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의 20번기'와 낙향
    비운의 합천거사, 하찬석
    [현대바둑 사이드 스토리] 하찬석배 ‘영재바둑’ 대회 1회 우승자는?
        2021년 07월 27일 11:2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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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바둑 사이드 스토리’ 칼럼 링크

    1973년 국수전 우승자 결정전을 앞두고 관철동에는 호사가들의 이야기가 선술집의 안줏거리였다. 안줏거리의 첫 번째 안주는 과연 하찬석이 타이틀을 차지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 안주는 ‘호칭’이었다. 누가 사형이고, 누가 사제인가 하는 것이었다. 국수전 타이틀 보유자는 윤기현이었고, 도전자는 하찬석이었다. 둘은 같은 일본 기타니 도장 문하생이었다. 언듯 보기에는 윤기현이 사형인 것이 당연해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둘은 관계는 묘하게 얽혀 있었다.

    하찬석이 기타니 도장으로 유학을 간 것은 1963년, 15살 때였다. 윤기현이 기타니 도장에 유학을 간 것은 1968년이었다. 하찬석이 당연히 사형이고 윤기현은 사제일 수밖에 없었다. 기타니 도장에서도 당연한 일이었다. 같은 문하생이라면 누가 사형이고 누가 사제인지 논란이 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기묘한 기타니 도장의 사형사제

    경남의 바둑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15살에 기타니 도장으로 유학을 간 하찬석은 한국기원에 입단한 적이 없는 아마추어였다. 그런데 기타니 도장에 유학을 온 윤기현은 아마추어가 아니었다. 김인과 마찬가지로 한국기원의 프로인 상태로 기타니 도장에 뒤늦게 유학을 간 것이다. 게다가 윤기현은 하찬석보다 8살이나 많은 나이였다. 족보가 꼬인 것이다.

    윤기현은 1년을 약간 넘는 유학을 끝내고 하천석보다 먼저 귀국했다. 하찬석은 일본기원에 입단해 활동하다가 7년이 지나서야 귀국했다. 국내로 먼저 돌아온 윤기현은 조남철에 이어 새로운 일인천하를 쓰고 있는 김인에게 타이틀을 빼앗기 시작했다. 관철동 호사가들은 ‘김윤시대’가 시작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하던 그때 하천석이 국내로 돌아왔다. 그리고 국수전을 2연패 중이던 윤기현의 도전자로 나서 단칼에 제압하며 타이틀을 차지했다. 어린 사형이 이제 막 새로운 시대를 열고 있는 사제의 시대를 끝내버린 것이다. 이후 윤기현은 은퇴(?)할 때까지 다시 타이틀 홀더가 되지 못했다.

    경남 합천 출신인 하찬석의 부친은 흔히 말하는 기원 3급 수준의 애기가였다. 그 당시 기원 3급의 기력이라면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고 날마다 기원에서 사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기원 3급은 아마고수로 가는 길목이자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거기서 한 치수만 넘으면 아마고수로 갈 수 있었지만 그 비율은 10%도 되지 않았다. 다른 세계로 가는 벽은 높았고 그 벽을 넘기 위해 기원에 살다시피 하는 만년 3급들이 즐비했다. 어린 하찬석은 부친의 바둑을 어깨너머로 구경하며 배었다. 그런 아들이 신기해 바둑을 가르치던 부친은 1년 만에 자신과 차원이 다른 바둑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호기심 반, 기대 반을 가지고 부친은 경남 아마고수들에게 바둑 동냥을 요청했다. 그런데 경남 고수들은 입을 모아 바둑 신동이 나타났다며 서울로의 바둑 유학을 권고했다. 비용이 얼마가 들지 감을 잡지 못한 부친이 망설이자 고수들이 조남철에게 연줄을 넣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권력이나 재력으로 바둑에 청탁을 넣은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평판이 좋은 지방의 고수들이 추천하는 것은 합격원서와 같았다. 조남철은 선선히 소년의 서울 유학을 허락했다. 비용 걱정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14살 소년은 그렇게 서울로 바둑 유학을 올라왔다. 유학한 지 단 1년이 지나자 조남철은 소년의 실력이라면 당장이라도 한국기원에 입단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조남철은 한국기원에 입단하는 것보다 다른 제안을 했다. 하찬석의 부친에게 일본 유학을 제안한 것이다. 그렇게 하찬석은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하찬석의 또 다른 스승

