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 모델 체질인가봐"
        2006년 12월 02일 08:1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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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호작약이었다. 지하실에서, 차고에서, 다락방에서 보이지 않게 일했던 미싱의 달인들이 화려한 패션 무대를 휘어잡았다. 번쩍거리는 조명도, 고막이 터져라 울려대는 음악도, 강금실 전 장관을 비롯한 유명 인사들도 난생 처음 무대에 오른 창신동 아줌마들의 위풍당당함에 녹아내렸다.

    고 전태일 열사의 동생 전순옥 박사가 설립한 ‘참여성노동복지터(참터)’가 1일 동대문 패션아트홀에서 ‘수다공방 패션쇼-창신동 아줌마, 미싱에 날개 달다’를 개최했다. 패션쇼에 참가한 30여명의 여성 노동자들은 참터에서 지난 6월부터 운영하고 있는 ‘수다공방 기술교육센터’의 졸업생들이며, 30~40년간 미싱사로 일한 전문 기술자들이다.

       
      ▲ 제목 그대로 날개를 달고 런웨이를 압도하는 창신동 아줌마들 "우리 모델이 체질인가 봐" (사진=신경남)
     

    전태일 오빠, 드디어 아줌마들이 밝은 무대에 섰어

    11월 현재  3기까지 졸업생을 배출한 수다공방은 노동부 노사공동 훈련 시범프로그램의 직업센터로서 동대문 지역의 여성봉제 근로자들의 기술 대안 학교이다.

    이날 패션쇼에는 정해진 635석을 넘는 1,200여명의 관람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으며, 이상수 노동부장관, 장하진 여성가족부장관, 강금실 전 법무부장관, 민주노당당 심상정, 최순영 의원 등 각계 인사 20여명이 봉제 근로자들이 만든 옷을 입고 모델로 나섰다.

    전순옥씨는 "창신동 아주머니들은 숙련된 고급 기술을 가지고 있음에도 70년대와 똑같은 열악한 환경에서 일한다. 이것을 사회적으로 인정받게 만들고 아주머니들이 전문 기술자로서 당당히 주인되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 패션쇼를 기획했다"고 밝히고, 아줌마들의 패션쇼 워킹을 보며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전씨는 "아줌마들의 당당한 모습들이 자랑스럽고 감사하다. 그런 모습을 보니 오빠가 생각났다" 면서 "( 마음속으로)오빠, 드디어 아줌마들이 밝은 무대에 섰다!"라고 연신 외쳤다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동대문 의류시장의 발전과 함께 공장의 불빛이 꺼지지 않던 창신동, 이화동, 원남동 등은 가내 봉제공장 밀집 지역으로서 세계적 수준의 봉제 가공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2000년대 말 상인들이 중국, 베트남 등 저임금지역에서 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동대문 시장은 국내 소비자 및 일본 등 해외 소비자들로부터 신뢰를 상실하고 중국이나 동남아와 비교하여 차별성 없는 저가 의류시장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에 따라 세계적으로 독특한 경쟁력을 가진 의류시장이자 고용 유발 효과가 큰 산업으로서 동대문 의류시장의 생산기반이 무너질 수 있다는 우려가 대두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우려는 30년 이상 숙련된 기술력을 가진 여성봉제 노동자들의 일거리가 줄어들고, 봉제 가공 기술력이 단절되는 역효과를 초래하고 있다.

    자신감과 당당함을 얻었어요 

    한국의 경제력이 세계 10위에 오르는 동안 봉제 노동자들에게 남은 건 하루 15시간 이상의 근무 조건과 저임금에 따른 사회적 냉대와 생활고 뿐이었다. 70~80 년대 한국 경제의 숨은 주역이었건만, 봉제 노동자들은 그간 단 한번도 음지의 지하실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이 날 패션쇼에 참가한 아줌마들이 한 목소리로 "이제야 한 줄기 빛이 보이는 것 같다"고 말한 것은 그래서 뜻깊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봉제 일을 시작했다는 성양자(46)씨는 언제부터 미싱일을 시작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봉제일이 바쁠 때는 숨 쉬는 것조차 고될 만큼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고, 또 한가할 때는 생활이 너무 쪼들려 힘이든다. 우리는 일손이 딸려 죽겠는데, 청년 실업이 문제라는 보도를 보면 무언가 모순이 있는 것 같다" 면서 " 힘들게 일한만큼의 값어치를 인정해주는 사회적 시스템을 마련하면 그 모순을 해결 할 수 있을 것 같다.  요즘 우리는 후배들이 들어오지 않아 숙련된 고급 기술이 사장될까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봉제 공장도 눈에 보이는 단기 이익에 급급하지 말고 제대로 된 투자와 시스템을 갖춰 경쟁력을 길러야 한다"면서 " 나 또한 아직 장인이 되려면 멀었다. 내가 아는 기술을 활용하며 사는 것에 만족을 느끼는 만큼 죽을 때까지 배울 것"이라고 포부를 드러냈다.

