 주입한 결과 경제와 달리 국민성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라고 대한체육회의 처신에 대해 혹평을 퍼부었다. 이런 비판에 대해 대한체육회는 “‘범 내려온다’ 현수막은 한국 선수들의 도전 정신을 호랑이의 기상에 빗대기 위한 의도로 만들어졌다. 자꾸 정치적으로 해석이 되면서 한국 선수단이 거듭 피해를 보고 있다. 순수한 응원 현수막,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라는 입장을 보였다. 그리고 지도에 독도 표기 의혹에 대해서도 “무궁화 꽃잎으로 표현된 ‘점’도 독도가 아니라 그냥 점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사진] 이순신 현수막이 철거된 후 새로 걸린 ‘범 내려온다’ 현수막.

    이 현수막 비판에는 일부 한국인들도 가세했다. 물론 일본인들과는 다른 맥락에서였다. 만화가 윤서인씨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이 써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꼭 선수단 건물 외벽에 민족주의 코드를 담은 현수막을 걸었어야만 했는냐는 지적인데 말투는 다소 거칠었다.

    “척추 나간 빙신 호랑이 그림 걸어놓고 ‘범 내려온다’ 이게 뭐냐. ‘이 정도면 일본이 뭐라고 못하겠지’라는 비겁한 마음으로 무의미한 상징물 하나 걸어놓고 또 뭐라고 하나 안 하나 살피고 발끈한다. 꼭 이렇게 조급하게 티를 내는 저 마음은 얼마나 가난한가”

    중앙일보의 이훈범 기자는 현수막에 적힌 ‘범 내려온다’는 문구를 문제 삼았다. 중앙일보 2021년 7월 29일자 칼럼을 통해 그는 이렇게 지적했다.

    ‘범 내려온다’는 문구는 더 웃기다. 원래 이 말은 판소리 ‘수궁가’에 나오는 것이다. 토끼를 찾으러 뭍에 나온 용궁의 자라가 수영을 하느라 진이 빠져 ‘토 선생’ 대신 ‘호 선생’이라 잘못 불렀다. 자신을 선생이라 불러주는 소리를 듣고 호랑이는 위엄있게 내려온다. 호랑이를 빼고 잔치를 벌였던 다른 동물들은 공포에 떤다. 여기까진 그럴듯하다. 하지만 책임감을 느낀 자라가 호랑이 ‘가운뎃다리’를 물었다. 호랑이는 비명을 지르며 순식간에 의주 압록강까지 도망을 갔다. 이처럼 잠시 후 당할 망신은 생각하지도 못하고 온갖 폼을 다 잡던 호랑이의 모습을 안다면, 한국 선수들의 투혼을 일깨우는 데 사용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럼 지금부터 이런 논란의 가운데 있는 ‘범 내려온다’ 현수막의 내용을 분석해보자. 이 그림 속에 나오는 호랑이와 무궁화 등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그 역사적 맥락을 하나하나 살피고, 이어서 이 현수막이 선수단 숙소에 걸린 것이 적절했는지도 따져보자.

    노인에서 토끼로, 다시 호랑이로!

    다음 단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노인, 칼, 용, 장구춤, 예수, 호랑이, 무궁화

    연관이 별로 없어 보이는 저 단어들은 한반도의 지형(지도)으로 비유되거나 그림으로 그려졌던 소재들을 열거한 것이다.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 부분에 남북으로 길게 붙어 있는 한반도는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형상으로 비유되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비유는 나름의 역사성을 반영하고 있다. 그 흐름을 개괄적으로 정리해보자.

    먼저 조선시대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우리 땅의 모습을 어떻게 인식했을까?

    조선 시대 지식인들은 한반도의 모습을 중국에 공손히 읍(揖)하는 노인의 모습으로 인식했다. 중국에 대해 사대하던 시대의 소산이었음이 분명하다. 이런 인식은 이중환의 『택리지』나 조선 후기 지도의 발문 등에 폭넓게 나타나고 있다. 이중환이 쓴 『택리지』의 ‘산수총론’에 나오는 기록은 이러하다.

    대체로 옛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노인의 형상이며 해좌사향(亥坐巳向)으로서 서쪽으로 향하여 앞이 열려있어 중국에 읍하고 있는 형상이므로 옛날부터 중국과 친하고 가까이 지냈다.

