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공은 학교 풍경을 어떻게 바꾸었나?
    [컬렉터의 서재-3] 우리가 살았던 반공의 시대
        2021년 05월 31일 10:4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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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수집한 옛 자료 중에 1970년대 웅변 대회 관련 팜플랫이 하나 있다. 팜플랫은 1974년에 열렸던 ‘제 11회 웅사기 쟁탈 북괴만행 규탄 및 국민 총단결 전국남녀웅변대회’ 행사에 관련된 것이다. 여기에는 제목만으로도 그 내용을 짐작케하는 연제(演題)가 여럿 보인다. 한신국민학교 홍석진군은 ‘공산군을 이겨내자’는 제목으로, 영중국민학교 임성근군은 ‘쳐부수자 공산당’이라는 제목으로, 같은 영중국민학교 유철웅군은 ‘미운공산당’이란 이름으로, 춘천 성수국민학교 조형호군은 ‘반공의 불사조’라는 제목으로 웅변했다.

    “저 공산당 붉은 집단을 무찌르고 억압받는 북한 동포들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이 연사 목 놓아 목놓아 외칩니다!!!”

    눈을 감으면 1974년 12월 어느날 연단에 선 한 소년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도 들린다.

    [사진] 반공의 시대에는 반공·승공을 주제로 한 수많은 웅변대회가 열렸다. (박건호 수집 사진)

    우리는 참 오랫동안 반공의 시대를 살았다. 어디서든 반공, 방첩, 멸공이라는 구호를 볼 수 있었다. ‘황국신민의 서사’를 외우던 일제 강점기의 학생들은 해방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의 맹세’라는 걸 외워야 했다. 이승만 시대 모든 책의 판권 페이지에는 3개항으로 이루어진 ‘우리의 맹세’를 실어야만 했다. 일종의 반공 맹세문인 ‘우리의 맹세’ 내용은 이러했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아들·딸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키자. 우리는 강철같이 단결하여 공산침략자를 쳐부수자. 우리는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를 날리고 남북통일을 완수하자”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부가 붕괴되면서 반공 체제가 일시 완화된 시기도 있었다. 혁명의 열기가 충만한 속에서 반공 이념은 일시적으로 희석화되었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중립화통일론, 남북협상론 등이 제기되는가 하면, 심지어 남북 학생회담이 추진되기도 했다. 이때의 구호가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이 땅이 뉘땅인데 가도 오도 못하는가”

    이런 상황을 위기로 인식한 군부는 쿠데타를 감행하게 되고, 이를 통해 집권한 박정희는 ‘5.16 혁명 공약’의 1조에서 반공을 국시로 표방했다.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

    이어지는 혁명공약 5조에서는 “민족적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라고도 했다. 당시 경제력이 북한에 뒤지는 상황이었던지라 “공산주의에 대결할 수 있는 실력배양”이라는 말은 따라잡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었다. 당시 북한에 대한 남한의 공포와 위기감은 지금보다 훨씬 컸다. 남한의 경제력이 북한을 추월하는 것은 197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였다. 그러므로 ‘공산주의에 대결할 수 있는 실력배양’이라는 저 다짐 속에는 1960년대 초반의 북한체제에 대한 반감만이 아니라 북한을 따라잡겠다는 절박함과 비장함도 함께 묻어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박정희 정부는 반공 정책을 더 강화되었다. 보안법으로 부족해 반공법이라는 것이 추가로 만들어졌다. 대한민국은 반공전선의 최전선에서 공산주의와 맞서는 반공의 교두보였다. 박정희 정부는 반공의 십자가를 맸다. 그냥 쓴 표현이 아니다. 실제 196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쓴 붓글씨 중에는 ‘반공 십자군’이라고 쓴 작품도 남아 있다.

    [사진] 반공의 시대에는 어디서든 반공과 방첩의 구호를 볼 수 있었다. 왼쪽 사진은 1970년대 어느 학교의 기념사진으로 학교 현관 가운데 반공 방첩이라는 구호가 붙어있고, 그것으로 부족했던지 현관 좌우에도 방첩과 승공의 구호를 내걸었다. (박건호 수집 사진) 오른쪽은 최근 어느 경매에 나온 박정희 대통령의 붓글씨이다. 1966년 작품으로 ‘반공 십자군’이라고 썼다.

    이승만 시대에 이어 박정희 시대에도 반공은 모든 것에 앞서는 가치였다. 북한 사람들에게 ‘반미’가 그러했듯, 남한 사람들에게는 반공과 멸공·승공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남북은 서로를 악마화하고 증오함으로써 체제 결속과 단결을 꾀했다. 같은 김일성이라도 북한사람들에게 그는 ‘위대한 원수(元帥) 김일성’이었지만, 남한 사람들에게는 ‘민족의 철천지 원수(怨讐) 김일성’일 뿐이었다.

