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왕 조남철 시대를 끝낸
    관철동의 청산(靑山) 김인
    [현대바둑 사이드스토리⑤]모두가 사랑한 바둑계 노블리스 오블리제
        2021년 07월 13일 09:3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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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6년 바둑 애기가들의 시선은 종로구 운당여관에 쏠려있었다. 운당여관의 특별 대국실에서는 국수전 9연패를 하고 있던 조남철과 도전자 김인의 마지막 결승대국이 열리고 있었다. 대국은 중후반까지 형세는 안개 속이었다. 미세하게 불리하다고 생각한 조남철은 특유의 변화도를 던지며 판을 흔들었다. 김인은 조남철의 도발에 대응하지 않았다. 묵묵히 두텁게 두며 조금씩 성을 지켜나갔다. 조남철의 승부수는 먹히지 않았다. 김인은 조남철의 변화도 정체를 잘 알고 있었다, 기타니 도장에서 수없이 경험한 변화도였다. 백을 잡은 김인은 두 집을 남겼다. 조남철의 국수전 10연패가 저지되는 순간이었다.

    조남철(오른쪽)의 국수전 10연패 저지하는 장면

    현대 바둑의 결승전이 자주 열렸던 운당여관은 단순한 여관이 아니었다. 왕에 오른 순조가 친정을 시작했을 때는 이미 경주 김씨와 노론 벽파의 천하였다. 순조는 남아있는 남인을 등용해 집권 세력인 노론 벽파를 견제하려는 시도를 했지만 그때마다 천주교 박해를 이용해 남인의 씨를 말려버렸다. 집권 세력은 비변사를 설치해 군권마저 장악해 사실상 왕권을 무력화시켰다.

    운당여관, 반상 위의 전투

    정치와 담을 쌓은 순조의 유일한 말상대는 내관이었다. 순조의 최측근 내관이 양자를 들이기 위해 집을 이사한다고 하자 순조는 인사동 한복판에 정승집 규모의 집을 하사했다. 평소라면 상소가 빗발치고 내전에서 매일같이 문제를 삼아야 할 노론 벽파는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왕이 할 수 있는 마지막 권한까지 집권 세력이 끝내는 것은 부담스러웠다. 순조가 죽고 세월이 흐르면서 내관의 집은 모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해방 후 가야금 무형문화재 보유자인 박귀휘가 이 집을 사서 운당여관이라는 간판을 달았다. 말이 여관이지 일류 요리사들을 갖춘 고급 한옥호텔이었다.

    조남철의 긴 노력 끝에 한국기원이 국수전 유치를 성공하자 그럴듯한 결승 대국 장소가 난항이었다. 그러던 중, 주관사인 동아일보 간부가 운당여관을 기억해냈다. 박귀휘 선생도 흔쾌하게 장소 이용을 허락했다. 제법 고가의 병풍이 있는 귀빈용 내실에서의 결승대국을 사진기자들은 한 폭의 그림으로 담아냈다. 다른 기전들도 운당여관으로 몰려들었고 덩달아 유명인들도 방문하기 시작했다. 바둑을 전혀 몰랐던 박귀휘 선생은 “돌 가지고 놀이하는 데 사람들이 다들 왜 난리냐”며 고개를 저었다.

    1962년, 조남철은 김인에게 일본 유학이라는 뜻밖의 제안을 했다. 관철동 뒷골목 술집에서는 소문을 들은 기사들이 별별 이야기들이 등장했다. 관철동 뒷골목 선술집에서 모 프로기사는 “이거 조남철 선생이 너무 하는 것 아니냐”는 말까지 흘러나올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김인은 차기 주자가 아니라 이미 차기였다. 그해 국수전과 최고위전을 차지하고 있던 조남철의 도전자가 바로 김인이었다. 한국기원의 설립자이자 실질적인 권력자, 당대의 최고수 조남철이 도전자에게 잠시 쉬며 공부를 하라고 제안한 것이다. 그런데 이 제안을 김인은 수락했다. 강력한 도전자에게 유학을 제안한 조남철이나 그걸 수락하는 김인이나 누가 봐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도전자로 나설 때마다 김인은 조남철과의 작은 차이, 하지만 결코 넘을 수 없어 보이는 거대한 벽에 절망하곤 했다. 김인은 “그곳(기타니 도장)에 가면 다른 세계가 보이고 다른 출구가 보인다”라는 조남철의 말에 마음이 움직였다. 승부의 세계에서 승부수를 던지지 않고는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한 김인은 유학길에 올랐다. 기타니 미노루 도장의 두 번째 한국인 제자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기타니 도장의 두 번째 한국인 제자

