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보 신뢰의 위기 구체적 정책으로 돌파해야
    By tathata
        2006년 11월 27일 09:5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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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슨 실증적 분석 결과를 본 기억은 없으나 한국은 참 빨리 변화하는 사회인 것 같다. 한국을 좀 경험해 봤다는 외국인들에게 "빨리 빨리"라는 표현이 한국인의 문화적 상징처럼 여겨진다는 사실도 이를 간접적으로 반증 한다.

    실제로 전쟁의 폐허로부터 반세기 만에 세계 10대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것이 그렇고, 역시 그 정도의 기간에 군사 독재로부터 형식적 민주주의 체제로 빠르게 전환한 것 역시 그런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급속함에 대해서는 그 내실의 부실함을 우려하는 성찰이 없는 바는 아니나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적 자긍심의 원천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는 것 또한 현실이다.

    그렇다면 이런 건 어떨까? 한국 사회가 형식적 민주주의를 성취하는데 있어서 핵심 동력이었다고 할 수 있는 학생운동의 급격한 쇠퇴나 진보운동의 이념적 기치였던 마르크스주의 혹은 사회주의 사상이 순식간에 퇴조하고 말았던 경험, 그리고 최근에 뚜렷하게 드러나는 현상으로서 소위 권력을 거머쥔 순간 끝없는 나락으로 추락하고 있는 진보/개혁 세력의 현실 역시 참으로 빠르기 그지없는 한국 사회의 한 단면이 아닐까.

    그렇다. 이견이 많겠지만 언필칭 진보/개혁 세력, 또는 386 운동권 세력은 권력을 잡았으나, 채 5년의 세월이 지나기도 전에 "말은 많으나 가장 무능한 집단"으로 취급받고 있다. 이 증오를 동반한 비난은 결코 청와대와 국회에 있는 몇몇 정치인들에게 머물지 않고 민중운동, 시민운동을 포함한 80년대 세대 전반에 대한 부정과 거부로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권력에 참여한 주요 당사자들 입장에서 보면 부당한 비판도 많을 것이고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고 있다는 억울함이 가슴에 사무칠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짧지 않은 4년이라는 세월 동안 진보 개혁 세력은 현실을 실체적으로 지배하지 못했다. 이념적 자기모순과 실사구시적 정책 능력의 부재라는 변명할 수 없는 현 주소를 분명하게 드러낸 것이다.

    ‘좌파신자유주의’라는 표현이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처럼 현 집권 세력은 수사적으로는 개혁과 진보를 표방했으나 그 이념적 기반에 있어서는 전혀 방향성 없이 헤매면서 궁극적으로는 세계를, 그리고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거대한 신자유주의 주류 세력의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러한 점에서 경제정의, 녹색주의, 그리고 평화주의 등의 이념적 기치를 명료하게 정립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할 수 있다.

    하지만 현 집권 세력의 추락만이 아닌 진보진영 전반의 사회적 신뢰 상실이라는 현실을 생각한다면 이념적 지향을 잘 다듬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다. 오히려 그러한 이념을 구체 현실에서 실현하는데 필수적인 잘 다듬어진 정책 프로그램을 생산하는 능력을 갖추는 문제 또한 시급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미국의 ‘웨더라이제이션’ 프로그램은 저소득층 보호와 에너지 절약, 환경보전의 효과를 동시에 가져다 주고 있다.
     

    오로지 관료들과 그들과 밀착한 전문가 집단이 정책생산을 독점해온 우리 현실을 고려할 때 진보진영에게 정책 생산 능력이 부족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지사이다. 이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이념적 기치를 현실에서 능란하게 실현할 수 있는 실사구시적 정책 프로그램을 생산하는 능력을 갖춰 나가야 할 때인 것이다.

    실질적인 정책 프로그램이란 결코 추상적인 원론이 되어서는 안 되지만 동시에 이념적 지향과 무관한 것이어서도 안 될 것이다. 현재 미국에서 시행되고 있는 ‘저소득 가구를 위한 웨더라이제이션 지원 프로그램’을 예를 보자. 이 프로그램은 전 세계가 에너지 위기로 휘청이던 시절인 1976년 미국정부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서 저소득 계층의 보호는 물론 에너지 절약과 환경보전이라는 목적을 동시에 실현하기 위해 마련된 정책이다.

    미 에너지부의 재정을 기반으로 해서 각 주정부에서 시행하고 있는 이 웨더라이제이션 프로그램은 저소득 계층의 주택을 단열 시공, 보일러 수리나 교체 등의 방법으로 에너지 효율성이 높은 집으로 전환시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 정책 시행을 위해 진행된 연구 결과를 보면 일반 가구들이 그들의 연간소득 중 약 3.5%를 에너지 필요를 충족하는데 지출하는데 반해 저소득 가정의 경우 연간소득의 평균 14%를 지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저소득계층일수록 에너지 비용이 높아지는 상황에 더 큰 어려움을 겪는다. 웨더라이제이션 프로그램은 이들 주택의 에너지 효율성을 증진시킴으로써 에너지 비용을 절감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이러한 에너지 관련 경제적 형평성의 실현 외에도 이 프로그램은 에너지 효율증진에 따른 자원절약 효과와 대기 오염 물질 배출 감소라는 환경적 효과를 동시에 실현하고 있다. 연구 결과를 보면 웨더라이제이션 프로그램은 저소득 가구당 매년 358 달러의 에너지 비용을 절감시키며 매년 2만명 이상의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한편 가구당 약 22%에 달하는 연료 에너지 절감을 통해 지구온난화 물질인 이산화탄소 발생을 1톤씩 줄이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효과를 고려한다면 웨더라이제이션 프로그램은 경제적 형평과 녹색이라는 진보 진영의 이념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매우 현실적인 정책 프로그램이라 평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간 30여년에 걸쳐 미국 전역의 5백6십만에 이르는 저소득 가구에 이 프로그램이 시행되었다고 한다. 큰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지금 국민들은 우리 진보 진영에게 바로 이러한 실질적 정책을 생산하고 이를 능숙하게 집행할 수 있는 역량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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