    1970년 재개발로 집을 강제 철거당하게 된 서울 달동네의 한 주민이 철거반원들을 향해 “이 김일성보다 더 나쁜 놈들아!”라고 욕했다가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된 일도 있었다. 반공법 4조 1항 공산주의자 고무찬양죄 혐의였다. 김일성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놈이라야 되는데, 김일성 보다 나쁜 놈이 있으면 김일성은 두 번째로 나쁜 놈이 되므로 이는 김일성에 대한 고무 찬양일 수 있다는 것이 검찰의 논리였다. 북한에서 이런 욕을 해서 처벌받았다면 모를까 남한에서 이런 욕을 했다고 잡혀 들어갔다는 것은 한편의 코미디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 시대가 그랬다. 이 뿐만 아니다. 1970년대에는 막걸리 한잔 걸치고 어릴 때 인민군에게 배운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으로 시작되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흥얼대던 사람들이 반공법에 걸려 감옥에 가야 했다. 이런 상황을 본 사람들은 이를 가리켜 ‘막걸리 반공법’이라고 불렀다.

    공산주의자로 몰리면 남한에서는 주홍글씨가 되었다. 정권이 반대세력을 제거할 때도 ‘공산주의자, 빨갱이’라는 낙인만 찍으면 끝이었다. 그러면 대중들이 알아서 그를 마녀사냥하고 결국은 매장시켜 버렸다. 이런 두려움을 체험한 사람들은 반공을 스스로 체득해갔다. 공산당으로 몰리면 얼마나 쉽게 체제 바깥으로 배제되고 제거되는지도 경험을 통해 배우게 되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공권력이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

    5.18을 다룬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에 나오는 내용이다. 소설 속 동호는 전남도청 상무관에서 5.18 당시 희생자들의 시신을 관리하는 일을 돕는다. 그런데 그는 추도식 때 유가족들이 관 위에 태극기를 덮고 애국가를 부르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왜 신군부로 대표되는 공권력이 총칼로 광주를 탄압할 때 시민들은 태극기를 들고, 애국가를 불렀을까? 그리고 대형 태극기로 덮였던 전남도청 앞 분수대!

    이것은 아마도 오래전부터 내려왔던 ‘레드 콤플렉스’ 때문이 아니었을까? 고립된 광주에서 자신들을 지키고 국민들로부터 더 고립되지 않기 위해서 그들은 자신들이 공산주의자가 아님을 어떻게든 호소해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5.18 전기간에 걸쳐 태극기를 흔들며 애국가를 불렀을 것이다. 지금도 지만원 등 일부 극우 인사들은 광주에서 싸웠던 시민들을 북에서 내려온 공산주의자, 특수부대로 규정하려 한다. 광주를 다른 지역과 고립시킬 수 있는 최고의 무기가 그들을 북한과 연결시키는 것임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내친 김에 퀴즈를 하나 낸다. 다음에 소개하는 도덕 교과서는 언제쯤 사용된 교과서일까? 2학년용 교과서인데 ‘반공 포스터’라는 단원의 내용 일부이다. 잘 읽어보고 판단해보시라.

    승호네 반에서는 미술 시간에 반공 포스터를 그렸습니다. 경일이는 총을 들고 있는 공산군들에게 우리 국군이 비행기에서 총을 쏘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현희도 국군이 공산군을 총으로 무찌르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희숙이는 무서운 간첩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희숙이가 그린 간첩은 손톱이 길고, 머리에는 뿔이 나 있어서, 꼭 도깨비 같았습니다. 포스터 그리기를 마친 다음, 저마다 그림을 칠판과 교실 앞에다 내다 붙였습니다. 선생님께서 그림을 차례로 돌아보셨습니다.

    “간첩은 어떻게 생겼을까 말해 봐요.”

    선생님 말씀에

    “도깨비같이 생겼어요” “무섭게 생겼어요.”

    저마다 한 마디씩 하였습니니다. 어린이들의 말을 들으신 선생님께서는

    “북한 공산당이 보내는 간첩은 얼굴의 생김새나 말씨가 우리와 비슷하며 옷차림도 거의 같이 하고 다녀요.”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 그러면 간첩을 어떻게 찾아내지요?”

    하고 상호가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찾아 내기가 힘드는 거지요.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것을 묻거나, 돈을 함부로 쓰거나, 헛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는 사람들을 수상히 여겨 찾아 낸답니다. 희숙이의 그림은 간첩이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그린 것 같아요. 잘 그렸어요”

    [사진] 반공 시대 어느 초등학교의 수업 장면이다. 왼쪽으로 보이는 학급 게시판에 붙어있는 반공 포스터가 보인다. 포스터에 ‘멸공통일’, ‘무찌르자 붉은 마수’ 등의 문구도 보인다. 당시 학생들은 정기적으로 반공 포스터 그리기, 반공 글짓기를 통해 반공을 내면화해갔다. (박건호 수집사진)

    교과서 내용이 무척이나 거리감이 느껴진다. 지금의 학교 교과서에서는 이런 내용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더 이상 반공 포스터를 그리지 않는다.

    정답은 1981년 사용된 교과서이다. 5.18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던 그 시기에 이런 도덕 교과서가 학교 현장에서 사용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광주 시민들이 자신들을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호소하고 애국가를 부르고, 태극기를 흔들었던 것이다. 지금은 ‘반공 시대의 교육’이 먼 옛날의 전설이 되고 말았지만. 그 시대는 그것은 상식이었고 도덕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책 속에 나오는 괴담으로 끝나는 것이 현실에서 무서운 힘을 발휘하는 치도곤이었다.

