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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마음속 고려인과 원시인을 찾아서
    [컬렉터의서재④] '관촉사 미륵불'과 '바위그림' 생각
        2021년 06월 21일 10:3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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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렉터의 서재-3] 우리가 살았던 반공의 시대

    J에게.

    무척 오랜만이구나. 그동안 잘 지냈는지 궁금하다.

    내가 수집하는 자료들 중에는 문화유산을 배경으로 찍은 옛 기념사진들도 다수 있단다. 이런 기념사진들을 수집하는 이유가 궁금할 거야.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런 사진들을 통해 그 유산들의 변화를 찾아보는 재미가 있어. 이건 수리나 복원처럼 문화유산 그 자체의 변화도 그렇지만, 그 유산이 어떻게 이리저리 유전(流轉)되어 왔는지 그 내력을 살피는 일이기도 해. 문자 기록이 미처 담지 못한 내용을 사진 한 장이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이지.

    왜 광화문 현판 가지고 말이 많았잖아. 1960년대 박정희 정부 때 시멘트로 지은 광화문 건물을 허물고 원래의 목조 건물로 복원할 때 그곳에 걸려있던 한글 현판(박정희 대통령이 쓴 것)을 흥선대원군 중건 당시의 광화문 현판으로 새로 만들어 교체했던 일을 기억할 거야. 그런데 이때 만든 현판은 흰색 바탕에 검정 글씨로 한 건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검은색 바탕에 금박 글씨로 교체했지. 이유는 고증 실패 때문!

    문화재청이 2010년 복원 당시 참고했다던 1902년(추정)과 1916년 사진 자료보다 더 오래된 1893년 9월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 사진이 발견됐기 때문이야.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 소장의 이 사진 속 광화문 현판은 흰색 바탕에 검정 글씨가 아니라 검정색 바탕으로 되어 있었단다. 그래서 다시 자료를 더 찾아서 최종 검은색 바탕에 금박 글씨로 현판을 새로 제작해 교체했던 거야. 이런 경우는 그리 흔치 않지만 어쨌든 옛 문화유산 사진들 속에는 이처럼 우리가 잘 몰랐던 뜻밖의 사실이 담겨 있는 경우들이 종종 있단다.

    [사진]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이 소장한 광화문 사진으로 1893년 9월 이전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진 속 광화문 현판의 바탕은 검은색을 띄고 있다.

    내가 수집한 사진을 가지고 다른 예를 하나 들어 줄게.

    수집한 사진 중에 경운궁(덕수궁)을 배경으로 찍은 두 남녀의 사진 4장이 있어. 여기에는 중화전, 석조전 등 경운궁의 주요 전각들이 담겨 있단다. 그런데 석조전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에는 지금은 거기에 없는 정체불명의 석등이 하나 서 있는 게 보여. 뭔가하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석등 앞 돌표지석에 ‘국보 103호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이라고 적혀 있어.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이라…..다소 생소한 이름.

    그렇지만 이 석등은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 합천 영암사지 쌍사자 석등과 더불어 통일신라 석등의 백미로 평가되는 작품이야. 이 석등 3형제 중 국보로 지정된 것이 법주사 쌍사자 석등(국보 5호),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국보 103호)이고, 합천 영암사지 쌍사자 석등은 보물 제 353호로 지정되어 있어. 그런데 나머지 두 점은 원래의 그 자리를 꿋꿋이 지켜 왔는데,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은 왜 서울의 경운궁에 있는 것일까? 중흥산성은 전남 광양 중흥산에 있는 유적이거든. 이 사진 한 장은 석등의 심상치 않은 수난을 담고 있는 셈인데, 호기심을 참지 못해 관련 자료들을 찾아보았단다.