    세상은 넓었다. 기타니 도장에는 한국에서는 접할 수 없는 수많은 바둑책과 기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스무 살 김인에게 이곳은 밥을 먹지 않아도 배부른 천국이었다. 무엇보다 도장에는 천하의 기재들이 바글거렸다. 실전만큼 좋은 공부는 없었다. 김인의 잠재력을 높이 산 기타니는 일본 기원의 프로로 활동하면서 연구하는 것을 제안했다. 한국기원 4단이었던 김인은 일본기원 3단을 인정받았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지만 당시 일본 기원의 프로의 벽은 높았다. 하지만 김인은 19살에 국수전의 패권에 도전했던 이무기였다. 일본기원 대회에 출전하기 시작한 김인은 80%가 넘는 승률을 기록하며 파란을 일으켰다. 일본 언론들은 김죽림(金竹林) 시대가 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바둑은 모양이 중요하다는 철학을 가진 미학자 오타케 히데오(大竹英雄) 기성, 내 바둑은 절대 끊어지지 않는다는 이중허리 린하이펑(林海峰)의 이니셜을 딴 호명이었다.

    1년 9개월, 김인도 군 입대는 피할 수 없었다. 귀국한 김인은 일반부대에 배치를 받았지만 얼마 후 국회로 부대를 옮기게 되었다. 한국기원의 로비가 작용한 것인지 바둑을 좋아하는 육군의 고위간부가 손을 쓴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국회에서 남은 시간을 쪼개 바둑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

    1966년 조남철과 김인의 국수전 결승이 운당여관에서 시작됐다. 9연패를 기록하고 있는 조남철은 10연패라는 상징적인 역사를 쓰기 위해 전력을 다했고, 김인은 그 아성을 무너트리기 위해 분전했다. 관철동의 호사가들은 김인이 조남철의 독주를 끝내주기를 염원했다. 혈투는 김인의 승리로 끝났다. 일본유학이라는 승부수는 그렇게 김인에게 최고 자리로 화답했다. 같은 해 패왕전까지 손에 넣으면서 김인 시대의 서막을 열기 시작했다.

    관철동은 이제 김인 시대였다. 국수전 6연패, 패왕전 7연패, 왕위전 7연패, 최고위전 3회, 김인의 천하였다. 조남철과 다른 기사들이 번갈아 도전자로 나섰지만 김인의 성은 난공불락이었다. 일본기원을 모방한 도전자 결정전 방식은 디펜딩 챔피언에게 엄청난 이점이 있었다. 챔피언은 예선과 본선에 참여하지 않는 방식이었다. 도전자가 결정되면 기전에 따라 7판 혹은 5판만 두면 되었다. 1년에 4번, 혹은 3번만 이기면 타이틀과 거액을 벌 수 있었다. 다른 기사들이 1년 동안 치열한 예선과 본선을 치르는 동안 챔피언은 도전자들의 기보를 연구하고 공부하면서 대응할 준비를 할 수 있다는 특권이 있었다. 도전자가 타이틀을 차지하기 어려운 구조적인 이유였다.

    김인의 첫 스승 이학진

    김인의 부친은 전라남도 강진읍장이었다. 부친은 애기가였고, 형도 바둑에 한참 빠져있었다. 초등학생인 김인은 부친과 형의 바둑을 어깨너머로 구경하다 미지의 세계에 매료되었다. 학교에서 집으로 오는 도중에는 오래된 느티나무 아래에 정자가 있었다. 정자에서는 날마다 동네 노인들이 바둑을 두는 게 일상이었다. 어린 김인은 날마다 해가 지는지도 모르고 바둑을 관전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뒤늦게 이런 사실을 안 부친은 혼을 내기는커녕 강진 최고수에게 바둑을 배우도록 해주었다. 부친이 혜안이 있었던 것일까. 1년 만에 강진 최고수는 부친에게 김인을 서울로 바둑유학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다. 낡은 바둑판을 품에 안은 12살 소년은 야간열차에 몸을 실었다.