    그 시절 반공 이념을 가르치고, 확대 재생산하는 곳은 역시 학교였다. 학교에서는 반공 웅변대회가 열렸고, 반공 글짓기 대회, 반공 포스터 그리기 대회 등이 수시로 열렸다. 군사학인 교련 과목을 정규 교과목으로 가르쳤고, 소풍인지 군사훈련인지 애매모호한 ‘행군’이라는 이름의 행사도 있었다. 대학생들은 문무대 입소가 이루어지고, 전방 입소도 의무화되었다. 문무대 입소와 전방 입소는 노태우 정부 때인 1988년 폐지되었고, 고등학교에서의 교련 과목은 1997년 폐지되었다.

    그런데 학교 현장에서의 반공의 목소리는 이렇게 바깥으로 뚜렷하게 모습을 드러낸 것들도 있지만, 조용히 숨어 있는 것들도 있었다. 그래서 주목해서 보지 않으면 쉽게 놓치게 되는 것이다. 반공 이념은 이렇게 전방위적으로 힘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수집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교육 현장에서의 반공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학교 운동회 풍경

    맑고 푸른 가을 하늘 아래 오곡 백과가 무르익는 좋은 시절을 맞이하여 귀체의 안강하심과 존당의 균경하심을 축하드리오며 혁명과업 완수를 위하여 분투하시는 노고에 감사를 드립니다. 아뢰올 말씀은 다름 아니오라 본교에서는 오는 9월 25일을 가리어 가을 체육회날로 정하고 어린이들이 평소에 닦고 익힌 재주와 씩씩한 기상을 보여드리고자 하오니 공사간 바쁘신 줄 믿사오나 꼭 오셔서 함께 즐기시고 칭찬과 격려의 말씀으로 어린이들의 장래을 축복하여 주시옵기 바랍니다.

    내가 수집해 소장하고 있는 가정통신문의 내용이다. 1962년 9월 강원도 원주에 있던 장양국민학교의 교장이 학부모들에게 보낸 것으로 ‘체육회(운동회)’ 개최 사실을 알리고 많이 참여해 달라는 내용이다. 지금도 학교에서 체육대회 혹은 운동회를 하지만, 이전의 운동회와는 비교할 수가 없을 것이다. 기성 세대의 기억 속 운동회는 단순한 체육행사가 아니라 일종의 지역 축제였다. 학생들의 학부모, 심지어는 지역 유지까지 운동회에 와서 같이 점심도 먹고 운동회에도 직접 참가하여 경기를 하기도 했다.

    이전에는 해마다 가을이 되면 학교마다 운동회를 개최하였다.

    만국기가 휘날리는 파란 하늘. 재잘거리는 아이들, 운동장이 떠나갈듯한 함성. 릴레이 경주, 상으로 받은 노트, 가족들과 같이 먹는 점심 식사, 김밥과 사이다.

    운동회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이다.

    [사진] 옛 학교 운동회날 풍경을 담은 사진들이다. 운동회는 단순히 학생들만의 체육활동이 아니라 학부모들과 그 지역민들이 같이 즐겼던 지역 축제였다. (박건호 수집 사진)

    그런데 이 운동회의 이미지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청군’과 ‘백군’이다.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종일 이런 응원이 운동장을 가득 채웠고, 운동회가 끝난 후에도 이 응원소리는 한참동안 귓가를 맴돌았다. 그런데 그 당시 많고 많은 색 중에서 하필 청색과 백색을 골라 편을 나눈 것일까?

    태극기에서 볼 수 있듯 청색과 대비되는 색은 홍색이고, 백색과 대비되는 색은 검정색이 아닌가? 청백전이 아니라 청홍전이나 흑백전이 더 어울릴 법한데도 우리는 그냥 청백전이었다.

    그렇다면 왜 청백전인가?

    1925년 신문 기사 한토막부터 보자.

    의주공립보통학교 운동

    의주공립보통학교 추계 운동회는 통군정운동장에서 지난 4일 오전 9시부터 시작되었는데, 정각전부터 운동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며 만장의 박수 속에서 경기는 오후 5시 25분에 종료되었는데, 최후의 우승은 백군에게 돌아가게 되었는데, 홍군의 패전은 참으로 가석하게 되었다고.

    -『동아일보』, 1925년 10월 9일 기사

    신문 기사처럼 일제 강점기의 운동회에서는 청백전이 아니라 홍백전이라하여 홍군과 백군의 대립이었다. 이 홍백전은 일본의 역사에서 나온 전통이다.

    대립하는 두 팀을 ‘홍팀’과 ‘백팀’으로 나눈 것은 11세기 말 대립하던 두 가문 미나모토(源)씨와 타이라(平)씨 사이에 벌어진 겐페이 전쟁(源平の合戦, 1180∼1185)에서 각각 흰색과 붉은색 깃발이 사용된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영국·프랑스 사이의 100년 전쟁 직후에 영국 내부에서 랭커스터가와 요크셔가 벌였던 왕위 쟁탈 전쟁인 장미전쟁(1455-1485)에서 각 가문의 문장이 붉은 장미, 흰 장미였던 것과 유사하다. 이런 이유로 일본에서는 지금도 홍백전 형태로 운동회가 벌어지고, NHK의 연말 가요 프로그램의 이름도 ‘홍백가합전(紅白歌合戰)’이다.