    이런 전통적인 한반도 지형론과는 완전히 결이 다른 논리가 등장하는 것은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 과정에서였다. 당시 일본 정치가 후지사와 리키타로는 한반도를 “일본의 심장을 겨누는 칼, 중국의 머리를 때리는 망치, 러시아의 태평양 진출을 막는 수갑, 미국에게는 태평양의 군사력에 대한 방아쇠”라고 하였는데, 이는 러일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쓴 표현이었다. 한국은 러시아가 일본의 심장을 겨누는 칼이므로 한국을 그대로 방치할 경우 두고 두고 일본의 화근이 될 수 있으므로 러시아와 전쟁을 통해서라도 한국을 정복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대륙 끝에 삐죽하게 튀어나온 모양을 한 한반도를 러시아가 일본을 향해 빼든 칼처럼 인식한 것이다.

    ‘한반도 토끼론’이 등장한 것도 비슷한 시기였다. 지금부터 대략 120년 전이었던 1900년대 초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郞)라는 일본 지리학자가 한국을 방문하여 한반도의 지질구조를 조사한 후 그는 “조선은 토끼가 서 있는 것과 같다. 전라도는 뒷다리에, 충청도는 앞다리에, 황해도와 평안도는 머리에, 함경도는 어울리지 않게 큰 귀에, 강원도에서 경상도는 어깨와 등에 각각 해당된다”고 주장하였다. 일제는 이후 한국의 나약함과 순응성을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학교 교육을 통해 이러한 ‘한반도 토끼론’을 보급하였다. 한국은 일본이 무서워 중국으로 도망가는 토끼 모양이라는 것이다. 이런 논리가 확대 재생산되면서 한반도 토끼론이 한국인들의 상식으로 자리를 잡아 갔다. 한국을 나약하고 일제에 순응하는 존재로 만들기 위한 이러한 노력은 한반도를 토끼 모양으로 설명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전우용 교수의 글이다.

    일본인들은 각종 출판물과 인쇄물에서 기생이나 노인을 한국의 대표 이미지로 삼았다. ‘이민족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연약하고 노쇠한 민족’이 일제 강점기 한국인들에게 강요된 자의식이었다.

    – 전우용, ‘힘 숭배의 시대’ 중에서, 2018년 6월 5일자 [경향신문]

    이런 일본인들의 주장에 맞서 한국의 지식인들이 들고 나온 것이 ‘한반도 호랑이론’이었다. 한반도를 대륙을 향해 포효하는 호랑이의 모습으로 설명하고자 한 것이다. 이 ‘한반도 호랑이론’의 선구자는 육당 최남선이다. 최남선은 자신도 소년티를 갓 벗어던졌을 18세의 나이에 소년들에게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 1908년 11월 잡지 『소년』을 창간했다. 한국 최초의 신체시인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창간 기념시로 실린 것으로 유명한 그 잡지이다. 그런데 이 창간호에는 또 하나 흥미로운 글이 있는데, ‘봉길이 지리공부’라는 제목으로 실린 글이다. 이 글에서는 한반도를 토끼로 비유한 고토 분지로를 비판하면서 한반도 호랑이론을 펼치고 있다.

    [사진] 왼쪽은 일본 지리학자 고토 분지로가 토끼로 표상한 한반도 지도. 오른쪽은 최남선이 그린 호랑이 모양의 한반도 지도. 모두 잡지 『소년』에 실려있는 그림들이다.

    글은 먼저 “일본의 지리학자 고토 박사는 우리나라를 토끼 형상에 비유하여 다리를 모으고 중국을 향해 뛰어가려는 형상이라 하였다. 하지만 이는 잘못되었다. 우리 대한반도는 맹호가 발을 들고 허우적거리면서 동아(東亞) 대륙을 향하야 나르난 듯 뛰는 듯 생기있게 할퀴며 달려드는 모양”이라고 설명한 후 최남선이 그렸다는 설명과 함께 스케치풍의 간략한 호랑이 형상의 한반도 그림을 실었다. 이어 평하기를 “그 의미로 말하여도 우리 진취적 팽창적 소년한반도의 무한한 발전과 아울러 생왕(生旺)한 원기의 무한한 것을 남겨짐 없이 넣어 그렸으니 또한 우리 같은 소년이 보는데 얼만큼 마음에 단단한 생각을 줄 만한지라. 가히 쓸만하다 하겠소.” 나약한 토끼의 모습이 아니라 진취적 호랑이를 통해 식민지로 전락해가는 한국의 소년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하는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이는 “우리 대한으로 하여금 소년의 나라로 하라. 그리하려하면 능히 이 책임을 감당하도록 그를 교도(敎導)하여라”는 잡지 『소년』 창간 정신에 부합되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 잡지에 실린 호랑이 한반도 그림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황성신문 1908년 12월 11일자에 실린 다음과 같은 글은 그 일단을 보여준다.

