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냉소한다고 해서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
    [인터뷰] <지금은 없는 시민> 저자 강남규
        2021년 06월 09일 10:2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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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지금은 없는 시민 : 끝내 냉소하지 않고, 마침내 변화를 만들 사람들에게>는 언론과 정치를 비판하기에 앞서 시민의 책임을 되묻는다. 정치를 혐오하고,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하며, 시민단체와 노동조합을 불필요한 것으로 치부하는 유권자, 독자, 시민에게 질문을 던진다. 혐오스러운 정치, 기만적인 정당, 기레기 언론에 ‘우리’의 책임은 없느냐고. 정치개혁과 언론개혁, 사회의 변화엔 결국 시민 개개인의 역할과 책임이 필요하다고 설득한다. 시민의 역할은 “열심히 먹고 사는 것에만 있지 않다”며 시민의 의무를 저버리지 말라고 충고한다.

    냉소하거나 맹신하거나

    유하라 <레디앙> 기자 (이하 유하라) : 책 제목이 ‘지금은 없는 시민’이다. 시민의 역할에 대해 부정적인 진단을 내리고 있는 것 같다.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담고 있나?

    강남규 <지금은 없는 시민> 저자 (이하 강남규) : 풀어서 말하면 ‘지금은 없지만 앞으로 도래할 시민’이라는 뜻이다. 촛불혁명 이후 정권 교체가 됐고 광장에 나왔던 시민들은 일상으로 돌아갔다. 이후 시민들은 민주주의 주체로 활동을 하기보다 ‘우리를 대변할 대통령이 청와대에 들어갔으니 모든 정치를 대통령과 민주당에게 위임하겠다’는 태도로 임하고 있다.

    그 결과 “촛불로 좋은 대통령을 만들었는데 세상이 바뀌지 않았다”면서 냉소에 빠지거나, 아니면 “우리 대통령이 끝내 해결해 줄 거야”라는 신앙에 가까운 믿음을 갖는 식으로 시민의 역할이 많이 축소됐다.

    이렇게 냉소하거나 시스템이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고 일상으로 돌아간 시민의 빈 자리에 대해 얘기해보고 싶었다.

    시민의 역할은 ‘열심히 먹고 사는 것’에만 있지 않다

    유하라 : 도발적인 내용들이 책 곳곳에서 눈에 띈다. ‘기레기’라는 언론을 향한 비난에 언론보단 독자의 책임을 지적하고, 정치와 사회에 무관심한 이들을 향해선 “죄를 짓지 않거나 남을 해롭게 하지 않으며 그저 열심히 먹고 사는 것으로 모든 책임을 다한 것이라는 알리바이”라는 문장은 뼈를 때린다. 정치와 언론 등 권력기관만이 한국 사회를 후퇴시키는 장본인으로 지목이 돼왔는데, 이 책은 권리와 의무를 다하지 않는 시민들에게도 책임이 있고 사회 후퇴의 공범이라는 지적 같다.

    강남규 : ‘정치가 잘해야지, 언론이 잘해야지’ 이런 말에 질려 버린 것 같다. 그런 말은 참 쉽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언론과 정치를 어떻게 잘하게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다. 잘하는 정치를 구매해주고, 잘하는 언론을 소비해주는 것도 하나의 시민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민주주의 시민의 역할 계속 강조할 수밖에 없다. 정치인은 안 그런 것 같지만 시민의 눈치를 많이 살핀다. 박근혜 탄핵 당시 새누리당은 복지부동했고, 민주당은 질서 있는 퇴각을 요구하며 온건한 모습을 보였다. 이때 시민들이 광장에 나가 훨씬 더 급진적인 요구를 하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시민이 제대로 조직돼 강력하게 요구하면 권력은 이를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목격했다.

    (‘오보 장사’를 하는) 언론에 대해 ‘클릭 수가 확보가 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는데, 그렇다면 그 기사를 클릭하는 독자의 저의에도 ‘기레기를 만든 책임’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었다.

    유하라 : ‘잘하는 정치를 구매해주고, 잘하는 언론을 소비해주는 것도 하나의 시민의 역할’이라고 했다. 시민의 역할을 구매자와 소비자로만 가둔다면 책에서 언급한 ‘같이 돌파하는 정치’가 가능할까.

