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운의 혁명가 펑더화이
    [중국현대사 인물열전] 장비·조자룡
        2021년 05월 26일 11:0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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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공내전> 연재 칼럼을 2년이 넘게 70회에 걸쳐 보내주신 전 철도노동자 이영민 씨가 이번에는 조금 가벼운 주제로, 중국현대사의 인물들에 대한 약전을 보내주시기로 했다. 주은래를 시작으로 중국현대사에서 긍정적 의미이든 부정적 의미이든 영향을 미치고 후대에 교훈을 남긴 인물들의 이야기를 진행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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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회의 글 ‘인민의 좋은 총리, 저우언라이’

    펑더화이는 삼국지 연의에 등장하는 장비와 조자룡을 합쳐 놓은 듯한 인물이다. 용맹하고 성질 급하기로는 장비를 닮았고 충직하고 담대하기로는 조자룡을 닮았다. 그는 홍군 부총사령은 물론 인민해방군 부총사령으로 공산당의 군사면에서 총사령인 주더에 이어 늘 2인자 위치에 있었다. 홍군 초기부터 줄곧 마오쩌둥과 공산당에게 충직하기 이를 데 없어 마오쩌둥은 늘 “가장 어려운 일은 펑더화이에게 맡기면 된다.”고 생각하였다.

    펑더화이는 후난성 샹탄현 출신으로 마오쩌둥과 동향이다. 펑더화이는 샹탄현에서도 산골 출신으로 몇 가구 되지 않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펑더화이는 빈농의 자식으로 소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중퇴하였다. 그 후로는 소년머슴, 소년광부, 동정호 제방인부 등 온갖 고생을 다하다가 먹고 살기 위해 군벌 군대에 입대하였다. 그는 사병에서 시작하여 국방부장에 올랐으니 입지전적인 인물 중 대표선수격이라 할 수 있다.

    펑더화이는 군사적 재능은 물론 통솔력이 뛰어나 군벌 군대에서도 승승장구하였다. 후난군에서 분대장, 소대장, 중대장, 대대장을 거쳐 연대장에 승진한 그는 중대장 시절부터 부대내에 ‘구빈회’를 설립하며 혁명의 씨앗을 심었다.

    1927년 장제스가 상하이에서 4.12 정변을 일으켜 공산당원과 노동자들을 학살하여 대숙청의 바람이 불던 때 펑더화이는 오히려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시류를 거스르는 그의 기질을 엿볼수 있다.

    1928년 광저우 폭동과 추수폭동에 이어 후난성 핑장(平江)에서 봉기한 그는 주더와 마오쩌둥의 홍4군에 이어 홍5군을 설립하여 군단장 겸 13사단장에 선출되었다. 후난과 후베이, 장시성 경계에 해방구를 설립한 그는 국민당군의 공세에 밀려 징강산에 가서 마오쩌둥 주더의 군대와 합류한다.

    징강산에 국민당군의 토벌이 임박하자 마오쩌둥은 “펑더화이는 남아 징강산을 사수하고 자신과 주더의 부대는 산을 내려가 근거지를 확대한다.”는 방침을 세운다. 중과부적인 징강산에서 악전고투하던 펑더화이는 간신히 첩첩의 포위를 돌파하여 후난성을 떠돌며 근거지를 세워 나갔다. 마오는 나중에 “홍5군을 징강산에 남기면 안되었다”고 하며 미안해 하였다.

    펑더화이

    펑더화이는 언제나 마오쩌둥의 정책 및 방침을 옹호하였다. 루이진의 소비에트에 대한 5차 토벌에서 펑은 진지전을 고수하는 오토 브라운과 대판 싸워 실각할 위기를 겪기도 하였다. 대장정 기간에 펑더화이는 쭌이회의에서 마오쩌둥을 견결하게 지지하여 마오가 지도력을 세우는데 군사적으로 뒷받침하였다.

