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가 빚고, 강릉 땅이 만든 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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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12월 02일 09:0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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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애를 했던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강릉에서 회 한 접시에 소주 한 잔하자며, 애인에게 동해바다 넘실거리듯 넘실거렸을지 모른다. 그렇게 ‘회’는 강릉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쉽게 떠오른다. 그러나 재미있게도 회를 비롯한 해산물은 강릉을 대표하는 음식이 될 수 없다.

    그 이유는 강릉이란 도시 형성 과정과 깊은 관련이 있다. 예민한 관찰자들은 동해안의 대부분 도시가 항구를 기반으로 형성, 발전된 반면에 강릉이란 도시는 ‘항구’가 없이 형성되었음을 알아챘을 것이다.

    항구 없이 형성된 도시 ‘강릉’

    서쪽으로는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높고 가파른 태백산맥이 가로 막고 있고 동쪽으로는 푸른 동해바다가 넘실되는 곳, 그 옛날 유일한 생산수단인 농지 개간조차 어렵고 개간을 하였다 하더라도 치더라도 당시 인구를 감당할 만한 충분한 여유를 가질 수 없었을 것은 뻔한 이치이다. 따라서 동해안 따라 형성된 대부분의 도시들은 어업을 생업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을 것이다.

       
      ▲ 관동별곡의 무대가 된 경포대 정자
     

    이는 항구를 가지지 못한 강릉이 옛날부터 생산을 기반으로 형성된 도시가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대신 강릉은 그 옛날부터 생산보다는 동해안 지역의 행정과 교육을 담당하며 성장하였다. 그 이유는 아마도 강릉이 태백 준령을 비교적 쉽게 넘을 수 있는 교통의 요지라는 성격 때문이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따라서 항구가 없는 도시에서 회나 해산물이 그 도시에 대표적인 음식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인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강릉을 대표하는 음식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쉽게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동해바다 청정수를 간수로 사용하여 만든다는 부드럽고 고소한 맛의 ‘초당두부’가 아닌가 싶다.

    ‘초당두부’하면 사람들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끈한 모두부를 김치에 싸먹는 맛을 상상하며 입맛을 다실지 모른다. 그런데 이 초당두부에는 이 아삭한 김치와 두부의 부드럽고 고소함이 잘 어우러진 맛과 더불어 강릉 지방의 오랜 역사를 함께 맛볼 수 있다.

    혁명적 사상을 잉태한 강릉, 허균과 여운형

    정치적으로 보자면 강릉은 매우 보수적인 마을이다. 역대 선거 결과만 놓고 보자면 진보정당은 고사하고 보수 자유주의 정당조차 제대로 뿌리를 내려 본 적이 없다. 게다가 일상 생활 마저도 대단히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이라는 평이다(강릉 분들에게 죄송 ^^;;).

    강릉지역 선배의 이야기를 빌리자면, 강릉의 결혼 풍습은 여타의 다른 지방과 달리, 결혼을 할 때 여자가 혼수 대부분을 준비하는 것이 관례이며, 남자는 그저 모 두 쪽만 가지고 간다고들 한다. 지금이야 그렇게까지 하겠는가마는, 하여튼 그렇게 많은 혼수를 준비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자들은 결혼 후에도 남자를 깍듯이 섬기는(?) 가부장적 질서를 자연스럽게 받아드린다고 한다.

    남자를 신주단지처럼 모시는 강릉 사람들의 이런 보수성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나는 초당두부의 역사를 알게 되면서 자연스레 이 궁금증을 풀 수 있는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강릉지방의 보수성이라는 자물통은 초당두부라는 열쇠를 통해 열수 있었던 것이다. 하여튼 자물통을 열기 전에 강릉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자.

    역사적으로 보면 강릉은 앞서 말한 것과 같이 보수적인 사회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여타의 다른 지역보다 진보적이고 때로는 혁명적이었던 듯하다. 조선 500년 역사 중 가장 혁명적인 사상이 강릉 사람 허균을 통해 나타났고, 걸출한 사회주의자 여운형이 강릉에 기숙을 했었다는 사실만 보아도 그렇다.

