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하제패 꿈꾸었지만
    미생으로 끝난 윤기현
    [현대바둑 사이드스토리] 바둑해설
        2021년 08월 05일 10:4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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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11월 부산고법에서는 “바둑판의 주인은 누구인가”하는 희대의 선고공판이 열리고 있었다. 재판부의 판결을 요약하면 이렇다. 고인 김영성씨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두 개의 바둑판을 가족들의 생활비로 사용할 목적으로 팔아달라고 피고에게 위임했지만 판매대금을 원고에게 지급하지 않아 위임특약이 종료되었다는 내용이다.

    법률 용어가 그렇듯 다소 복잡해 보이지만 내용은 간단하다. 김영성씨가 바둑판을 팔아달라고 피고에게 부탁을 했는데 판매 후 대금을 주지 않는 것이다. 그 사이 김영성씨가 죽자 유족들이 대금을 달라고 하자 피고는 증여한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위임특약이 종료되었다는 것은 증여한 것이 아니라고 법원이 판단한 것이다. 피고는 윤기현이었다. 윤기현은 대법에 항소했지만 기각됐다. 한국기원 이사회가 징계를 추진하자 윤기현은 사퇴서를 제출하고 관철동을 떠났다. 젊은 시절 천하제패를 꿈꾸었던 원로기사의 초라한 은퇴였다.

    세고에와 오청원의 비자바둑판

    1972년, 오청원의 서명이 있는 고급 비자바둑판이 국내에 들어왔다. 오청원 바둑판을 가지고 있던 일본의 한 바둑기사가 급전이 필요하자 조훈현에게 부탁해 국내에 판매를 한 것이다. 일본에서 판매하는 것은 아무래도 부담이었다는 것이다. 윤기현 때문에 조훈현은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살아있는 기성 오청원의 바둑판은 부산바둑 대부였던 사업가 김영성이 200만원에 사들였다. 당시 부산의 최고급 주택가 한 채 값이었다.

    1992년, 오청원의 스승이자 조훈현의 스승인 세고에 겐사쿠의 서명이 있는 비자 바둑판이 국내에 나타났다. 바둑판에는 세고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서명도 함께 들어있었다. 애기가였던 한 대신이 세고에와 지도대국이 끝나고 서명을 받았고 이후 자신의 서명에 다른 대신들의 서명을 받아 기념으로 소장한 것이다. 이를테면 안평대군의 서명에 김종서와 황보인 등 당대의 대신들이 서명한 몽유도원도의 ‘바둑판 버전’인 셈이었다.

    세고에 유족들이 생계에 어려움을 겪자 대신이 바둑판을 돌려주었고 역시 일본에서 판매가 부담스러운 유족들은 조훈현을 통해 국내에 들여온 것이다. 이번에도 바둑판을 구매한 사람은 김영성이었다. 구입 가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상당한 거액이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전후 사정을 전해들은 김영성이 예상보다는 높은 가격에 사들였다는 이야기만 떠돌았다.

    2004년, 건강이 악화된 김영성은 치료비와 가족들의 생계비 마련을 위해 마당발로 소문난 윤기현에게 두 개의 바둑판을 판매해 줄 것을 부탁했다. 한 달 후 김영성은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윤기현은 세고에 바둑판을 일본인에게 1000만엔(1억)에게 판매했다. 뒤늦게 소식을 전해들은 유족들이 대금을 달라고 하자 윤기현은 묘한 주장을 하고 나섰다. 김영성이 바둑판을 맡기면서 수고비로 세고에 바둑판은 자신에게 준 것이고, 팔지 않은 오청원 바둑판은 돌려주었으니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유족들은 소송에 나섰고 법원은 9천4백만원을 돌려주라며 유족의 손을 들어주었다. 평소에도 평판이 좋지 않았던 윤기현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관철동 주변에 보이지 않았다.

