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종홍 이희승 오천석 등
    만들어진 '신화'를 넘어서서
    [기고] 거짓 '신화'는 진실의 궤도열차를 탈선시킨다
        2021년 06월 21일 04:1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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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사회의 발전을 퇴행시키는 것에는 낡은 <신화>도 한몫 한다. 특히 왜곡된 <신화>는 진실을 가리고 현상을 굴절시킨다. 현상의 굴절은 우리 의식의 굴절로 이어진다. 그것은 고스란히 우리 사회의 모순을 이해하는 걸 방해하고 나아가 사회모순을 해결하는 것 또한 어렵게 한다. 거짓 <신화>는 특히 우리의 의식을 오염시킬 뿐 아니라 진실의 궤도열차를 종종 탈선시킨다.

    박정희 <신화>가 우리 사회 왜곡된 의식과 사회갈등을 촉발시킨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실제로 박정희 <신화>는 대한민국 경제성장의 실질적 주체였던 이 땅의 수많은 ‘전태일’의 피와 땀과 눈물을 외면하게 만들었다. 글쓴이는 우리 사회 건강한 의식 형성을 저해했던 <신화> 몇 가지를 소개하고 이를 바로 잡고자 한다.

    먼저 우리나라 철학계 거물 ‘박종홍’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박종홍’은 한국 현대철학 1세대 선두 주자이다. 경성제국대학에서 일본인 교수로부터 서양철학을 수용하고 공부한 1세대이자 한국 실존주의 철학의 효시이다. 원효의 화쟁사상을 비롯해 지눌과 퇴계 이황의 사상, 그리고 조선사회 19c 최한기의 기사상 등 한국의 독창적인 사상을 연구 발굴한 업적이 크다. 나아가 대학 강단에서 철학의 ‘실천’을 강조하며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그러나 그는 박정희 유신체제를 철학적으로 옹호하고 이론적으로 합리화시켜 준 인물이다. 박정희 유신체제의 전주곡인 「국민교육헌장」(1968)을 기초한 실질적 인물이다. 전체주의 냄새가 짙은 「국민교육헌장」을 기초한 3인 기초위원(박종홍, 이인기, 유형진)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는 1972년 10월 ‘유신’(維新)에 이름을 붙여준 「10월 유신」의 명명자이기도 하다.

    사진 :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 전경(서울시 마포구 상암동 소재) 2012년 2월 박정희 기념재단에서 설립한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으로 근대화 경제성장과정을 전시하고 있다. (사진 출처 : 하성환)

    철학자 열암 박종홍! 그는 유교, 불교 등 한국전통사상을 현대화하는 데 기여한 1세대 철학자이자 한국의 독창적인 사상으로 주체성을 드높였다는 학문적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철학자 박종홍 <신화>는 건강한 것인가? 글쓴이는 단연 아니라고 본다. 그것은 그가 독재자 박정희의 교육문화 담당 특보를 해서라기보다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이승만-박정희로 이어지는 파시즘 체제에 대해 단 한 번도 철학도로서 비판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처럼 나치에 협력하면서 그 암울한 독재시절을 일말의 저항도 없이 보냈다.

    따라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박종홍’을 <신화>의 대상으로 높일 이유는 없다고 본다. 깨어 있는 역사학도들이 대한민국 역사학계 1세대 이병도를 조작된 <신화>로 존경하지 않듯이 ‘박종홍’을 존경할 이유는 없다. 차라리 경성제대 철학 동문이자 일본인 교수로부터 ‘천재철학자’로 인정받은 1세대 서양철학자 ‘박치우’의 삶을 조금이라도 알아보는 게 나을 듯싶다. 적어도 ‘박치우’는 영혼이 맑은 윤동주와 친분을 나눈 사이로 당대 인텔리겐치아로서 시대의 모순에 고뇌하다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일석 이희승에 대한 낡은 <신화>이다. 일석 이희승은 흔히들 청빈하고 검소한‘딸깍발이 선비’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희승은 일제강점기 시절 경성제국대학 스승 오구라 신페이의 '과학적'언어학을 신봉했던 인물이다. 해방 후 이희승은 어느 날 한글 운동하는 사람들을 비난했다. 나아가 우리말을 곱게 다듬는 「말다듬기 운동」을 비판했다. 언어는 사회적 약속이기에 의도적으로 국어학자들이 말다듬기 운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는 현대언어학의 창시자 소쉬르를 공부한 경성제대 스승 고바야시와 오구라 신페이의 생각을 그대로 반복한 것이다. 우리 토박이말을 되살리고 아름다운 우리말을 곱게 다듬는 운동이 왜 국어학자들의 고유한 영역이 아니란 말인가!