    김인이 기타니 도장에 유학을 온 것은 1962년이었다. 15살 하찬석이 유학을 온 것은 그 다음 해였다. 하찬석보다 6살 연상인 김인은 말도 통하지 않는 이국에서 유일한 희망이자 탈출구였다. 김인이 대인의 풍모와 성격을 가진 것도 하찬석에게 행운이었다. 하찬석에게 김인이라는 존재는 이때 큰 도움이 되었다. 기타니 도장에서 대국을 둘 때 그건 정수가 아니라고 할 때 하찬석은 종종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언어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자신이 생각할 때는 정수인 것 같은데 왜 아니라고 하는지 궁금했지만 이내 언어의 벽에 막혀 물어보는 데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하찬석에게는 바로 옆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김인이라는 거장이 있었다.

    두 사람의 브로맨스는 짧게 끝났다. 한국기원의 프로였던 김인은 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 이상 체류하기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일본기원의 차세대 4인방으로 주목받고 있던 김인은 귀국을 결정했다. 하찬석에게는 청천벽력같은 소리였다. 김인은 하찬석에게 두 가지 당부를 남겼다. 일본기원에 입단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라. 그리고 동생을 챙기는 데 노력하라는 당부를 남기고 돌아갔다.

    하찬석이 기타니 도장으로 유학을 오기 몇 개월 전, 6살 소년이 먼저 유학을 왔다. 조치훈이었다. 말하자면 15살 하찬석에게는 조훈현이라는 6살 사형이 있었다. 하찬석은 사형의 당부를 잊지 않았다. 틈틈이 조치훈과 대국을 두며 대화하고 질문에 답변하고 변화도를 연구했다. 1967년 하찬석은 일본기원에 입단했다. 2년 후 조치훈이 만 11살의 나이로 입단했다. 일본기원 최연소 입단이었다. 일본기원은 조치훈의 잠재력에 기대 반, 긴장 반인 분위기였다.

    기타니 도장에 유학을 온 윤기현은 한국인 제자들과 그렇게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지 않았다. 윤기현이 유학을 온 목적은 단기간에 기타니 도장의 내공을 흡수하는 것이었다. 소탈하지만 가벼운 성격인 윤기현은 이리저리 내공을 쌓은 데 주력하고 20개월 만에 국내로 돌아갔다. 처음부터 윤기현은 성격상 하찬석과 맞는 스타일도 아니었고 윤기현은 누구를 챙기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1년에 한 단 승단도 어렵다는 일본기원에서 하찬석은 매년 그 이상을 승단하며 5단까지 올랐다. 일본기원에서는 제2의 김인이 나타났다고 했지만 하찬석에게도 군 문제가 앞을 가로막았다. 1970년 하찬석은 조용히 귀국했다. 한국기원은 삼류적인 결정을 내렸다. 김인이 일본 유학을 갈 때 일본기원은 한 단 아래로 판정한 적이 있었다. 당시 일본바둑의 수준은 한국기원보다 높은 수준이었고 어쩌면 당연한 결정이었다. 그런데 한국기원은 하찬석을 4단으로 결정했다. 6단을 주어도 당연하지만 한국기원은 과거의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제대를 하자마자 하찬석은 전 기전의 본선에 올랐다. 그리고 국수전 결승에서 자신보다 나이 많은 사제 윤기현을 밀어내고 왕좌에 올랐다. 사람들은 김인, 윤기현, 하천석의 삼국시대가 열리는 것이 아니냐고 추측했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다르게 전개됐다. 김인은 흔들리며 추락하고 있었고, 철학이 없는 윤기현은 이내 바닥을 드러내며 순식간에 변방으로 밀려났다. 하찬석이 국수전을 연패하고 1975년 김인에게서 왕위전을 빼앗으면서 무관으로 밀어내자 이제 하찬석의 시대가 온 것처럼 보였다.