    김인을 넘기 위해 기타니 도장으로 떠나다

    1959년 입단한 윤기현은 4년 차인 1963년 불과 21살의 나이로 최고위전 도전권을 차지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천하의 조남철을 상대로 패배하기는 했지만 1승을 거두면서 김인-윤기현의 시대가 시작될 것이라고 관철동의 호사가들은 전망했다. 실제로 바둑 잡지는 윤기현을 차세대 대권주자로 표현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김인은 기타니 도장으로 유학을 떠났고, 윤기현은 휘청거리며 이렇다 할 성적을 보여주지 못했다.

    1965년 심기일전한 윤기현은 국수전 도전권을 차지하며 결승에 올랐지만 조남철의 국수전 9연패 희생양이 되었다. 기왕전에서 다시 조남철에게 도전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윤기현에게 조남철은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보였다. 그런데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김인이 조남철의 국수전 10연패를 저지하는 일대 사건이 일어났다. 라이벌 의식이 폭발한 것일까. 1966년 윤기현은 조남철마저 꺾으며 국수전 본선을 질주한 후 김인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결과는 처참했다. 윤기현은 단 한판도 이기지 못했던 것이다. 이듬해 다시 국수전 도전자로 나섰지만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김인은 윤기현에게 단 한판도 내주지 않았다.

    호사가들에게 꾀주머니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였던 윤기현은 좌절하는 대신에 방법을 찾았다. 윤기현의 일본 유학이 이뤄진 것에 대한 이야기는 엇갈린다. 윤기현은 조남철이 한 단계 도약을 위해 김인처럼 유학을 가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이 있었다는 뉘앙스로 이야기를 했지만 조남철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뉘앙스라고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윤기현이 조남철을 언급하며 모호하게 말한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느 것이 진실이냐고 조남철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윤기현이 기타니 도장에 유학을 왔을 때는 하찬석과 조치훈 두 명의 한국인 제자들이 있을 때였다. 목표가 분명했던 윤기현은 한국인 제자들과 어울리며 시간을 소비하지 않았다. 오직 기타니 도장의 내공을 흡수할 수 있는데 주력했다. 새롭게 변하고 있는 정석들과 과거와 다른 행마들을 연구하는데 시간을 집중했고 이미 상당한 내공이 있는 윤기현은 단시간에 기량이 성장했다. 프로에게 언어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기보만 들여다보면 무엇이 문제인지 얼마든지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기타니 도장의 제자들과 일본프로기사들과의 실전은 돈으로도 바꿀 수 없는 절호의 기회였다.

    2년이 채 되지 않은 시간, 윤기현은 귀국을 결정했다. 김인이나 조훈현처럼 병역문제가 있는 것도 아닌 윤기현의 결정은 다소 성급한 측면이 있었다. 현해탄 건너에서 김인이 국수전을 5연패 했다는 소식들이 날아오는 것이 자극을 주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성급한 결정은 얼마 지나지 않아 오판이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윤기현은 천하제일인에게 꼭 필요한 ‘자신만의 바둑철학’을 완성하지 못한 상태였다.

    1972년 국수전을 6연패 중이던 김국수(주1)의 도전자로 나선 것은 윤기현이었다. 조남철과 김인에 이은 두 번째 기타니 도장의 사제대결이 시작되자 바둑팬들의 시선은 온통 운니동 운당여관 특별대국실에 쏠렸다. 두 번씩 승패를 주고받은 후 마지막 5국, 윤기현의 기세에 김인은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고 반격의 기회를 잡지 못하고 패퇴했다. 윤기현이 처음으로 타이틀을 차지한 것이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김인 검법의 파훼를 가장 잘 아는 유일한 인물은 같은 도장 출신인 윤기현이었다.

