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바둑 창시자 세고에,
    바둑황제 조훈현을 만들다
    [현대바둑 사이드스토리③] 세 제자
        2021년 05월 27일 10:1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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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회의 글 “예(藝)의 구도자, 기타니 미노루의 운명”

    태평양전쟁이 끝이 보이던 1945년, 일본기원은 최대 기전인 혼인보전을 강행했다. 동경에 공습이 계속되자 일본기원은 히로시마로 이전해 혼인보 결승전을 진행했다. 7번기 대국의 주인공은 하시모토 우타로와 이와모토 가오루였다.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대회를 총괄하던 인물은 세고에 겐사쿠였다.

    3주에 걸쳐 진행될 예정이던 혼인보 결승전은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대회 중간에 원자폭탄이 떨어지면서 히로시마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폐허로 변모했다. 기타니의 아들과 조카가 죽고 자신의 한쪽 눈은 거의 실명 상태가 되었다. 당대 최고수 중의 한 명이 원폭 후유증으로 실전대국이 사실상 불가능해진 것이다.

    무라세 야키치와 호엔샤

    무라세 야키치의 삶은 한 편의 드라마로 만들어도 성공할 정도로 극적이었다. 목수인 무라세 부친이 주로 일하던 곳은 세습바둑 가문으로 유명한 혼인보였다. 어린 무라세는 부친을 따라 혼인보를 들락거리다 바둑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어깨너머로 배운 바둑의 기량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이미 기득권의 아성이 된 혼인보는 눈에 띄게 출신성분이 가문에 들어오는 기준으로 작동했다. 실력과 평판 모두가 좋았던 14세 혼인보 슈와(1)는 가문의 그런 분위기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늦은 나이에 혼인보에 올랐지만 슈와는 실력을 중심으로 가문을 강화하고 싶었다. 슈와의 결단으로 무라세는 가문에 정식제자로 입문할 수 있었다.

    슈와는 혼인보 개혁을 주도해 나갔지만 나이가 걸림돌이었다. 후계자로 15세 혼인보가 내정되었고 슈사쿠라는 세습명칭까지 확정되었다. 이때, 역사의 심술쟁이가 끼어들었다. 슈사쿠가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갑자기 급사한 것이다. 새로운 후계자 논의가 가문 내부에서 이견을 보이며 흔들리자 슈와는 최고 실력을 가진 무라세를 차기 후계자로 내정하는 결단을 내렸다.

    그런데 슈와가 혼인보 최고결정권자가 아니라는 것이 문제였다. 12세 혼인보 조와(2)의 부인이 생존해 있었다. 그녀의 권위는 후계자 없이 사망한 왕의 후계를 결정할 수 있는 대왕대비 그 이상이었다. 조와 부인은 무라세의 출신을 문제 삼아 다른 인물을 혼인보 후계자로 발표하며 슈와의 결단을 무력화시켜버렸다. 16세 혼인보 슈겐이 탄생했다.

    분노한 무라세는 일부 제자들과 함께 혼인보를 이탈했다. 그리고 태풍처럼 불어오고 있는 메이지유신에 가담했다. 메이지유신이 끝나고 내려진 많은 결정 중에는 바둑에 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세습바둑 가문에 대한 지원 중단과 그들이 가지고 있는 토지에 대해 심사를 거쳐 재분배한다는 내용이었다. 심사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사실상 몰수에 가까운 조치였다. 한순간에 세습 바둑가문들은 고사 위기에 빠졌다.

    바둑역사를 흔든, 세고에의 도전

    메이지유신 직후 무라세는 ‘호엔샤’라는 조직을 결성했다. 모두가 유신을 등에 업은 새로운 가문이 등장한 것인가 의심했지만 정반대였다. 무라세는 일종의 현대 일본바둑협회를 설립을 시도한 것이다. 세습은 끝났으며 모두가 자유롭게 참여해 실력으로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시대를 선언했다. 취지에 동감한 사람들이 호엔샤로 몰려들었다.

    무라세와 호엔샤의 약점은 재정이었다. 무라세는 면장(단증)을 발급하는 것으로 위기를 타개했다. 단증은 단에 따라 발급비용이 달랐다. 높은 단증을 받기 위해서는 더 많은 비용을 지출해야 했다. 무라세의 의도는 아니었지만 돈으로 천국을 사는 것처럼 돈으로 단이 결정됐다. 재정을 타개하는 데 성공했지만 단증 인플레가 일어나면서 호엔샤는 비난에 직면했다.