    20세기 신천지에 우리 대한 지도의 전체가 돌연히 신 광채를 발현하니 장하고 웅(雄)하다. 동양반도에 대한(大韓) 지도여. 천지간 동물 중에 가장 사납고 날쌔며 강하고 용맹한 호랑이의 형체로다. 국민의 지기(志氣)를 배양하고 국가의 지위를 존중케 하는 자료가 될지로다.

    이런 반응에 감격했을까? 최남선은 이후 자신이 만드는 잡지들에서 호랑이 그림을 즐겨 넣었다. 1914년 그가 만든 『청춘』 창간호의 표지에도 꽃을 든 청년이 한반도 모양의 호랑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그림을 실었다. 최남선이 만든 것은 아니지만 1921년 잡지 『개벽』 창간 1주년 기념호 표지에 그려진 포효하는 호랑이 그림도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호랑이를 잡지 표지에 넣는 일종의 문화적 붐은 192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사진] 왼쪽은 잡지 『청춘』 창간호(1914) 표지, 가운데는 잡지 『개벽』 창간 1주년 기념호(1921) 표지, 오른쪽은 고려대 박물관 소장의 ‘근역강산맹호기상도’로 모두 한반도 호랑이론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그림들이다.

    고려대학교 박물관에는 ‘근역강산맹호기상도(槿域江山猛虎氣像圖)’라는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호랑이가 대륙을 향해 웅장하게 포효하는 모습으로 한반도를 그린 이 그림(가로 46cm, 세로 80.3cm)은 ‘한반도 호랑이론’을 가장 실감나게 표현한 그림으로 평가된다. 백두산 부분을 호랑이의 머리 부분으로 표현하고, 함경북도 두만강 일대를 앞다리 오른발, 평안도 강계지역을 앞다리 왼발, 황해도를 뒷다리 오른발, 전라도를 뒷다리 왼발, 변산반도 일대를 꼬리 끝, 백두대간을 등줄기와 뼈대로 그렸다. 제주도와 울릉도 등 섬들은 별도의 채색과 방식으로 그냥 섬 모양으로 그려 놓았다. 김태희가 그린 것으로, 제작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대략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로 추정하고 있다. 잡지 『소년』이 창간된 시기 한반도 호랑이론이 크게 유행하던 시기로 보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이 호랑이 지도와 관련하여 2018년 5월 인터넷 경매에 매우 흥미로운 대한제국 시기 지도가 출품된 일이 있었다. 그 지도는 일반적인 지도가 아니라 한반도 지형을 모티브로 삼아 동물로 표현한 것이었다. 가로 23cm, 세로 22cm 크기의 한지에 가는 붓으로 그린 것으로 제목은 ‘대한제국 전도’였다. 글씨체나 지질의 상태 등을 보았을 때 대한제국 시기의 지도로 보였다. 지도 가운데 세로로 쓴 ‘대한제국전도(大韓帝國 全圖)’라는 제목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호랑이 모양의 한반도 지도가, 오른쪽에는 용 모양의 한반도 지도가 그려져 있다.

    [사진] 왼쪽은 2018년 5월 인터넷 경매에 나온 대한제국전도, 오른쪽은 대한제국전도 중 호랑이와 용으로 그려진 지도를 실제 지도 방향으로 회전시켜 본 그림이다.