    언어는 그 나라의 정신이자 혼이다. 언어가 죽으면 그 민족의 정신은 망한다. 그것은 불변의 진리이다. 주시경-최현배로 이어지는 「언어민족주의」학자들이 왜 그런 주장을 해왔고 또한 그를 몸소 실천해 왔던가를 상기해 보자! 이른바 ‘과학적 언어학’의 깃발을 내세운 이희승이 국어운동, 바로 한글운동을 펼친 주체인 한글학회와 대립했던 국어학자로서 과연 제대로 된 정도를 걸어간 것인지 검증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과학적 언어학’이야말로 과학의 외피를 쓴 일제 ‘식민지 언어학’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이병도의 식민사관이 ‘실증사학’의 외피를 섰듯이!

    이희승을 비롯해 이숭녕 등 경성제대-서울대로 이어지는 관학아카데미즘은 주시경-최현배로 이어지는 한글학회와 대립했다. 그들은 언어-민족 일체관에 섰던 「언어민족주의」학파 주시경-최현배의 국어운동을 ‘국수주의’ 내지 ‘옹고집쟁이’로 비난하며 그런 부정적 여론을 널리 퍼뜨렸다. 곰곰이 생각컨대 이희승의 ‘과학적 언어학’은 일제강점기 식민사학의 거두 두계 이병도의 ‘실증주의 사학’의 국어학계 버전과 매우 흡사하다.

    ‘실증사학’으로 포장된 식민사학자 이병도는 와세다 대학 일본 유학 시절 자신의 스승, 쓰다 소키치의 학설을 수용하고 널리 유포시켰다. 이른바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이 바로 그것이다. 이병도 스스로 우리 역사학계에 식민학문을 널리 퍼뜨린 것처럼 이희승의‘과학적 언어학’역시 그와 대동소이하다. 이병도든 이희승이든 일제강점기 식민지학문의 영향 하에 놓인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의 주체적 역사관을 부정하고 우리말글의 주체성에 흠집을 내는 반역사적인 태도가 아닐 수 없다. 한 마디로 ‘실증주의 사학’, ‘과학적 언어학’이란 ‘실증’과 ‘과학’이란 외피를 쓴 ‘식민지 관학 학문의 변신’일 뿐이다.

    실제로 이희승은 1949년 한글전용을 주장하다가 1970년대 들어선 국한문혼용으로 돌아섰다. 1949년 최현배의 「우리말본」과 이희승의 「국어문법」 파동을 겪으면서 갈등해 오다 이후 이희승은 제헌국회에서 제정된 「한글전용법」을 반대했다. 실제로 이희승은 「한글전용법」폐기를 주장하고 한자 섞어 쓰기를 내내 강조했다. 그가 조선어학회-한글학회의 오랜 수고의 결실인 우리말 『큰 사전』이 1957년 6권으로 완간되자 이에 대항해 1961년 『국어대사전』을 간행했던 것도 그런 대립의 산물인 것이다. 우리말『 큰 사전』에 수록된 어휘가 16만 개였는데 이희승의『국어대사전』은 무려 25만 어휘에 달했다.

    이희승이 100명이 넘는 상당한 인력을 동원해 만든『국어대사전』은 한자어를 70% 이상 수록할 정도로 한자어를 대거 집어넣었다. 이는 이후 국한문혼용, 바로 한자 섞어 쓰기 운동의 주된 근거로 작용했다. 일각에선 이희승의 『국어대사전』이 일본 국어사전을 베낀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게다가 굳이 일상생활에 필요하지 않은 한자어와 외국어를 대거 잡다하게 수록한 결과라는 비판도 제기됐다.