    비난은 잠시였고 호엔샤는 계속해서 급성장했다. 혼인보 가문은 지는 노을처럼 스산했다. 혼인보는 17세 혼인보 슈에이가 죽자 내부 논의를 거쳐 무라세에게 혼인보에 취임할 것을 제안했다. 무라세는 18세 혼인보 슈호라는 칭호를 받으며 친정으로 금의환향했다. 혼인보 슈호의 시대는 열리지 않았다. 혼인보로 돌아온 무라세는 석 달 만에 알 수 없는 이유로 급사했다. 독살설이 나돌았고 호엔샤에서 진상조사를 위해 사람을 파견했지만 무라세는 이미 화장된 이후였다.

    세고에 겐타쿠가 호엔샤에 입문한 것은 무라세가 죽은 지 20년 후였다. 세고에가 호엔샤에 입문한 것은 무라세가 주창했던 실력 중심의 기풍에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세고에의 기대는 처참하게 무너졌다. 호엔샤는 또 다른 기득권 세력으로 변모해 있었고 세고에의 저항은 거대한 벽에 부딪혀 좌절되었다. 게다가 혼인보는 여전히 세습을 진행하며 기득권을 되찾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세고에는 혼인보와 호엔샤에 대항하는 새로운 동맹체를 결성했다. 현대 일본바둑의 앙팡테리블이 등장한 것이었다. 차세대 주자로 불리던 카리가네 준이치와 스즈키 타메지로 등 젊은 기사들과 함께 ‘히세이카이(裨聖會)’라는 이름의 동맹체를 결성했다. 이들은 파격과 혁신적인 주장을 전면에 내걸었다.

    세습바둑은 며칠에 걸쳐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심지어 혼인보가 전권을 장악하고 있을 때는 대국이 몇 달에 걸쳐 진행되기 일쑤였다. 세고에 동맹은 ‘제한시간’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각자 제한시간을 모두 사용하면 정해진 초읽기를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각자 제한시간 3시간, 30초 초읽기 3회라는 현대바둑의 초석이 등장한 것이다. 모든 대국은 하루에 끝나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신념이었다.

    제한시간의 도입이 혁신이라면 혁명은 따로 있었다. 현대 바둑기사들은 호선(3)으로 두는 것은 당연한 일로 여기지만 세습바둑은 그렇지 않았다. 초단과 8단(4)이 호선으로 두는 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초단과 4단은 정선(5)으로 두고 7단과는 두 점 접바둑을 두는 식이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초단과 8단이 대국을 하는 일은 아예 일어나지도 않았다.

    1924년에 설립된 일본기원은 제한시간과 초읽기 개념을 도입했다. 물론 제한시간이 8시간이었기 때문에 대국은 이틀에 걸쳐 진행될 수밖에 없었고 초읽기 도입은 빛이 바랬다. 다소 급조된 일본기원은 아마바둑 고수인 기업가 오쿠라 기시지로의 후원이 있었지만 여전히 재정적으로 취약한 상황이었다. 제대로 된 기전을 만들려면 기업과 신문사의 후원이 동시에 있어야 하지만 양쪽 모두 팔짱을 끼고 관전하며 지켜만 보고 있었다. 한두 푼도 아니고 거액을 투자 하려면 ‘성공’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했다.

    다른 문제도 있었다. 재정과 신문사의 후원이 확정되더라도 기전에 대한 명망이 있어야 했다. 최고위전이라는 이름을 붙인다고 하더라도 명망이 따라오는 것도 아니고 팬들이 호응하는 것도 아니다. 마지막 혼인보 슈에이가 세습 중단을 선언하고 ‘혼인보’라는 기전을 만들어 줄 것을 일본기원에 요청했다. 소식을 들은 다음 날 아침 일본기원을 찾아간 것은 마이니치 신문사였다. 세고에가 현대바둑의 초석을 완성시키는 순간이었다.