    원래 이 석등은 전남 광양군 옥룡면 운평리 중흥산성 안의 절터에 있었다고 해. 1930년 어떤 일본인 골동품 수집가가 부산 골동품상과 모의하여 이 석등을 일본으로 반출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옥룡면 면사무소 앞으로 옮기던 중 주민들에게 발각되어 반출 계획은 미수에 그쳤어. 광양군으로부터 이 사실을 보고받은 조선총독부는 일단 이 석등을 전남도지사 관사로 옮기게 했고, 이듬해 다시 경복궁 자경전으로 옮긴 거야. 그러다가 1945년 광복을 맞은 후 경무대로 옮겼고, 5.16 쿠데타 후에는 경운궁으로 오게 되었단다. 그후 1972년 경복궁 오른편에 새로 만든 국립중앙박물관(지금은 국립민속박물관으로 사용되는 건물)으로 이사했다가 1986년 중앙청(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박물관으로 개조해 옮길 때 다시 이사. 이렇게 처음 고향을 떠난 후 60여년 동안 일곱 번이나 옮겨 다닌 끝에 지난 1990년 그나마 고향 가까운 국립 광주박물관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안식을 취하고 있단다.

    [사진] 왼쪽은 경운궁 석조전 앞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을 배경으로 찍은 기념사진(박건호 수집사진), 오른쪽은 현재 광주박물관에 전시 중인 석등 사진이다(인터넷 사진).

    혹시 수집한 사진 뒷면에 촬영 연도가 적혀 있나 봤더니 ‘1965년 6월’이라고 적혀 있어.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이 경운궁에 머물렀던 기간이 1961년부터 72년까지였으니 사진의 시간 정보와 정확히 일치하는 거지. 나는 이 석등이 유랑하는 처지가 마치 한 사람의 굴곡진 일생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짠하단다.

    이렇게 나는 사진들을 통해 옛 문화유산들이 어떤 곳에, 어떤 모습으로 세워졌는지, 보호 전각은 있었는지, 파손된 곳은 없는지 등의 구체적인 사실들을 알아가는 재미를 즐기고 있어. 우리는 새로운 문화유산을 창조하는 동시에, 훌륭한 조상의 문화유산을 잘 보존해 다음 세대로 물려주어야 할 의무도 동시에 떠안고 있잖니. 저런 사진들은 이 유산들의 이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충분히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게 뭐가 중요하냐고 물으면 따로 대답하긴 힘들겠지만 말이야.

    관촉사 미륵불이 ‘얼큰’ 불상이 된 이유

    J야.

    옛 문화유산을 찍은 사진들이 나름 의미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말이 많이 길어졌구나. 정작 너에게 왜 편지를 쓰게 되었는지 이유를 말해야 되는데 말이야.

    최근에 나는 문화유산을 배경으로 한 수집 사진들을 정리하다가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하 관촉사 미륵불)을 배경으로 찍은 기념사진 여러 장을 보게 되었단다. 옛날에는 논산군 은진면에 있었던지라 이 불상을 ‘은진미륵’이라고 주로 불렀는데, 요즘은 그렇게 잘 부르지 않더구나. 관촉사를 찾은 관광객들은 빠짐없이 이 불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단다. 물론 지금도 그렇겠지. 보기 드물게 큰 석불인데다 얼굴을 표현한 그 조형미라든가 다른 불상이 가지지 못한 묘한 느낌이 있어 주목받는 불상이란다. 국사 교과서에 항상 실리는 불상인지라 너도 배운 기억이 날 거야.

    [사진] 관촉사 미륵불을 배경으로 찍은 옛 기념 사진들 (박건호 수집사진)

    이 18미터의 거대한 불상은 모자 꼭대기부터 목까지가 대략 9미터, 어깨부터 발까지가 대략 9미터 그러니까 2등신 불상이다. 모자는 빼고 얼굴만 가지고 보더라도 4등신! 이 불상을 ‘얼큰 불상’이라고 부르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거지. 고려 초 광종 연간에 만들어진 이 불상은 신라말∼고려초 지방에서 성장했던 호족 세력의 미의식을 반영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원래는 보물 제218호였는데, 몇 년 전 2018년에 국보로 승격되었단다. 내가 너를 문득 떠올렸던 건 아주 오래 전 수업시간에 고려시대 문화를 배운 후 네가 나에게 했던 질문 때문이었다.