    강남규 : 소비와 구매가 ‘연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의당 활동에 관한 기사를 보면 욕먹는 댓글만 엄청 많다. 지지해줘야 할 사람들은 페이스북에서 그들끼리만 얘기하거나, 비판에 초점을 맞춰서 글을 쓴다. 장혜영 정의당 의원이 ‘잘하고 있다’고 서로를 독려하는 메시지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는데, 그 글을 보면서 ‘그동안 우리가 (진보정당의 의원들을) 정말 독려하지 못했구나’라는 고민이 들었다. 이런 부분에 대한 시민의 역할도 있다고 생각했다.

    유하라 : 깨시민이나 문빠를 ‘정치의 주체가 아니라 정치 지도자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집단’이라고 했다. 그런데 내부적인 비판보단 독려가 필요하고 소비자와 구매자 입장을 견지할 필요가 있다고 하는 것은 저자가 비판하는 깨시민이나 문빠와 노선만 다를 뿐 같은 맥락이 아닌가.

    강남규 : 사람을 바라보고 갈 것인지, 가치를 바라보고 갈 것인지 그 차이인 것 같다. 일부 민주당 지지자들은 문재인 대통령이 최저임금을 인상하자고 했을 때도 지지했지만, 최저임금 인상 속도를 늦춰야 한다고 했을 때도 지지했다. 그들은 최저임금 인상이 필요하다는 가치를 지지하는 게 아니라, 문재인 대통령이라는 사람을 지지하는 거다.

    정치인을 판단할 때 봐야 할 것은 가치에 대한 신념이라고 생각한다. 시민은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인의 가치관이 흔들릴 때 제 위치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독려하고 때로는 비판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강남규 씨(왼쪽)와 유하라 기자

    그들은 공정한 사회를 원하는 게 아니다

    유하라 : 최근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국민의힘 이준석 전 최고위원이 실력주의와 능력주의를 ‘공정’이라는 카테고리 안에 담고 있다. 실력주의와 공정이 같은 말이 되어버린 상황에 대해 어떻게 보나.

    강남규 : 실력주의, 능력주의엔 언제나 탈락자들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 탈락자들을 고려하지 않는다. 탈락자들이 계속 생산되고 큰 규모를 이루게 됐을 때 한 사회는 그들을 시한폭탄처럼 안고 갈 수밖에 없다. 그런 사회가 지속될 수 있나. 이런 능력주의가 과연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한 이념이 될 수 있을까.

    유하라 : 저자는 그들이 요구하는 공정함에 대해 “내가 갖지 못한 것이나 못할 것에 대해 선택적으로 분노하는 죽창과 같은 것 아닐까”라고 했다.

    강남규 : 개개인의 청년들이 공정이라는 개념을 하나의 가치관으로 여기는지, 혹은 나의 성공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LH사태 당시 ‘부러우면 LH로 이직하라’고 말했던 사람도 청년일 것이고, BTS가 순전히 운이 좋아 성공했다며 불만을 성토하는 삼성SDI 직원도 청년일 거다.

    이런 말을 하는 이들은 자신이 누리는 특혜에 대해선 “정당한 권리”라고 항변하거나 말하지 않는다. 블라인드(젊은 층이 많이 사용하는 직장이 커뮤니티)를 보면 “우리는 정당하게 공기업에 취업해서 얻은 권리”라고들 한다. 이런 청년들이 말하는 그 공정이, 과연 실력주의와 일치하나.

    이들은 공정한 사회를 원하는 게 아니다. 여성들이 채용 불이익을 받은 것에 대해 ‘공정하지 않다’고 얘기하는 남성 청년들의 목소리는 거의 없다. 본인들이 피해를 보지 않기 때문이다. 불공정에 분노한다지만 내가 받지 않은, 받지 않을 불공정에 대해서 분노하지 않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이 (특혜를) 누리지 못하는 상황이 불공정하다고 믿는 것뿐이다. 지금의 공정은 가치관이나 이념이 아니라 자신들의 주장을 펼칠 근거 정도로, 편의적으로 활용되는 개념이다.

    불가능에 도전하는, 선을 넘는 진보정치가 필요하다

    유하라 : “선을 넘는 진보정치가 필요하다”면서 “불가능성에 도전하며 독단적이고 교조적이라는 시선도 감수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저자의 책에 자주 언급되는 정의당 내엔 불가능성에 대한 도전보단 “정치는 현실”이라는 분위기가 더 지배적인 것 같은데, 혹시 진보정치가 끝내 선을 넘지 못해 아쉬웠던 기억이 있나?

