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적색과 녹색의 공존은 왜 어렵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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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02월 02일 02:0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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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대 초반으로 기억된다. 낙동강 페놀 오염 사건으로 나라가 온통 시끄러울 때다. 그 때까지만 해도 환경 문제가 그렇게 큰 국민적 관심사가 된 적도 없었던 것 같다. 그 때 이런 생각을 했었다. 이게 중요한 문제가 맞긴 맞는 것 같은데 당장 시급한 노동 문제와 정치적 투쟁이 산적해 있는데 지금 이것까지 그렇게 신경을 써야 하느냐고 말이다.

    마침 당시 한겨레 신문 만평란에는 페놀 사태 이야기를 듣고도 수돗물을 그냥 마시면서 ‘뭐, 당장 죽기야 하려고’라고 중얼거리는 어느 빈민 부부의 초췌한 얼굴 그림이 오르기도 했다. 어쩌면 우리 형편에 그런 문제까지 일일이 신경 쓰는 게 호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조차 든 게 사실이다.

    ‘보다 적색으로, 보다 녹색으로’에 대한 비판적 성찰

    그러나 지금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비단 진보적 사고를 가진 사람만 그런 게 아니다. 속내야 어떻든 보수적인 단체나 인사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환경문제 개선에 대해 적극적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개발론자들이라도 대놓고 이를 무시하지는 못한다.

    더욱이 십수 년 전 환경 문제에 대해 관심이 막 고조되던 때보다 이제 한걸음 더 나아갔다. 환경운동이 인간을 중심으로 한 자연에 대한 접근 방식이라면 보다 근원적으로 인간과 자연과의 상호적인 조화를 꾀하고자 하는 생태주의 운동으로까지 발전 변화하고 있다.

       
      ▲지난 해 10월에 있었던 초록당 창당씨앗대회 모습.
     

    이제 거의 모든 정치적 단체의 강령에는 의례히 환경친화성을 강조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물론 민주노동당도 마찬가지다. 이런 가운데 이번 민주노동당 내분 속에서 진보의 개혁을 주장하면서 신당 창당을 들고 나온 사람들이 바로 환경, 생태 문제를 진보의 핵심 구호로 전면에 내세우기 시작했다. 이름하여 ‘보다 적색으로, 보다 녹색으로.’

    이 구호는 한 당 안에서 적록 두 가지 가치의 동시적인 발전이 가능하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의 발전이 다른 하나에게 그 발전의 깊이를 더해 주고 보다 풍부화할 것이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임에 틀림없다.

    적색운동과 녹색운동이 당 속에서 서로 어떻게 연관되어 발전될 수 있다는 것인지 이 슬로건을 내건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지 못했고 또한 이에 대한 상세한 해설이 발표되지 않아 아직 제대로 알 길이 없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해 비판적 성찰을 하는 게 매우 조심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좋은 것 다 모아놓는다고 바람직한 건 아냐

    아무튼 좋은 것이라고 해서 그냥 다 모아 놓는 게 항상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아름다운 한복이 있는데 어디 활동적으로 움직여야 될 상황에 처해서 마침 멋진 양복을 발견하고는 그냥 위에는 한복 밑에는 활동하기 편한 양복을 입었다고 생각해보자. 참 우스꽝스런 모습이 될 것이다.

    어울리지 않는 양복과 한복을 한 몸에 함께 입으면 필시 양복의 멋도 한복의 아름다움도 모두 잃어버릴 것이다. 활동적인 곳에서 한복을 입고자 하면 활동성을 고려해서 디자인한 개량 한복을 입는 것이 훨씬 바람직할 것임에 틀림없다.

    진보적 사상의 역사에서 보자면 사회의 진보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지배력을 보다 강화해 나가는 것을 그 방향으로 하고 있다. 생산력으로 표현되는 기술, 기계의 발전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자연 지배력을 가리킨다. 즉 사회는 생산력이 보다 향상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고 또한 이것이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관점이다.

    이를 바탕으로 사회적 관계의 변화를 통한 인간 해방을 추구하는 것이 진보적 사상의 핵심이다. 이는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지배력 강화를 통해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고 그 욕구와 충족의 질을 보다 향상시키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함축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즉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에서 인간이 그 중심이고 자연은 대상이다.

    녹색운동에서 한번 보자. 물론 여기에도 다양한 주장과 관점들이 있다. 그러나 녹색운동에 보다 충실하고(사람에 따라 견해가 다를 수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접근하고자 하는 생태주의적 입장에서는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지배보다는 오히려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관계를 강조한다.

    여기에서 자연은 단지 인간을 위해 봉사하고 인간의 욕구 충족을 위해 이용되어야 할 그런 객체적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자연의 일부다. 인간의 욕구 또한 무한히 충족되고 발전되어 나가야 할 것이 아니라 자연의 생태체계 속에서 적절히 조정되고 통제되어야 할 그 무엇으로 이야기 된다.

