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나는 잠시 비굴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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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11월 29일 05:2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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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1월 23일 오전 9시 반경. 나는 심드렁한 얼굴로 9인의 수험생과 함께 3차 면접의 첫 번째 단계인 집단 면접을 기다리며, 시험장 앞에서 줄을 서 있었다.

명색이 사법시험인데 왜 심드렁한 얼굴이었냐고?
사람이 화장실 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른 거 아니겠는가? 작년에 2차 시험 떨어지고 나서는 양복 빼입고 3차 면접시험 치러 가는 사람이 그리도 부럽더니, 올해 셤 붙고 나니 ‘요식행위’에 불과한 시험 보러 가기가 상당히 귀찮더라.

화장실 갈 때 맘, 올 때 맘 다른 것 아닙니까

소집 시간은 11월 23일 오전 8시20분. 출근 시간에 일산까지 가야 한다는 것도 유쾌하지는 않았고, 어차피 내년에 당장 사법연수원 들어갈 생각도 없는데 그냥 제끼고, 내년에 3차 시험 보러 갈까하는 생각도 들었다.(3차에서 떨어지면, 다음 해엔 1, 2차 시험이 면제되고 3차 시험만 다시 보면 된다)

   
  ▲ 레게머리를 풀고 비교적 얌전한(?) 헤어스타일이던 9월 인터뷰 당시의 신민영 보좌관.  
 

찬 바람 불면, 왜 거 출근하기 싫지 않은가? 따뜻한 이불 속에서 나오기가 싫고ㅠㅠ 그러던 나를 이불 밖으로 꾸역꾸역 내몬 것은 "일어나서 셤 치러 가라"는 엄마의 고함소리였다.

3명의 시험관을 두고, 10명의 학생이 ㄷ자로 둘러앉았다. 첫 번째는 집단 토론이라며 문제를 두 번 불러줄 테니 적거나 잘 기억하라고 했다. – 자 다 같이 풀어보자! –

프랑스는 최근 위험에 처한 사람을, 자신에게 위험이 예견되지 않음에도 방치하는 사람을 처벌하는 이른바 ‘착한 사마리아인 법’을 도입하였습니다. 이 제도를 한국에 도입하는 데 대한 입장을 밝혀 주세요. 미리 생각할 시간으로는 5분을 드리겠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법’과 ‘신호등 건너기 게임’

5분 동안 내가 할 일은 미리 주어진 종이에다 ‘PD 수첩, 폐휴지 줍는 노인들’을 적은 게 다였다. 내가 ‘사마리아인 법’에 반대할 생각이었을 것 같은가? 찬성할 생각이었을 것 같은가?

답은 ‘앞에서 얘기한 사람의 의견을 그대로 따른다’ 였다. 이런 상황은 내가 명명한 ‘신호등 건너기 게임’ 상황이었기 때문이다.(네이버에서 ‘신호등 건너기 게임’을 검색해주세요! 트위스트헤드도 검색 좀 ㅠㅠ)

신대방 사거리의 50m쯤 되는 길고 긴 횡단보도를, 파란 불 게이지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한 사람이 바삐 뛰어들었다. ‘배짱도 좋군. 차들이 빵빵거리고 난리를 칠 텐데.’ 헉..그런데 이사람 한술 더 뜨는 게 아닌가? 맨 뒤에서 길을 건너고 있는 아줌마를 앞지르고 나더니 숫제 걷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생각해보니…… 나도 길 건널 때 마다 그랬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니, 신호등 건너기는 운동회 100m 달리기와 달리 1등 했다고 보상이 주어지는 게임이 아니라. 꼴등만 안 하면 충분한 보상(안전한 횡단)이 주어지는 게임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게임의 특성은 무조건 꼴등이 기준이 되는 거다. 다시 말해서, 외부 상황이 빨간불이 켜지든 차들이 빵빵대든 간에 꼴등보다 앞서기만 하면 보상이 주어진다. 따라서 행동 양식도 꼴등대로만 하면 되는 거다. 신호등이야 꺼지건 말건. (횡단보도 게임에 대해선 나중에 더 자세히 소개하겠다.ㅋㅋ)

3차 면접 "꼴등만 안 하면 된다"

사법시험 3차 역시 상위권 몇 명이 생존하는 게임이 아니라, 부적격자 몇 명을 골라낼 수 도 있고 안 골라낼 수도 있는 게임이다. 그러니, 바보같이 1등 하겠다고 무리할 필요 없이 그냥, 아무나 하나 골라잡아서 그 사람이랑 똑같이 행동하면 되는, 그럼 되는 거였다.

