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공동체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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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11월 20일 06:3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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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공동체를 집단 중심적이고 이념 중심적인 것으로 보고 좋지 않게 생각해왔다. 특히 귀농과 생태운동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공동체를 지향하는 경향이 강했지만, 농사를 비롯해 자연 속의 삶을 살아가려면 먼저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도시의 삶에 밴 나의 모든 것을 발가벗고 자연 속에서 나 홀로 스며들 때 비로소 농부로서, 자연인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먼저 인간이 되고 농부가 되기를 바랐고, 공동체는 당장의 일이라 생각하질 않았다.

    갑자기 들이닥친 생각 "우리 집은 꽤 크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잠들기 전에 우리 집이 꽤 크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평수로 치면 24평에 불과한데 아내와 둘이 살기에는 엄청 큰 집으로 느껴진 것이다. 집만이 아니었다. 집안에 들여져 있는 각종 전기 제품과 물건 가구들을 살펴보니 우리 둘이 쓰고 있는 것들이라 하기에는 너무 많고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낡아서 한참 켜 놔야 화면이 자리를 잡는 34인치의 텔레비전도 옛날로 치면 10명의 식구들이 둘러앉아 볼 수 있는 크기다. 어디 그뿐이랴. 냉장고는 또 어떠한가. 자취할 때 쓰던 멀쩡한 냉장고는 버리고 선물로 들어온 꽤나 큰 냉장고도 모자라 김치 냉장고도 한 자리 차지하고 있다. 마당이나 밭에다 항아리 묻으면 더 맛있는 걸 구태여 사겠다는 아내의 고집을 꺾지 못해 들여 놓았지만 막상 그 안에 들어간 김치의 맛을 보고는 사람 마음의 간사함을 느끼곤 했다.

    가스렌지도 그렇고 세탁기도 그렇고 여하튼 우리 집 가전 제품들을 보면 하나 같이 그 양이나 크기가 둘이 쓰기에는 너무 많고 큰 것들이다. 진짜 옛날로 치면 3대는 함께 살아도 될 규모의 집과 가구들 속에서 둘만이 살고 있는 셈이다.

    뭔가 거대한 사기에 속고 사는 느낌이 들었다. 물도 돈 주고 사 먹어야 할 정도로 뭐든지 돈이 아니고서는 살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는 것은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필요치 않은데도 필요한 것처럼 속아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누군가가 너에게 필요한 물건이라고 심어준 관념을 위해서 말이다.

    이 수많은 가전제품 "거대한 사기에 속고 있다는 느낌"

    우리나라에서 버려지는 음식물 쓰레기가 돈으로 치면 한해에 8조가 넘는다는 얘기는 몇 년 전 일이다. 2001년 기준으로 음식물쓰레기 처리 예산만 1조 8천억원이 든다고 했다. 이런 음식물쓰레기를 제일 많이 배출하는 것은 가정이지만 그 다음이 음식점이다. 가정에서 많은 음식물쓰레기가 버려지는 것에는 필요한 것보다 많은 양의 음식을 만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음식점에서 버려지는 음식물쓰레기는 가정보다 심각성이 더하다. 집에서는 먹다가 남는 것이 있으면 냉장고에 보관했다가 다음 밥상에서 먹을 수 있지만 식당에선 한번 먹고 남는 것은 바로 쓰레기통으로 버려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외식문화가 일상화되어 보통 사람들이 평균 일주일에 1~3회는 외식을 한다는 것을 보면 식당에서 배출되는 음식물쓰레기는 상당량 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진짜 옛날로 치면 쓰지 않아도 될 돈을 마구 쓰고 버리고 있는 꼴이다.

    음식물쓰레기 비용보다 더 황당한 것은 사교육 비용이다. 2003년 기준으로 사교육 시장의 규모가 년 13조원이나 되는데 그 마저 매년 2조씩 증가하고 있다는 얘기다. 불경기가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사교육 시장은 매년 급성장을 거듭하고 있으니 그 기현상은 참 이해하기 힘들다. 그렇게 돈을 막 쏟아 붓고 있음에도 우리 대학은 세계 100위권 대학에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단다. 한국의 무역 규모는 11~12위를 자랑하고 GDP는 13위 정도나 한다고 하는데 말이다.