    나에게 이 지도가 흥미로웠던 이유는 두 가지였는데, 첫 번째는 최남선이 한반도 호랑이론을 제시한 이래 호랑이 지도는 보통 대륙을 향해 포효하는 형상인데 비해 이것은 남쪽 바다를 향하고 있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용 모양으로 한반도를 그린 것은 이전에는 알려진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용은 보통 중국을 상징하는 것으로 한반도를 용으로 표현한 사례는 찾지 못했다. 용 지도에서 제주도를 여의주로 표현한 것도 재미있는 부분이었다. 황제국을 표방한 대한제국의 위상에 맞게 한반도를 용으로 그려 본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지도 속의 호랑이 그림은 대륙을 향해 포효하는 것보다는 자연스럽지 못한 자세지만, 민화 까치호랑이 그림에 흔히 등장하는 익살스런 표정의 호랑이가 숙련된 필체로 그려져 있었다. 용의 표정 역시 익살스럽다. 나는 이 지도를 얻기 위해 경매에 참여했으나, 경합 끝에 낙찰 받는 데 실패하였다. ‘범 내려온다’ 현수막 속 한반도 지도에 대해 이렇게 글을 쓰는 이유 절반도 경매에서 낙찰받지 못한 그 지도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다. 어쨌든 경매에 나왔던 그 지도를 통해 대한제국 당시 한반도를 나약한 토끼로 보려는 움직임에 대해 한반도를 다양한 방식으로 표상하여 거기에 적극 대응코자 했던 대한제국 사람들의 노력의 일단을 읽을 수 있었다.

    그것으로 만족!

    이 글을 끝으로 아쉬움은 접는다.

    무궁화 지도와 남궁억

    독자들께서는 호랑이 한반도 지도를 소장하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역사 컬렉터를 만만하게 보시면 안된다. 컬렉터에게는 호랑이 지도만큼이나 소중한 한반도 지도가 있다. 이순신 현수막식으로 말하면 “신에게는 아직 두 점의 한반도 지도가 있사옵니다”. 컬렉터의 서재에는 자수로 만든 ‘무궁화 한반도 지도’가 벽에 걸려 있다. 게다가 벽에 걸린 지도 말고도 비슷한 무궁화 지도를 한 점 더 소장하고 있다. 두 점 모두 동일한 형식의 지도인데, 무궁화 줄기를 기본 뼈대로 하여 거기서 뻗어 나간 무궁화 가지와 13송이의 무궁화 꽃으로 한반도 지형을 형상화했다. 13개의 꽃은 13도(道)를 표현한 것이다. 제주도와 울릉도는 온전한 무궁화 꽃이 아니라 한 점의 꽃잎이나 나무잎 한 점으로 간단히 표현하고 있다.

    [사진] 무궁화로 한반도 지도를 표현한 자수 작품이다. (두 점 모두 박건호 소장)

    이렇게 한땀 한땀 자수를 떠서 무궁화 지도를 만드는 일은 일제 강점기나 해방 직후 여성들 사이에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호랑이 한반도 지도가 일제 강점기 1920년대 중반을 기준으로 서서히 퇴조해 사라져 갔다면, 이후 한반도 지도 계보를 이어 해방 직후까지 내려온 것이 무궁화 모양의 한반도 지도였다. 이 자수 무궁화 지도는 흔하다고 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아주 희귀한 것도 아니다. 민간에 비교적 많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어머니 육영수가 만든 무궁화 자수 작품도 남아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자신의 어머니 육영수가 처녀시절에 짠 무궁화 자수를 매우 아꼈다고 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언젠가 육영수숭모제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 집에는 어머니께서 우리 국민들이 편안하고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나라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땀 한땀 정성들여 우리나라 지도에 무궁화꽃 수를 놓으신 액자가 있는데, 저는 그 액자를 보면서 어떻게 하면 어머니께서 바라시는 우리 국민 모두가 꿈과 희망이 있는 행복한 나라를 만들 수 있을까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는다.

    컬렉터가 소장하고 있는 자수 무궁화 지도 두 점도 잠시 살펴보자. 먼저 벽에 걸린 무궁화 자수는 가로 30, 세로 40cm로 삼베 위에 자수를 뜬 것으로 연대 미상이다. 일제 강점기로 추정할 뿐이다. 나머지 한 점은 비슷한 크기의 작품이나 재질은 삼베가 아닌 광목이다. 이 작품을 넣은 액자 뒤에는 “외할머님(유연님씨)의 17세(1945년) 작품”이라고 써 놓았다. 해방되던 해 ‘유연님’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이 자수를 떠서 만든 것임을 보여준다. 해방 당시는 광복의 열기가 드높았던 때로 태극기와 무궁화 등 민족을 표상하는 것들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상황이었다.

    앞에서 한반도를 호랑이로 표상한 지도의 선구자를 최남선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 무궁화 지도는 누가 창안한 것일까? 이 무궁화 지도의 기원을 살펴보자.