허나, 성격상 또 완전히 똑같이 갈 수는 없어서, 앞사람이 찬성하면 PD수첩의 사례 – 영등포 시장에서 새벽에 한 상인이 택시에 받혔는데, 행인들이 사람을 구할 생각은 않고 사고 시에 뿌려진 돈만 주워갔다. 결국 상인은 죽었고, 택시는 번호조차 알 수 없었다 -를 들어 인명경시 풍조에 경종을 울리고, 황금만능주의를 개탄하는 하나마나 한 소리를 하면서 찬성하려 했고.

앞사람이 반대하면 폐지 줍는 노인의 증가 사례를 예로 들어 ‘한국이란 국가가 만들어 놓은 환경은 인간 정글이고, 국가가 기본적인 사회 안전망조차 만들어 주지 못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자기 생존을 걱정하지 누가 다른 사람 챙기겠냐? 국가가 이런 환경을 만들어 놓고는 남을 도우지 않았다고 처벌하는 건 위선이다. 차라리, 도운 사람에게 간첩보상금 주는 식으로 보상하는 법을 만들자’ 라고 하려고 했다.

앞 사람이 대답을 시작했다. 뭐라 뭐라 하는지 자세히 들리지는 않으나, 여하튼 반대였다. 읏흥~그렇다면 나도 당연 반대지. 폐지 줍는 노인의 사례를 들어 신나게 얘기하다 보니, 탄력을 받았다.

"저는 긴장돼 죽겠는데 잘도 주무시네요"

또 왠지 PD수첩 사례도 버리기는 아까운지라 “국가가 변변한 사회보장도 못해주니 누구나 사는 게 두렵고 노후가 두려운 거 아니냐? 돈 주워간 사람들도 자신의 불안한 현재, 미래가 한 사람이 죽든 말든 별로 달라질 게 없는 반면, 흩어진 돈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도 제쳐놓고 주은 거 아니겠느냐?”라 했다.

탄력 받아 신나게 얘기하고 돌이켜보니 후회막급이었다. 신호등 게임의 규칙을 중대 위반한 거 아닌가? 남들은 법률의 명확성 원칙, 부작위범의 예외적 처벌 원칙 등에 어긋난다는 ‘심심한’ 근거를 바탕으로 반대를 했는데… 가만히 보니 나만 ‘신나게’ 한국 정부를 비난한 거 아닌가? 이런 바보…….ㅠㅠ

허나, 걱정도 팔자였다. “시험관한테 욕 좀 먹겠구나”란 걱정과는 달리 시험관들께서는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일절 수험생간의 토론에 개입하지 않으셨다. ‘그럼 그렇지..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사상검증 같은 걸 하겠어. 히히’

“저는 걱정돼 죽겠는데 주무시기까지 하시네요.” 집단 면접이 끝나고 개별 면접을 기다리는 동안 ‘군기가 완전히 빠져’ 잠까지 잤다. 옆에서 파랗게 질려 덜덜 떨고 있는 수험생이 부러운 듯 말을 걸었다. "예예, 저도 긴장을 해서 어제 잠을 제대로 못 잤어요"(실은 군기가 빠져서 새벽까지 술 먹었다. 히히) 졸다가, 잡담을 나누다 보니 개별 면접의 시간이 돌아왔다.

“그럼 자네는 사람이 옆에서 죽어가는 데, 돈이나 줍고 있는 사람을 가만히 두자는 건가?” 개별 면접 문제는 내지도 않은 채, 한 시험관이 집단 면접 때의 발언을 물고 늘어졌다. 얼굴을 찌푸린 채.

면접 시험장에서 벌어진 일들

지금부터는 사태가 있었던 그대로 제시해보겠다.

   
 ▲ 단체 면접시 이런 대열로 앉아서 보았다. (사진=SBS)
 

나: “도덕적으로는 비난 받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왜 그런 행동이 발생했는지에 대한 고찰 없이 전과자만 양산하는 건 문제가 있다 생각합니다. 법은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수많은 수단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시험관 : “도움을 못 받은 사람이 죽어 가는데 국가가 손놓고 가만히 있으란 말인가? 사마리아인 법에 긍정적인 기능이 없다고 생각하나?”

나 : “의사상자에 대해서도 제대로 지원 못하고 있는 나라가 우리 나라입니다. 의사상자에 대한 보상을 충실히 하는 한편, 그런 상황에서 도움의 손길을 베푼 사람에게 간첩보상금처럼 보상을 하면 될 듯합니다.”