    일제 강점기 홍백전은 분명 일본의 전통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이전 한국이 식민지가 되기 전에 열렸던 구한말의 운동회에서는 어땠을까? 그때는 어떻게 편을 나누어 대항전을 펼쳤을까?

    1896년 4월 18일 을미의숙에서 구한말 최초의 운동회가 열린 후 일제강점기가 되기 전까지 대략 15년 사이에 열렸던 운동회를 살펴보면 명확한 기준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구한말 운동회를 다룬 박상석의 『구한말 운동회 풍경』, (한국학술정보, 2016년)을 참고하면, 1906년 5월 20일 열린 계산보흥학교에서 열린 운동회에서는 100여 명의 학생을 동·서 양 편으로 나누었다. 1906년 5월에 열린 인천 제물포 소년학교의 운동회에서는 참가한 소년들의 머리에는 빨강과 흰색의 모직물이 묶여 있었다. 1907년 10월 5일 전주공립보통학교 운동회에서는 4개로 팀을 편성했는데, 여기서는 색깔이 아니라 갑·을·병·정 팀이었다. 1908년 6월 3일 열린 한성내 여학교 연합춘계 운동회에서는 청군과 홍군 양군을 나누어 줄다리기를 했고, 같은해 10월 15일 열린 공성학교 가을 운동회에서의 축구 경기도 청군과 홍군의 대항이었다. 1909년 6월 2일 의주군 내 학교연합운동회에서는 ‘황홍양대(黃紅兩隊)’, 즉 황팀과 홍팀으로 나누었다. 한일병합 직후인 1910년 9월 10일 열린 관립 학성고등학교 추기 운동회에서는 흑색모자와 홍색모자 양대로 나누어 야구 경기를 했다.

    정리하면 1906년 인천 제물포 소년학교의 운동회에서만 홍백전이 나오고 나머지는 제각각이다. 오히려 청홍의 대립이 더 많았다. 우리에게는 홍백이 아니라 ‘청홍’이 대립되는 색이었다. 신랑, 신부는 ‘청실, 홍실’이고, 신혼부부의 베개는 청실, 홍실로 꾸몄다. 태극기도 아래는 청, 위는 홍이다.

    그렇다면 ‘청백전’은 어디서 온 것일까?

    홍백전이 청백전으로 바뀐 것은 해방 이후였다.

    백(白)은 그대로 두고 홍색이 청색으로 바뀐 것이다.

    [사진] 일제 강점기 홍백전으로 진행된 운동회는 해방 이후 청백전으로 바뀌었다. 왼쪽은 1972년 1학년 사회 교과서의 일부 내용으로 청군과 백군이 줄 다리기하는 장면을 그린 삽화, 오른쪽은 1970년대 어느 학교의 운동회 사진으로 왼쪽 칠판에 청군 백군의 점수가 적혀있다.(둘 다 박건호 소장 자료)

    바뀐 이유는 대략 짐작이 갈 것이다. 그것은 바로 정부의 반공노선 때문이었다. 바뀐 시기는 한국전쟁 즈음으로 보인다. 이렇게 붉은 색이 푸른 색으로 바뀐 상황을 현기영은 그의 자전적 소설 『지상의 작은 숟가락 하나』에서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가을 운동회 때의 홍백전이 청백전으로 바뀐 것도 (국민학교) 3학년 때였던 것 같다. 전교생이 양 진영으로 나뉘어 “홍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하고 외치던 응원 함성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고, 내 이마에 둘렀던 붉은 머리띠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런데 그 홍띠가 금기가 되고 말았다. 홍백 두 겹의 머리띠였는데, 어머니가 거기에서 붉은 쪽을 뜯어내고 대신에 잉크물 들인 청색 천으로 갈아주었다. 홍백은 단순한 색상 대비의 의미를 떠나 엄혹한 이분법의 정책색을 뜻하게 되었으니, 홍은 불온한 색깔이었다.

    1941년생이었던 그가 제주도 북국민학교에 입학한 것은 1948년이었다. 그렇다면 국민학교 3학년 때는 1950년이 된다. 현기영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또한 이런 일들이 보편적으로 벌어졌다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2년 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 1950년 경부터 홍백전이 청백전으로 바뀌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에서 4.3사건과 여순사건 등 좌익들의 거센 도전이 있었던 데다가 북한의 전면적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 당시의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아마 이 즈음부터 서서히 홍백전은 청백전으로 바뀌었고, 그 이후에 운동회를 경험한 이들은 그 유래를 모른채 원래부터 청백전인줄 알고 운동회를 즐겨왔던 것이다. 이 운동회의 청백전 속에도 우리 모르게 ‘레드 콤플렉스’, 반공의 그림자가 오랫동안 어른거리고 있었다.

    운동회에서 퇴출되었듯이 이렇게 대한민국에서 ‘붉은 색’은 오랫동안 금기의 색깔이었다. 그런데 세상이 서서히 변하더니 이 붉은 색이 금기의 영역에서 해방되는 사건이 생겼다. 2002년 월드컵이었다. 당시 많은 한국인들이 ‘붉은 악마’를 상징하는 붉은 색 옷과 깃발을 들고 국가대표팀을 응원하는 모습은 붉은 색의 복원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월드컵 당시 붉은 악마의 응원을 보도한 일본 닛케이신문의 다음의 보도 내용은 이 의미를 잘 지적하고 있다.