    녹색과 적색의 근본 차이

    언젠가 녹색 정치 운동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민주노동당 내에서 녹색 정치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질의에 대해 사상적 토대가 다르기 때문에 따로 할 수밖에 없다는 답변을 하는 것을 언뜻 들은 적이 있는데 이런 점에서 매우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진보적 사상이 태동하던 시기에는 지금처럼 환경 문제가 심각한 상황으로 나타나지도 않았다. 만약 그 때 이런 문제들이 나타났다면 당연히 이런 생태 환경 문제에 대한 입장과 고려가 포함되어 일정한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또한 지금 이런 환경, 생태 문제와 당면한 진보 진영 역시 이런 문제에 대한 극복 방안을 마련하여 진보적 사상의 내용을 풍부화시켜야 할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이런 문제를 생각해 보자. 일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세계적으로 드문 청정 호수인 바이칼 호가 주변 주민들의 생활하수 및 생계활동 산업 등으로 말미암아 오염이 심각해지자 국제적 환경 단체와 생태주의자들이 이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고 나섰다. 그러자 주민들이 반발했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그럼 어떤 입장을 취해야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을까? 사실 근본적 생태주의의 입장에서는 주민들의 생계 문제는 별개의 문제이다. 그런 문제들을 다 고려하기 시작하면 생태주의의 근본이 훼손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회 운동의 관점에 서면 달라진다. 주민들의 생계 문제에 대한 아무런 해결책이나 대안 없이 생태 환경적인 문제만 제기하면 무책임한 주장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진보운동은 녹색운동의 주장과 요구를 적절히 수용해야 하면서도 또한 다른 지점에 서 있을 수밖에 없다. 녹색운동 역시 진보운동의 틀 속에 들어와 버리면 현실 속에서 일관된 관점을 유지하는 게 어렵게 된다.

    오히려 녹색운동은 독자적 관점과 틀로 일관되게 나아가면서 진보운동을 비롯한 사회가 생산력주의에 빠지는 것을 제어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다.

    녹색은 독자적 관점과 틀이 더 바람직할 수도

    약간 옆길로 나가보자. 처음 황우석 소동이 일어났을 때 많은 우려가 들었다. 다름이 아니라 자주파에서 황우석을 옹호하고 나설 수 있다는 예측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정말 자주파 일각에서 맹목적인 민족주의 입장에서 그런 주장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다행히 민주노동당은 생명과학에 대한 올바른 입장을 세웠고 뿐만 아니라 줄기세포와 관련한 전문적 지식으로 황우석 연구의 비윤리성 뿐만 아니라 반사회성, 그리고 갖가지 의혹들을 적절히 제기했다. 결국 연구 결과 발표 내용 자체가 허위로 밝혀지는 바람에 승부는 싱겁게 끝나버렸지만 말이다.

    아찔했다. 혹이라도 황우석에 대한 비판을 미제국주의의 음모로 몰고 그를 지지했다면 얼마나 큰 망신을 당했을까? 이 과정에서 민주노동당의 주장을 바로 세우고 전파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한재각씨인 것으로 안다. 당시 그의 주장을 보면서 전적으로 공감했다.

    그런데 그런 한재각씨의 북미핵 문제에 대한 입장을 보면서 굉장히 혼란스러워졌다. 한재각씨는 민주노동당은 핵제조와 사용뿐만 아니라 핵 반입과 이를 이용한 핵 발전소 건설에 대해서도 반대하기 때문에 북의 핵제조에 대해서는 분명한 반대와 비난의 입장을 취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런 관점에서 볼 때 ‘핵 자위론’ 등의 주장은 명백한 민주노동당 강령 위반이며 당시 북핵에 대해서 유감 표명에 그친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정치 사회적 문제에 있어서 상황조건과의 관계를 배제하고 그것만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과연 진보운동 아니 모든 사회적 운동에서 타당한 걸까? 우리가 살인에 대해서 반대하고 합법적인 살인인 사형제도도 반대하고 나아가서 안락사에 대해서도 반대한다고 하자.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안중근의 이토오 살해에 대해서 살인 만행으로 규탄해야 할까? 물론 테러적인 방식에 대한 문제 제기나 유감 표시는 할 수 있겠지만 일제의 침략 행위와 같은 수준에서 비난해야 할까? 또 그렇게 되면 일본의 침략을 막아낸 이순신은 집단 학살자로 규탄해야만 되는게 아닐까? 핵 문제는 특별한 것이라서? 전술핵은? 그것보다 살상력이 조금 떨어지는 대량 살상무기는? 그것들을 구분하는 기준은 또 어떻게?

    나를 헷갈리게 만든 한재각 전 연구원

    그런 주장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근본 생태주의나 무저항 비폭력주의의 입장에 서 있을 때이다. 그래야 일관성이 있다. 나는 생태주의와 같은 그런 견해의 가치를 나름대로 충분히 존중하고 싶다.

    그러나 북핵 문제에 대한 민주노동당이 유감 표명에 그친 것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는 사람이나 한재각씨는 그런 비폭력 무저항주의자나 생태 근본주의자는 아닌 것 같다. 그래서 매우 혼란스러운 것이다.

    이제 진보운동은 시대적 요구에 따라 녹색운동의 주장들을 적절히 수용하고 그것을 통해 진보운동을 보다 풍부화시켜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게 이것저것 모두를 합쳐 놓는다고 될 일은 아니다. 녹색운동과 진보운동은 각자의 영역을 유지하며 연대하고 발전해 나가야 한다.

    한복은 시대변화와 필요에 따라서 양복의 편의성을 수용한 개량 한복으로 발전해야 될 일이지 양복과 함께 한복 상의 양복 하의를 입혀서는 안 될 것이다. 더구나 그런 복장이 필요에 따라 어떨 때는 한복의 처지에서 또 어떨 때는 양복의 입장에서 이리 저리 둘러대는 데 이용되어서는 더욱 안 될 것이다.

    ‘보다 적색으로 보다 녹색으로’ 라는 구호가 마치 그렇게 보이는 것은 그 내용을 제대로 모르거나 나의 운동에 대한 이해 수준이 저급하기 때문일까? 또 그 구호가 요즘 인기 있는 품목들을 그냥 모아 놓은 것으로 보이는 것은 신당을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나의 편견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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