    무궁화 지도가 그려지기 전부터 무궁화는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꽃으로 인식되었다. 고려 이전의 문헌에서는 확인이 어렵고, 고려 예종 때 기록에 나오는 ‘근화향(槿花鄕)’이란 표현이 우리 나라를 무궁화로 연관지어 표현한 최초 사료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이수광이 쓴 지봉유설에 인용한 ‘고금주(古今注)’에는 ‘군자국은 지방이 천리인데, 무궁화꽃(木槿花)이 많다’라고 하였다. 조선을 ‘근역(槿域)’이라 일컫는 것은 여기서 유래했다. 무궁화는 한자로 ‘근(槿)’이라고 쓴다. 남자들의 이름에 들어가는 ‘근’은 보통 뿌리 ‘근(根)’자를 쓰는데 비해, 여성들의 이름 속에 쓰는 ‘근’은 보통 이 무궁화 ‘근(槿)’자를 쓴다. 일제 강점기 여성계의 민족유일당으로 조직된 ‘근우회’의 근자도 무궁화 근(槿)자의 ‘근우회(槿友會)’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이름의 ‘근’자도 당연히 무궁화 ‘근(槿)’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어머니 육영수의 무궁화 자수 작품에 큰 애착을 보였던 것도 자신의 이름에 들어있는 무궁화 ‘근(槿)’자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런 수준으로 언급되던 무궁화가 국화(國花) 수준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대한제국이 식민지로 전락하기 직전이었다. 국권 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 계열의 지식인들이 창가형식의 애국가를 다수 만들어 보급했는데 그 노래 속에 자주 들어간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라는 가사가 이런 변화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동아일보] 1935년 10월 21일자 학예란에 실린 ‘조선의 국화 무궁화의 내력’이라는 기사는 이런 역사를 회고하고 있다.

    아마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조선에도 개화풍이 불어오게 되고 서양인의 출입이 빈번해지자 당시의 선각자 윤치호 등의 발의로 양악대를 비롯하여 애국가를 창작할 때 애국가의 뒷풀이에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라는 구절이 들어가면서 무궁화는 조선의 국화가 되었다. 안창호 등이 맹렬히 민족주의를 고취할 때 연단에 설 때마다, 가두에서 부르짖을 때마다 주먹으로 책상을 치고 발을 구르면서 무궁화 동산을 절규함에, 여기에 자극을 받은 민중은 귀에 젖고 입에 익어서 무궁화를 인식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구한말 이후 일제 강점기에 무궁화가 우리 민족의 표상으로 자리 잡게 되는데 기여한 언론은 [동아일보]였다. 동아일보는 1921년 12월 공고를 통해 “조선지도의 윤곽 안에 세 가지 이내의 물형을 채우라”면서 입상자에게 시상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이 현상 공모에 전국에서 수천장의 응모 엽서가 도착하였다. 입상작은 1922년 1월 27일과 28일 이틀에 걸쳐 1등 없이 2등 3등 각각 2점을 발표했는데, 2등작은 춤추는 무동 형태로 한반도를 그린 ‘평화의 무사(舞士)’라는 작품과 일본을 향해 포효하는 사자 모습을 그린 ‘사자의 한자웅’이라는 작품이었다. 3등은 누에와 뽕잎으로 한반도를 그린 ‘잠(蠶)’이라는 작품과 무궁화로 한반도를 표현한 ‘근(槿)’이 뽑혔다. 이중 비록 3등에 머물기는 했으나, 그것이 가진 의미나 형태에 있어 가장 자연스러운 느낌을 주는 것이 ‘근(槿)’이었는데, 이방호(李方鎬)라는 인물이 응모한 작품이었다.

    [사진] 1921년 [동아일보]의 한반도 지도 그리기 현상 공모작 중에 입선한 작품들이다. 왼쪽부터 2등 ‘평화의 무사’, 2등 ‘사자의 한자웅’, 3등 ‘근(槿)’, 3등 ‘잠(蠶)’이라는 작품이다.

    이 [동아일보]의 공모에 입선한 이방호의 무궁화 한반도 그림은 일제 강점기와 해방 직후 제작된 자수로 짠 무궁화 한반도 지도와 거의 동일한 모습이다. 그렇다면 이방호가 이 무궁화 한반도 지도의 창안자일까? 이방호의 작품이 1921년 작품이었고 신문을 통해 대중에 공개된 것이 1922년이었으므로 자수로 만든 무궁화 지도는 모두 1922년 이후의 작품으로 봐야 되는 것일까?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놓쳐서는 안되는 인물이 있다.

    한서 남궁억(南宮檍).

