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국 현상에 대한 단상
    [시선] 어떤 전근대성에 대한 생각
        2021년 08월 05일 11:1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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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국을 옹호하는 이들과 그를 비판하는 세력의 싸움은 희한하다. 수십 년간의 민중운동 진형의 대립각이 완전히 무너졌다. 소위 민족해방(NL) 진영 출신의 많은 이들이 소위 제헌의회 그룹(CA) 출신, 혹은 사노맹 출신의 조국을 옹호하는 전선의 최선두에 나선 상태이다. 자신은 7년여를 감옥에서 보냈지만, 집행유예로 바로 풀려나 미국으로 유학을 갔던 조국을, 그의 운동 진영 선배이자 서울대 법대 선배인 백태웅이 옹호한다.

    이 싸움에는 소위 시인들과 대학교수들도 동참했다. ‘원산폭격’하는 모습을 인터넷상에 올린 교수가 하나 있었다. 그걸 연대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사진은 이 논쟁의 배후에 존재하는 것, 80년대 초반에 대학에 입학했던 이들 일부의 특성인 전근대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원산폭격은 지난 세기 한국 사회의 전근대성과 폭력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얼차려 행위이다. 아마 일제 강점기에서 기인했을 것이고, 군인 출신들이 사회를 좌지우지하던 때의 유물이다.

    나는 1987년 대학로에서 어느 고등학교 동문 선배들이 후배들 30여 명에게-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대학생이었다-원산폭격을 명령하고, 30여 명이 군소리 없이 따라 하는 충격적인 장면을 보았었다. 맞으면서 큰 아이가 폭력적인 사람이 될 가능성이 크고, 원산폭격을 당해 본 이가 그것을 타인에게 시킬 가능성이 크다. 나는 군대에서 두 시간을 원산폭격을 한 일이 있었다. 두 시간. 그때의 기억은 참으로 참혹한데, 그것을 가지고 동료를 응원하겠다고 하는 이가 2021년에 버젓이 존재한다.

    사람들은 이런저런 이유를 가져다 붙이지만, 사실 백태웅 등의 사노맹 출신들 일부가 그를 공개적으로 옹호하는 이유는 단 하나이다. 학연, 같은 조직 출신의 끈끈한 정. 이러한 이성적이지 아니한 전근대적 감성이다.

    나는 어느 정도는 그들을 이해할 수 있다. 나는 1987년에 대학에 들어갔는데, 그때는 전투경찰이 대학교에 상주했던 1980년대 초반의 상황과는 크게 달랐다. 선배들의 이야기는 나를 매우 놀라게 했다. 전투경찰이 대학에 상주하며 겁을 주고, 가끔은 성희롱을 하기도 했다고 들었다. 도서관에서 사람들이 떨어져 죽고, 여기저기서 대학생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했다.

    81학번, 82학번, 83학번, 이분들의 대학 생활은 참으로 힘들었을 것이고, 아마 그들은 87학번보다 더 격렬하게 싸웠을 것이고, 그래서 친구나 후배에 대한 정도 정말 대단했을 것이다. 그들 사이의 정서를 내가 알기는 힘들 것이다. 50대 중후반의 정치인을 “우리 국이, 우리 국이.” 하고 부르는 여자 선배를 나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이것이다. 누구든 잘못을 저지르면 그 사람은 비판받을 수 있고, 어떨 때는 법적인 처벌을 받을 수도 있다. 그 사람이 예전에 민주화운동을 했던, 하지 않았던, 잘못이 있으면 비판받거나 때로는 처벌받아야 한다. 또, 조국의 법무부 장관 임명 과정부터 벌어졌던 일들은 문재인 정권이 곤두박질치는 것에도 공헌했고, 조국은 정치적인 면에서도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심지어 문재인 정권 지지자에게도 말이다.

    2019년 8월 9일 조국이 대한민국 법무부 장관 후보로 지명되었다. 그 일이 있기 전 문재인 대통령의 업무 평가는 50% 이상 긍정적이었다.

    http://www.realmeter.net/리얼미터-7월-4주차-주중동향-文-대통령-긍정-54-0-부정-42-4/

    2019년 10월 2일, 투기자본감시센터에서는 조국 장관과 그의 부인 정경심 교수를 공직자윤리법 위반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조국을 비판하는 대규모 집회가 진행되었고, 2019년 10월 14일 조국은 사퇴하였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문 대통령은 집권 후 처음으로 50%가 넘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게 되었다.

    https://www.yna.co.kr/view/GYH20191010000500044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망했다’라고 여겨지던 자유한국당은 더불어민주당과의 지지율 격차를 크게 줄였다.

    나는 이 모든 것이 조국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대통령의 업무에 대한 평가나 정당에 대한 지지는 하나의 요인에 의해서만 변화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조국과 가족들의 일들이 문재인 정부의 지지율을 떨어뜨리는 요인이었음은 누구라도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조국은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이해가 되는 일이다. 그와 가족들에 대한 조사에 정치적 의도가 섞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시 출신이 아닌 이가 법무부 장관이 되는 것을 보기 싫었던 이들의 공작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패거리를 이루어 조국을 공격한 것이 문제일 수 있듯이, 조국의 잘못은 전혀 없는 것처럼 패거리를 지어 주장하는 것도 문제이다.