    “왜 관촉사 미륵불은 저렇게 머리가 큰가요? 비례에 대한 기본 지식도 없는 거 아닌가요? 엄청난 인력과 재력을 투입해 만든 불상치고는 너무 신경을 안 쓴 것 아닌가요?”

    J야.

    너는 나에게 이렇게 따지듯이 질문을 했다. 내가 만든 것도 아닌데 말이다. 기억하니?

    당시 나는 길게 설명할 시간이 없어 이렇게만 말했다.

    “그렇게 한 것에는 다 이유가 있지 않을까?”

    이런 불친절이라니…..

    나중에라도 네가 그 답을 찾았기를 바라지만, 혹여 찾지 못했다면 늦게라도 그 답을 하려고 편지를 쓴다. 30년 전 너의 질문에 대한 나의 답변이다.

    사람들은 흔히 객관적이라는 이름으로 옛 역사를 그 시대의 관점이 아니라 자신의 시각으로 보는 경향이 있지. 관촉사 미륵불을 우리는 늘 그 앞에서 사진을 찍는 위치에서 봐 왔지. 그리고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의 신체 비율과 대비되는 불상을 보고서는 왜 저렇게 만들었을까 한숨을 짓지. 너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들이 하는 생각이야. 그런데 이 불상은 먼발치에서 구경하거나 사진 찍기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그 아래에서 엎드려 절하고 빌기 위해서 만들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단다. 조금 더 가까이 조금 더 가까이 발 밑으로 다가가 보자. 그리고 그곳에서 불상을 올려다 보렴. 그러면 얼큰 불상의 머리가 적당히 체감되면서 ‘이상적 비례’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당한 크기로 보이게 되는 거란다. 그러니 이 불상은 ‘2등신 불상’ 혹은 ‘기괴한 불상’이 아니라 그냥 개성 있는 한 분의 불상인 거지. 어쩌면 이것이 비례를 넘어선 비례, 과학을 넘어선 과학, 합리를 넘어선 합리가 아닐까.

    [사진] 왼쪽 사진은 먼발치에서 본 미륵불, 오른쪽은 조금 더 다가가 밑에서 올려다본 미륵불사진이다. 오른쪽 사진을 보면 왼쪽보다 머리 크기가 적당히 체감되어 보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인터넷 사진)

    불국사 석가탑도 그렇지 않니? 3층 석탑에서 각층 탑신의 이상적 비율은 4:3:2라고 하거든. 그런데 석가탑의 탑신 길이를 실제 재보면 그 비율이 4:2:2로 되어 있다고 한다. 사람의 눈은 착시 현상을 일으키기 때문에 아래에서 올려다볼 경우 2층과 3층 사이의 길이를 같게 해도 3층이 거리상으로 멀기 때문에 작게 보인다는 점을 고려하여 만든 것. 역시 구경하는 이가 아니라 사용하는 이의 입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대목이야.

    관촉사 미륵불과 같이 비교해 보면 좋은 불상이 하나 있어. 이걸 보면 이해가 좀 더 쉬울 거야. 보은의 속리산에는 법주사라는 유명한 절이 있어. 위에서 언급한 국보 5호 쌍사자 석등이 있는 바로 그 절이야. 국보 55호인 팔상전도 이 절에서 아주 유명한 건축물이란다. 이 팔상전 옆에는 현재 청동으로 만든 거대한 미륵대불이 서 있단다. 그런데 청동대불 이전에는 시멘트로 만든 미륵대불이 있었는데 너희 부모님 세대가 수학여행 가서 찍은 기념사진에는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는 불상이야. 시멘트를 사용한 이 실험적 불상은 근대 조각가 김복진(金復鎭)이 1939년 건립을 시작했다가 요절함으로서 중단된 것을 권진규 등 제자들이 해방 직후인 1948년 마무리한 것인데, 불상 높이가 무려 33미터였다.