    남궁억은 역사 교과서에서는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한 교육자·언론인으로 나오는데, [황성신문]의 초대 사장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런데 그의 업적 중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무궁화 보급 운동이다. 배화학당의 교사로 근무할 당시 그는 여학생들에게 무궁화 꽃으로 된 한반도 지도를 자수로 제작하게 했는데, 이는 무궁화꽃을 통해 민족혼을 되살리고자 한 의도였다. 남궁억은 조선 13도를 무궁화로 수놓은 자수본을 고안하였는데, 한반도를 상징하는 무궁화 13송이와 백두대간을 상징하는 무궁화 가지를 수놓은 것이다. 울릉도와 제주도는 무궁화 꽃잎으로 수놓았다. 이 무궁화 지도는 배화학당뿐만 아니라 경향 각지의 여학교에 보급되었고, 가정 주부들도 이 무궁화 자수를 만들어 실내를 장식할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의식을 가슴 속에 수놓았던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무궁화 지도는 이방호의 동아일보 입상작과 모양이 동일하다. 누가 먼저인지는 연도 비교를 하면 간단히 밝힐 수 있다.

    남궁억이 이 자수본을 고안하여 학생들에게 보급한 것은 배화학당 교사로 근무할 때였다고 한다. 남궁억의 연보를 보면 1910년에 배화학당 교사로 근무를 시작하여 건강이 나빠져 선향인 강원도 홍천군 서면 모곡리(보리울)로 낙향할 때가 1918년까지였으니 1910년대에 이미 이 자수본을 고안했다는 것이다. 현재 독립기념관에는 남궁억이 배화학당 교사로 근무할 당시 제작된 자수 무궁화 지도가 소장되어 있기도 하다. 1919년 3.1운동 당시 태극기 대신 무궁화 지도를 들고 일제에 항거했다는 이야기도 전하므로 1919년 3.1운동 이전에 이런 류의 지도가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근거로 결론을 내리자면 무궁화 지도는 남궁억이 1910년대 이미 고안한 것이고, 이방호가 이를 거의 그대로 ‘표절’하여 동아일보사에 응모해 입상했다는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이방호가 이 무궁화 지도를 응모할 당시에는 남궁억이 창안한 무궁화 지도가 널리 대중들에게 알려지지는 않았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누가 최초인지에 대한 것은 전문가들의 보다 세밀한 검토가 필요해 보인다. 일단은 이 무궁화 지도의 지적 재산권은 남궁억에 있는 것으로 정리해두자.

    어쨌든 남궁억의 무궁화 사랑은 잃어버린 나라와 민족에 대한 사랑이었다. 배화학당 교사 당시 무궁화 지도 자수본을 고안한 그는 홍천 모곡리(보리울)에 낙향한 이후 설립한 모곡학교에서도 무궁화 보급 운동에 혼신의 노력을 다하였다. 그는 모곡학교 실습지에서 기른 무궁화 묘목을 전국 각지에 보급하고자 했다. 1920년대였다. 명목은 학교 경비 보충을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애국심 고취를 목적으로 각 지방의 학교나 교회, 사회 기관에 무궁화 묘목을 기증하거나 판매했다. 일본 관헌이 학교에 찾아오면 이를 뽕나무 밭이라 속이기도 하였다. 이때 보급된 무궁화 묘목은 대략 30만 주 정도였다고 한다. 이 무궁화 보급 운동을 전개하던 1931년 그는 〈무궁화 동산〉이란 노래를 모곡학교 학생들에게 가르치기도 했다. 여기에는 이제 일흔을 넘긴 남궁억의 무궁화 사랑,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우리의 웃음은 따뜻한 봄바람
    춘풍(春風)을 만난 무궁화 동산
    우리의 눈물이 떨어질 때마다
    또다시 소생하는 이천만
    백화가 만발한 무궁화 동산에
    미묘히 노래하는 동무야
    백천만 화초가 웃는 것 같이
    즐거워하라 우리 이천만

    (후렴) 빛나거라 삼천리 무궁화 동산
    잘살아라 이천만의 고려족(高麗族)

