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명한 정치노선은 뭔가 숨기는 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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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11월 27일 08:1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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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에 있어 선명함이란 누가 나의 동지인지 적인지를 분명히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각각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를 확정하는 것이다. 정치는 기본적으로 당파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정치가 크고 작은 권력의 장악을 위한 경쟁적 실천임을 감안할 때, 정치는 단지 당파적이기만 해서는 안 된다. 다수를 점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명함은 당파적인 것인 동시에 다수를 점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특히나 그것을 노선으로 삼을 때 그러하다.

    그렇다면 과연 선명함을 기치로 한 노선으로 다수를 점할 수 있을까? 있다. 그리고 없기도 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선명 노선이 전자의 경우이고, 노무현 정부의 개혁파들의 그것이 후자의 경우이다.

    성공한 선명 노선, 실패한 선명 노선

    김영삼 전 대통령은 박정희 유신독재 정권 하에서 이른바 선명 야당 노선으로 전성기를 구가한 정치인이다. 40대 기수론을 주창하며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함으로써 지도자급 반열에 올라선 김영삼은 1974년 당권을 장악하고 선명 야당의 기치 하에 유신헌법 개정투쟁을 전개했다.

       
      ▲ 김영삼 전 대통령 (사진=연합뉴스)

    1975년 김영삼은 박정희와의 단독 회담 이후 유화 전략을 구상하는 등의 행보를 보이다가, 1976년에 들어 이철승에게 당권을 넘겨주기도 했다. 하지만 1979년 다시금 선명 야당 노선 하에 이철승을 타협 노선으로 비판하면서 당권을 장악하고 반유신 독재투쟁을 주도했다. 김영삼이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이끈 야당 지도자로 자리매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한국 정치사에서 야당의 전투성 신화가 만들어진 것도 이때부터였다.

    반면에 노무현 정부의 개혁파들은 정체성의 정치를 강조하는 선명 노선을 표방하였으나 이 시대 무능 정치 세력을 대표하는 것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진짜 개혁을 해야 한다며 만들었던 열린우리당은 이제 문을 닫을 지경에 이르렀다.

    성공과 실패의 이유

    김영삼의 선명 노선이 다수를 점하면서 당권 장악과 반독재민주화 투쟁 동원에 성공했던 이유는 명분과 실리를 다 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민주화라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강화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반대로 노무현 정부의 개혁파들은 선명 노선을 강조하면 할수록, 개혁세력으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면 할수록 점점 더 명분과 실리 양자 모두를 잃는 양상을 보였다. 개혁이라는 이름에도 불구하고 고용 및 소득 안정을 통한 사회양극화 해소라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고, 시대적 요구와 별반 상관없는 정책들로 자신의 지지기반을 스스로 붕괴시켰기 때문이었다.

    노동귀족론을 통한 노동계에 대한 부당한 압박에서부터 대연정 제안까지 그들이 선보였던 자기 파괴적 정책들은 셀 수 없이 많다. 안락한 자기 집을 갖는 게 거의 유일한 꿈인 서민들의 고통을 가증시키고 있는 부동산 정책은 그것들 중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다.

    아직도 선명 노선은 통하는가

    한편 김영삼의 선명 노선은 성공하고, 노무현 정부 개혁파의 선명 노선은 실패한 시대적 배경에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선명성이 정치의 기본이긴 하지만, 그것이 노선일 수 있느냐 없느냐는 주체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 노선 자체가 유효하기 위해서는 보다 근본적으로 주체가 발 딛고 있는 시대적 상황이 어떠한지를 살펴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독재 정권 시절 민주화라는 시대적 요구는 보다 많은 다수가 쉽게 동의할 수 있는 것이었다. 적과 동지가 분명한데다가 그것을 가늠하는 기준의 설정이 그다지 복잡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둘러싸고 독재정권과 민주화 운동 세력으로 확연히 구분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의 시대에 살고 있는 지금은 어떠한가? 사회양극화 해소가 시대적 요구라는 합의는 존재하지만, 그것을 위해 누가 먼저 얼마큼이나 부담을 질 것인가를 둘러싸고 매우 다차원적인 이해 갈등이 전개되면서 누가 동지이고 적인지가 불투명한 상황이다.

    적대가 오히려 차이보다도 더 비적대적이고, 차이가 오히려 적대보다도 더 적대적인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때때로 정규직 노동과 비정규직 노동 간의 갈등이 노동과 자본 간의 갈등 보다 더 심각하고, 생태주의와 개발주의의 갈등보다도 근본적 생태주의와 비근본적 생태주의자 간의 갈등이 보다 더 심각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선명성 보다는 중용을 미덕으로

    2007년 대선이 1년 남짓 앞으로 다가 왔다. 그야말로 정치의 계절이 도래한 것이다. 대권을 꿈꾸는 자들 중 선명 노선을 고민하는 자들이 분명 있을 터, 그들에게 감히 충고하나니 선명 노선은 아무나 그리고 아무 때나 쓰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명 노선을 선택하겠다면 다원화된 이 시대에 부합되는 선명 노선을 쓰라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아마도 좌파-우파 같이 이미 주어진 틀 내에서의 적과 동지에 대한 구분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적과 동지의 구분을 없애는 새롭고 선명한 비전의 제시가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나는 중용을 미덕으로 한 새로운 정치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선명함을 강조하는 것은 그렇지 않은 것들을 숨기기 위한 책략”일 수 있다는 선명성의 정치에 대한 방법적 회의 끝에 든 생각이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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