    사진 속에 서 있는 이 불상을 보면 관촉사 미륵불에 비해 확연히 신체 비례가 잘 맞아. 게다가 훨씬 부드럽고 인간적인 느낌을 주기도 하니 금상첨화! 그런데 밑에서 저 30미터 이상 되는 불상을 올려다봤을 때 얼굴이 제 크기대로 보였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 생각으로는 저 불상은 먼발치 적당한 거리를 두고 봐야 아름다운 불상이야. 그에 비해 관촉사 미륵불은 발 아래에서 올려다봤을 때 적합하게 만든 불상인 거고. 물론 훌륭한 조각가 김복진의 작품에 대해 평가절하할 의도는 전혀 없어. 어떤 관점에서 불상을 보느냐에 따라 불상이 달리 보일 수도 있다는 점을 그냥 말하고 싶은 거야.

    [사진] 왼쪽은 법주사에 서 있던 미륵불로 김복진이 시멘트로 만든 실험적 불상이었다. 그는 김제에 있는 금산 미륵전의 미륵삼존을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이 시멘트로 만든 불상은 미학적으로 훌륭했지만, 결국 신성함도 따뜻함도 사라진 금을 덮어쓴 청동대불(오른쪽사진)로 바뀌고 말았다. 원래 이 절에 있던 청동불이 흥선대원군 때 당백전 주조할 때 청동이 부족하자 철거했던 금동미륵불을 복원한다는 취지였다. 시멘트 자재가 갖는 한계성 때문에 전체적 이미지에 문제가 발생한 것도 한 이유였다. 시멘트 불상은 1990년 철거되었고, 2002년 새롭게 청동불이 조성되었다. 철거하기에 아쉬운 불상이었다.(왼쪽 박건호 수집 사진, 오른쪽 인터넷사진)

    내 마음속의 원시인을 찾아서

    J야.

    나는 수업시간에 역사를 바라볼 때는 당시 사람들의 시각으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늘 너희들에게 강조했다. 구경꾼의 입장보다는 사용자의 입장이 중요하다는 사실과 함께 말이야. 이런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면 우리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을 알 수도 있단다. 그것이 만들어질 당시 날것 그대로의 맛을 느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가 저 먼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살아 움직이는 역사가 되는 것이다. 나와 옛 시절의 그들이 직접 접속하는 놀라운 경험은 덤일 테고.

    J야. 나는 편지 말미에 너에게 선사시대 이야기를 하려고 해. 시간적으로 우리와 가장 멀리 떨어진 옛날이지. 문헌 기록도 없어서 이해가 쉽지 않은 시대야. 그런데 이런 시대일수록 오늘날 우리 시각이 아니라 그 시대 사람 시각으로 역사를 보려는 노력이 중요하단다. 우리들 마음속에 여전히 숨어있는 원시인을 깨워서 그 눈으로 이 시대를 보자는 거야.

    ‘바위그림’을 배웠을 거야.

    선사시대 사람들은 바위에 안료로 그림을 그리거나 아니면 바위면을 깎아 바위그림을 왜 그린 것일까? 특히 동물 그림은 왜 그리도 많이 그렸을까?

    국사 교과서에서는 이에 대해 단순히 주술적 의미를 담았다고 설명하고 있지.

    아이들이 ‘주술적’이란 말뜻을 잘 이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바위그림은 ‘우리 마음속의 원시인’을 찾아서 보면 훨씬 쉽게 이해할 수 있어.

    이렇게 가정해보자.

    내가 네 부모님 사진을 주면서 너에게 눈이나 심장 같은 데를 바늘로 찔러보라고 한다. 그럼 너의 반응은 어떨까? 흔쾌히 찌를 수 있을까? 아니면 주저할까?

    너는 분명히 주저할 것이다.

    왜?

    네 마음 속 원시인이 너를 말리는 것이다.

    원시인은 생각한다.

    “사진 속 부모님 눈을 해치면 실제 저 분들의 눈이 보이지 않게 될 수도 있어.

