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생각하는 학벌사회
    [노동자와 산업/경제] 학벌과 노동조건, 임금격차
        2021년 08월 02일 09:2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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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가 학교를 다녔던 30여년 전 우리 사회의 주요 문제 중 하나는 강한 학벌주의였다. 학벌이란 특정 학교를 중심으로 형성된 폐쇄적 파벌집단을 말한다. 폐쇄적 파벌집단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학벌은 같은 학교를 나온 사람들끼리 집단을 이루어 다른 개인을 차별하고 배제한다. 이유는 단순한데 그래야만 부ˑ권력ˑ명예와 같은 한정된 재화를 더 많이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학벌 없는 나라가 어디 있겠냐 마는 당시에 학벌이 문제가 되었던 이유는 우리 사회가 지닌 학벌의 특이함과 강도 때문이었다. 특이함이란 입학에 의해 그 뒤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것이었고, 강도란 특정 학교의 지배력이 지나치게 크다는 것이었다.

    같은 문화권인 일본만 하더라도 동경대를 중심으로 강한 학벌이 존재하지만 강도와 집중의 측면에서 우리와 비교할 바가 못되었다. 문화권이 다른 미국이나 영국과 같은 나라도 아이비리그나 캠브릿지‧옥스퍼드처럼 강한 학벌이 존재하지만, 동급으로 간주되는 대학이 여럿 존재하여 서로 경쟁하기 때문에 강도와 집중의 정도가 우리와 확연히 달랐다. 무엇보다 이들 나라들은 졸업 후에도 끊임없이 자신의 실력을 증명해야 하기 때문에 입학시험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는 우리 사회와 크게 차이가 존재했다.

    이를 요즘 유행하는 말로 바꾸어보면 서구 선진국의 경우 실력에 따라 보상이 이루어지는 능력주의가 지배하지만, 우리나라는 입학시험에서 한 번만 능력을 보여주면 되기 때문에 능력주의에도 한참 모자라는 전근대적 신분주의가 지배하는 사회라는 것이다. 여기서 신분화되어 있다는 말은 최상위 학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최상위에 대항하기 위해 차상위 학벌이 존재하고, 동일한 이유로 다시 그 아래 … 등등으로 해서 사회 전체적으로 계급화된 학벌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험적으로 보면 학벌과 무관하게 동등한 능력을 갖거나 더 뛰어난 실력을 지닌 사람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개인에 따라 탁월함을 발휘하는 시차가 존재할 수 있으며, 탁월함이란 분야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학벌이 낮거나 없더라도 탁월함을 갖는 개인을 만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학벌 획득을 위한 치열한 경쟁을 완화하고, 보다 공정한 사회를 만들려면, 학벌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대략 이런 것들이 필자가 학교를 다녔던 시절 학벌에 대한 주요 비판으로 기억한다.

    우리 사회 학벌주의는 어떻게 변화했나

    그러면 상당한 시간이 흐른 현재, 우리 사회의 학벌주의는 어떻게 변화했을까? 필자는 학벌이 약화되고 있다는 이범(2020, 문제인 이후의 교육)의 문제의식에 크게 동의한다. 필자는 학벌이 약화되는 가운데, 능력주의가 우리 사회에 매우 강하게 뿌리내렸다고 판단한다. 그에 따라 학벌 역시 과거와 달리 능력을 키워주는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우선 학벌이 약화되고 있다는 점들은 자료를 통해 뚜렷이 확인된다. 우리나라 100대 기업 CEO 중 서울대 출신이 차지하는 비중이 1994년엔 53.9%에 달했지만, 2017년 현재 24.6%로 크게 하락했다. 1000대 기업으로 이를 확장하면 2007년의 경우 SKY출신 CEO가 59.7%에 달했지만, 2020년 현재 29.3%로 확연히 낮아졌다.

    학벌이 약화되고 있는 것은 대기업 채용방식에서도 관찰된다. 고도성장을 하던 과거엔 대기업이 정기공채를 통해 여러 분야를 담당할 수 있는 올라운드 플레이어를 채용했다면, 최근엔 수시채용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 과거엔 무슨 일을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직무교육을 통해 인력을 배치하는 정기공채가 주류였기 때문에 학벌을 포함한 소위 스펙이 중요했다. 단, 대졸자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했던 시절엔 다양한 스펙을 강하게 요구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수시채용은 직무가 명확하기 때문에 출신대학보다 전문성이 더 중시된다. 다시 말해 직무에 대한 능력이 중요하다. 그러다 보니 담당업무에 대한 능력이 인정되면 굳이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더라고 문제되지 않는다.