    그는 일단 정치적으로 실패했다. 법무부 장관에 임명된 지 35일만에 사퇴했고, 문재인 정부에 엄청난 부담과 타격을 주었다. 그것을 반성했는지 그렇지 않은지 그는 베스트셀러 책을 만들어냈다. 나는 만일 나와 가족 문제 때문에 자신이 속했던 조직이, 그것도 작은 조직이 아니라 정부라는 조직이 해를 입었다면, 그 후에는 나의 행동이 그 정부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를 계산하고 행동할 것이다. 그런 책을 출간할 때 조국은 그런 계산을 하였을까? 나는 그가 계산하지 않았거나, 그 결론을 무시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결국 책을 출판한 것과 그 후의 페이스북 글 게시 등으로 또 한 번 문 정부에 부담을 주었다.

    정치적으로는 실패했고, 법적으로는 어떠한가? 그와 관련하여 그의 친족이나 지인들인 유재수, 김경록, 조범동, 조권, 그리고 그의 아내는 재판에서 실형을 선고받았고, 항소심 등이 진행 중이다. 나는 모든 재판이 끝날 때까지 이 문제에 관한 완전한 판단을 유보하겠지만, 8월 초 현재 그들 모두가 유죄 판결을 한 번 이상 받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조국은 억울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조국이 했던 여러 가지 말들을 최서원(최순실)이나 정유연(정유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모든 채널을 통해 압박하고, 집안을 풍비박산 나게 하고, 사생활을 침해하고, 마녀사냥을 하고.” 최서원은 모르겠으나 정유연은 그런 말을, 적어도 공개적으로는, 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스운 것은 그런 비슷한 말을 우병우도 했었다는 점이다. 이 서울법대를 졸업한 민정수석 출신들은 정유연만큼도 행동하지 못했다. 고난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접했던 ‘엘리트’들은 유약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NL이니 CA니 PD니 하는 진영들, 혹은 그 진영 출신들 간의 해묵은 다툼을, 조국 사태는 완전히 바꿔놓았다. 서로를 별로 좋아하지 않던 이들이 대동단결하여 조국을 옹호하게 만든 원인은 무엇인가? ‘정파를 초월한 연대’가 일어난 이유는, 문재인 정부를 옹호하려는 이들 중 상당수가 민족해방 진영 출신이고, 조국을 옹호하려는 이들 중 상당수가 제헌의회 그룹 출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정치적이라기보다는 인간관계에 근거한 것이다. 노무현과 문재인에 대한 개인적 애정, 같은 CA 출신에 대한 개인적 애정, 이런 것들이 배후에 있는 것이다.

    개인적 애정을 비난할 일은 아니다. 다만, 전근대적인 학연 등에 근거하여 그를 옹호하면서, 거기에 무언가 심오한 의미가 있는 것처럼 논리를 들이대는 것은 비난받을 일이다. 사노맹 출신인 것으로 보이는 어떤 이의 글을 읽으니, 조국을 비판하는 이들에게는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없다고 했다. 그가 전두환 정권을 비난할 때 그가 전두환에 대한 예의를 지켰을까? 나는 중2 때부터 전두환에게 쌍욕을 했다. 나는 그것을 후회하지 않고, 반성하지 않는다.

    이 시점에서 “아니, 조국이 전두환과 같다는 거냐?”라고 질문할 사람이 있을 것 같아 조금 더 말하겠다. 나는 조국이 전두환과 같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인을, 공인을 비판할 때 사람들은 일반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는다. 20세 대학생이 70대 정치인을 비판할 때 존칭 붙이던가? 무슨 인간에 대한 예의 타령인가.

    그냥 솔직하게 말하든지, 조용히 있어 주면 안 될까? “나는 조국을 좋아하고 그는 나의 절친한 후배여서 그를 옹호한다.” 이렇게 말한다면 나는 그것을 인정할 것이다. “조국을 옹호해야 문 정부가 살며, 다음 대선 승리가 가능하다.” 그렇게 말한다면, 나는 그 말이 옳은지 판단하고자 애쓸 것이다. 하지만 “조국과 정경심은 마녀사냥을 당하고 있다.”라고 말한다면 나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정경심은 나의 학과 선배이며, 나의 육촌 누님의 친구이다. 하지만 나는 그를 판단할 때, 관계라는 잣대를 쓰지 않을 것이다.

    1980년대 초반에 대학에 들어가 온갖 일을 다 당했을 나의 선배 세대 중 일부는, 87년 이후에 대학에 들어갔던 이들보다 더 끈끈한 서로에 대한 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점이 어떨 때는 부러워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개인적인 일이다. 제헌의회파도 존재하지 않고, 민족해방파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모여서 술을 마시며 옛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고, 요즘 일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개인적인 인연에 근거해 정치적인 주장을 하는 것은 아름답지 못함을 알기 바란다.

    “부르주아지는 적나라한 이해관계, 무정한 ‘현금 지불’ 이외에 인간들 사이에 다른 어떤 관계도 남겨놓지 않았다.” (https://ko.wikipedia.org/wiki/공산당_선언)

    19세기 부르주아 계급은 이런 식으로 전근대를 뛰어넘었지만, 21세기에 살아가는 상당수의 변혁을 꿈꾸는 혹은 변혁을 꿈꾸었던 이들은 그러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을 닮으라는 말이 아니다. 왜 그들을 넘어서는 대신 근대 이전의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으로 회귀하려 하는가?

    필자소개
    레디앙 기획위원. 도서출판 벽너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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