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떠돌아 다님과 삶의 모든 전선에 맞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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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11월 25일 09:1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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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도 리나는 의심하지 않았다. 저만치 앞 허공에 푸른 둑처럼 펼쳐져 있는 국경은 어느 순간 활짝 열릴 거라고 믿었다. 그 푸른 둑이 이쪽을 향해 파도처럼 몰려와 하늘이 열리듯 저절로 열릴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손이 나타나 탈출자들을 고스란히 빨아들인 후 안전한 투망 안에 넣어, 마술처럼 국경 너머로 데리고 갈 거라고 믿었다.”(p.11)

    『리나』는 그 오롯한 주인공 리나가 자신의 나라를 버리고 떠나는 것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자신의 나라를 떠나고 또 자신의 ‘머문 곳’을 떠나는 리나의 동선은 곧 이야기의 궤적이 된다. 떠나는 곳은 기근이 심한 어떤 곳, 향하는 곳은 리나 또래의 젊은 여자들이 청바지를 입고 거리를 자유롭게 거리를 누비며 대학교도 다닐 수 있다는 P국.

    함께 탈출하는 이들은 리나의 가족을 포함해 스물 두 명. 작품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이 이름을 얻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P국의 풀네임은 괄호쳐져 있다.

    『리나』를 탈북자의 이야기로 읽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결정적인 문제가 되지 못한다. 현실에 대입하든 아니든 구체성과 리얼리티는 훼손되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 구체성과 리얼리티는 일그러져 있으며, 그 일그러짐이 도리어 비정상적으로 찌그러진 지금-이곳의 현실을 다층적이고 보편적으로 드러낸다.

       
     ▲ 『리나』강영숙 장편소설, 랜덤하우스
     

    국경과 P국의 좌표를 묻기 전에 귀기울여야 할 것은 ‘그래도’로 시작해서 ‘믿었다’로 끝나는 리나의 속마음이다. 시간과 공간의 구체성을 탈각하고 정주가 아니라 유목으로서 생존을 증명하는 리나의 탈주는 비극의 언덕을 넘어 끝내는 안착에 성공하는 고통스럽지만 감동적인 드라마를 예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탈출하다 붙들린 경우 총살과 화형을 면할 수 없지만 ‘그래도’ 생존을 속박하지 않는 푸른 자유와 안전을 ‘믿었다’는 리나의 어법 속에는 이미 감량이 불가능한 비극과 비애가 서려 있다.

    작가는 어쩌면 이 세계의 존엄성 따위는 이미 고갈되었다고 여기는지도 모르겠다. 혹은 우리가 일용할 양식이란 신의 은총으로 자라는 밀알이 아니라 자신의 몸뚱아리라고 여기는 지도 모른다. 만인 대 일인으로 존재하는 탈출자/탈주자들은 자신의 몸을 옴파먹는다.

    “밤이 되자 희미한 달빛이 생겼다. 사람들은 불 앞에 모여 앉아서 자기 팔을 입으로 물고 있거나, 겨드랑이를 긁어서 나온 것들을 입속에 넣거나 발 새에 낀 때를 빼먹었다. 머리가 긴 신혼의 여자는 자기 머리카락을 입에 물고 질겅질겅 씹었다.”(p.48)

    P국은 점점 가까워지기보다는 점점 멀어져가고, 그곳에 대한 꿈 역시 퇴색해 간다. 그곳으로 가는 길은 애초부터 직항로가 없다는 듯, 유예와 우회의 연쇄다. 길은 푸른 하늘이 아니라 불모의 사태에 점령당한 듯하다. 가령, 화학약품 공장에 끌려가 희망없는 노동을 하게 된 리나의 상황은 이렇다.

    “남자는 연신 두 음절의 짧은 단어를 반복해서 중얼거리며 거의 결박하다시피 리나의 몸을 위에서 내리눌렀다. …중략… 리나는 주변이 조용해진 후 배 위의 액체를 손가락으로 찍어 불빛에 비춰보았다. 내장이 뒤집힐 것처럼 독한 냄새가 나는 흰 화공약품이었다.”(p.58)

    태연한 능욕은 남자에게서 여자로 오는 것만이 아니라, 삶 그 자체에 만연한다. 유린당하는 여자와 정액을 대체하는 화공약품, 그리고 진전하지 않는 시간이 현재의 풍경이다.

    “… 화공약품공장에서는 계절을 알 수 없었다. 검은 바닥에 뿌리를 내린 키 작은 꽃들은 계절에 관계없이 늘 피어 있었고, 고원 위쪽에서부터 가끔 소금 가루 같은 모래 알갱이들이 날아오기도 했다. 고원의 꽃들은 여전히 노란색이었고 더 이상 키가 자라지도, 잎이 떨어지지도 않았다.”(p.59)

    능욕당하거나 팔려가거나, 리나의 거처는 그 두 가지 방식으로 결정된다. 화학공장에서 천막 극단의 가수로, 천막 극단에서 창녀들의 마을 시링, 그리고 대규모 공장지대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어디 가서 돈이나 더 벌다 가면 어때? 내가 널 더 비싼 값에 팔아줄 수 있는데”(p.100), “돈만 준비해오면 너희들을 다 그리로 보내줄게”(p.173)라는 식의 노골적이 속삭임들이 곧잘 등장한다.