    강남규 : 재작년 선거제도 개혁 국면에서 진보정당들은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더 공정한 룰”이라고 할 뿐 “진보정치의 성장이 필요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선거제도를 바꾸는 게 진보정당에 더 유리하니까 바꾸자고 하는 것 아닌가. “진보정당의 이익을 위한 것 아니냐”는 비판에 부딪히면 “우리 사회에선 진보정치가 성장하는 게 필요한 일이고 지금 우리를 비판하는 여러분들에게도 필요한 일이다”라고 얘기해야 했다.

    가장 크게 실망했던 기억은 2018년 예멘 난민들이 제주도에 왔을 때다. 당시 정의당 중앙당은 난민에 관한 논평조차 내지 않았다.

    유하라 : 난민 문제에 대해 입장을 내지 못했던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나.

    강남규 : 국민적 합의가 (난민 수용) 반대 쪽으로 쏠려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 아니겠나. 난민 문제를 설득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적당히 침묵하고 넘어가는 선택을 했던 게 아닌가 싶다. 논란이 뜨거웠던 시기를 지나고 10월부터는 난민 문제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엄청나게 논란이 됐을 땐 뒤로 빠져 있다가 논란이 사그라지고 개입하는 것을 보고, 비겁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선거제도로 (민주당에) 뒤통수를 맞은 후엔 선을 넘고 있는 것 같다.(웃음) 지금은 조금 더 독려를 해도 되는 시기인 것 같다.

    유하라 : 당내 건강한 비판이 당을 건강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을 가끔 목격하는데, 이럴 때에 당원과 시민의 역할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강남규 : 만약 당원들이 (당에 실망했을 때) 탈당해버렸다면 당의 변화는 없었을 거다.

    나이브한 말이 필요할 때도 있다

    유하라 : 정의연 사태 다루면서 시민단체의 부실 회계 원인이 열악한 재정에 있고 따라서 시민들의 관심과 후원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냈다. 정의연 사태와 별개로 비판적이고 저항적이어야 하는 시민단체의 본질적 성격이 퇴색됐다는 비판이 많다. 예컨대 서울지역 시민단체들은 박원순 전 시장과의 친분 때문에 감시의 기능을 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많았고, 문재인 정부 들어선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청와대로 가는 일이 많아지면서 시민단체가 정부의 하부조직이 돼버렸다는 비판까지 나왔다. 이런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시민단체에 개별 시민이 애정을 갖기는 쉽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관심과 후원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건 설득력이 떨어지지 않나.

    강남규 : 시민단체가 잘해야 한다는 말을 부정해본 적은 없다. 시민단체가 잘해야 한다는 말은 너무 당연하다. 다만 시민에게 말을 거는 칼럼에선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많은 시민단체들이 서울시나 정부와 짝짜꿍해서 흘러가는 경향들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여전히 더 많은 시민단체들은 재야에서 계속 진보적인 담론을 만들고 있고 그 담론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금은 노동조합이나 시민단체에 대한 비판보다, 이들이 좀 더 영향력을 가질 수 있도록 독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하라 : 저자는 끊임없이 나를 설득해주고,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들 때문에 성장할 수 있었다고 했다. 저자의 지금 그 말이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강남규 : ‘끝내 냉소하지 않고, 마침내 변화를 만들 사람들에게’가 책의 부제다. ‘냉소하지 말자’, ‘냉소를 만드는 사회를 바꾸자’는 또 다시 뻔한 말을 할 수밖에 없다. 나이브한 것 알고 있다.

    유하라 : 나이브한 말이 필요할 때도 있다는 뜻인가.

    강남규 : 냉소한다고 해서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 어떻게 냉소하지 않을 수 있냐고 한다면…‘그럼 이대로 다 같이 망한 사회로 가자는 거냐’는 말밖엔 할 수 없을 것 같다.

    유하라 : 시스템에만 기대지 말고 구조와 시스템을 바꾸는 시민이 되자면서, 그러기 위해선 시민들이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시민의 변화와 사회적 연대가 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가장 큰 축이라고 본 것인데 구조를 바꾸는 시민의 변화, 시민들의 사회적 연대를 이끌어낼 힘은 어디에서 온다고 보나.

    강남규 : 어찌됐든 한국 사회는 형식적으로나마 분명한 민주주의 사회이고 시민은 형식적으로나마 이 사회의 주인이다. 주인이라는 말은 변화를 만들 권리가 있다는 것이고, 동시에 책임이 있다는 뜻이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내가 이 사회에 조금이나마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다른 시민들에게 설득하고 또 설득하다 보면 하나의 조직이 생기고 그러면 하나의 변화를 만들 주체들이 생긴다. 또 뻔한 말이지만, 결국 사회는 그런 식으로 변해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이 사실을 겸허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필자소개
    레디앙 취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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