    부모님 심장을 찌르면 심장이 상해 저 분들이 돌아가실 수도 있어.

    이렇게 부모님 눈과 심장을 바늘로 찌른다면 나는 부모님을 늘 끌탕하며 살게 될 것이다.”

    얼마나 비과학적인 생각이니?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 경우 바늘로 사진 찌르기를 주저한다. 고작 사진일 뿐인데 말이야. 이런 원시인의 마음을 생각해보니 왜 원시인들이 바위면을 깎아 동물을 그렸는지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지 않니? 그 그림들은 분명히 감상이나 장식의 목적으로 그린 것은 아니었을 거야. 그들은 분명 이 그림을 그려놓고 이 앞에서 사냥을 앞두고 의식을 행했을 거야. 바위 속 그림을 향해 화살을 쏘거나 창이나 돌을 던지는 거지. 그러면 실제 사냥에서 저 동물들이 잘 잡힐 거라 믿는 거지. 이것은 그림 속 동물을 향해 마술 혹은 주술을 거는 행위이고, 이렇게 미술은 마술에서 파생된 거란다.

    이렇게 인간의 행동을 진화론적 관점에서 설명하는 학문이 따로 있는데 ‘진화심리학’이라 한단다. 이 학문은 특히 선사시대를 연구할 때 도움이 된단다.

    J야. 너도 카페에 자주 가겠지?

    카페에 가면 흥미로운 점은 사람들이 보통 구석자리부터 앉기 시작해서 주로 마지막에 가운데 자리를 채운다는 거야. 그 이유를 진화심리학에서는 이렇게 설명해. 먼 옛날 사냥하던 시대의 흔적이라고. 사냥의 시간은 내가 사냥감을 잡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운 나쁘면 내가 사냥을 당할 수도 있는 시간이잖아. 그런데 내가 맹수한테 공격당하는 것은 주로 뒤쪽이나 위쪽이잖아. 그러니 사람들은 뒤가 열린 공간에서는 그만큼 불안해하고, 뒤를 등지고 앉거나 서면 심리적으로 매우 안정이 된다는 거야. 그게 구석자리를 먼저 찾는 이유라는 거지. 흥미롭지 않니?

    왜 여성들은 쇼핑을 할 때 이리저리 둘러보고 물건을 사는데, 남자들은 물건만 사고 집에 올까? 이것도 진화심리학에서는 남자들은 사냥하던 습속, 여성들은 열매나 풀뿌리를 캐던 습속에서 나왔다고 설명한다. 남자들은 저 멧돼지를 잡아 오면 되잖아. 그래서 목적지향적이 되는 것인데 비해 여자들은 이 열매가 잘 익었는지 안 익었는지, 이 식물의 뿌리가 큰지 작은지를 다 비교한 후에 그것들을 취한다는 거지.

    다시 바위그림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나라 바위그림에 대표적인 것이 울산 반구대 바위그림이야. 거기에는 고래, 호랑이, 사슴 등 동물 그림이 많이 그려져 있단다. 그 동물 그림은 위에서 말한 대로 이해하면 별 문제가 없을 듯한데, 또 하나 유명한 바위그림으로 고령 장기리 알터 바위그림이 있어. 그런데 여기에는 동물 그림이 아니라 수많은 기하학적인 문양이 새겨져 있어. 동심원, 십자형, 삼각형 등등. 교과서에서는 특히 동심원 문양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설명했어.

    “동심원은 태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 바위그림 유적은 다른 지역의 청동기시대 농업 사회에서 보이는 태양 숭배와 같이 풍요로운 생산을 비는 제사 터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는 전형적으로 오늘날 시각으로 역사를 해석한 거야. 그런데 우리 마음속의 원시인은 전혀 다르게 볼 수 있는 거야. 우리가 간과해선 안될 사실이 하나 있다. 우리나라 남부 지방 바위그림에 제일 많이 등장하는 미스테리한 문양이 있어. 이건 동심원 문양보다 훨씬 많이 등장한단다. 가면 모양이라고도, 방패 모양이라고도 설명하는데, 직사각형 문양 가운데 1∼2개의 선으로 구획되어 있고, 그리고 그 안에 점들이 찍혀 있고, 직사각형 주변에는 선들이 그어져 있는 문양이야.

