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의 첫 프로바둑기사
    조남철, 한국바둑 설계자
    [현대바둑 사이드스토리④] 후계자
        2021년 06월 11일 03:4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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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바둑 창시자 세고에, 바둑황제 조훈현을 만들다

    소년은 갯벌이 눈앞에 보이는 작은 어촌에서 태어났다. 우연히 어깨너머로 배운 바둑은 불과 1년 만에 줄포면에 상대가 없을 정도였다. 얼마 후에는 부안 전체의 최강자로 등극하며 애기가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곧이어 국수라는 호칭을 받던 호남의 최고수들과 대등한 실력을 보이자 “바둑 신동이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조선 전체에 퍼져나갔다. 소년의 나이, 열한 살 무렵이었다.

    소년의 바둑 기풍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강한 완력(전투바둑)과 정교한 행마였다. 일제 강점기 시절 조선바둑이 전투바둑이었던 것은 역사적인 배경이 있었다. 조선의 전통바둑은 ‘순장바둑’이었다. 17개 흑백의 돌을 사전에 정해진 위치에 미리 놓고 흑이 천원(바둑 정중앙)에 돌을 놓으면 대국이 시작되는 것이 순장바둑이었다.

    순장바둑은 치명적인 약점과 장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돌이 미리 놓여 있기 때문에 ‘정석’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동시에 시작부터 돌들이 부딪힐 수밖에 없었고 난전은 필연이었다. 당연히 형세를 판단한다는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상대방의 돌을 잡으며 허리를 꺾어 버리는 것이 필연이었다.

    소년은 순장바둑에서 등장하지 않던 효율적인 행마를 보여준 것이다. 돌이 죽지도 않았고 전투에서 크게 밀리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바둑이 끝나있다면 그처럼 허망한 것도 없다. 흔히 “숨이 막힌다”라는 바둑기풍을 소년이 가지고 있었다.

    기타니 미노루의 첫 조선 제자

    1934년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오던 기타니 미노루는 경성에서 잠시 머무르며 휴식을 취하자 그를 만나기 위해 조선의 아마 고수들이 문전성시였다. 호남 만석꾼의 아들인 노사초는 조선 최고수 중의 한 명으로 ‘국수’ 칭호를 받던 인물이었다. 국수라는 칭호를 받는 사람들의 대국은 ‘내기바둑’으로 진행되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노사초는 지금의 가격으로 20억 정도인 기왓집을 15채를 날리고 20채를 찾아왔다는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기타니와 노사초의 기력 차이는 두 점 접바둑에 ‘고미’를 주어야 하는 정도였다. 노사초가 두 점을 깔고 그것도 모자라 노사초가 백돌 다섯 개를 미리 잡은 사석(고미)으로 받고 시작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기타니와 노사초의 기력은 두 점과 석 점 접바둑 사이라는 것이다.

    두 사람의 대국은 이뤄지지 않았다. 대국 결과가 문제가 아니라 두 점인가 석 점인가 칫수 자체가 협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노사초도 일본바둑의 차세대와 승부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일본바둑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고 고민은 무엇인지 하는 대화가 오갔다. 기타니는 오십대 후반인 조선의 최고수보다 젊은 인재들이 얼마인지와 어느 정도 수준인지가 궁금했다. 노사초와 정선 칫수인 조남철의 이름이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기타니는 이 젊은 바둑신동을 제자로 데려가고 싶었다. 일제 강점기라는 현실은 부모들에게 쉬운 선택은 아니었다. 조남철의 일본유학은 그렇게 좌절됐다. 기타니는 계속해서 유학을 권고하는 서신을 보냈고 호남지역의 고수들도 “이런 기회는 다시는 없을 것”이라며 부모들을 설득했다. 4년 후, 조남철은 현해탄을 건너는 연락선에 몸을 실었다. 열 다섯 살 나이였다.

    조선인 최초의 바둑프로기사의 탄생

    조남철이 일본으로 유학을 왔을 때 기력은 프로기사와 석 점 접바둑 수준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전국 대회 3개 이상을 제패해야 오를 수 있는 아마 7단 기력이었다. 조남철은 1년에 한 점씩 그 차이를 줄여 나갔다. 기타니 도장에는 아마 최고수 수준의 기력을 가진 제자들이 득실거렸고 스파링만큼 좋은 바둑공부는 없었다. 유학 4년이 되던 해 조남철은 일본기원에 입단했다.

    조남철의 기량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일본기원의 촉망받는 신예 중 한 명이었다. 입단 3년 후인 1944년 조남철은 돌연 귀국을 결정했다. 개인의 명예보다는 조선으로 돌아가 바둑 보급에 앞장서겠다는 생각이었다. 전도가 유명한 22살의 청년의 결정에 스승인 기타니도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하라며 조남철의 결정에 힘을 실어주었다.

