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당권파 격돌 민주당 '68 당대회 & 록
    2006년 11월 25일 11:4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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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파릇한 신인이던 김혜수가 나오는 초콜릿 광고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많다. 그 광고는 김혜수라는 모델 말고도 귀에 익은 멜로디의 팝송으로도 기억되고 있다. 바로 시카고의 ‘미안하다는 말은 힘들어Hard To Say I’m Sorry’다. 그 시절 팝송을 열심히 듣던 사람이 아니더라도 시카고라는 밴드의 이름은 어렵지 않게 들어봤을 것이다. 그만큼 대중적인 음악을 하는 ‘인기그룹’이었다.

그런데 ‘감미로움’을 강조하는 초콜릿 광고에 딱! 어울리는 노래들로 기억되는 이 밴드가 사실 출발은 꽉 찬 실험 정신과 날선 사회감각을 보여주면서 시작했다. 1969년 발표된 이들의 데뷔 앨범은 말 그대로 ‘역동과 혼란이 어지럽게 뒤엉켜있던 시대’의 산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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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cago Transit Authority"
Chicago
-1969년
Side 1
1. Introduction
2. Does Anybody Really Know What Time It Is?
3. Beginnings
Side 2
1. Questions 67 And 68
2. Listen
3. Poem 58
Side 3
1. Free Form Guitar
2. South California Purples
3. I’m A Man
Side 4
1. Prologue, August 29, 1968
2. Someday (August 29, 1968)
3. Liberation
 

시카고에 있는 드폴대학 동기생들을 주축으로 해서 결성된 시카고의 원래 이름은 ‘Chicago Transit Authority’였다. 우리말로 옮기자면 ‘시카고시 교통국’정도쯤 될 것이다. 아무리 기괴한 밴드 이름들이 난무하던 시대라고 해도 범상치 않은 이름임에 틀림없었다. 비유해서 말하면 ‘인천도시철도공사’라는 이름의 밴드가 데뷔한 셈이니까. 이 이름은 동시에 밴드의 데뷔 앨범 제목이기도 했다.

데뷔 앨범 발표 후 밴드의 이름은 우리가 알다시피 ‘시카고’로 단축됐다. 자기네들이 생각해도 이름이 너무 엉뚱하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진짜 ‘시카고시 교통국’이 이름을 바꾸지 않으면 무단도용으로 고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기 때문이다. 예술가를 탄압하는 권력은 세계 어디에나 있는 모양이다.

사실 시카고는 이름만 특이했던 것이 아니다. 데뷔 당시 7명으로 구성된 밴드 멤버 중 3명은 트럼펫과 트럼본 같은 관악기를 연주하는 친구들이었다. 지미 페이지가 레드 제플린을 결성했고 지미 헨드릭스가 무대 위에서 기타를 불태우던 그 해에 나팔을 들고 록큰롤을 하겠다는 밴드가 등장한 것이다. 후에 모든 것에 이름을 붙이고 싶어 안달하는 평론가들이 ‘브라스 록’이라고 정의한 음악스타일이 시카고의 특징이었다.

더 가관인 것은 인지도라고는 먹고 죽으려고 해도 없는 무명밴드가 겁도 없이 76분짜리 데뷔 앨범을 녹음한 것이다. 게다가 가장 긴 곡은 15분이 넘었다. 소속사인 콜럼비아 레코드는 난색을 표했다. 가뜩이나 팔릴지 안 팔릴지도 자신이 없는 마당에 아예 안 팔리기로 작정한 듯한 형태로 레코드를 시장에 내놓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밴드 입장에서도 고생해서 녹음한 음악이 난도질 당한 채로 발표되게 할 수는 없었다. 결국 판매수입 중 밴드의 몫 일부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시카고의 데뷔앨범은 두장의 레코드에 담겨 1969년 4월 28일 발표됐다.

* * *

데뷔 앨범에 담긴 이들의 음악은 대단히 진보적이다. 기타 대신 관악기와 피아노를 전면에 내세운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들은 재즈와 클래식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밴드였다. 그렇다고 무언가 난해하고 복잡한 기교들이 난무하는 형식은 아니다.

프랭크 자파의 음악처럼 처음부터 듣는 사람들을 기겁하게 만들거나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꽉 짜여진 형식미학의 틀 안에서도 프리 재즈의 정신과 록의 자유분방함이라는 미덕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다. 그 증거로 데뷔 앨범은 발매 후 빌보드 앨범차트 17위까지 올라갔다. 요컨대 실험성과 대중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데 성공한 흔치 않은 밴드인 것이다.

앨범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사랑을 받은 곡은 ‘발단Beginnings’이였다. 하지만 이 역시 7분이 넘는 대곡인지라 싱글로 발매될 때는 절반정도를 편집해내야 했다. 전반적으로 연주시간이 길어 두 장의 레코드라고 해도 수록곡은 12곡밖에 되지 않는다.