    얼마 전 종영한 mbc 드라마 발칙한 여자 의사 가운을 협찬 제작하기도 했던 김중성(53)씨도 " 처음엔 우리같은 사람이 과연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이제는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얻기도 하고 또 당당히 보여주기도 했다"며 애써 눈물을 참았다. 

    그는 "끊임없는 자기 계발이 필요하다. 기술을 업그레이드해서 꼭 세계적 명품을 만들겠다"면서 "의류 산업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만 있으면 반드시 성공 할 수 있으며, 내 제품으로 증명 하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 워킹의 컨셉이  발랄, 경쾌, 유쾌라는 양선애씨 (사진=신경남)
     

       
     ▲ 열렬한 환호로 패션쇼 피날레 무대는 성대하게 막을 내렸다 (사진=신경남)
     

    관객들이 열렬한 갈채와 환호는 멈출 줄 몰랐다

    패션 쇼 무대 뒤. 수많은 사람들 앞에 서는 게 부담스러운지 행사 초반 아줌마들의 얼굴엔 긴장감이 역력했다. 그러나 처음이 어려울 뿐, 정신없이 첫 무대를 치르자 두 번째 무대부터는 서로 ‘워킹’을 칭찬하며, 곳곳에선 “또 해보고 싶다”, “나 모델 체질인가봐!”라는 농담이 넘나들었다.

    하는 사람이 즐거우니 보는 사람도 행복하긴 마찬가지. 샤넬 라인, 화려하고 값비싼 의상, 환상의 S라인이 없어도 관객들은 열렬한 갈채와 환호를 멈추지 않았다.

    굳은 살이 박힌 거친 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객석을 지켰던 양영순(39)씨는 “열 다섯부터 봉제 일을 해 기자와 얘기 할 주변머리나 지식이 없다”며 처음엔 기자의 물음에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대가 달궈지자 양씨는 “평생 머리털 나고 이런 곳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오는데, 마치 내가 무대에 선 것처럼 가슴이 너무 뭉클하고 떨린다”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양씨는 “미싱을 하면서 일보다는 서로 돕고 함께 사는 인생의 지혜를 어머니들에게 많이 배웠다. 그 분들이 없으면 나는 있지도 않았다”면서 “미싱 일이 보는 것과 달리 육체적으로 만신창이가 될 만큼 정말 힘들어 가끔 어린(?) 나도 그만두고 도망치고 싶었다. 이번 패션쇼를 통해 옷의 한 올 한 올이 모두 아주머니들의 피와 땀이라는 걸 사람들이 많이 알았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 이분이 바로 늦깍이 고등학생이신 신경남씨. 교복이 멋지시네요.
     

    MBC 라디오 여성시대를 통해 수다공방의 소식을 알고 사진 찍는 자원봉사를 지원한 신경남(52)씨도 “라디오를 듣고 같이 힘든 삶을 살아온 동시대의 사람으로서 가슴이 울컥해 견딜 수  없었다”며 행사에 참가한 이유를 설명혔다.

    현재 경동고 1학년 늦깍이 고등학생이기도 한 신씨는 “내겐 교복이 평생의 응어리 같은 옷이다. 이제 고등학교에 들어가 항상 중요한 모임에 갈 때마다 양복 대신 당당히 교복을 입고 다닌다”면서 “내가 뒤늦게 남아 교복을 입고 평생의 한을 풀었던만큼, 미싱아줌마들도 이제는 반드시 빛을 볼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이날 행사는 KBS 아줌마 아나운서 정용실, 여성학자 오한숙희씨가 공동으로 진행했으며, 창신동 노동자들의 다큐영상, 창신동 봉제인과 초청인사들이 함께 하는 패션쇼, 각종 축하 공연 및 전시회로 채워졌다.

    앞으로 수다공방은 내년 초 ‘의류생산 공동작업장’을 설립하고, 청계천 전태일 동상 근방에 1호점을 열어 소비자와 직거래 할 예정이다. 수다공방의 옷은 30~50대 어른들을 대상으로 편안하고 품위 있는 분위기를 컨셉으로 하고 있으며, 또 모든 가공법을 친환경적으로 제작한다. 수다공방 옷에 대한 자세한 문의는 수다공방 홈페이지(www.sudagongbang.org) 또는 사무실 전화(02-587-0590)를 통해 문의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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