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페미니즘 백래시 확산
도나 저커버그는 고전 연구의 새로운 방향성을 열정적으로 제시해온 젊은 고전학자다. 소셜미디어 기업 페이스북 CEO 마크 저커버그의 동생으로 소셜미디어를 깊이 이해하고 있는 그는 “소셜미디어가 여성혐오를 새로운 단계의 폭력으로 끌어올렸다”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진보적인 관점에서 고전을 연구하는 온라인 저널 〈에이돌론〉의 편집장으로 지내던 2016년, 해당 저널에 ‘부유한 백인 남성만이 고전을 향유하는 세계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라는 취지의 글을 발표한 후 ‘고전을 연구하는 여성’에 대한 극우 남성들의 조롱 섞인 협박을 무수히 받기도 했다. 이러한 학문적 배경과 개인적 경험은 그를 ‘소셜미디어 시대의 고전과 여성혐오’ 연구로 이끌었다.
저자는 온라인에서 일어나는 여성혐오 논란에 정면으로 맞서기 위해 남성 우월주의 온라인 커뮤니티 레드필의 담론을 분석한다. 레드필은 2012년에 개설돼 현재 23만여 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레딧의 하위집단으로 시작되어 현재는 더 크고 느슨한 커뮤니티로 존재한다. 레드필의 독특한 점은 고대 그리스·로마의 문헌을 퍼나르고 인용하고 재해석함으로써 가부장제와 백인 우월주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고 여성혐오를 정당화한다는 데 있다.
레드필이 굳이 고전을 인용하는 이유와 그것이 문제인 까닭은 무엇일까? 일부 고전학자들은 레드필이 고대 문헌을 오독하고 왜곡하는 점을 주로 비판한다. 하지만 도나 저커버그는 레드필의 고전 인용에 오류가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이유로 고전에 내포된 여성혐오적 인식을 간과해선 안 된다고 지적한다. “고전에 대한 이들의 해석은 자신이 살고자 하는 세계에 대한 열망을 담은 재현에 가깝다.”(82쪽) 저자는 고대사회와 고전이 지닌 백인 남성 우월주의적이고 여성혐오적인 관점을 드러내, 레드필이 이상화하는 사회상의 본질적 문제를 밝히는 작업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서양 고전은 그 자체로 지고의 가치를 지니는가
레드필이 고전에서 길어내는 여성혐오적 관념들
이 책은 온라인의 여성혐오 게시물과 그 댓글들을 ‘날것 그대로’ 가져와 분석하는 신선하고 도발적인 연구다. 이 책에서 주요하게 다루는 집단인 레드필에는 남성에게 불평등한 법과 사회적 규범을 철폐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남권운동가, ‘작업’으로 여성을 꾀어내 성관계를 갖고 동성사회에서 우위를 차지하려는 픽업 아티스트, 도널드 트럼프의 지지를 받으며 세를 불린 극우주의자 등이 모여 있다. 도나 저커버그에 따르면, 레드필 남성들은 고전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여성혐오를 정당화한다.
▶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하다?
“남성이 여성보다 감정 절제를 더 잘한다(무소니우스)”, “여성은 자기 통제를 할 수 있는 능력이 낮다(세네카)”, “여자 같은 남자보다 더 나쁘고 수치스러운 것은 없다(키케로)”, “여자라는 파괴적인 종족은 인간 남성에게 고통을 안긴다(헤시오도스)”와 같은 문장에서 볼 수 있듯, 대다수 고대 철학자는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고 여겼다. 레드필 남성들은 이러한 문장들을 인용함으로써 고대와 현대를 같은 선상에 놓고, 모든 역사 속에서 여성은 부정적 특징을 공유해왔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구조적 불평등에 정당하게 분노하는 소수자들을 ‘비이성적’이며 ‘열등한’ 존재로 놓고, 분노하지 않는 ‘이성적’인 백인 남성을 특권적 위치로 끌어올리는 수사법을 즐겨 사용한다. 또한 고대 그리스인들은 오로지 집안일에서만 여성의 쓸모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레드필 남성들은 이러한 인식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가부장제 아래의 불평등한 성 역할이 옳다는 주장을 재생산한다.
▶ 여성으로 인해 남성들이 피해를 본다?
레드필의 주류는 소위 ‘루저남’으로 알려져 있다. 이 남성들은 미국 사회에서 자신들이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남성혐오’라는 표현을 쓴다. 현대사회가 ‘여성중심’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근거로 ‘거짓 강간 고발’을 들며, 피해자의 진술을 거짓말이라고 매도하는 작업에 집착하기도 한다. 나아가 트럼프의 지지로 급부상한 온라인 보수 세력 ‘알트라이트’는 “성적 좌절은 정치적 좌절”이라며 젊은 남성들의 좌절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미국 사회에서 남성성을 회복시킬 필요가 있다는 주장을 펼친다. 온라인의 안티페미니즘을 극우 정치와 연결시킨 바 있다. 레드필 남성들은 이러한 ‘여성중심’ 사회에서 남성들이 역차별을 받고 있으므로 남성이 가장 강력한 통제력을 지녔던 고대 세계의 질서를 다시 복원해 여성의 결정권을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여성의 ‘노’는 결국 ‘예스’다?