    “응원의 상징 색깔 ‘빨강’에 대한 세대간의 미묘한 의식 차이도 월드컵 축구대회 열기로 완전히 감춰지고 말았다. 한국에서는 오랜기간 ‘빨강’은 공산주의의 상징이었다.”

    [사진] 2002년 월드컵은 한국 현대사에서 금기의 붉은 색을 해방시킨 사건이었다. (인터넷 사진)

    2002년을 통과하면서 우리는 수십년 만에 붉은 색에 대한 인식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보수 정당이 자신의 상징색으로 붉은 색을 차용하는 모습까지 보고 있다. 격세지감이라고 해야할까? 이율배반이라고 해야할까? 아니면 그냥 뒤죽박죽인가?

    사족1. 2021년 5월 아주 최근에 흥미로운 한글가사를 하나 수집하였다. ‘羅湖總角會歌(나호총각회가)’라는 한글 가사인데 경상북도 군위군 우보면 나호리 총각들이 총각회를 결성한 경위와 취지를 소개한 매우 흥미로운 가사집인데 총 23페이지 국한문혼용체로 필사한 것이다. 책 표지에는 『詭辯(궤변)』으로 되어있다. 해방 직후인 1947년 정해년 1월 5일 기록이다. 이 가사집은 시종일관 장난스럽게 총각의 신세를 한탄하면서도 해방 후 새나라 건국에 나설 것을 다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이 가사집의 후반부에 총각회 창립을 한 후에 있었던 윷노리 부분이 재미있다. 옮겨보자.

    ……선배와 딸네들이 십여명 남았고나. 의논이 분분하매 청백(淸白)으로 갈라 앉아 윷놀이 시작하니 회원은 청군(靑軍)이라 백군(白軍) 진영 살펴보니 사령겸 참모장에 풍정 좋은 영춘씨가 전법을 선언한다…..청백(淸白) 승부 들었어라. 백군진영 볼작시면 들당성이 처음에는 체면차려 져 줬더니 그런 줄을 모르고서 사리마다 아우성에 판마다 춤이로다. 딸네들 거동보소 두 무릅 딱 꿇고서 싸울 듯이 내다르며 자기네 놀 때에는 모야 모야 소리치며 우리 청군 던질 때는 손가락에 침 묻히며 도야 도야 하는구나. 체면을 다 채리고 우리 청군 일어서니 추풍에 낙엽같이 백군 상하 안색없다. 추위타고 노는 윷이 이길 수가 있겠는가. 한숨쉬며 물러가니 더구나 가관이다.

    이 총각회의 윷놀이에서는 청군과 백군을 나누어 청백전을 벌이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일제 강점기의 홍백전이 한국전쟁 발발은 말할 것도 없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도 전에 이미 청백전으로 바뀌어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 홍색이 청색으로 바뀐 것이 반공사상 강화 차원 이전에 왜색(倭色) 즉 일제 잔채 척결 차원에서 이미 민간에서 그렇게 바꿔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지금으로서는 두 가지 이유가 모두 작용한 것으로 보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지혜로운 선후배의 후속 연구를 기대해 본다.

    [사진] 왼쪽은 1947년 1월 경북 군위 나호리의 총각들이 결성을 기념하여 지은 나호총각회가의 표지이고, 오른쪽은 가사 내용 중 청군과 백군을 나누어 윷놀이한 내용을 담은 페이지이다. (박건호 소장)

    방학 학습장의 제목이 바뀐 이유?

    2021년 3월에 수집한 자료 중에 방학 학습장 세 권이 있다. 이전에 『방학 탐구생활』, 『방학생활』, 『방학공부』 등으로 불렸던 방학용 책들인데 수집한 것들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후에 나온 오래된 책들이었다. 그렇게 가난하고 험난한 시절에도 이런 책을 펴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우리들은 한국전쟁 중에도 천막치고 학교를 운영했던 민족 아니었던가. 교육열로 한국인을 따를 민족이 이 세상 어디에 또 있겠는가?

    그런데 내가 이 책들은 수집한 이유는 그 교육열에 대한 찬탄과 감동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책 세 권은 발행 시기에 따라 미묘한 변화를 보여준다. 그 미묘한 변화에 대한 흥미가 이 책들을 주목한 이유였다.

    발간순으로 정리하면 먼저 1948년 6월 나온 3학년용 여름방학 책자가 한권 있고, 1948년 11월에 나온 4학년용 겨울방학 책자가 하나 있다. 그리고 1949년 12월에 나온 5학년용 겨울방학 책자가 한권. 모두 세 권이다. 이 책들은 모두 경북 의성군 옥전공립국민학교에 다녔던 신중기 학생이 실제 사용했던 것들이다. 앞면이나 뒷면에 신중기군의 이름이 적혀있고, 안에는 공부한 내용도 확인할 수 있다. 크기는 대략 가로 15cm, 세로 20cm 정도로 오늘날 태블릿 PC 보다 조금 작은 정도이다.