    그후 ‘4도적수’라 하여 마오쩌둥이 국민당군을 따돌리기 위해 구이저우성 츠수이(赤水)를 네 번 건너게 하자 현장 지휘관들 사이에 불만이 일었다. 린비아오가 펑더화이에게 “마오쩌둥은 정치적 지도를 하고 부대는 형이 지휘해야 한다.”고 제의하자 이를 일축하였다. 후이리(會里) 회의에서 이를 알게 된 마오가 펑더화이의 지지에 힘입어 린비아오를 엄숙하게 비판하여 자신의 군사적 지위를 굳힌 사건도 있었다.

    중일전쟁 시기에 펑더화이는 전력을 보존하기를 원하는 마오쩌둥의 뜻을 묵살하고 ‘백단대전’(백개연대 작전)을 일으켜 일본군과 대판 싸운다. 이 전투로 공산당은 “싸움을 회피하고 실력만 키우려 한다.”는 장제스의 비난에서 자유로워졌을 뿐 아니라 “항일에 앞장서는 공산당”의 정치적 상징을 얻게 되었다.

    국공 간 내전이 벌어지자 펑더화이는 3만명의 병력으로 30만명의 후쫑난 부대와 싸우라는 임무를 받았다. 옌안을 수비하여 당정의 지도부와 가족들, 그리고 공산당원들이 피신할 시간을 벌라는 것이었다. 펑더화이는 악전고투 끝에 일주일간 옌안을 사수하여 남김없이 철수한 뒤 마지막으로 옌안을 떠난다. 그 다음날 후쫑난이 홍색수도를 점령했으나 그야말로 빈 성을 차지했던 것이다.

    그후 펑더화이는 섬북 고원을 전전하며 국민당군과 게릴라전을 벌인다. 크고작은 승리를 하던 펑더화이는 마오쩌둥을 줄기차게 추척하던 국민당 류칸 부대를 대파하고 류칸을 전사시켜 마오쩌둥의 찬사를 듣는다. 마오쩌둥은 이때 “말 위에 큰 칼 비껴든 장수가 누구인가, 바로 나의 펑더화이 대장군이라네.”하는 유명한 시를 지어 보낼 정도였다.

    내전이 승세를 탈 때 펑더화이는 땅이 넓기만 하고 정치적으로 빛이 나지 않는 서북지역을 평정할 임무를 맡았다. 섬서성에서 간쑤, 칭하이, 신장위구르 자치주, 티벳 등 광대한 지역을 평정한 펑더화이는 전쟁이 끝나자마자 한국전쟁에 참전하라는 요청을 받는다. 전쟁의 천재라는 린비아오가 병을 핑계로 고사한 다음이었다. 내전이 끝난 지 몇 달도 되지 않고 세계 최강 미국과 싸우는 것을 두려워한 중공 지도부가 모두 출전을 말릴 때 마오쩌둥은 펑더화이를 불러 의견을 물었다. 펑더화이는 “미군과 압록강을 경계로 국경을 마주할 수는 없다.”고 대답하여 마오쩌둥의 기대에 부응하였다.

    북한의 동굴에 지휘소를 차려놓고 전쟁을 지휘한 펑더화이는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온 미군과 연합군을 평택선까지 밀어내고 ‘항미원조 전쟁’의 영웅이 되었다. 세계 최강 미군과 싸워 이겼으니 – 중국에서는 당여히 승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 마오와 중국 지도부가 그를 높이 평가하는 것도 무리가 아닌 것이다. 그 과정에서 김일성과의 불화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더 밀고 내려가기를 바라는 김일성에게 “당신은 전쟁을 모른다.”고 일축하여 둘이 주먹다짐 일보전까지 갔다는 것이다.

    중국에 돌아온 펑더화이는 국방부장으로 중국군의 현대화에 앞장선다. 부총리 겸 국방부장으로 승승장구하던 펑더화이는 뜻밖의 사건으로 실각하고 반당, 반혁명 분자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다.