레드필 커뮤니티 내의 픽업 아티스트들은 기원전 1세기 시인 오비디우스의 《사랑의 기술》을 자주 인용한다. 픽업 아티스트는 여성에게 ‘작업’하는 기술을 알려주는 남성으로, 주로 여성과 관계한 적 없는 남성들에게 그 기술을 전수한다. 오비디우스는 《사랑의 기술》에서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성폭력 범죄로 간주될 행동을 ‘사랑의 기술’로써 제시하는데, 이들은 이런 오비디우스를 “원조 픽업 아티스트”라며 추켜세운다. 《사랑의 기술》에는 “그녀는 먼저 요구하기를 두려워하고, 자신이 요청하지 않는 것을 원한다”, “그녀는 주지 않는다. 그녀가 주지 않더라도 가져라”라며, 강간을 암시하는 듯한 내용과 “수치스러운 많은 일들이 잠을 잘 때 일어난다” 등 강간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를 옹호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변신 이야기》와 함께 《사랑의 기술》이 한편에서 ‘강간 핸드북’으로 불리는 이유다.
온라인 트롤링으로 가속화된 안티페미니즘 백래시
민주주의의 진보를 위협하는 여성혐오에 대한 경고
혐오 표현은 소셜미디어 시대에 더 빠르게 퍼지고 더욱 다양해지고 있다. 한국에서는 2010년 온라인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에서 갈라져 나온 ‘일베’를 중심으로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폭력적인 언어와 범죄가 하위문화라는 허울을 쓰고 온라인에 떠돌았다. 이어 ‘소라넷’, ‘텔레그램 n번방’ 등 여성 강간이 유희 거리로 소비되어온 실상이 보도되면서, 여성혐오가 단순히 소수의 기행이나 범죄가 아니라 남성들의 문화로 자리해왔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다행히 2015년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 이후 더욱 치열해진 페미니즘 운동과 자성적인 실천이 맞물려 이러한 행동은 처벌받고 지탄받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명백히 문제적인 온라인 커뮤니티 외에도 ‘엠엘비파크’, ‘보배드림’ 등 남초 커뮤니티에는 ‘남성이 고비용을 부담하는 데이트 문화’, ‘남성이 집 마련을 도맡는 결혼 문화’ 등 가부장제의 부정적 잔재에 대한 책임을 여성에게 돌리는 왜곡된 ‘피해자 서사’가 여전히 넘쳐난다.
최근 한국에서 일어난 여성혐오 사건들은, 도나 저커버그의 말처럼 “새로운 단계의 폭력”으로 보인다. 안티페미니스트들은 특정한 손동작을 ‘메갈리아’의 상징으로 의도적으로 오독해 이 이미지와 관련된 기업을 처벌하라는 국민 청원을 내는가 하면, 과거에 비혼주의를 선언한 한 여성 방송인을 광고 모델로 등장시킨 한 기업을 뒤늦게 찾아내 보이콧하는 등 소비자 권리를 내세워 여성혐오를 정당화한다. ‘남성 인권’을 표방하며 여성혐오 콘텐츠를 제작하는 한 유튜브 채널이 18만 명 구독자를 보유한다는 사실은 여성혐오가 걷잡을 수 없이 퍼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책의 배경이 되는 미국의 상황은 한국 독자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2016년 반이민주의, 백인우월주의, 안티페미니즘 등 극우 이데올로기를 내세운 트럼프 정부가 들어서면서 같은 관념을 공유하는 커뮤니티가 자신들을 적극 드러내 보였다.
이러한 ‘백래시’가 한국 정치 일각에서도 유사하게 펼쳐지고 있다. 2021년 4·7일 재·보궐선거 이후 ‘20대 남자’가 여당을 지지하지 않는 것이 페미니즘 정책 탓이라는 논평이 등장하거나, 징병제의 미래를 논하는 상황에서 일부 언론과 남성들이 ‘젠더 갈등’이라는 프레임을 형성하는 것 등이 그 예다. 문화평론가 최태섭은 이러한 현상을 두고 “온라인에서의 트롤링이 오프라인까지 진출해 민주주의와 정치가 흔들린다”라고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이 책은 온라인 트롤링이라는 복잡한 현상에 엄밀한 학자적 태도로 접근하여 남성 우월주의자들이 근거로 삼는 관념들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고전’이라는 과거의 유산을 현대에 어떻게 독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밀도 높은 사례 연구다. 한국의 페미니즘이 겪고 있는 복잡다단한 역동 속에서 어떻게 학문과 정치가 중심을 잃지 않고 진보적인 관점을 견지할 수 있을지, 그 한 방향성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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