    그럼 지금부터 책 3권에 나타나 있는 흥미로운 변화를 살펴보자.

    먼저 1948년 6월에 발행된 책부터!

    이 책의 표지에는 냇가에 발을 담근 두 남녀 학생이 그려져 있다. 밀짚모자를 쓴 왼쪽 남자 아이는 낚시를 하고 있고, 여자 아이는 바구니 속에 잡혀 있는 물고기를 보고 있다. 한가로운 여름철 풍경으로 여기에는 남북의 분단이나 좌우의 이념대립같은 혼란스러운 시대상은 비껴나 있다. 당시에는 5.10 단독 선거가 실시된 직후였고, 제주도는 4.3사건이 진행 중에 있었다. 책의 제목은 연두색을 배경으로 크게 『여름동무』로 적혀있다. 이 책을 펴낸 곳은 ‘조선교육연합회’이다. 오늘날의 한국교원총연합회(교총)의 뿌리이다.

    [사진] 왼쪽은 1948년 6월에 발행된 『여름동무』의 표지, 오른쪽은 책의 제일 마지막 페이지 판권 표시부분이다. 붉은 테두리 부분에서 조선교육연합회에서 펴냈음을 볼 수 있다. (박건호 소장)

    그런데 5개월 뒤에 나온 책을 보자. 두 번째 책의 제목은 겨울방학에 맞추어 제목이 『겨울동무』로 되어 있다. 표지 그림은 모형 비행기를 만드는 두 남녀 학생이 있고, 바깥에는 아이들이 모형 비행기를 날리는 모습이 담겼다.

    그런데 이 책의 표지 하단에는 편찬한 주체로 ‘대한교육연합회’가 인쇄되어 있다. 5개월 전에 나온 책을 펴낸 곳과 동일한 기관인데 이름이 ‘조선교육연합회’가 ‘대한교육연합회’로 바뀐 것이다. 이 변화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수립과 1948년 9월 9일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으로 한반도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된 상황과 관련되어 있다. 남과 북에 들어선 두 정부는 수립 직후부터 서로 정통성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먼저 대한민국은 두 자로 줄여서 ‘한국’이라고 스스로를 칭하면서, 북을 지칭할 때 ‘북한’이라고 불렀다. 38선 이북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줄여서 자신들을 ‘조선’ 혹은 ‘공화국’으로 부르면서 남한을 부를 때 ‘남조선’이라고 불렀다. 즉 남의 입장에서는 한반도에 ‘남한과 북한’이 있는 것이고, 북의 입장에서는 ‘남조선, 북조선’이 있을 뿐이었다.

    ‘북한’, ‘남조선’이란 표현은 그나마 양반이었다. 보통은 ‘북한 괴뢰도당 줄여서 북괴’, ‘남조선 괴뢰도당’이라고 ‘괴뢰’라는 말을 꼭 붙여 불렀다. ‘괴뢰(傀儡)’라는 어려운 이 용어는 ‘형식상으로는 독립적이나 실질적으로는 다른 단체에 종속되어 그의 말을 따르는 단체나 정권’을 이르는 말이다. 상대 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미국이나 소련의 꼭두각시 정부라는 뜻으로 쓴 말인 것이다. 두 측은 서로 격하게 대립하고 서로를 부정하면서도 상대를 ‘괴뢰’라고 부르는데는 사이좋게 의견 일치를 보았다. 누가 먼저 저 말을 썼는지도 궁금하다.

    어쨌든 이렇게 남북 양 지역에서 각각 ‘조선’과 ‘한국’은 금기어가 되어갔다. 남한에서는 ‘조선옷’이 ‘한복’으로, ‘조선음식(朝鮮飮食)’이 ‘한식’으로, ‘조선집’이 ‘한옥’으로, ‘조선반도’가 ‘한반도’로 바뀌어갔고, 조선은 이제 자신의 자리를 잃고 퇴출되어갔다. (이 와중에 한국에서 1등 신문이라고 자랑하는 보수지 ‘조선일보’의 이름이 바뀌지 않은 것은 신기한 일이다.)

    마지막 세 번째 책을 보자. 이 책은 1949년에 나온 책으로 두 번째 책과 마찬가지로 ‘대한교육연합회’가 펴냈다. 표지에는 스케이트 타는 학생들이 앞면과 뒷면에 그려져 있다. 그런데 이 책에도 중요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바로 책 제목이다. 1년 전에는 제목이 『겨울동무』였는데, 이제는 『겨울공부』로 바뀌어 있다. ‘동무’라는 말이 사라졌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수집하지 못한 1949년 여름방학까지는 『여름공부』가 간행되었고, 1949년 겨울방학 때부터 『겨울공부』로 바뀌었다. 즉 내가 수집한 책 중 세 번째 책이 동무를 버리고 펴낸 첫 책인 셈이다.

    [사진] 왼쪽은 1948년 11월에 발행된 『겨울동무』의 표지, 오른쪽은 이듬해인 1949년 11월 발행된 『겨울공부』의 표지이다. ‘동무’가 ‘공부’로 바뀌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박건호 소장)

    이런 변화도 분단 과정에서 우리 말에 나타난 거대한 ‘창씨개명’이 반영된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이 좋아한다고, 북한에 좋아한다고 해서 허다하게 많은 말들이 창씨개명의 대상이 되었다. 이승만 정부의 반공 정책은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공산주의를 연상케하는 색깔인 붉은 색 뿐 아니라 말까지도 추방해 버린 것이다.