이 앨범의 진보성은 음악적인 부분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역시 싱글로 커팅되어 대학방송국과 FM라디오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던 ‘지금이 몇시인지 궁금한 사람도 있나요Does Anybody Really Know What Time It Is?’는 단순히 ‘시계’와 ‘시간’에 대한 노래가 아니라 시대에 대한 노래로 읽혀졌다.

길을 걷는데 누군가 다가와 지금 몇시냐고 묻자, 요즘 시간을 궁금해하는 사람도 있느냐고 반문했다는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또 길을 걷고 있는데 사람들이 시계를 구타하고 파묻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시대의 정체성이 혼란해지고 부정되는 것을 노랫말에 담은 것이다. 1969년이면 베트남 전쟁이 수렁 속에 빠진 채 해결의 기미가 안보이고, 디트로이트와 뉴욕에서는 흑인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미국의 주요한 정치인과 지도자들은 줄줄이 암살당하던 시절이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이해가 될 것이다.

밴드의 급진성이 여과 없이 표출된 것은 앨범의 마지막 3곡이다. 우선 ‘프롤로그 1968년 8월 29일Prologue, August 29, 1968’은 음악이 아니라 1968년 시카고(!)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의 마지막 날 녹음된 실제의 집회 현장 소리를 담고 있다.

1968년 민주당 전당대회는 대회장 안에서는 반전파와 당권파가 격돌하고 있었고, 대회장 밖에는 미국 전역에서 몰려든 급진파들이 ‘봉기’를 목표로 데모를 벌이고 있었다. 전당대회의 ‘순조로운’ 진행을 위해 시카고 시장은 경찰로 하여금 시위대를 폭력적으로 진압하게 했고 결국 이 기간 동안 도시는 피로 얼룩지게 됐다.

레코드에 밴드가 적어놓은 글에 따르면 ‘프롤로그 1968년 8월 29일’은 전투적인 흑인 시위대가 행진을 하다 경찰과 대치하면서 ‘전 세계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구호를 외치는 광경을 녹음기에 담은 것이다. 1분여 동안 ‘전 세계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구호가 선명하게 반복된다.

그 전해에 존 레논이 비틀즈의 음반에 ‘호치민-마오쩌뚱-체 게바라’를 연호하는 런던 시위대의 함성을 숨겨놓듯이 담아놓은 것에 비하면 훨씬 노골적인 수법인 셈이다.

이어지는 ‘어느 날 (1968년 8월 29일)Someday (August 29, 1968)’도 역시 시카고의 민주당 전당대회를 지켜보며 만든 곡이다. 어두운 단조의 도입부로 불안감과 혼란을 그려내면서 시작하는 노래는 시위 현장의 엎치락뒤치락 하는 광경을 묘사한 가사와 함께 총성을 상징하는 듯한 강한 연주와 함께 급격히 종결된다.

앨범의 대미는 15분짜리 즉흥재즈곡인 ‘해방Liberation’이다. 추가 녹음 없이 스튜디오에서 라이브로 녹음된 곡으로 해방이라는 제목은 프리 재즈의 자유분방함과 함께 앨범이 담고자 했던 시대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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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에 발매된 시카고의 두 번째 앨범도 역시 정치적 급진성을 테마로 다룬 곡들(‘민중을 위한 시Poem for the People’, ‘조기종결It Better End Soon’)을 담고 있다. 그러나 밴드의 주도권이, 음악적인 면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면에서도 진보성을 주장해온 밴드의 피아노 연주자 로버트 램에서 베이스 연주자인 피터 세트라로 넘어가면서 시카고는 실험적인 밴드에서 대중성과 히트곡 차트를 중시하는 밴드로 변모해 갔다.

이제는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서 앨범이 담고자 했던 정치적 맥락의 주제들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거의 사라졌다. 단지 음악적인 성취만이 여전히 기억되고 전승될 뿐이다. 하지만 굳이 그런 망각을 아쉬워할 필요도 없다.

시대가 더 새로운 시대로 진입하지 못하고 정체한다면 그것도 큰 문제니까. 다행히 “Chicago Transit Authority” 앨범은 시간과 함께 그 일부가 유실됐다고 하더라도 세기가 바뀐 지금 들어도 여전히 녹슬지 않은 연주와 음악을 담고 있다. 굳이 정치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한번쯤은 들어볼만한 음반이다.

다만, 음악을 들으면서 어렴풋하게나마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땀 냄새를 맡을 수 있다면 30여년 전 한 밴드가 트럼펫과 피아노에 담아 전하려고 했던 이야기에 한 걸음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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