    물론 아직까진 수시채용이 정시채용보다 규모가 작다. 그렇지만 인쿠르트가 705개 기업에 대해 2021년 상반기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2021년의 경우 49.9%에 이를 정도로 수시채용은 대세가 되어 가고 있다. 진정한 능력주의 사회로 간주되는 미국이나 유럽의 경우 정기채용이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나라 역시 급속히 능력주의로 전환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학벌 없는 사회를 외쳐온 시민단체가 고백한 바 있듯이 학벌은 더 이상 권력을 보장하는 수단이 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 왜 이러한 일들이 발생하고 있을까? 과거 국가 주도 경제성장을 할 당시만 해도 크게 부족했던 자원을 국가가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할당받기 위해선 고시를 통과한 관료와의 인적네트워크가 매우 중요했다. 그런 만큼 학벌 자체의 중요성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민간부문이 크게 성장하면서 스스로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이 확장되자, 고위관료와의 인적네트워크가 과거만큼 중요하지 않게 된 것이다.

    생각해보면 세계시장에서 경쟁해야 하는 자본이 학벌에 얽매인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자본에 중요한 것은 이윤을 높여줄 수 있는 능력을 보유했는가 아닌가이지 좋은 학벌을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과거 자본이 학벌을 우대했던 것은 당시만 하더라도 이윤확대에 크게 기여한 수단이 학벌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글로벌기업으로 성장한 자본이 다수 존재하는 오늘의 현실에서, 지속적 능력을 보여주지 못함에도 학벌 때문에 이를 배려할 자본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만약 지금도 과거 학벌을 고수하는 자본이 있다면 그 자본은 필연적으로 경쟁에서 도태될 것이다. 이런 이유로 과거 학벌은 자본의 성장과 함께 도태될 수밖에 없는 역사적 산물이었다고 판단된다. 물론 정부의 힘이 압도적으로 작용하는 은행과 같은 금융부문의 경우 여전히 학벌이 중요하다는 한계가 존재하지만, 다른 부문의 경우 학벌이 차지하던 위상은 과거와 크게 달라지고 있다.

    학벌의 위상은 달라졌지만 경쟁이 지속되는 이유는?

    그럼에도 주변을 보면 학벌을 획득하기 위한 경쟁이 더 심화되고 있다. 1인당 사교육비는 이명박정부 시기인 2008년 금융위기 여파로 소폭 하락한 후 주춤했던 것을 제외하면 2016년 이후 다시 계속해서 상승하고 있다. 학벌은 약화되는데 학벌을 위한 경쟁이 더 심화되는 모순된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 이유는 우선 노동조건이 탁월한 제한된 좋은 일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고용형태별 근로실태조사에 따르면 2017년 총액 기준 중소기업의 임금은 대기업의 52.6%에 불과할 정도로 차이가 크다. 이를 두고 흔히 헬조선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중소기업의 실질임금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계속 상승했다는 점을 오해해선 안된다. 대기업의 실질임금이 더 가파르게 증가하면서 차이가 확대된 것이다. 특히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임금격차가 두드러지게 확대되고 있는데, 대기업 비정규직조차도 중소기업 정규직보다 더 낮은 수준에 있다.

    이를 잘 아는 학부모들은 자녀가 더 좋은 일자리를 획득하기에 용이하도록 더 많은 사교육비를 지출하는 것으로 대응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비단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가족주의가 약한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로 발견된다. 미국 역시 소득격차가 큰 주일수록 자녀 교육에 대한 투자가 크고, 양극화가 심해질수록 자녀의 성취를 관리하는 부모의 비율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학벌을 얻기 위한 경쟁 심화의 또 다른 이유는 학벌이 능력을 키워주는 형태로 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알리미에 따르면 2018년 기준 서울대의 1인당 교육비는 4,475만 원이고, 연세대는 3,173만 원이며, 한양대는 2,190만 원이다. 고가의 실험장비에 대한 의존도가 큰 이과 위주의 포항공대는 9,328만 원에 달한다. 이과 위주의 포항공대를 예외로 하면 대학 서열대로 학생 1인당 교육비 역시 서열화되어 있다.

    이 상황을 단순화시켜 말하면 서열이 높은 학교에 가면 더 좋은 교육훈련을 받을 수 있고, 그 결과 더 나은 능력을 획득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학벌의 전통이 전혀 없는 데다 지방에 위치한 불리함까지 지닌 포항공대가 최상위권 학벌로 도약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으로 추론된다. 말하자면 현재 학벌은 과거에 비판받던 학벌이 아니라, 능력으로 무장된 학벌로 진화하고 있다. 물론 학부모들은 경험적으로 이를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학벌을 더 약화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대ˑ중소기업 간, 특히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임금격차를 줄이고, 대학 간 교육환경의 차이를 좁혀야 한다. 특히 지방의 교육환경을 개선하는데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한다. 지방 학생들은 수도권에 비해 경제력이 취약한 가정에 속한 경우가 많을 뿐만 아니라, 정보에서도 소외되어 공정한 경쟁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사후적으로나마 불공정을 개선하려면 공적기능을 담당하는 지방 국공립대학의 교육환경을 크게 향상시키는 데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한다. 물론 이를 실현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를 실현하기 위한 지혜를 모아야 한다.

    필자소개
    동아대학교 법학연구소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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