    허균은 민중을 법에 순종하면서 지배계급의 부림을 당하는 항민(恒民 : 온순한 백성), 뼈 지도록 일해 지배계급의 끝없는 요구에 부응하지만 지배계급을 미워하는 원민(怨民 : 원한을 품은 백성), 착취와 억압에 대한 분노를 감추었다가 어떤 계기에 지배계급에 항거하여 자신의 뜻을 펼치려는 호민(豪民)으로 구분하여, 통치와 지배의 대상으로만 인식하던 당시의 현실과는 크게 다른 진보적 백성관, 정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나아가 홍길동전을 통해 신분질서의 타파하려는 혁명적인 사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편 노비 앞에서 노비문서를 불태우며 "그대들을 다 해방시키겠다. 지금부터 각기 자유롭게 행동하라. 이제부터는 상전도 없고 종도 없다"라며 신분질서 타파와 노예해방을 몸소 실천했던 몽양 여운형 선생. 그는 1910년 지금의 강릉고등학교의 전신인 ‘초당의숙’에서 선생을 하였는데, 당시 몽양이 가르치는 초당의숙에는 그 지역의 많은 청년들이 몰려들었고, 이들은 후에 3.1운동의 지도급 인사로 활동하였다. 이런 지적 유산은 해방정국과 한국전쟁에까지 이어져 강릉지방에 강한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적 사상을 남겼다.

    역사가 빚어낸 맛, 초당두부

    허균과 여운형을 통해 본 강릉의 진보적 역사는 시대의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비극으로 끝나게 된다. 즉 정치적 격동은 이 지역의 혁명적 사상을 가졌던 이들을 죽음으로 내 몰았던 것이다.

       
      ▲ 소박한 초당 순두부 한상
     

    조선시대 반역죄는 이른바 삼족을 멸한다는 가혹한 정치적 탄압을 의미하는 바, 허균이 죽을 때 함께 목숨을 잃었던 사람이 얼마나 될까? 허균이 죽은 뒤 광해군이 ‘허균은 성품이 사납고 행실이 개, 돼지와 같았다. 윤리를 어지럽히고 음란을 자행하여 인간의 도리가 전혀 없었다. 죄인을 잡아서 동쪽의 저자거리에서 베어 죽이고, 다시 기쁨을 누리고자 대사령을 베푸노라’하며 발표한 반교문은 그 탄압의 실체가 어떠했는지 짐작가게 한다.

    또한 여운형에게 감화되었던 사람들이 ‘6·25 후 공산주의가 들어오니, 모두 동참해 남자들 대부분이 희생’되었다는 강릉에 사는 한 할아버지의 진술(참고: 주간동아)은 한국전쟁 와중에 강릉 지역에서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죽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초당두부는 이러한 정치적 희생과 아픔 속에서 태어난 것이다. 남자들이 씨가 말라버린 상황, 농사 지을 변변한 땅 한 평 없고, 그렇다고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을 수도 없는 지리적, 사회적 환경 속에서 아낙들은 무엇인가를 생산하고 시장에 내다 팔 수 밖에 도리가 없었다.

    어찌 보면 주변에서 나는 흔한 콩과 동해바다라는 천연의 간수를 이용하여 대표적인 서민음식 두부를 만드는 일은 자연스런 일이었을지 모른다. 살아남은 여자들은 억척스런 노동과 장사를 통해 아이들을 교육시켜야만 했고, 아이들만 남기고 간 죽은 자에 대한 원망을 아이들에게 전했을 것이다.

    해방 전후, 지주가 다섯 집, 소작이 200여호 되었던 마을, 초당동에서 만들어진 두부는 이렇게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이런 까닭에 나는 강릉의 최고의 장소를 꼽으라 하면, 주저 없이 초당마을을 꼽는다. 초당두부에 얽힌 가슴 저린 이야기를 곱씹으며 동해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솔밭 산책길을 걷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소나무 숲 한가운데 위치한 허난설헌 생가의 솟을 대문도. 수국 곱게 피어 있는 마당도 남모를 애뜻한 정감을 준다.

    맛있는 초당두부 만들기

    두부를 만드는 과정은 간단하지만 그 맛을 제대로 내기 위해서는 섬세한 손질과 많은 정성이 필요하다. 우선 두부의 가장 기본재료인 콩은 두부의 맛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소다. 보통 강원도 산간지방에 나는 햇콩을 사용한다.

    만드는 방법은 첫째, 햇콩을 불려야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콩을 불리는 시간이다. 이 시간에 따라 맛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둘째, 불린 콩을 맷돌에 갈고 이를 촘촘한 천으로 걸른 후, 콩물을 끊인다. 끊이는 시간과 화력 역시 중요한 항목이다. 그런 다음 바닷물을 부으면 단백질이 엉기면서 응고가 되는데 이런 상태를 순두부라 한다. 이 순두부를 틀에다 넣고 응고를 시키면 초당두부가 된다. 두부의 맛은 간수, 바닷물의 양이 맛을 좌우하는데 그 양의 조절은 집집마다 전해지는 비법이므로 다 다르다.

    만약 초당 순두부 집에 간다면 부엌에 들어가 두부를 만드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도 나름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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