    사진 : 주시경 마당 (종로구 당주동 소재). <한글과 견줄 문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극찬한 언어학자 헐버트. 을사늑약, 헤이그 특사 사건 당시 한국의 자주 독립을 도왔던 미국인이다. 그는 외국인 가운데 최초로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 인물이다.(사진 출처 : 하성환)

    ‘과학적 언어학’과 이희승의 선비 정신을 분석적으로 비판해온 김영환(부경대 명예교수)의 여러 연구 논문들에 따르면 이희승은 어휘수를 부풀리기 위해 한자숙어도 올렸다. 심지어 '언행군자지추기(言行君子之樞機)' 같은 한문마저 올렸는가 하면 '예스, 굿 모닝, 고잉 마이 웨이' 같은 영어도 수록했다. 수록된 어휘수를 늘리기 위해 외래어와 외국어의 경계를 허물어뜨린 것이다. 오늘날 학교교육에서 국어교사들이 우리말의 70%는 한자어라고 가르치는 잘못된 속설의 시발점이 바로 이희승의 『국어대사전』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늘날 국한문혼용을 주장하고 초등학교 한자 병기를 역설하는 움직임의 역사적 뿌리를 생각할 때 이희승은 결코 자유롭지 않다. 왜냐하면 이희승의 국한문 혼용 주장은 「경성제대-서울대 관학아카데미즘」을 통해 제자들과 후학들, 그리고 제도권 국어교육을 통해 널리 유포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희승의 국한문혼용론은 2015년 초등교과서 한자병기를 주장하며 한자 섞어 쓰기 운동의 주된 근거로 작용했다. 오늘날 교과서 국한문혼용을 역설하고 한자병기운동을 강조한 것은 바로 이희승, 이숭녕 등 경성제대-서울대로 이어지는 관학 아카데미즘이 국어학계 학문권력을 장악하고 이를 행사한 산물이기도 하다.

    실제로 이희승은 1969년에 「한국 어문교육연구회」를 설립한다. 이 단체는 한글학회와 내내 대립했다. 「한국 어문교육연구회」초대회장은 바로 이희승으로 그는 1988년까지 19년 동안 회장직을 역임했다. 「한국어문 교육연구회」는 1970년대 박정희 집권 시절 <국어국문학회>, <국어학회>, <한국국어교육연구회> 등과 연대해 학교교육에 한자교육을 강화하고 1800자, 2000자 등 상용한자 보급을 지속적으로 강조하며 한글학회와 대립해 왔다. 그 중심에 이희승이 있었다. 「한국어문 교육연구회」2대 회장은 이희승의 제자 남광우가 맡았다. 남광우는 1991년 「한국어문 교육연구회」자매기관인 「한국어문회」를 조직해 초대 이사장을 역임했다. 「한국어문회」는 1992년 제1회 한자능력검정시험을 시행하며 한글전용정책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다.

    요컨대 이희승이 주장한 ‘과학적 국어학’의 학풍은 일제강점기 시절 스스로 ‘좋은 스승’, ‘은사’로 칭한 오구라 신페이와 고바야시의 학문을 이어받은 것이다. 다시 말해 「제국주의 식민관학」의 학풍을 계승한 것이다. 이희승은 자신의 스승, 오구라 신페이처럼 언어학은 가치중립적인 학문임을 강조했다. 학자는 언어를 새롭게 만들어 내거나 말을 다듬는 존재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희승의 생각은 일제의 식민 통치의 본질을 간과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경성제국대학 자체가 식민통치의 중간관료를 양성하려는 목적에서 세운 학교였다. 즉 경성제국대학 졸업생을 통해 식민지 조선에 식민통치를 저항 없이 관철시키고자 했다. 그것이 일제가 의도한 정책의 숨은 의도였다. 도쿄제국대학을 본뜬 경성제국대학의 설립에는 그런 불순한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 따라서 이희승의 ‘과학적 언어학’은 일제 관학자들이 식민지 조선에 유포한 학설이다. 그런 점에서 이희승의 학문하는 태도는 그들 관학자의 의도에 적지 않게 포획된 모습이다. 이는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고도의 식민통치술에 압도당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해방 이후 이희승 스스로 한글전용론자에서 국한문혼용론자로 전향한 데 있다. 나아가 한글전용을 부르짖는 국어운동을 불순하게 배척했다. 심지어 한글전용론에 맞서 국한문혼용론을 주장하며 경성제대-서울대로 이어지는 관학 아카데미즘을 형성해 오늘날 한자 병기 운동의 든든한 배경을 제공했다. 이희승에게 덧씌워진 낡은 <신화>를 걷어내는 게 변화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21세기를 향한 힘찬 발걸음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대한민국 문단 내에 ‘겨레의 큰 시인’으로 유포된 미당 서정주! 미당 <신화>가 그렇듯이 대한민국 교육계에 널리 유포된 천원 오천석에 대한 교육 <신화> 역시 마찬가지이다. <국대안> 사건(1946~1947)을 통해 미군정은 대한민국 교육의 자주성과 민주성을 거세해버렸다. 해방 후 대한민국 현대교육사에 일대 사건이 <국대안> 사건이다. <국대안> 사건은 미군정과 서북청년회의 탄압으로 학교 자치와 자율의 싹이 자라지도 못한 채 무너져버렸다. 그리고 그 틈새를 국가주의 교육행정이 똬리를 틀었다. 향후 대한민국 교육은 민족교육, 민주교육의 뿌리가 잘린 채 수십 년 진행되었다. 그것이 <국대안> 사건이 갖는 교육사적 의의이다. 문제는 바로 그 <국대안> 사건을 강제한 인물이 천원 오천석 박사라는 사실이다.

