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자폭탄의 아버지를 좌파로 만든 것들
    By
        2006년 12월 01일 07:51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트루먼 대통령, 제 손에는 원폭 희생자들의 피가 묻어있습니다.”

    1946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을 개발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로버트 오펜하이머 박사가 미군의 최고 지휘관인 대통령에게 한 말이다.

    원폭의 아버지라 불린 오펜하이머는 평생 자신의 손으로 만든 ‘자식’들인 핵폭탄을 증오하며 살았다. 자기가 만든 핵병기의 가공할 위력을 보고 충격을 받은 그는 핵무기 반대 운동을 통해 22만 원폭 희생자들에게 속죄하고자 한 것이다.

    미국인들에게 오펜하이머 박사는 원자폭탄을 개발해 일본의 항복을 앞당기고 수많은 미군 병사들의 목숨을 지킨 미국의 은인이었지만, 핵무기에 대해 그가 적대적 태도를 보이자 오히려 ‘미국의 적’으로 몰아붙였다. 이로 인해 그는 온갖 고초를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미국의 은인에서 미국의 적으로

       
     ▲ 로버트 오펜하이머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1904년 뉴욕에서 태어났다. 하버드를 졸업한 후 그는 더 많은 공부를 위해 유럽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유럽 학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그는 자신의 학문을 넓히고 독창적인 연구 성과를 올리며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공부밖에 모르며 세상 일에는 담을 쌓고 사는 전형적인 공부벌레였다.

    그런 그가 이론물리학 바깥의 영역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은 1936년 한 여학생을 만나면서부터였다. 당시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 캠퍼스의 물리학과 교수였던 그는 스탠포드 심리학과에 다니던 진 태틀록이라는 여학생과 사랑에 빠진 것이다.

    진 태틀록은 미국공산당 당원으로 오펜하이머에게 문학과 사회주의라는 다른 세계를 가르쳐주었다. 둘은 결혼을 계획했지만 사랑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진 태틀록은 1944년 자살했다.

    오펜하이머를 급진주의자로 만든 다른 요인은 미국과 세계를 휩쓴 대공황이다. 그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생계 걱정 없이 연구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공황으로 고통 받는 진 태틀록의 가족을 보면서 이전까지 자신이 안주했던 ‘연구실 안에서의 연구’에 대해 의심하게 됐다.

    1937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재산의 대부분을 상속받은 오펜하이머는 자신이 소유한 부를 미국 안팎의 좌파 활동에 기부했다. 특히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군과 인민전선 정부를 돕는 일에 힘을 쏟았다. 스페인 내전뿐만 아니라 파시즘에 반대하는 활동에 열정을 쏟았는데 이는 오펜하이머 자신이 그다지 종교적인 인물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유태인이었고, 또 유럽에서 만났던 많은 유태인 학자들이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해오는 것을 보고 파시즘의 위험을 일찍부터 간파했기 때문이다. 그가 핵무기의 개발에 매진했던 것도 단지 학자로서의 호기심만은 아니었다.

    오펜하이머는 1940년 캐서린 해리슨과 결혼했다. 캐서린 해리슨은 스페인 내전에 국제 의용군으로 참전했다 전사한 미국공산당원의 미망인이었으며 자신 또한 당원이었다. 친동생이며 역시 물리학자인 프랭크 오펜하이머도 30년대, 공산당에 입당했다.

    오펜하이머 연구실의 대학원생 다수가 또한 당원이었다. 이러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오펜하이머 자신은 입당을 한 적이 없다. 그러나 공산당원을 비롯한 급진주의자들과 교류하고 그들의 활동을 꾸준히 지원했다.

    연구실에서 사회 현실로

    4년간의 노력 끝에 1945년 7월 16일 미국은 인류 최초의 핵폭발 실험에 성공했다. 그러나 맨하탄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했던 오펜하이머는 성공의 기쁨보다는 핵폭발이 보여준 무시무시한 힘에 공포를 느꼈다.

    그는 후에 당시의 폭발을 지켜보며 머리 속에서 힌두교 경전인 ‘바가바드기타’에 나오는 구절을 떠올렸다고 한다. “이제 나의 이름은 죽음이며, 세상의 파괴자이니라.” 동생 프랭크도 그가 실험의 성공 후 전혀 기뻐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한 달도 안 지나서 완성된 두 개의 원자탄이 일본에 떨어졌고 태평양전쟁이 끝났다. 트루만은 1946년 정부기구인 원자력위원회(AEC)를 구성해 핵개발과 통제를 군부에게 민간에게로 넘겼다. 트루만은 미국의 핵 독점 지위가 지속될 것으로 낙관해 핵을 민간에게로 넘긴 것이다.