    기타니 도장과 앙대 산맥 이룬 현대바둑 창시자 세고에 겐사쿠

    기타니 도장의 라이벌, 그러나 단 세 명의 제자

    히로시마 원폭으로 반강제적인 은퇴를 하게 된 세고에는 조용하게 도장을 차렸다. 오십대 중반의 나이는 자연스런 은퇴로 이어졌다.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제자나 자식들을 도장에 문하생으로 받아줄 것을 요청했지만 세고에는 모두 고개를 저었다.

    세고에 제자는 단 세 명에 불과했다. 그나마 두 사람은 스스로 제자임을 자처했지 제자라고 보기도 어려웠다. 첫 번째 제자는 하시모토 우타로다. 2기 혼인보 타이틀 보유자이자 3기 히로시마 혼인보 결승전의 당사자다. 당시 하시모토의 나이는 37살, 마지막 불꽃을 태우던 때였다. 삼십대 후반의 혼인보 보유자가 세고에 제자로 들어가는 일은 상식적인 것은 아니었다. 세고에 철학에 공감했던 젊은 하시모토는 세고에 집에 머물며 그의 철학을 계승하려고 노력했다.

    세고에 두 번째 제자는 기타니와 신포석으로 유명한 오청원이다. 중국을 유람하며 기존의 최고수들을 연파하던 오청원이 일본으로 건너온 것은 1924년이었다. 상하이항에서 연락선 3등칸 구석에 몸을 싣고 시모노세키 항에 도착한 것은 나이 15살 때였다. 기존 질서를 거부하던 오청원이 찾아간 사람은 세고에였다. 먼 이국에서 온 중국 소년에게 세고에는 말없이 방 한 칸을 내주었다. 말하자면 두 사람은 세고에의 식객이었다.

    세고에 집에 둥지를 튼 오청원은 명예와 상금에 연연하지 않고 일본기원을 당혹하게 하는 도전을 계속했다. 세고에의 철학은 하시모토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다. 기전이 시작되면 새로운 실험을 계속했고 충격적인 변화를 주도했다. 나이 서른이 넘으면 한계라고 모두가 말하는 순간 하시모토는 주요 기전의 본선에 오르면서 하나씩 타이틀을 차지했다. 오청원은 거리에서 칼춤을 추고 하시모토는 반상 위에서 칼춤을 추었다. 세고에는 묵묵히 지켜만 보았다.

    조훈현과 세고에의 운명적인 만남

    1962년 9살의 소년이 한국기원 프로에 입단했다. 조훈현이었다. 1년에 단 두 명만 입단이 허용되는 시절, 전국의 아마 최고수들을 9살 소년이 모두 제압하고 프로가 된 것이다. 천재소년의 입단은 기정사실이 되는 분위기였지만 빨라도 너무 빨랐다. 전대미문의 사건에 관철동 한국기원에는 정적이 흘렀다. 소식이 일본까지 전해지자 호기심이 생긴 일본기원은 막 입단한 일본 이시다 요시오 초단과 대국을 추진했다. 최초의 국제전화 대국은 조훈현의 완패로 끝났다.

    당대의 승부사 조훈현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생각 이상의 충격을 받았던 것일까? 조훈현은 최강이라고 불리는 일본으로 유학을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조남철은 몇 가지 내용을 담아 일본기원에 의사를 타진했다. 일본기원은 “유학은 얼마든지 지원할 수 있으나 한국 프로자격은 인정할 수 없다”라는 회신 보냈다. 한국기원의 초단은 일본에서는 아마추어 수준이라는 답변이나 마찬가지였다.

    한국기원의 실질적인 관리자이자 최고수인 조남철이 일본기원의 회신을 수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설령 실력 차이를 인정하더라도 한국기원의 프로는 일본기원에서도 프로로 대접받아야 한다는 것이 조남철의 입장이었다. 금방 지나갈 것 같은 조훈현의 고집은 끝나지 않았다. 고민을 거듭한 조남철은 유학을 보내기로 결단을 내렸다. 젊은 날의 자신을 떠올리며 조훈현이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줄 것이라는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조남철의 스승은 기타니다. 당연하게도 조훈현의 유학도 기타니 도장의 문하생으로 입문하는 것이 확정되었다. 중국에서 ‘꽌시’라는 오래된 문화가 있는 것처럼 일본에서도 유사한 문화가 있었다. 한국으로 말하자면 ‘관례’와 유사하고 낡은 산물이었다. 조남철은 일본기원 이사장이자 원로인 세고에에게 조훈현을 데리고 가서 인사를 시키면서 “많이 지도해 달라”는 관례적인 말을 했다.