    김인의 스승은 당대 최고수이자 아마 바둑의 최대 후원자인 이학진이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 게이오대학에 유학하던 이학진은 전일본바둑연맹전을 우승할 정도로 이미 아마 최고수 중의 한 명으로 명성을 날렸다. 학업보다 바둑에 더 심취한 이학진은 일본바둑의 차세대라고 불리는 사카다 에이오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사카다는 전후, 혼인보 7연패라는 대업적을 기록했다. 사카다가 공격하면 상대방이 마치 살을 에는 듯한 치명상을 입는다고 하여 면도날이라는 닉네임을 얻었다.

    원래 전투바둑이었던 이학진은 당대 최강의 공격수 사카다에게 배우자 그의 공격력은 조선에서 적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학진의 대국은 계가로 가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렇다고 끝내기가 약한 것도 아니었다. 당시 일본바둑의 끝내기는 조선의 최고수들도 이해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김인은 이학진 밑에서 전투와 형세판단, 그리고 끝내기의 깊은 심연을 하나씩 배웠고, 당시로서는 불가능할 것이라는 15살의 나이로 입단해 성공했다.

    상당한 재산의 소유자였고 애기가인 이학진이 바둑을 후원하는 것은 당연해보였지만 그가 행보를 할 때마다 사람들은 언제나 그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그에게는 다른 호명이 있었다. 이학진은 조선의 마지막 왕인 의친왕 이강의 사위였다. 김인이 조남철에 이어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이학진이라는 보이지 않는 조력자가 있었던 것이다.

    합천거사 하찬석과 수읽기의 귀재 윤기현

    불가사의 수를 가진 바둑에서 최선의 착점을 찾아내는 것은 신의 영역이다. 그런 신의 영역을 찾아내며 최고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에 사람들은 환호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율배반적인 존재가 아닌가. 조남철의 독주시대를 끝낼 광야의 기사를 기다렸던 바둑 팬들은 이제 김인에게 심드렁하기 시작했다. 이제 누가 도전자는 될까 하는 것이 관심이 아니었다. 김인의 아성을 무너트릴 사람이 언제 나타나는가 하는 것에 시선이 집중됐다. 언제나 독재를 염원하는 사람은 없었다.

    김인이 국내로 돌아오던 그 해 또 한 명이 기타니 도장으로 유학을 떠났다. 기타니 도장의 세 번째 한국인 제자인 합천 출신의 소년 국수 하찬석이었다. 일제강점기에 호남에 열 살 국수 조남철이 있었다면 해방 후 영남에는 아마 최고수들을 제압하는 열두 살 국수 하찬석이 있었다. 조남철이 일본유학을 갈 당시 프로기사와 석 점 접바둑 수준이었다. 그런데 하찬석은 두 점이라는 이야기가 정설처럼 떠돌았다. 14살 소년은 부친의 결단으로 서울 유학 대신에 곧바로 일본 유학을 선택했다.

    4년 후 하찬석은 일본기원에 입단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일본바둑의 벽은 높아졌고 한국바둑은 제자리걸음이었다. 하찬석은 바늘구멍처럼 좁은 일본기원의 입단에 성공한 것이다. 제2의 김인이 나타났다고 일본기원이 술렁거릴 때 하찬석 역시 군 입대 문제로 국내로 돌아와야 했다. 하찬석이 군대에서 김인의 시대에 도전하는 꿈을 꾸고 있을 때 김인이 국수전 7연패에 실패하면서 윤기현에게 타이틀을 내주는 사건이 발생했다.

    윤기현은 김인이 입단한 이듬해 17살의 나이로 입단해 주목을 받았다. 사람들의 기대대로 각종 기전에 두각을 나타내며 김인과 함께 조남철의 시대에 도전할 한 명으로 지목됐다. 김인이 조남철의 철옹성을 무너트리고 국수전을 차지하자 2년 연속 도전자로 나선 것은 윤기현이었다. 호사가들의 기대와 달리 김인은 단 한 판도 이기지 못하고 패배했다. 한 판을 이기지 못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대국 전체가 완패였다.