    사교육 시장을 주도하는 것은 대학입시 시장이지만 우리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사교육 시장에 내몰리는 것에는 놀 곳이 없는 아이들 문화의 문제도 크다. 한 친구가 자기 아이만큼은 학원에 보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을 했는데 결국 보낼 수밖에 없게 된 데에는 공부를 더 시킬 요량에서가 아니라 놀이터에서 혼자 놀고 있는 아이가 너무 딱해서였다고 한다. 말하자면 놀기 위해서 돈을 들여야 하고 친구 사귀는 데에도 돈이 필요한 세상이 된 것이다.

    공동체, 돈으로 사지 않아도 되는 게 무지 많다

    우리 어릴 때 텔레비전 반공 프로를 보면 북한 아이들은 탁아소에서 집단 생활하며 큰다고 매우 흉을 보고는 했었다. 아이가 어머니 품과 식구들 품에서 자라지 않고 집단 생활에서 자란다는 게 어린 나로서도 도저히 납득이 가질 않았다. 게다가 그 집단 생활을 하며 북한의 아이들은 일인 숭배사상에 세뇌되고 있다고 얼마나 욕을 했던가.

    그런데 지금 우리 아이들은 어떠한가. 어린이집에서 크지 않는 아이가 없고 돈 숭배사상에 세뇌되고 있지 않은 아이가 어디 있는가. 북한이야 사회주의 국가이니 그래도 교육비가 따로 들지 않겠지만 우리는 그를 위해 천문학적인 돈을 퍼 붓고 있으니 참으로 황당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다시 공동체를 생각하게 된 이유는 바로 이런 것들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식구 공동체든 마을 공동체든 뭐든지 우리 삶에 공동체적인 요소가 많았을 때는 돈으로 사지 않아도 문제되지 않는 것들이 무지 많았다.

       
      ▲ 공동체 원두막 짓기
     

    물을 돈 주고 산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김치도 그렇고 된장도 그렇고 공부도 그렇고 친구도 그랬다. 말하자면 자급자족 경제 요소가 많았던 것인데, 이를 상업주의와 신자유주의가 하나둘씩 깨뜨려버리면서 돈 아니면 살 수 없는 세상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GDP 1만불을 넘어 2만불을 향해 간다지만 그 GDP라는 게 따지고 보면 공동체적인 삶의 자급경제에서 빼먹은 돈이 대부분이다. 예를 들면 내가 돈 1천원을 벌어서 그것으로 물을 사먹었다 치자. 그러면 소매상은 물을 팔아서 이윤을 남기고, 소매상에게 물을 건네준 도매상도 이윤을 남기고, 도매상에게 물을 만들어 판 제조업체도 이윤을 남긴다.

    제조업체는 또 물을 더 많이 팔기 위해 광고를 제작하고, 광고를 제작해준 광고업체도 그렇게 해서 이윤을 남기고, 광고물을 인쇄한 인쇄회사와 종이회사도 이윤을 나기고, 방송국을 통해 선전되면 또 이윤이 발생하고, 각각의 회사들이 사업을 유지하기 위해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으면 은행에게는 이자가 발생해서 결국은 최초의 1천원보다 더 많은 돈이 GDP로 합산된다. 돈 주고 사먹을 필요가 없는 물이 이렇게 GDP를 올리는 데 큰 공헌을 한 것이다.

    경제발전은 필연적으로 공동체 파괴

    지금은 부조금이 일상화되었지만 그 원형을 따지고 보면 공동체 사회에서 서로 나누는 생활의 잔재물이다. 마을의 한 집에서 경조사가 나면 마을 사람들이 집에서 농사지어 장만한 먹을거리들을 가지고 와 음식을 같이 하고 노동도 함께 해주던 것이 돈 봉투로 바뀐 것이다.

    지금은 그 봉투에 든 5만원이 부조되면 그것으로 음식을 장만하여 음식점의 GDP가 올라가고, 장소를 빌리는 데 쓴 임대료가 건물주의 GDP를 올려주고, 각종 행사에 필요한 부대비용들이 각각의 업체에게 GDP를 올려준다. 전혀 GDP와 무관했던 돈이 돌고 돌면서 전체 GDP를 올려주는 신기한 마술을 부린다.