    자본주의의 낯설지 않은 율법이자 운영 원리가 리나를 잡아먹으려 발가벗고 달려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가련한 리나의 생애가 아니라 징그러운 우리 삶의 조건과 양태인 셈이다. 만인 대 일인의 구도에서 일인 리나의 고난은 만인의 행복을 위한 희생 제의가 아니라 만인과 일인 모두가 겪는 출구없는 비극의 알리바이라는 것이다.

    자신을 탐하는 남자들을 향해 리나가 던지는 말, “나는 화학가스에 오염된 몸이랍니다. 내가 낳는 아이는 대대 손손 병신이고 불임이라는데요.”(p.313) 당장 ‘리나’라는 하나의 상황을 외면하는 일은 손쉽다. 허나 ‘리나’라는 하나의 상징을 영원히 모면하거나 완전히 버리기는 어려운 일이다.

    『리나』에서 특징적인 것은, 리나는 자신의 가족과 함께 국가를 떠났지만, 국가를 떠나는 여로가 본격화하는 순간부터 가족에서도 벗어나버린 다는 것이다. 가족주의를 등지고 선 리나는, 세상의 또 다른 ‘리나’들과 연대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모색한다.

    이를 테면, 전직 가수 할머니, 봉제공장 언니, 그리고 소년 ‘삐’는 험한 탈출과 모진 생사의 경계 속에서도 리나의 삶을 가능하게끔 하는 중요한 사람들이다. 그 작은 연대가 세계의 비루함을 완전히 탈색시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삶을 무너지지 않게 한다.

    리나가 죽음에 임박한 전직 가수 할머니를 씻기는 장면은 그야말로 낮의 휘황함과 찬란함을 누릴 수 없었던 삶을 환상적으로 빚어낸다.

    “할머니의 등허리에는 땅에서 옮겨 붙은 녹색 이끼들이 자리를 잡고는 한창 신나게 자라는 중이었다. 리나는 얇은 수건을 할머니의 등을 살살 문질렀다. 척추뼈 주변의 녹색 이끼들은 쉽게 떨어져 나가고 분홍색 피부가 드러났다. 등 한가운데 약간 도드라지며 튀어오른 말간 피부를 계속해서 문질렀다. 그 순간 마찰에 의해 피부 껍질이 살짝 벗겨졌다. 그리고 볼록 튀어나온 피부가 올록볼록 혼자 꼼지락거리면서 움직이는 게 보였다. 놀랍게도 볼록 튀어나온 곳에서 희고 작은 나방들이 계속해서 태어났다.”(p.289)

    나방을 잉태하고 있던 할머니는 한때 노래로 자신의 삶을 증명했다. 또 리나가 천막 극단에서 불렀던 노래가 할머니의 그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리나의 노래를 들어 보라.

    “오늘의 이야기. 열여덟 살에 국경을 넘어 당신들의 나라에 들어와 스물 네 살이 된 여자 이야기. / 매일 사기 치고 매일 사기당하고 열여덟 살이지만 모르는 게 없어. 남자는 어딜 만져야 좋아하고 여자는 어딜 만져줄 때 좋아하는지 모르는 게 없어. / 국경을 넘자마자 브로커가 날 팔았어. 다 찌그러진 자동차 껍데기 조차 살 수 없는 돈에 팔았지. / 도시 사람들은 나에게 말해. 아주머니 고향이 어디세요? 그럼 난 대답하지. 난 겨우 스물네 살인데 아주머니라니. 너무하잖아요. 그러면 도시 사람들이 또 물어. 어디서 왔냐구요? 도대체 어디서 왔는데 말투가 그 모양이냐구요? 그럼 난 수줍게 말하지. 국경이오.”(p.93~94)

    『리나』의 이야기를 현실이라고 읽을 때 현실은 더욱 누추해지고, 환상이라고 읽을 때 환상은 소름끼치도록 끔찍해진다. 이때 끝내 유예하는 것이 ‘저 곳’이라면, P국으로의 입국과 정착을 자발적으로 포기함으로써 ‘저 곳’을 언제나 ‘저 곳’으로 남겨두는 것은 어떤가.

    그렇다면 여기에서 도망하여 어딘가로 탈출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와 저기를 진정으로 유목하는 자로 등극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애초에 탈출자들을 인솔하던 남자가 물었다. “당신들한테 안전한 데가 어딘데?”(p.20)라고. 모두들 답하지 못했다. 이제 리나가 반문한다. “거긴 들어가서 뭐 하는데 씨팔!”(p.334)이라고.

    어느 곳도 안전하지 않다면 끝끝내 떠도는 것 역시 국경이라는 모든 삶의 전선과 맞서는 하나의 방법일 수 있으리라. 끝끝내 떠돌기를 택한다면, 적어도 “‘그래도’로 시작해서 ‘믿었다’로 끝나는” 탈주하는 자들의 첫번째 명제만은 훼손하지 않고 지킬 수 있을 것이다.

    푸른 빛의 ‘저 곳’이 있다는 것을 ‘그래도 믿는’ 내가 너의 질서와 너의 현실에서 탈출한다. “리나는 또다시 저만치 앞 허공에 푸른 둑처럼 펼쳐져 있는 국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p.348)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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