    관철동에서 눈치 하나는 천하제일이라는 윤기현은 기타니 도장으로 유학하는 길을 선택했다. 한국기원의 6단이 일본유학을 하는 것은 김인의 유학과는 다른 문제였다. 9단이 아직 없던 시절이었고 조남철이 8단, 김인이 막 승단해 7단이었다. 기타니 도장의 네 번째 한국인 제자 윤기현의 유학 기간은 단 1년이었다. 그 기간 동안 윤기현은 자신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만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최고수 자리에 오르기 위한 철학은 뒷전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윤기현은 국수전 도전자로 나서 김인의 약한 고리를 물고 늘어졌다. 같은 스승 밑에서 검법을 배운 제자들이 외나무다리에서 만나 생사를 겨루어야 한다면 그것만큼 곤혹스러운 것도 없다. 바둑에서 말하는 ‘기풍’이다. 윤기현이 국수전을 2연패하자 관철동은 다시 술렁거렸다. 그 때, 군대를 제대한 하찬석이 도전자로 나서 윤기현을 가볍게 제압하며 국수전을 차지했다. 하찬석이 국수전을 연패하고 왕위전까지 차지하자 호사가들은 “이제 하찬석과 윤기현의 시대”가 오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들이 관철동을 떠돌았다. 그것은 곧 다른 표현이기도 했다. 이제 김인의 시대는 끝났다는 우회적인 표현이었다.

    김인(왼쪽)이 일본유학 시절 일본으로 유학 오는 조치훈(중간)를 나리타공항으로 마중나간 장면.

    조남철 정신을 잊지 않았던 김인

    국수전과 패왕전을 차지하며 천하제일의 시대를 열어가던 김인은 뜻밖의 결정을 내렸다. 기사회 회장을 맡기로 한 것이다. 최소 십년은 최고의 자리를 유지해 명성과 부를 쌓은 후에 맡아도 되는 자리였다. 성적이 곧 수입이었던 시절, 기사들은 기사회 같은 단체의 임원을 맡은 것을 기피했다. 많은 시간을 투입해야 하는 자리였고 바둑연구를 할 시간은 당연히 적어질 수밖에 없었다. 한국기원의 체계가 제대로 잡히지도 않은 시기였고 재정과 나이든 기사들의 복지도 큰 난제였다. 한마디로 잘해야 본전도 안되는 자리였다. 정상에 오른 김인은 그 가시밭길을 자임했다.

    하찬석과 윤기현의 시대는 오지 않았다. 현대바둑 역사를 새로 쓸 조훈현이 일본에서 막 돌아왔기 때문이다. 하찬석과 윤기현에게 타이틀을 빼앗긴 김인은 조훈현이 등장하면서 변방으로 밀려났다. 그가 조남철에 이어 한국기원의 체계를 잡기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한 것도 크게 작용했다. 1977년 최강자전, 국수전, 최고위전, 왕자전, 국기전을 모두 차지하며 일인천하를 꿈꾸던 조훈현을 상대로 기성전에서 우승하는 저력을 보였다.

    무관으로 전락한 제왕 김인을 모두가 사랑했다. 전성기 시절 김인은 상금을 받으면 가난한 후배들의 술과 밥을 사는 게 거의 일상이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우승상금 5천만원을 받으면 천만원 정도를 술값과 밥값, 그리고 원로기사나 가난한 기사들에게 조금씩 쌀값을 보태는 것이 거의 습관이었다. 김인은 바둑계의 노블리스 오블리제였다. 그런 김인을 좋아하는 애기가들 중 한 명은 자비로 대회를 만들 정도였다. 김인이 그 대회 타이틀을 상실하자 후원자는 대회를 없애버렸다. 사람들이 너무 심한 것 아니냐고 하자 “그 대회 우승자는 김인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고 답할 정도였다.

    올해 4월, 김인이 세상을 떠났다. 관철동 시대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한국바둑의 영원히 변하지 않는 푸르른 산이 세상을 떠났다고 추모했다. 바둑을 떠나 모두가 그의 인품을 존경했다. 김인의 고향 강진에서 주관하는 ‘김인국수배 국제시니어배’가 매년 열리고 있다. 병석에서 김인은 내년에는 대회가 열릴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김인의 유언 아닌 유언이 되었다.

    필자소개
    인문사회과학 서점 공동대표이며 레디앙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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