    조국으로 돌아온 조남철은 전국의 국수(초고수의 별칭)을 만나 친선대국을 두면서 조선에 바둑 보급을 위한 단체를 만들자고 설득했다. 내기바둑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국수들은 조남철의 제안에 의문을 나타냈다. 식민지인 조선에서 독자적인 바둑조직의 설립이 가능한지에 의문을 나타낸 것이다. 단체를 만들어도 생계에 도움이 되는지도 의문을 가졌다.

    그때, 조선이 해방이 되면서 상황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조남철은 일본처럼 기원을 설립하고 기업의 후원으로 대회를 개최하면 상금만으로 먹고사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언론사에 기보를 연재하고 받는 수입으로 운영비를 충당할 수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1945년 한국기원의 전신인 한성기원이 탄생했다.

    한성기원과 국수전

    프로기사를 배출하기 위한 한성기원을 설립하는 데 성공했지만 조남철의 다른 예측은 처참하게 빗나갔다. 기업 홍보에 상당한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조남철의 주장에 기업들은 숫제 이상한 사람 취급하기 일쑤였다. 간혹 후원 비용이 얼마인지 묻는 기업들이 있었지만 “고급 승용차 세 대 값 정도”라는 조남철의 이야기를 듣고 이상한 사기꾼이 나타났다는 사발통문을 돌릴 정도였다.

    한성기원을 설립하고 10년간 대회다운 대회는 열리지 못했다. 간혹, 바둑을 좋아하는 지방의 거부들이 후원해 대회가 열리기도 했지만 우승상금이라고 해도 고작 노동자 몇 달 월급 수준에 불과했다. 그나마 조남철이 대회를 싹쓸이해 지방의 최고수들을 허탈하게 만들었다. 조남철이 던지는 변화도에 최고수들은 이해조차 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이었다. 하지만 10년 동안 조남철은 쉬지 않았다. 바둑의 정석과 변화도에 대해 책을 만들어 전국에 보급한 것이다. 바둑고수들이 조금씩 조남철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1955년 기아자동차가 대회 후원의사를 피력했다. 핵심부품을 일본자동차회사에 의존하던 기아자동차는 때마다 고위임원들이 일본 출장을 가는 것이 일상이었다. 일본자동차회사들은 일본기원의 대회를 후원하는 것은 오랜 전통이었다. 아니, 더 많은 비용을 들이더라도 대회를 후원하려고 안달이었다.

    조남철이 먼저 스승에게 도움을 요청했는지, 소식을 알고 있던 기타니가 먼저 개입한 것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일본자동차회사는 기아자동차 고위임원들에게 “바둑대회를 후원하는 것만큼 좋은 광고효과가 없는데 왜 하지 않는 것인지”라며 의문을 표시했다. 기아자동차는 “협력관계를 계속하려면”으로 이해했다. 기아자동차는 조남철을 찾아가 필요한 금액을 불러보라고 재촉했다.

    1956년 한국기원은 기아자동차가 후원하는 최대 기전 <국수전>을 시작했다. 후원금액은 고급 자동차 네 대 값이었고, 우승상금은 한 대 값이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후원금액은 2억, 우승상금은 5천만원이었다. 대회의 흥행은 기대 이상을 뛰어 넘었다. 기아자동차 같이 훌륭한 회사의 차를 사야 한다는 입소문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당황한 기아자동차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기 위해 대책회의를 해야만 했다.

    후원을 확정한 조남철의 다음 행보는 대회 주요 기보를 연재해 줄 신문사를 찾는 일이었다. 주요대국을 신문에 날마다 연재하는 것은 바둑팬들의 갈증을 풀어주는 지름길이었다. 다른 하나는 기보연 재료를 고정적으로 받아 한국기원의 기본적인 운영비를 확보하자는 것이었다. 대회가 늘어나면 연재료는 한국기원의 운영을 유지하는 강력한 힘이 되기 때문이었다.