    김인이 비틀거리자 이듬해 국수전 도전자로 나타난 것은 떠오르는 신예 노영하였다. 기대주로 불리던 노영하는 1승을 거두는데 만족해야 했다. 한구석에서 윤기현의 천하가 오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윤기현의 천하는 영원히 오지 않았다. 철학을 완성한 하찬석이 일본에서 돌아왔기 때문이다. 1974년 국수전 도전자로 나선 하찬석은 윤기현에게 완승을 거두었다. 애초 관철동의 전망은 일본프로에서 호평을 받은 하찬석이 “좋은 대국기보를 남길 수 있을 것”이라는 정도였다. 선전을 할 가능성은 있지만 윤기현은 이기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는 뜻이었다. 하찬석은 한 판만 내주며 국수전을 차지하자 관철동은 충격으로 술렁거렸다. 패배의 상처가 깊었던 탓인지 윤기현은 비틀거리며 자멸했다. 윤기현이 마지막으로 도전자로 나선 것은 1976년 명인전이었다. 명인전 타이틀 보유자는 떠오르는 제왕 서봉수였다. 휸기현은 서봉수에게 5연승을 헌납하며 명인 호칭을 수여하는 제물이 되었다. 윤기현은 이후 은퇴할 때까지 다시는 도전자로 나서지 못했다.

    1974년 운명의 국수전 결승전. 좌측이 하찬석

    주1) 바둑기전을 5연패 하면 기사들에게 기전의 이름을 딴 호칭을 붙인다. 국수전을 6연패 한 김인의 호칭은 김 국수다. 김인 시대가 막을 내리고 등장한 조훈현은 국수전을 무려 10연패했다. 조훈현의 호칭도 조 국수다. 명인전을 5연패한 서봉수의 호칭은 서 명인이다. 국수전 2연패가 전부인 윤기현은 은퇴할 때까지 윤기현 9단이었다.

    KBS 노영하 대 MBC 윤기현

    유망주나 기대주가 모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노영하의 변신은 의외였다. 노영하가 입단한 것은 16살이었다. 1년에 단 두 명만 입단이 허용되던 시절이라 16살의 입단은 주변의 기대를 모으기 충분했다. 기대대로 입단 4년차인 1971년 약관의 나이에 왕위전에 나섰지만 준우승에 그쳤다. 상대는 천하의 김인이었다. 이듬해는 국수전 도전자로 나섰지만 다시 준우승에 그쳤다. 상대는 김인에게 국수전을 빼앗은 윤기현이었다. 21살의 나이, 노영하가 새로운 도전사를 쓰기에는 아직 충분한 시간이었다.

    1975년 하나의 사건이 노영하의 운명을 바꾸었다. 왕자전을 주최하던 TBC가 급하게 보조해설자를 찾던 중 우연히 노영하에게 그 자리가 돌아갔다. 메인 해설자가 벽에 걸린 커다란 바둑판에 자석 돌을 놓으려면 보조 해설자가 반드시 필요했다. 메인 해설자가 “젖히면 귀에서 패가 나는 모양”이라고 말하며 돌을 놓으면 보조 해설자는 알아서 다음 수순을 같이 진행해야 한다. 보조 해설자가 상당한 고수가 아니면 쉽지 않은 일이다.

    중견 고수들의 고민은 생계였다. 우승상금이 적은 것은 아니었지만 한두 사람이 독식하는 일이 계속되었고 중견 고수들의 수입은 평범한 직장인 월급도 되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나마 평판이 좋은 기사들의 경우는 탈출구가 있었다. 지방 애기가들이 초청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 옆에는 항상 바둑을 좋아하는 재력가들이 있었다. 지도 대국료라는 이름의 거마비는 상당한 수준이었다. 한 달에 한 두 번이면 집에 생활비를 가져다 줄 정도는 되는 수준이었다. 반상근이나 다름없었던 TV해설은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하지만 ‘도전’과는 거리가 멀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실력 외에 여러 가지가 겸비된 쓸만한 중견 보조 해설자를 찾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노영하는 청년신사라고 불러도 좋았다. 차분한 말소리에 신뢰감을 주는 억양은 상대방에게 집중력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지적인 외모에 옷걸이마저 뛰어났다. 적격이라고 생각한 TBC는 노영하를 섭외했고 평소에 남에게 싫은 소리를 잘 하지 못하는 노영하는 경험이라고 생각하고 응했다. 대회가 끝나자 노영하에 대한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24살의 청년은 조금 당황했지만 이내 잊어버렸다. 사건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바둑 해설을 준비 중이던 KBS의 레이더에 노영하가 잡힌 것이다. KBS는 노영하에게 해설을 제안했다. 무슨 생각이었을까. TV 해설을 시작한다는 것은 도전과는 멀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노영하는 제안을 선선히 수락했다. 1976년 KBS는 TV 바둑 해설 프로를 신설했다. 자체 대회를 신설한 것은 아니었고 다른 대회의 주요대국을 해설해주는 방식이었다. 유명기사들의 대국을 해설하는 것이 주였지만 특이한 대국도 종종 소개되었다. 주변 돌의 배석 때문에 사활을 착각한 됫박형과 놓쳐버린 변삼수가 함께 등장한 대국 같은 경우가 소개되는 식이었다. 여기서 문제의 수가 등장하죠. 아마고수들이 눈을 크게 뜨고 보는 순간이다.