    ‘인민(人民)’이라는 말은 대표적 금기어가 되었다. 이 단어는 사회주의자들이 많이 사용했던 말이기도 하거니와, 북쪽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란 정부 이름 속에 ‘인민’이란 말을 확실히 새겨 넣음으로써 더더욱 쓸 수 없는 단어가 돼버렸다.이제 ‘인민’은 국민으로 바뀌었다. 이후 남쪽에서는 인민이라는 말만 써도 사상을 의심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노동자란 말도 근로자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사회주의는 노동자 농민 중심의 평등사회를 지향한다. 노동자 농민등 무산 계급을 강조하는 이유이다. 그래서 지배 정당 이름도 ‘조선노동당’이다. 남쪽에서는 노동자라는 말을 위험시하면서 한동안 퇴출되었고, 5월 1일 메이데이 즉 노동절은 오랫동안 근로자의 날로 불렸다. 지금도 보수주의자들은 ‘노동자’ 대신 ‘근로자’란 용어를 의도적으로 쓰고 있다. ‘노동재해’란 말도 ‘산업재해’란 말로 사용되어 온 것이 대한민국이었다.

    또 하나 사라진 표현이 ‘동무’이다. 공식 영역에서 ‘동무’는 ‘친구’로 바뀌었다. ‘동무’는 ‘마음이 서로 통하여 가깝게 사귀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었다. 원래 이 말은 남북을 막론하고 친근한 사이를 지칭할 때 쓰던 어휘였다. 그런데 북한에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면서 ‘동지’를 뜻하는 ‘Comrade’를 ‘동무’로 번역 사용하면서, ‘동무’라는 단어는 한국전쟁을 겪은 남한 사람들에게 금기어가 되었고 ‘친구’라는 말로 대체되었다.  “동무 따라 강남 간다”라는 속담도 “친구 따라 강남 간다”로 바뀌었다.

    원래 동무가 금기어가 되기 전에는 어린아이들끼리 동무 대신 친구라는 단어를 쓰는 것은 지나치게 거창하다는 이유로 적절치 않다는 인식이 보편적이었다. 친구(親舊)는 한자 뜻 그대로 가깝게 오랜 사귄 사람이라는 뜻이다. 즉 공부나 사업 등의 일로 커서 사귄 동반자 개념이고, 이에 비해 동무는 커가면서 생긴 일종의 놀이 동반자의 개념이므로 아이들에게 어울리는 말은 친구가 아니라 동무였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친구(親舊)’는 어른들이나 쓰는 말이고, 애들은 ‘동무’를 써야 정서상 부합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맥락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북한이 동무를 “노동계급의 혁명 위업을 이룩하기 위하여 혁명대오에서 함께 싸우는 사람을 친근하게 이르는 말”로 정의해 사용한다면 우리는 그 단어를 쓰면 안되는 것이었다. ‘동무’라는 말에 이데올로기가 결합되는 순간 본래 가지고 있던 고유한 의미는 상실되었다. 남북이 분단되면서, 벗에 해당하는 말도 친구와 동무로 분단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렇게 동무가 친구로 대체될 때, ‘어깨동무’, ‘길동무’같은 합성어나 일부 동요에는 사라지지 않고 그 흔적을 남긴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이후 남한에서 ‘동무’라는 말이 가진 사회적 의미를 잘 보여주는 몇가지 사례를 보자.

    1964년 서울 송파구의 전도사 정모씨는 ‘모여라 동무야 여름성경학교로’라는 현수막을 교회 앞에 걸었다가 끌려가 온종일 맞고 계속 감시를 받은 일이 있었다. 그리고 1970년대에 제주도 한 고교의 교사가 술에 취해 동무라는 말을 내뱉었다가 전기고문으로 정신병자가 된 사례도 있었다. 북한 말을 쓰면 북한 체제를 추종하는 세력, 우리 체제를 부정하는 사람으로 간주되어 탄압을 받기 일쑤였다. 언젠가는 원양어업보다 북한에서 쓰는 먼바다고기잡이가 낫다고 가르친 교사가 국가보안법 혐의로 감옥에까지 가는 일도 있었다고 하니 참으로 말(言)이 사람을 잡는 시대였다.

    다시 방학 교재로 돌아가 보자. 이제는 그 변화가 잘 보이실 것이다.

    1948년 방학 학습장 『겨울동무』가 이듬해 『겨울공부』로 슬그머니 바뀌게 된 데에는 이런 역사가 있었다. 조그만 책들 속에 몇 글자 바뀐 것에도 반공의 역사가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거대한 시대의 변화도 결국은 구체적 일상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신중기를 포함한 당시 꼬마 아이들은 이런 책 제목이 바뀐 이유와 의미를 알고 있었을까?

    사족2. 대한민국에서 퇴출되었던 ‘동무’가 잠시 복권된 적이 있긴 했다. 한국전쟁 때로 잠시 가보자. 한국전쟁은 무력의 전쟁이었지만, 말의 전쟁이기도 하였다. ‘인민’과 ‘국민’이 맞섰고, ‘동무’와 ‘친구’가 서로 총질했다.