    관철동을 피로 물들인 부드러운 바람, 빠른 창

    1972년, 기타니 도장의 라이벌이자 세고에 도장의 유일한 한국인 제자 조훈현이 국내로 돌아왔다. 대방동 공군본부에 근무하면서 틈틈이 바둑을 두었다. 휴가가 많은 공군인 탓에 관철동에 오면 조남철에게 깍듯이 인사를 한 다음 “밥 먹었냐”라고 할 정도로 우리말이 서툴렀다. 사람들은 언어가 서툰 조훈현이 적응하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단 한 사람 정창현 프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정창현은 내 사위 “조훈현이 한강다리를 건너는 순간 관철동은 초토화가 될 것이다”라고 단언했다. 정창현이 한강다리를 언급한 것은 대방동의 공군본부에서 제대하는 것을 의미했다. 조훈현은 정장현의 사위도 아니었다. 불행하게도 정창현의 예언은 현실이 되었다.

    1975년, 조훈현은 최고위전에서 김인을 손쉽게 제압하고 타이틀 사냥에 나섰다. 대국을 검토한 프로기사들은 “이거 대체 뭐냐” 하면서 말을 아꼈다. 관철동의 선술집에 모 프로기사는 “이거 전성기 조남철이 와도 안되는 거 아냐”라고 반문했다. 프로기사들은 조훈현의 행마에 대해 이해하기 어렵다는 의견을 보였다. 부드러운 바람처럼 움직이는 행마에 끌려가는 순간, 어느새 옆구리에 창이 찔려 상대가 절명했다. 조훈현이 중반전에 바둑돌 하나를 놓은 행마를 하면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대국자는 시간을 물 쓰듯이 해야만 했다. 조훈현이 바둑돌 하나를 놓으면 모두가 흔들렸다.

    1976년, 국수전 본선은 조훈현에 의해 초토화됐다. 조훈현의 부드러운 바람과 빠른 창에 모두가 백기를 들었다. 디펜딩 챔피언인 하찬석은 1년 동안 조훈현이 도전자로 올라올 것으로 예측하고 그의 바둑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결승전은 허무했다. 하찬석이 한 판을 이기기는 했지만 그것은 조훈현의 실착에 가까운 덕분이었다. 2연패 중이던 국수전을 하찬석은 허무하게 내주었다.

    조훈현(왼족)과 하찬석의 피의 20번기. 국수전 대국 장면.

    운명의 1978년, 천하통일을 눈앞에 둔 조훈현에게 하찬석은 국수전, 왕위전, 최고위전, 국기전 4개 기전의 도전자로 나섰다. 관철동과 애기가들의 초미의 관심사였던 그 유명한 5전 3승의 20번기가 시작됐다. 12전 12패. 하찬석은 단 한 판도 이기지 못했다. 타이틀 하나라도 가져오지 않을까 하는 관철동은 충격에 휩싸였다.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하찬석이었다. 전혀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하찬석은 절망했다. 하찬석은 관철동을 떠나 고향 합천의 가야산에 은거했다.