    1959년 공산당이 장시성 루산에서 대약진 운동의 실패를 평가하고 전열을 재정비하려고 할 때 펑더화이는 마오쩌둥에게 장문의 편지를 써서 당내의 관료주의와 대약진 운동의 오류를 지적하였다.

    마오쩌둥은 펑더화이가 자신의 권위에 정면도전한다고 생각하여 편지를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 인쇄하여 공개하고 강력하게 비난하였다. 처음에 펑더화이에 동조하던 사람들도 모두 침묵하고 펑더화이는 모든 직위를 내놓고 오히려 특별 심사조에 연행되어 끝없는 심문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

    결국 펑더화이는 물론 그의 부하들까지 반당, 반혁명 분자로 비판받아 실각하게 되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신이 너무했다고 여긴 마오쩌둥은 그후 펑더화이를 불러 떠보았으나 전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충심에서 비롯했다는 8만자 편지를 써서 마오를 격노하게 하였다. 몇 년이 지나 마음이 가라앉은 마오쩌둥은 펑더화이를 쓰촨성의 광산 부문에 3인자로 배치하였다.

    그때 펑더화이는 공산당 지도부의 동네인 중난하이를 떠나 베이징 교외에서 텃밭을 가꾸며 울분을 삭이고 있었다. 부인인 푸안슈는 반혁명분자인 펑더화이와 살 수 없다고 생각하여 이혼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펑더화이는 배를 가져다 두 쪽으로 나눈 뒤 반 쪽씩 먹고 이혼에 동의하였다. 배와 헤어진다는 한자가 모두 발음이 ‘리’이므로 착안한 행동인데 펑더화이의 칼칼한 성미를 엿볼 수 있다.

    쓰촨에 하방되어 묵묵히 일하던 펑더화이는 뜻밖에 문화대혁명때 홍위병들에게 끌려 베이징으로 연행되었다. 마오쩌둥에게 대들었으니 반혁명분자라는 것이었다. 비행기 태우기, 두팔 뒤로 꺾기, 폭행등 온갖 모욕을 겪은 펑더화이는 홍위병들에게도 견결하게 저항하였다. 자신과 이혼하였음에도 끌려와 함께 비판받던 푸안슈를 보고 “저 여자는 죄가 없다. 내 부인도 아니다.”라며 푸를 옹호하였다.

    수모를 받던 펑더화이는 암에 걸려 한을 품은 채 죽었다. 죽을 때 “내가 모질게 대한 동지들을 보아야 한다. 그들에게 사과하고 죽어야 한다.”고 한탄하는가 하면 “나는 아무 잘못이 없다. 주석을 만나 나에게 왜 그렇게 했는지 따져 보아야 하겠다.”는 말을 되뇌였다고 한다. 죽은 뒤 펑더화이는 4인방에 의해 가명으로 비밀리에 화장되어 연고도 없는 쓰촨성에 묻혔다.

    1982년 덩샤오핑이 집권한 뒤 펑더화이는 복권되었다. 그러자 부인인 푸안슈도 공산당 지도부에게 자신이 펑더화이와 부부관계임을 확인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래야 자신도 복권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푸안슈의 요구에 펑더화이의 조카인 펑메이쿠이가 견결하게 반대했지만 당에서는 “공식적으로 이혼을 확인한 사실이 없다.”고 하여 푸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푸안슈는 나중에 리푸춘의 부인인 차이창에게 혼쭐이 난다. “환난을 함께 해야 부부지 너처럼 남편이 정치적 어려움에 처했다고 이혼을 요구하는게 말이 되느냐?”고 혼난 것이다. 대성통곡한 푸안슈는 남은 생을 펑더화이의 업적을 기리고 자서전을 쓰는데 전념한다.

    펑더화이의 골분은 조카와 고향 주민들에 의해 펑더화이 생가 뒷산에 묻혀 있다. 반혁명 분자가 고향을 빛낸 일세의 영웅이 된 것이다. 펑더화이 동상과 기념관이 들어서 성역화되었으나 워낙 궁벽진 산골이라 찾는 이가 별로 없다.