    [사진] 고령 장기리 알터 바위그림. 여기에는 동심원 문양도 보이지만 가면모양 혹은 방패모양의 미스테리한 문양이 훨씬 많이 새겨져 있다. (인터넷 사진)

    저 문양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명들이 있어. 성교합을 모방해 주술적으로 표현했다는 설, 샤먼의 신체(神體)를 상징적으로 묘사했다는 설, 방패를 상징화하여 집단의 존속을 위한 기원을 표현했다는 설, 여성을 추상적으로 표현했다는 설, 태양신을 상징하는 인면상이라는 설 등등.

    저 문양은 어떻게 해석해야 사실에 가장 가까운 것일까?

    저 문양은 원시인의 시각으로 볼 수 있다면 가장 정확히 볼 수 있겠지?

    조심스럽지만 저건 태양으로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 이유는 비슷한 시기 중국사람들이 만든 한자(漢字) 때문이야. 잘 알다시피 한자는 모양을 본떠서 만든 상형문자지. 당시 중국인들이 한자를 만들 때 태양을 ‘日’로 표현했지? 저 방패 모양 혹은 가면 모양의 문양이 어떤 지역들에서는 단순화되어 가운데 점들이 없는 것들도 있고, 가면 주변에 그려진 선들이 없는 것도 있어. 그러니 저런 문양들을 가장 단순화시켜 버리면 ‘日’자 모양이 되지. 가면 주변에 뻗어 나가는 선은 햇빛을 상징하는 것이고, 가면 속에 표현된 점들은 태양의 눈일 거야. 모든 신성한 인격체는 눈을 가지잖아. 눈을 많이 표현한 것은 그 신성성을 강조하기 위함일 것이고…..

    설득력 있는 가설 아니니? 우리의 관점에서는 동심원이 태양이겠지만, 저들의 관점에서는 저 방패 혹은 가면처럼 생긴 저 문양이 태양이란 거지.

    그럼 동심원은? 그건 우리가 모르는 전혀 다른 무엇인가를 상징하고 있겠지.

    명확한 결론을 내릴 순 없지만, 이렇게 열린 마음으로 그 시대를 봐야 그 시대를 더 정확히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

    J야.

    나는 겨울에 등산할 때 가끔 사람들이 눈에 손바닥을 찍어 놓은 것을 자주 본단다. 온 세상이 백설로 덮였고, 산에 오르는 한 인간은 거기서 무슨 감흥을 느꼈길래 바위 위에 손도장을 찍는 것일까? 나는 옛 선사시대 바위그림에 그려진 무수한 손그림도 비슷한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우리 마음속의 원시인이 눈 위에 손도장을 찍게 했다면, 분명 이유가 있을 거야. 그 마음으로 선사시대 그들도 바위 위에 손그림을 그렸을거야. 그래서 나는 이런 관점에서 선사시대 사람들이 벽에 손그림을 왜 그렸는지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탐구하고 있단다. 그럴듯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거야. 늘 그 시대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자세로 살다보면 벼락같이 답을 찾을 수 있을 거야. 답을 찾게 되면 그때 다시 편지하마.

    그럼. 너의 건강과 행운을 빈다.

    [사진] 왼쪽은 2019년 겨울 관악산 등산 중 필자가 발견한 눈 위의 손도장, 오른쪽은 2018년 인도네시아 보르네오섬의 어느 동굴에서 발견된 손바닥 벽화. 눈에 손도장을 찍은 이의 마음속에 숨어있는 원시인의 말에 귀 기울이면 선사시대인들이 바위에 손바닥 벽화를 그린 이유를 알 수 있지 않을까?

    필자소개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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