    남궁억의 무궁화 보급 운동은 일제의 심기를 건드리기에 충분했다. 일제의 경제 시책에 협력하여 남면북양정책에 따라 면화를 재배하거나 아니면 양잠을 위해 뽕나무 재배를 해도 모자랄 판에 조선 민족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무궁화 묘목을 키워 보급하는 것이 곱게 보일 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 1933년 ‘모곡(보리울) 무궁화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1933년 11월 2일 홍천경찰서 사법주임인 신현규가 [시조(時兆)] 잡지 사원으로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모곡학교 교장 남궁억을 방문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남궁억은 잡지를 팔며 무궁화 묘목을 사러 왔다는 신현규를 무궁화 묘포로 데리고 가 무궁화가 우리의 국화라는 것을 설명하며 무궁화 시(詩)에 대한 이야기까지 하며 벚꽃은 확짝 피었다가 곧 지지만 무궁화가 면면히 피어나는 것처럼 한국 역사도 면면히 이어질 것이라 역설하였다. 이를 빌미로 일제는 교장 남궁억을 체포하였으며 모곡학교도 폐교되고 말았다. 남궁억 체포 직후 일제가 1933년 11월 5일 작성한 수사기록인 ‘범죄보고’에는 모곡학교를 이끌었던 남궁억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남궁억은 일한병합에 불만을 품고 자신이 경영하는 모곡학교를 이용하여 장래에 자기가 주장하는 주의의 토대를 구축하려고 생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불온한 역사 및 창가를 가르치고, 혹은 조선의 독립운동을 선동하는 언동을 하여 무고한 아동에게 독립사상을 주입하고 있다. 나아가 일반민에 대해서도 무궁화 재배를 장려하고 불온한 역사책도 만들어 발매하면서 전적으로 민족의식의 주입 고취에 전념하고 있다.

    이 ‘무궁화 사건’으로 강원도 경찰부는 관내 무궁화나무를 전부 없애도록 하라는 긴급 지시를 내려 약 70,000주의 무궁화는 모조리 뽑혀 불태워졌다. 모곡(보리울)은 물론 홍천읍과 춘천읍 일대의 민가에 있는 무궁화와 강원도 일대 각 학교와 군면 소재지에 있는 나무까지 수난의 대상이 되었다. 이 나무들의 대부분은 모곡학교에서 남궁억이 애지중지 길러 보급한 것이었다. 1933년 11월 4일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된 후 1934년 7월 남궁억은 1년 징역에, 3년 집행유예 판결을 받고 복역하였다. 남궁억은 옥중에서 병들어 보석된 후 1939년 4월 5일 77세를 끝으로 소천하였다. 무궁화 사랑으로 삼천리를 수놓은 한 노인의 삶은 여기서 끝나게 된다. 그가 돌아간 그 하늘나라에는 분명 무궁화가 가득 피어 있었을 것이다.

    [사진] 왼쪽은 무궁화 보급을 위해 노력했던 한서 남궁억 초상화, 오른쪽은 강원도 홍천군 서면에 있는 남궁억기념관에 서 있는 남궁억 동상인데, 손에는 그가 그렇게 사랑했던 무궁화가 들려있다.(인터넷 사진)

    나는 무궁화 꽃을 볼 때마다 또 집에 걸린 무궁화 지도를 볼 때마다 무궁화 보급을 위해 전 인생을 걸었던 남궁억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의 삶에 담긴 굳센 의지에 대해 존경의 마음을 가지게 된다. 그런데 컬렉터에게 남궁억은 존경의 대상으로만 다가오지 않는다. 그는 다른 위인들에 비해 왠지 모를 친근감이 느껴지는 인물이다.

    이유는 이미 100년도 전에 그 역시 컬렉터의 길을 걸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그의 취미는 옛 돈과 우표 수집이었다. 그는 1899년부터 10여 년간 고려시대 해동통보로부터 대한 제국 융희 연간 화폐까지 다수의 화폐류를 수집하였다. 또한 개국 504년(1895)부터 1904년까지 우표도 모았는데, 이 우표와 화폐류는 1931년 6월 17일 연희전문학교 박물관에 기증하였는데 그 수는 2천여 점이나 되었다. 컬렉터로서의 수집, 이후 애지중지 모았던 자료들의 기증이라는 모든 행적이 후배 컬렉터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내가 남궁억을 각별히 생각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시 ‘범 내려온다’ 현수막