    신문사의 반응은 한결 같았다. 광고비를 얼마나 낼 것이냐는 식이었다. 기보를 광고라고 생각한 것이다. 조남철은 연재료 이야기는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했다. 허탈한 조남철에게 손을 내민 인물은 동아일보 사장인 최두선이었다. 바둑애호가였던 최두선은 타협안을 제시했다. 광고비는 받지 않고 기보 해설을 위한 사람을 추천하면 섭섭하지 않은 비용을 지급하겠다는 것이었다. 연재료는 대회를 진행해보면서 다시 논의해보자는 제안을 덧붙였다. <국수전>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13기 국수전 야외해설 장면. 사진에 보이는 건물은 동아일보 광화문 당시 사옥. 국수전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는 장면이다

    국수전 첫 우승자는 당연히 조남철이었다. 4년 연속 우승을 하던 조남철에게 막 입단 초단이 눈에 들어왔다. 김인이었다. 10살 무렵, 김인이 전남지역 아마 최고수라는 소문은 듣고 있었고 입단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입단 후 조남철은 김인에게서 다른 것을 보았다. 자신만의 바둑철학이었다. 기타니 도장에서 수학할 때 조남철은 대성한 기사들은 기재가 아니라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눈으로 보았다.

    천하삼분지계를 열다

    조남철은 김인에게 단 몇 년이라고 일본 유학을 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다. 아무리 신예라고 해도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에게 유학을 제안하는 것은 보기에 따라 폭력적일 수도 있었다. 게다다 제안자는 한국기원 이사장이자 전 기전을 제패하고 있는 조남철이었다. 하지만 소년 김인은 조남철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반전은 다른 곳에서 일어났다. 김인이 거절한 이유는 자존심이 아니라 가난이었다. 이제 혼자 밥벌이는 하고 있는데 유학이라는 제안을 받으니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기타니 도장은 제자들은 무료로 기숙하고 용돈도 준다는 조남철의 말에 소년 김인은 당장 짐을 꾸리고 현해탄을 건너갔다.

    국수전의 흥행이 성공하자 명인전, 패왕전, 최고위전이 속속 등장했다. 대회는 모두 조남철의 무대였다. 국수전 9연패, 명인전 2연패, 패왕전 4연패, 최고위전 7연패. 대회의 흥행은 성공했지만 우승자가 매번 같은 사람인 것은 팬들도 후원사도 피로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조남철은 언제나 ‘기획’을 하고 있었다.

    2년, 짧지만 강력한 스파링으로 세월을 보낸 김인이 일본에서 돌아왔다. 돌아온 김인은 조남철이 가지고 있던 모든 타이틀의 도전자로 나섰다. 반상 위에서 조남철과 김인의 대국은 보이지 않는 피가 흐르고 그 때마다 김인은 쓰라린 칼을 맡고 후퇴했다. 그 사이 조남철도 조금씩 김인에게 맞은 자상에 흔들렸다. 최초의 대형 기전인 국수전의 조남철 10연패의 도전자는 다시 김인이었다. 대국 장소인 운당여관의 문을 먼저 열고 나온 것은 김인이었다. 기다리고 있던 관철동 사람들은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희미한 웃음을 지은 김인은 단골술집인 쌍둥이집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관철동 사람들은 새로운 황제의 탄생을 축하하며 뒤를 따랐다.

    조남철 국수전(오른쪽) 10연패를 저지하는 김인(왼쪽). 대국 장소는 운당여관

    국수 10연패를 저지한 김인은 조남철이 차지하고 있는 기전을 하나씩 차지하기 시작했다. 위기에 몰린 조남철은 엉뚱하게도 다른 기사의 일본유학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윤기현이었다. 재기가 넘치는 윤기현은 신예가 아니라 김인과 동년배였다. 두 사람의 바둑은 상극이었다. 김인보다 더 충격적인 제안이었지만 야심히 많은 윤기현은 곧바로 제안을 받아들였다. 한국 바둑 스페셜 원, 조남철 바둑의 시대를 저물 게 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김인과 윤기현이었다.

    조남철이 국수전 유치에 성공하고 한국기원을 궤도에 올려놓았을 때 9살 소년이 경남 합천에서 보따리를 매고 찾아왔다. 합천거사 하찬석이었다. 소년의 바둑은 초반은 다소 의문이지만 중반 행마와 기세(싸움)은 국수급이었다. 조남철의 제안으로 하찬석은 기타니 도장으로 유학을 떠났다. 3년 만에 입단에 성공하고 최강만이 가능하다는 매년 승단에 성공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4년 후 하찬석은 귀국했다. 그리고 김인이 가지고 있는 타이틀을 하나씩 회수하기 시작했다.

    한국바둑의 설계자였던 조남철은 빠르게 자신 이후의 후계자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게 김인이었다. 그리고 강력한 라이벌이 있어야 흥행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거기에 천하삼분지기계가 되면 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조남철은 한국바둑을 설계하고 스스로 최강인 것을 증명하는 동시에 자신 스스로 칼에 베고 쓰러지는 순교자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한국기원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시간과 함께 천천히 저물어갔다.

    필자소개
    인문사회과학 서점 공동대표이며 레디앙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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