    자체 기전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노영하가 움직일 공간은 제법 넓었다. 자신이 대국을 선택할 여지가 많았고 자연스럽게 공부에도 도움이 되었다. 정식대회는 아니지만 신춘 특별기전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우승도 차지했다. 노영하는 잠시 부업을 중단하고 다시 도전의 길을 나서기 위해 연구에 집중했다. 노영하 덕에 흥행에 성공한 KBS는 1980년 속기전인 바둑왕전을 신설했다. 제1회 KBS 바둑왕전 결승에 오른 것은 노영하와 조훈현이었다. 노영하의 준우승은 이때가 마지막이었다.

    불행하게 끝난 미생, 윤기현

    KBS 바둑왕전은 종편방송의 안정적인 시청률을 보장하는 예능프로나 마찬가지였다. 차이점이라면 제작비가 거의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곧바로 MBC가 유사프로인 바둑제왕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해설자였다. 조건을 세 가지였다. 타이틀 홀더 경험이 있는 중견일 것, 방송에 적합한 마스크와 목소리일 것, 객원 해설을 대비해 마당발일 것이었다. 대상자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때 나온 인물이 윤기현이었다. 좋은 마스크는 아니었지만 딱히 비호감은 아니었다. 나머지 조건은 완벽했다. 변방을 떠돌던 윤기현은 제안을 즉각 수락했다.

    의외였다. 윤기현의 캐스팅은 성공 그 이상이었다. 윤기현은 여담에 강했고 추임새가 뛰어났다. 윤기현은 돌아가신 하일성 같은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만담꾼처럼 보여도 그가 보여주는 변화도는 흥미로우면서도 설득력이 있었다. 한때 타이틀 홀더였던 실력은 아직 녹슬지 않았다. 위기를 느낀 KBS는 노영하에게 컴백을 요청했다. 1984년 노영하는 KBS 바둑왕전 해설자로 돌아왔다.

    MBC 코미디 프로 <알까기 명인전>의 모델은 윤기현이었다. 공전의 히트를 치며 최양락은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윤기현은 MBC 바둑제왕전을 14년간 해설했고, 노영하는 KBS 바둑왕전을 무려 30년간 해설했다. 두 사람의 해설이 인기를 끌자 그들이 제작한 바둑비디오는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갔다. 노영하의 <바둑강좌>는 백만질(10개 1질) 이상이 팔렸다는 것이 정설일 정도였다. 윤기현이 노영하보다 조금(?) 먼저 해설을 그만둔 것은 그가 마당발인 탓이 크게 작용했다. 1980년 중반이 들어서면서 바둑의 규모는 커졌지만 한국기원의 시스템은 여전히 아마추어였다. 노장기사들의 숫자는 늘어갔고 최소의 품위유지를 위한 처우와 복지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윤기현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기원 이사회와 기사회에 참여해 기사들의 조건을 개선하려고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타이틀 획득을 위한 도전과는 거리가 멀어졌지만 간간히 본선 무대에 진출해 젊은 기사들에게 자극제 역할을 했다.

    * 현대바둑 사이드스토리 연재 링크

    필자소개
    인문사회과학 서점 공동대표이며 레디앙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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