    왼쪽이 푸안슈, 오른쪽이 류쿤모

    펑더화이는 공산당 지도부 가운데서도 청렴하고 여색을 멀리하기로 소문이 났다. 첫 번째 부인인 류쿤모는 행상의 딸로 일자무식이었는데 펑더화이가 글자도 가르치고 정치적 사상이나 교양도 교육하였다.

    펑더화이는 나중에 사관학교인 후난 강무당에 입교할 만큼 독학으로 학문과 교양을 쌓았을 뿐 아니라 한시도 지을만큼 교양인이 되었다. 류쿤모를 여학교에 보내어 교육을 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자신이 핑장 기의로 쫓기는 신세가 되자 10년동안 서로 떨어져 있게 되었다. 류쿤모는 도망다니다 상하이에서 공장도 다녔다. 우연히 만난 대학교수와 재혼한 류쿤모는 백단대전이 있은 뒤 펑더화이가 팔로군의 부사령원이라는 것을 알았다.

    꿈에도 그리던 펑더화이를 만나러 류쿤모는 단신으로 옌안에 가서 펑더화이를 만났다. 펑더화이는 그때까지 재혼도 하지 않고 류쿤모와의 상봉을 고대해왔다.

    그런데 웬걸, 만나보니 남편은 물론 자식까지 있다는 것이 아닌가? 펑더화이는 류쿤모를 설득하여 상하이로 돌아가라고 하였다. 울며 매달리던 류는 마침내 펑더화이와의 재결합을 포기하였다. 그러나 “나는 다시 상하이에 가지 않겠어요. 나도 혁명사업을 하고 싶으니 당신이 배려해 주세요.”하고 요청하였다.

    펑더화이는 류를 옌안의 당정학교에 입학을 주선하여 교육받을 수 있게 하였다. 신중국 설립후 류쿤모는 흑룡강 성 정부의 식량책임자로 일하였다. 곡창지대인 하얼빈에서 식량국장이 상당히 중요한 요직인 것을 감안하면 류쿤모의 능력이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펑더화이는 옌안의 3대 미녀인 푸안슈와 재혼하였지만 슬하에 자녀가 없었다. 펑더화이가 너무 바빠서 말 위에서 지내느라 그랬는지 알 길은 없다.

    대신 펑더화이는 자신의 조카들을 자식처럼 키웠다. 펑더화이는 두 아우가 있었는데 고향에서 공산당 비밀 당원으로 사업하다 모두 국민당군에게 처형을 당했던 것이다. 펑더화이는 베이징에서 자신의 조카들은 물론 전사한 전우의 자녀들 후견인을 도맡았다.

    항일전쟁 기간에 전사한 줘취안(좌권)의 자녀들도 펑더화이가 학비를 대주며 자신을 삼촌이라 부르라고 하였다. 펑더화이는 청렴하여 월급 외에는 일체 공금에 손을 대는 일이 없었으므로 살림이 상당히 쪼들렸다고 한다. 또 공사 구분이 엄격하여 부인인 푸안슈가 자신의 직위를 이용하여 어디 유람하는 것을 한 번도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펑더화이라는 인물이 매우 궁금하였다. 그래서 펑더화이 생가에도 가보고 자료를 찾거나 중국어 팟캐스트 연속극을 듣기도 하였다. 확인할수록 과연 내 추측이 틀리지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펑더화이에 대한 추측은 “멸사봉공하고 충직하며 평등사상을 체화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후 나는 펑더화이 자서전을 번역하여 출판했는데 다행히 많이 팔리지 않아 수구언론이나 재향군인회같은 골 때리는 이들에게 혼쭐나는 일이 없었다. 자서전이 많이 팔렸으면 아마도 여러 번 혼쭐이 났을 것이다. 그래서 페이스북에서도 내가 펑의 자서전을 번역 출간했다는 말을 한 번도 한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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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소개
    해남 귀농. 전 철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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