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낯선 물못자리 공동작업
    [낭만파 농부] 즐거우면서도 씁쓸함
        2021년 05월 25일 10:28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벼농사 철로 접어든 지 이제 달포가 다 되어간다. 볍씨를 담가 촉을 틔우고 모판에 넣어 못자리에 앉히는 작업이 끝났고, 지금은 못자리에서 볏모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지난 스무날 동안 날마다 물을 대주고, 무슨 탈이 나지 않았는지 살피면서 정성껏 돌봐오던 터다. 다행히도 하늘이 도와 가물지 않고 알맞게 비를 뿌려주어 애를 먹지는 않았다.

    내일 저녁엔 그 동안 보온을 위해 덮어두었던 부직포를 걷어낼 참이다. 모가 웃자라는 걸 막고, 모내기 때까지 상온에 적응시키기 위함이다. 하얀 장막을 걷어내고 나면 천연잔디구장 뺨치게 아름다운 열세 줄의 짙푸른 융단이 그 장관을 드러낼 것이다. 논배미 위에 펼쳐지는 ‘인공미’라고 할까.

    베일 벗은 못자리의 위용

    사실 논배미에 조성하는 ‘물못자리’는 갈수록 낯선 풍경이 되어가고 있다. 논을 갈아 로터리를 치고 물을 대 수평을 잡고 두둑을 만들어 또 수평을 맞추고 하는 작업에 품이 많이 들고 고단한 일이라 되도록 회피하는 탓이다. 그 대신 비닐하우스에 모판을 가지런히 앉힌 뒤 스프링클러로 물을 뿌려대는 방식을 쓰는 게 대세가 되고 있다. 그나마 손수 모를 기르는 대신 농협이나 개인이 운영하는 육묘장에서 사다 쓰는 추세다.

    하지만 우리 고산권 벼농사두레는 여전히 물못자리 방식을 굳건히 이어가고 있다. 작업이 어려운 대신 볏모에게 이롭기 때문이다. 스프링클러로 물을 뿌리고 영양성분을 화학약품으로 공급하는 볏모와, 흙에 뿌리를 박고 영양성분은 물론 온갖 미량원소를 빨아들이는 볏모를 감히 견줄 수 있겠는가. 게다가 말 그대로 두레 작업에 필요한 일손을 너끈히 댈 수 있는 ‘조직력’을 갖추고 있기도 하다.

    벼농사는 기계화 비율이 95%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농업인구가 갈수록 줄어 2백만 명, 비중으로는 전체의 4%에 지나지 않는 실정이다. 기계화가 마뜩치 않다고 하여 예전처럼 모내기두레, 김매기두레 따위를 꾸릴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실제 유기재배라고 해도 기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볍씨를 담그는 과정에서 소독을 거쳐야 하는데 유기농의 경우 화학약품(농약) 대신 끓인 물에 담그는 ‘열탕소독’을 하게 된다. 얼마 전까지도 직접 물을 끓여 담그는 방식을 썼지만 이제는 자동 열탕소독기가 개발돼 있다. 지게차로 볍씨를 담은 톤백을 들어 올려 기계에 공급하면 자동으로 적정시간 동안 온수에 잠겼다가 망자루에 담아내는 방식이다.

    열탕 소독 작업

    파종 작업

    볍씨 넣는 작업 또한 파종기계로 이루어진다.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모판과 상토, 볍씨가 공급되는 일관작업 시스템이다. 작업자가 하는 일이란 모판과 상토, 볍씨가 끊이지 않도록 대주는 보조노릇이다. 경작면적에 따라 많게는 수천 개의 모판에 볍씨를 넣게 된다.

    그 많은 모판을 물못자리에 앉힌다고 했을 때, 논을 가는 작업이야 트랙터가 한다고 치지만 수평을 잡고, 두둑을 만들고, 모판을 앉히는 일은 오로지 사람 손으로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나마 기계(트랙터)의 힘을 빌리려면 못자리를 논배미마다 나누어 조성하는 게 유리하다.

    그런데 우리 벼농사두레는 한 자리에 큰 못자리를 만들고 있다. 사실 두둑이 열 셋이나 되는 초대형 못자리는 근동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20~30명에 이르는 인원이 함께 작업하는 경우 오히려 한 곳에 집중하는 것이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두둑이 열 셋이나 되더라도 한 줄로 길게 서서 릴레이 작업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인해전술’이라고 할 수 있다.

    못자리 앉히기

    요즘에는 수십 명이 한 자리에서 공동작업을 하는 풍경 자체가 낯선 일이고, 그런 만큼 구경거리가 되기도 한다. 협동작업이 이루어지니 일의 고단함도 크게 덜 수 있다. 떼거리로 모이니 그 가운데서 흥이 일어나는 건 자연스런 일이다. 그야말로 왁자지껄, 웃음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일손에 여유가 생기니 사람이 일의 노예가 되는 게 아니라 한결 여유를 부릴 수 있다. 조금 고되다 싶으면 “좀 쉬었다 합시다!”. 한나절에 한 번 아니라 두세 번을 쉬며 막걸리 한 순배. 점심 뒤에는 모두가 둘러앉아 소회를 나누거나 장기자랑 하는 시간을 갖기도 하고. 하긴 풍물놀이를 했던 해도 있었지.

    앞으로 스무날이 또 지나면 모내기를 하게 된다. 모내기 자체는 이앙기 운전자와 주로 모판을 대주는 일을 하는 보조인력 하나, 단 둘이서 하는 참으로 따분한 작업이다. 그러나 그 전에 못자리에 있는 모판을 떼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논배미로 나르는 일이 또 많은 품을 필요로 한다. 수천 판을 떼어 릴레이로 트럭 짐칸에 싣는 작업, 그것을 논배미로 운송한 뒤 다시 짐칸에서 내려 논배미에 담가두는 일에 또 ‘인해전술’을 가동해야 하는 것이다. 작업내용이야 다르지만 그 과정을 쉬엄쉬엄, 먹고 마시고 왁자지껄 흥겹게 해치우는 사람들의 행동양태는 다를 게 없다.

    먹고 마시는 즐거움

    사실상 ‘일과 놀이가 하나 되는’ 경지라고 할 수 있겠다. 앞서 살펴봤듯 농업인구가 갈수록 줄어드는 상황에서는 예외적인 사례인 게 맞다. 농업인구 비중이 50%를 넘어서지 않는 한 넘보기 힘든 경지이니 가능성 제로 아닌가. 어쩌면 ‘복에 겨운’ 처지이고 그래서 씁쓸한 것이다.

    필자소개
    시골농부, 전 민주노총 편집국장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