    조훈현을 바라보던 세고에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바둑판을 가져오라고 말하면서 순간 정적이 흘렀다. 일본기원에서 도장을 이끄는 스승은 제자들과 1년에 하는 대국은 고작 한두 판이 전부였다. 제자도 아닌 조훈현에게 세고에가 지도대국을 스스로 요청한 것은 바둑 역사의 한 사건이었다. 대국이 끝나자 세고에는 조훈현을 제자로 데려가겠다는 의사를 나타냈다.

    기타니 도장의 입문이 이미 예정되어 있었기에 조남철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조남철은 “그러시지요”라고 답변했다. 스승 기타니와의 약속을 어기는 조남철의 결정은 당시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바둑의 역사가 바뀌는 순간이었다. 일흔이 넘은 나이, 오청원에게 방 한 칸을 내 준 이후 30년 만에 받은 제자였다.

    세계 최초 국제전화 대국. 조훈현 뒤로 전화 들고 착점을 통화하는 조남철

    가와바다 야스나리와 세고에의 죽음

    수십 명의 제자들이 있는 기타니 도장과 달리 세고에 도장의 제자는 조훈현뿐이나 마찬가지였다. 실전을 할 대상이 없었던 것이다. 4년이 지나서야 조훈현은 일본기원에 입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천하의 조훈현이었다. 입단하자마자 신인왕을 차지하고 젊은 차세대 주자들을 연파하면서 한국에서 온 천재소년의 다음 행마에 일본기원이 주목하기 시작했다.

    차기 대권주자의 길목인 주요기전의 본선에 이름을 막 내걸었을 때 한국에서 전화 한 통이 날아왔다. 입대영장이었다. 그제야 상황이 심각해진 것을 안 세고에는 조심스럽게 귀화를 제안했다. 조훈현은 아무런 일 아니라는 듯 싹싹하게 군대에 가겠다고 답변했다. 조훈현이 현해탄을 건넌 얼마 후 세고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호사가들은 세계 최강의 자질을 가진 조훈현이 떠나는 것과 3년간 바둑을 손에서 놓는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세고에가 목숨을 끊었다고 말한다. 언제나 그렇지만 호사들의 말은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세고에는 10살 연하인 절친이 있었다. <설국>이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노벨문학상 수장자 가와바다 야스나리다. 가와바다 야스나리는 소설가였지만 아마바둑 고수였다. 마지막 혼인보 슈사이와 기타니 미노루의 역사적인 대국을 관전한 후 바둑소설 <명인>을 쓰기도 했다.

    불행하게도 1972년 사건이 동시에 일어났다. 가와바다 야스나리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충격적이 일이 일어났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84살의 세고에는 몸져 누워 일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조훈현의 입대영장이 날아왔다. 세고에는 곡기를 끊고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스승의 마지막을 함께 하지 못한 조훈현은 대방동 공군본부에서 밤마다 소리 죽여 울었다.

    <각주>

    1. 혼인보 슈와는 화점정석을 완성시킨 인물이라고 해도 무방할만큼 현대 화점정석의 기초는 19세기에 슈와에 의해 정착됐다.

    2. 막부시대 최고 기전인 명인에 오른 혼인보는 단 5명뿐이다. 조와는 명인(8대)에 대회 개최 전권을 가진 기소(6대)까지 올라 혼인보의 최전성기를 연 인물이다.

    3. 각자 바둑돌을 손에 쥔 후 흑백을 가리고 먼저 두는 흑이 대국이 끝난 후 백에게 4집 반(덤)을 주는 것을 호선이라고 한다. 현대 바둑은 덤이 5집 반이 일반적이고 세계대회는 6집 반, 중국의 갑조리그는 7집 반을 공제한다. 그만큼 먼저 두는 흑이 유리하는 뜻이다.

    4. 역대 혼인보 최고 단수는 8단이다. 혼인보 슈호(무라세)를 포함하여 단 5명에 불과했다.

    5. 초단이 흑을 잡고 두지만 덤을 공제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즉 덤이 없다는 뜻이다.

    필자소개
    인문사회과학 서점 공동대표이며 레디앙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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