    오펜하이머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는 핵 확산과 군사적 이용을 막아야한다는 생각과 동시에 인간이 현명하게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했다. 그래서 원자력위원회의 출범과 함께 결합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소련을 비롯해 영국, 프랑스의 핵개발이 빠르게 진행되자 무언가가 잘못되고 있다고 느꼈다. 1948년 오펜하이머는 “미국의 핵 독점은 햇볕 아래 내놓은 얼음덩어리 신세”라며 미소의 핵무장 경쟁을 예견했다. 이듬해 소련이 첫 번째 핵실험에 성공했고 이에 놀란 미국은 한 단계 높은 핵무기, 수소폭탄의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오펜하이머는 수소폭탄 개발에 강하게 반대했다. 단순히 반대의견을 정부에 제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수소폭탄의 개발을 막으려 했다. 그 결과 1949년 엔리코 페르미 같은 저명한 과학자들이 오펜하이머보다 더 강한 어조로 수소폭탄의 개발에 반대하는 의견서를 발표했다.

    백방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한 단계 높은 핵무장에 성공했고 “미국의 수소폭탄 독점은 순식간에 끝날 것”이라는 오펜하이머의 예측대로 소련도 수소탄 개발에 성공했다. 인류가 핵을 평화적으로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그의 낙관주의는 이제 설 자리를 잃었다. 더군다나 예상치 못했던 고난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소폭탄 개발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

    새로 대통령이 된 아이젠하워는 오펜하이머를 원자력위원회에서 추방했다. 명분은 ‘보안문제’였다. 그의 좌파적 성향이 이유였다. 그리고 시대는 매카시즘이라는 이름의 마녀사냥을 벌이고 있었다.

    이미 FBI 국장인 에드가 후버는 전쟁 이전부터 오펜하이머 부부와 형제를 주목하며 내사를 벌여온 터였다. 먼저 동생 프랭크가 하원 ‘비미(un-America)활동위원회HUAC’에 끌려가 미국에 대한 충성서약과 동료들의 이름을 불 것을 강요받았다. 이를 거부한 프랭크 오펜하이머는 대학에서 추방됐다.

       
     

    오펜하이머는 1953년 청문회에 소환됐다. 청문회는 그의 소소한 개인사까지 들춰내며 핵에 대한 정보를 좌파에 연루된 친구들에게 흘리지 않았는지 추궁했다. 청문회는 동료들의 이름을 넘기라고 강요했다.

    1951년 로젠버그 부부가 소련에 핵관련 기밀을 넘겼다는 간첩혐의로 체포돼 사형이 선고됐고, 오펜하이머의 청문회가 진행 중일 때 사형이 집행됐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당시 청문회가 얼마나 살벌한 분위기에서 진행됐을 지 짐작할 수 있다.

    오펜하이머가 청문회의 요구를 끝까지 거부했고, 그의 소환에 대해 미국 과학계의 다수가 분노했기 때문에 공직 추방이나 기소는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평생 조국을 위해 공헌했던 과학자에게 조국이 안겨준 치욕은 실로 ‘핵폭탄’급이었다.

    구명운동에 참여했던 과학자 중의 한명인 로켓의 아버지 폰 브라운은 “영국이었다면 기사작위를 받았을 분”이라는 말로 미국인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비난했다.

    오펜하이머는 1947년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뒤를 이어 민간 연구기관인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책임을 맡았다. 이곳에서 그는 1966년까지 과학사, 과학자의 책임, 과학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 연구하다가 이듬해 사망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1963년 그에게 ‘엔리코 페르미상’을 수여해 매카시즘 기간 동안 미국 정부가 그에게 범한 과오를 간접 사과했다. 하지만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은 지금도 잊을만하면 오펜하이머 소련 간첩설을 제기하는 부관참시를 저지르고 있다.

    독단과 독선은 과학이 아니다

    황우석 파동으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을 때 언론에서 오펜하이머의 이름을 자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전쟁을 끝내려고 만든 무기가 사실은 인류를 끝장낼 괴물임을 알고 좌절했다. 그러나 자기가 저지른 오류를 자기 손으로 수정하고 인류에 속죄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과학자의 양심과 책임이 연구자의 권리가 아니라 사회적 의무임을 일깨우기 위해 남은 평생을 바친 과학자로 기억되고 있다.

    “자유로운 탐구에 장애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과학에 독단과 독선이 자리 잡아서도 안 된다. 과학자는 자유로워야 한다. 자유롭게 의문을 제기할 수 있어야 하고, 어떠한 주장도 의심할 수 있어야 하며, 증거를 찾는데 한계를 둬서는 안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떠한 오류도 망설임 없이 수정해야 한다.” – 로버트 오펜하이머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