    지방바둑의 전도사로 변신한 합천거사

    가야산 은거를 끝낸 하찬석은 관철동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합천과 경남 아마추어바둑을 확대하는 데 주력했다. 평소 인품과 평판이 좋았던 하찬석에게 지역의 애기가들이 적극적으로 후원에 동참했다. 하찬석의 노력이 성과를 얻기 시작하자 대구에서도 후원자들이 나타났다. 비극의 2인자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찬석을 후원하던 합천의 유지들과 지인들은 사석에서 “아직은 관철동에서 자웅을 다시 겨룰 수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이야기를 종종 건넸다. 타이틀을 차지하는 것은 무리라고 하더라도 정상급 기사들과 대국할 실력은 충분하지 않는가 하는 뜻이었다. 바둑세계에서 일종의 불문율이 있는데 아무리 대단한 후원자나 지인이라도 프로기사에게 이런 의견을 말하는 것은 일종의 금기였다. 하찬석은 말없이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런데 얼마 후 하찬석은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싣고 관철동으로 진군했다.

    1984년 히트상품으로 떠오르던 박카스는 한국기원과 손을 잡고 박카스배를 신설했다. 이듬해 2회 박카스배에 하찬석이 참전했다. 가야산의 신이 들렸을까 아니면 마음을 비운 탓일까. 하찬석은 박카스배 본선을 질주하고 도전권을 획득하고 타이틀까지 단숨에 차지했다. 1985년 최고위전 예선이 시작됐다. 미니기전인 박카스배와 달리 당시 상금이 3천만원인 최고위전은 기사들이 전력을 기울인 기전 중의 하나였다. 은마아파트 매매가가 3백만원이던 시절이었다.

    하찬석이 예선에서 좋은 성적을 내자 관철동은 조금씩 술렁거렸다. 하찬석은 파죽지세로 예선을 통과하고 16강 본선에 올랐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관철동 사람들은 설마라고 생각했다. 하찬석의 본선 바둑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조훈현과 서봉수 양강시대에 맞서던 도전5강들이 손 한번 쓰지 못하고 무너졌다. 충격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조훈현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이기는 것이 불가능하다던 서봉수를 제압하고 최고위전 도전권을 획득한 것이다.

    * 도전5강은 서능욱, 강훈, 김수장, 장수영, 백성호을 말한다. 서능욱은 준우승만 14회, 강훈은 박카스배 우승 1회, 김수장은 준우승 3회, 장수영 준우승 7회, 백성호 준우승 2회. 도전5강는 조훈현 근처는 고사하고 서봉수의 벽도 넘지 못했다. 그만틈 조훈현과 서봉수 벽은 거대하고 높았다.

    최고위전의 디펜딩 챔피언은 조훈현이었다. 7년만의 복수전에 관철동은 인산인해였다. 이제는 부드러운 바람, 빠른 창이 아니라 ‘전신(戰神)’이라고 불리는 조훈현을 상대로 난전에 난전을 거듭했다. 하천석은 난전 끝에 타이틀 획득에 실패했다. 하지만 7년 전과 달리 한 판을 드라마처럼 승리로 장식했다. 그해 하찬석은 속기전인 KBS바둑왕전 결승에 올랐다. 조훈현과의 마지막 승부는 운명처럼 빗나갔다. 조훈현이 본선에서 실책을 남발하며 김희중에게 발목을 잡힌 것이다. 하찬석은 우승컵을 들고 다시 합천으로 돌아가 관철동과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 다시 척박한 땅에서 전도사로 행마를 이어나갔다.

    지방에서 바둑 보급에 노력하던 2010년 하찬석이 세상을 떠났다. 후원자들과 합천군은 하찬석을 기리는 방법을 모색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하찬석배 ‘영재바둑’ 대회다. 하찬석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당연했지만 일반대회와 달리 영재대회로 한 것은 그의 행보를 추모하는 적적한 결정이었다. 하찬석배 정식대회 1회 우승 영재가 세계랭킹 1위, 조훈현과 이창호를 합쳐놓은 화신이라고 평가받는 ‘신공지능“ 신진서다.

    하찬석. 생전에 김인은 당신(하찬석)은 관철동(승부세계)에 맞지 않게 사람이 너무 좋아,라고 할 정도로 적이 없었다

    필자소개
    인문사회과학 서점 공동대표이며 레디앙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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