    그런 그를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 교육을 이 땅에 전파한 선구적인 인물’로 칭송해 왔다. 또는‘청사에 빛날 민주교육행정의 구현자’내지 ‘87년 온 생애를 민주주의 성숙을 위해 새로운 씨앗을 뿌린’‘한국현대교육의 아버지’로 극찬했다. 해방 공간 ‘점령군’임을 선언한 미군정청은 친일반민족 교육의 잔재를 일소하는 데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천원 오천석 박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진 : 천원 오천석 박사가 쓴 <스승>(배영사, 1972) 책 표지. 천원 오천석 박사는 <한국의 페스탈로치>로 추앙받는 교육자이다. 그는 해방 직후 미군정기 시절 미군정 통치자들의 통역과 <한국교육위원회> 중간 연락을 담당했다. 그는 반공의 제일선에서 미군 극동사령부 정보부에도 참여했다. 당시 미 극동사령부에는 박형규 목사, 문익환 목사, 정경모, 오천석, 장리욱 교수 등 영어를 구사할 줄 알았던 인물들이 다수 참여하였다. (사진 출처 : 하성환)

    미군정기 통치 시절 그가 선택한 교육정책을 살펴보노라면 오히려 해방된 공간에서 친일반민족 인사들을 교육계에 포진시킨 중대한 잘못을 저질렀다. 해방 직후 미군정청 자문기구인 「한국교육위원회」 초기 구성원 7명 가운데 무려 5명이 친일반민족 인사들이었기 때문이다. 김성수, 김활란, 최규동, 백낙준, 유억겸이 바로 그들이다.

    김성수는 고려대학교 캠퍼스에 동상이 있다. 김활란은 이화여대 캠퍼스에 역시 동상이 세워져 있다. 백낙준은 연세대학교 캠퍼스에 동상이 있다. 최규동은 박근혜 정권 시절 교육부가 ‘민족의 사표’, ‘조선의 페스탈로치’로 선정해 포스터 수만 장을 전국 초중고교에 배포했던 인물이다. 초대 교련 회장이자 3대 서울대 총장을 역임한 친일반민족 교육계 인사이다. 유억겸은 최초의 미국유학생 유길준의 둘째 아들로 역시 일제강점기 시절 적극적 친일행위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다.

    「한국교육위원회」는 공식적으로는 미군정청 자문기구였지만 실질적으론 의결집행기구였다. 전국 각급학교 학교장과 각시도 학무국 책임자를 임명했던 준행정기구였다. 해방된 나라에서 교육의 근간을 세우는 일에 「한국교육위원회」는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미군정청 문교차장과 문교부장, 천원 오천석! 그가 과연 우리교육계에서 존경할 만한 인물인지 글쓴이는 회의적이다. 아니 적어도 우리 현대교육사를 생각해 볼 때 결코 동의하기 어렵다.

    <신화>를 벗어나는 것은 우리사회 변화의 시작이다. 사회 각 부문에 침전된 낡은 의식의 상당 부분은 이런 왜곡된 <신화>에서 비롯되었다. 좀 더 맑고 밝은 사회로 진보하기를 꿈꾸며 변화를 열망하는 오늘, 대한민국이 낡은 <신화>의 두꺼운 껍질을 벗고 비상하길 소망한다.

    필자소개
    <우리역사에서 왜곡되고 사라진 근현대 인물한국사>(2021)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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