    그래서 한 나라의 경제가 발전하려면 더욱 더 그 사회의 공동체적인 요소를 파괴해야 한다. 필요한 물건을 공동체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면 전혀 국가 경제에 보탬이 되질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공동체적인 요소들을 파괴하면서 사회는 더욱 더 양극화, 계급화되고 세계적으로는 못사는 나라들을 더 많이 양산한다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평균을 내었더니 한 사람이 사는 데 필요한 땅이 1.6헥타르라고 한다. 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것에 두 배를 소비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처럼 소비를 하면 지구가 두개는 더 있어야 된다는 얘기다. 당연히 미국 사람들처럼 에너지를 낭비하면 지구가 7~8개는 더 있어야 한다.

    농경 시대에서는 한 사람이 먹고 사는 데 필요한 면적을 한 마지기로 계산했다. 한 말의 볍씨가 필요해서 한  마지기이기도 하지만 한 말의 볍씨면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다는 말이다. 한 마지기면 땅 2백평쯤 된다. 그러니까 지금은 그것에 40~50배 땅이 있어야 우리나라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좁은 땅에서 그만큼 많은 것을 빼 먹어야 하기 때문에 땅값이 올라간다. 그런데 쓸 데 없는 것을 빼먹으며 이상하게 돈 버는 사람들이 많아 땅값이 더 올라간다.

    자급자족 공동체 생활 속에서는 돈이 필요 없었다. 필요 없는 돈이니 갖고 있는 사람도 별로 없고 돈이 없으니 쓸 데 없는 것을 소비할 필요도 없다. 그러면 자연을 파괴하는 낭비도 없고 인간성과 도덕성을 망가뜨리는 부조리도 없다. 가끔 시골 벽지에서 한평생 농사만 짓고 사는 할아버지 할머니 얘기를 들어보면 자급자족 공동체의 원형을 아직도 느낄 수 있다.

       
      ▲ 추수감사제 전경
     

    정거장 공동체에서 막걸리 한잔 합시다

    다시 그 분들처럼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우리의 현재 삶 속에서 다시 공동체적인 요소들을 살려내는 길은 얼마든지 있다. 나는 그 중에 하나가 도시농업, 텃밭 가꾸기라고 생각한다.

    농사를 하면 내 몸에서 배출되는 쓰레기를 소중한 거름으로 재활용하면 자연도 깨끗해지고 거름 살 돈도 절약할 수 있다. 나는 몇 년째 집에서 음식물만이 아니라 똥오줌도 받아다 거름으로 만들다 보니 정화조가 빨리 차질 않는다.

    치라고 독촉장이 서너 번은 와야 억지로 치는데 치러 온 사람이 이상하다는 듯이 이 집엔 양이 별로 없네요, 한다. 정화조 치느라 돈을 주면 그것이 또 빙빙 돌아 우리나라 GDP를 올려 줄텐데 그마저 허용을 하지 않으니 애국자이기는 틀린 것 같다.

    나만이 아니라 우리 회원들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스스로 거름을 만들어 쓰고 있다. 항생제로 오염된 축분으로 거름을 만들지 않으니 흙이 건강하고 그 속에서 자라는 작물도 건강하고 맛있다. 그렇게 해서 내 손으로 김장을 담그고 밥상의 자급율을 높여가면 자급경제의 비중이 따라서 높아진다.

    우리 농장에서 회원들은 농사만 짓는 것이 아니다. 농사지은 콩으로 두부도 만들어 먹고 음식도 나눠 먹고, 원두막도 같이 짓고 농사 공부도 같이 하며 늘 재미있는 일들을 만들어낸다. 먼 데 차 끌고 놀러가지 않아도 되니 돈도 절약되고, 싸고 힘들이지 않게 아이들 자연교육도 절로 되고 재미있는 농사를 짓다보니 돈 들여 문화생활을 할 필요가 적어진다.

    그래서 나는 이를 텃밭 공동체라 한다. 다른 말로 정거장 공동체라고도 한다. 집단의 강제적인 규율도 없고 지향하는 바는 있지만 이념의 도그마는 없으니 자유롭다. 그저 오는 것도 자유고 나가는 것도 자유다. 공동으로 일할 때도 함께 참여하지 않는 사람한테 그 누구도 간섭하지 않는다. 성격이 달라 함께 어울리기 어색한 사람을 억지로 끌어들일 필요가 없다. 단 잠시 쉬면서 막걸리 한잔 할 때는 기를 쓰고 같이 먹자고 한다.

    이런 텃밭 공동체를 통해 뭔가 우리 삶 속에서 상업주의와 신자유주의를 뛰어넘을 수 있는 단서만 잡을 수 있다면 이는 매우 소중한 경험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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