    용어 하나 때문에도 죽고 사는 시대가 되었다. 6.25전쟁기간에는 쓰는 용어 하나에도 사람들의 생명이 오갔다. 어떤 말을 쓰는 가에 따라 ‘빨갱이’가 되기도 ‘반동분자’가 되기도 하였다.말이 곧 생명이었다. 누가 이 땅을 점령하는가에 따라 용어들도 그에 따라 ‘창씨개명’을 해야 했다. 당시 이와 관련된 상황을 그 시대를 기록한 일기나 소설 속에서 살펴보자. 직접 관찰한 자들의 목소리가 더 생생하지 않겠는가?

    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서울에서 90일간 인민공화국 치하에서 살았던 역사학자 김성칠의 일기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김성칠은 전쟁이 일어난 지 한 달 후 이런 일기를 남기고 있다.

    “집에 오니 아내가 몹시 억울해하는 표정으로 “세상에 이럴 법이 다 있소”하고 한탄한다. 왜 그런가고 까닭을 물으니, 오늘 낮에 정숙이가 반장 집 가게에 가서 다마네기를 달랬더니 “다마네기가 다 무어냐. 그런 말 쓰려거든 일본으로 가거라. 반동분자네 집 아이가 다르다”하여 이것이 또 듣고만 있지를 못하고 “반동분자가 뭐 택혼가. 우리 집이 왜 반동분자여”하고 말대꾸를 하여 한동안 부산했다는 것이다.”

    – [역사앞에서], 1950년 7월 25일자 일기 중

    ‘다마네기’하나가 사람 잡을 뻔 했다. 모두 예민해져 있었고, 만인이 만인과 투쟁하는 시대였다. 따뜻한 마음과 관용은 발을 붙일 수 없었다. 개인적 원한이 정의의 이름으로 포장되어 거칠게 표출되었다. 며칠 뒤인 8월 1일자 일기에서는 자신의 동료 유열이 ‘류렬’로 이름이 창씨개명하게 되었다면서 이렇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우랄 알타이 어계족에 있어선 첫 음절에 있어서의 ‘ㄹ’ 발음이 나지 않는 것인데, 이북에선 로동자, 리승만이라 쓰고 있다. 문법책에는, 쓰기는 그렇게 쓰더라도 읽기는 노동자, 이승만으로 읽으라 하였으나 평안도 사투리는 곧잘 로동자, 리승만으로 발음하고, 또 심지어 우리가 노동자, 이승만이라 하면 반동이라고 욕한다. 언제까지나 괴뢰의 구습을 버리지 못한다고.

    ‘반동’이란 레테르 하나 때문에 적어도 남의 앞에선 ‘리승만’이라 하여야겠고 그게 싫으면 어두(語頭)에 ‘ㄹ’음이 붙은 말은 안 쓰도록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 [역사앞에서] 1950년 8월 1일자 일기 중

    이러한 상황 속에서 북한식 표현은 점차 대중들의 용어로 자리 잡아 갔다. 대표적인 표현이 ‘인민’과 ‘동무’라는 표현이다. 김원일 소설 [불의제전]의 한 대목이다. 여기에서는 ‘동무’와 ‘인민’이 어떻게 6.25 전쟁기 남한 사회에 쓰이게 되는 지를 잘 보여준다.

    “바깥세상에서는 ‘동무’란 새로운 말이 거침없이 나돌았다. 해방 직후까지도 널리 쓰던 말이었으나 어느 때부터인가 동무란 말을 쓰면 빨갱이로 몰려 치도곤을 당했는데, 이제 그 말이 응달에서 양달로 나와 그 동안의 한풀이라도 하듯 말끝마다 입에 올려졌다. 어린이 동무, 청년 동무, 노인 동무, 김동무, 리동무, 이렇게 사람을 부를 때마다 무조건 동무란 말을 붙였다. “계급 없는 사회의 한 형제자매이므로 우리는 모두 동무 사이요.” 이런 정의가 내려지고부터 시민들도 남 듣는 자리에서는 어눌하게나마 그 말을 따라 썼다. ‘인민’이란 말도 그랬다. 호칭으로는 동무란 말을 썼으나 삼인칭으로 쓸 때는 시민·사람·인간·군중·대중이란 말 대신 두루뭉술 인민으로 불렀다.”

    -김원일, [불의제전] 중, 문학과 지성사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세상이 바뀌면 또 말의 운명도 바뀌는 법. 대중들은 또 새로운 용어에 적응해야했다. 국군이 인민군을 몰아내고 다시 옛 땅을 수복하면, 대중들은 적의 용어들을 버리고, 기존의 용어들을 다시 사용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또 사상을 의심받게 될 터였다. 결국 우리가 쓰는 말도 이념적이고 정치적이다. 말은 사람들의 사상과 철학을 담는 그릇이다. 어떤 용어를 사용할지 보다 생각을 많이하고, 고민을 담아야 하겠다.

    5.18이 ‘폭동’이면서 ‘민주화운동’일 수는 없지 않은가?

    5.16이 ‘혁명’이면서 ‘쿠데타’일 수는 없지 않은가?

    필자소개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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