시험관 :(인상을 찌푸리더니)“그럼 양심적 병역 거부자를 처벌하는 법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자네는 반대하겠구만, 사람을 구하지 않은 사람을 처벌하는 걸 반대하는 걸 보니 국가의 안보를 지키지 않은 사람을 처벌하는 것도 반대하겠네?”

논리의 저열함에 분노가 치밀었다. 허나, 꾹 참고 웃으며 대답했다.

아차, 이거 내가 잘못 하고 있는 거 아냐

나 : “네, 반대합니다.”
시험관 : “그럼 누가 군대에 가겠는가? 안보가 붕괴되어 전 국민이 위험에 처하게 되는 건 괜찮단 말인가?”

나 : “그 문제에 대해서는 대체복무제의 등가성 확보로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기간을 늘리든지 하면 대체복무를 악용하는 사람이 없을 것 입니다.”
시험관 : “그럼 현재 복무 거부자를 처벌하는 법에는 긍정적인 기능이 없다는 얘기인가?”

나 : “긍정적인 기능이 어찌 없겠습니까? 세상의 모든 현상은 진실의 단편을 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험관 : (얼굴을 제대로 찌푸리며)“자네는 너무 부정적인 면만 보는구만”

아차 싶었다. 뭐가 문제였을까? 긍정적인 기능 있다고 대답했는데, 왜 그럴까? ㅠㅠ

시험관 : (말을 이으며)“밤에 폐휴지 모으는 노인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서라 했는데, 내 주변을 보면 그저 일이 좋아서 운동 삼아 모으는 노인들도 많다네. 그리고 교통사고가 났을 때 사람을 돕는 방법이 반드시 119에 연락하는 방법만 있나? 그 사람을 위해 돈을 주워줬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왜 이리 생각을 극단적으로 하는가?”

아, 나는 비굴해지고 말았다

‘그럼 요새들어 갑자기 하늘에서 일 좋아하는 노인네들이 뚝 떨어 졌나요? 옛날에는 없던 게 왜 생겼는데요? 글구 선생님이 교통사고 났는데 사람들이 돈 줍는 형태로 도와줘도 선생님이 그런 말 할 건가요?’라고 하고 싶었다. 허나, 비굴하게도

나 : (웃으며)“아! 그런 면도 있었군요. 미처 생각을 못 했습니다”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 사람이 왜 이러지? 난 떨어지게 되는 걸까? 그럼 의원실 돌아가서 ‘사법시험 문제 있다’고 보도자료 써야되는 건가? 얼굴 찌푸린 사람의 정체는 뭐지?

검사? 판사? 변호사? 젤 오른쪽 사람은 2:8가르마에 금테안경이니 판사일 테고, 가운데 사람은 백발이 성성하고 점잖은 걸 보니 교수 같은데. 왼쪽의 정체가 뭘까? 이렇게 힘들 줄 알았으면 어제 술 안 먹는 건데. 아 배고프다. 아침 먹고 올걸. 점심은 뭘 먹지?

상념도 잠시.

시험관: (인상 쓰며)“그럼 자네의 법적 지식을 테스트하겠네, 종중의 재산처분 방법에 대한 판례의 최신 입장은 뭔가”

“날 죽이려 하는구나”란 생각밖에 안 들었다. 면접에서 이렇게 지엽적인 쟁점이 나오다니, 분명 다른 사람들한테는 기본 법리를 물어봤다고 하는데…

"날 죽이려 하는구나" 

어떻게 대답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나머지 공부반이라고 할 수 있는 심층면접 대상자 발표 날 때까지는 지옥이었고, 나는 심층면접에 가게 될 수밖에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결과는 다행히도 합격이었다.

이상이, 11월 23일에 있었던 상황의 전부이다. 더 궁금한 점이 있으면 댓글을 통해 질문해 주시라. 댓글로 대답하겠삼.

그리고 한마디 하자면.

– 미국은 평화애호 세력의 주적 맞다. 미국이 주적이 아니라면, 우리나라는 평화애호 세력이 아니다.

–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 내가 볼 때, 우리나라 법률 시장은 조폭과 경쟁 관계에 있다. 법이 좀 더 신속하고 친절하고 가깝게 다가가지 않는다면, 법이 아닌 ‘해결사’에 호소하는 사람은 더욱 늘어날 것이다.

– 검색창에서 트위스트헤드를 검색해주세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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