    글머리에서 다루었던 ‘범 내려온다’ 현수막을 다시 찬찬히 들여다 보자. 현수막에 그려진 호랑이 모양의 지도는 최남선이 그린 호랑이지도나 ‘근역강산맹호기상도’의 호랑이 그림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중심에서는 벗어나 있지만 현수막 왼쪽 구석에 그려진 무궁화도 분명 의미가 있다. 꽃송이를 세어보면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대략 13송이 정도로 보인다. 이 무궁화 꽃은 남궁억이 보급한 무궁화 자수 한반도 지도에 나오는 무궁화 꽃송이와 일치한다. 제주도와 울릉도를 무궁화 꽃잎으로 표현한 것 역시 무궁화 지도의 형식을 충실히 따른 것이다. 한반도 본토는 호랑이 지도를 토대로, 오른쪽 아래의 13송이 무궁화와 울릉도·제주도의 섬 표현은 무궁화 지도를 토대로 하였다. 그러니 이 현수막에는 호랑이 한반도 지도와 무궁화 한반도 지도가 나름 절묘하게 융합되어 있는 셈이다.

    한편 논란이 된 독도를 표시한 것으로 의심받는 울릉도 옆의 나뭇잎은 독도로 단정하기 어렵다. 일반적인 자수 무궁화 지도에는 제주도와 울릉도만 표현했는데, 이 현수막도 대체로 그런 형식을 취했다. 문제는 울릉도 부근에 표시한 꽃잎과 나뭇잎이 두 개라는 점인데, 이것도 실제로 무언가를 표현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제주도 쪽에도 꽃잎과 나뭇잎이 두 개로 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현수막이 담고 있는 그 ‘점’의 비밀은 이 현수막을 디자인한 이만 알 것이다. 그러니 더 이상의 논란도 무의미하다.

    덧붙여 현수막 속 호랑이가 일본인이 멸종시킨 호랑이를 연상시켜 반일 정서를 불러일으킨다는 일부 일본인들의 논리는 억지 주장이다. 이 호랑이 지도를 보고 그런 생각을 하는 한국인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한국인들이 저런 방식으로 한반도를 호랑이 모양으로 표현해 온 역사적 전통을 그들이 알지 못했을 뿐이다. ‘범 내려온다’는 문구도 특별히 수궁가의 어떤 내용까지 복잡하게 고려하고 붙였다기보다는 작년에 유행한 노래 제목이 용맹을 상징하는 호랑이 지도에 어울린다고 생각하고 붙인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순신의 ‘상유십이(尙有十二)’를 패러디한 문구는 반일적인 메시지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어 보인다. 이순신의 존재 자체가 임진왜란에서 일본군을 격파한 장군이므로 이는 우리 측이 논란을 자초한 면이 있다. 그러나 ‘범 내려온다’ 현수막의 경우 만화가 윤서인이 ‘병신 호랑이’ 운운하거나 ‘호랑이 멸종을 연상시켜 반일 정신을 불러일으킨다’는 일본의 주장은 부적절하거나 사실 관계도 맞지 않을뿐더러 과잉 반응한 것으로 보인다. ‘호랑이와 무궁화를 이용한 한반도 표상의 지도가 어쨌든 일제가 한국을 식민지로 만드는 과정에서 그려졌으므로 반일이다.’ 이렇게까지 주장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물론 어려운 시기 친선과 연대의 메시지를 담은 현수막이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지만, 그렇다고 이를 단순히 반일적 메시지라고 단정하기에는 그 ‘범 내려온다’ 현수막에 담긴 역사는 좀 더 복잡하다. 아주 잘했다고 박수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일본에 대해 반일적 메시지를 발신한다고 보기에도 곤란한 그 중간 지대에 있는 것이다.

    친선과 연대의 메시지를 담기가 좀 그랬다면, 그리고 굳이 한반도 지도를 가지고 선수들의 선전을 기원하고 싶었다면 훨씬 어울리는 지도가 있기는 하다. 누가 그린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인터넷 상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지도이다. 장구춤을 추는 신명난 여인의 모습으로 한반도를 표현한 그림이다. 이 그림 위에 힘든 시기 코로나를 같이 극복하자는 친선과 연대의 메시지나 선수들의 선전을 응원하는 문구를 적었다면 ‘범 내려온다’ 현수막 보다는 낫지 않았을까. 물론 이 그림을 쓸 경우에도 독도를 그려 불필요한 논란을 자초할 필요는 없겠다.

    [사진] 정확한 출처를 알 수 없지만 한반도를 신나게 장구춤을 추는 여인으로 그린 작품이다. 이렇게 한반도를 표상한 지도는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인터넷 사진)

    * ‘컬렉터의 서재’ 연재 칼럼 링크

    필자소개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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