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오쩌둥의 영혼의 단짝,
    인민의 좋은 총리 저우언라이
    [중국현대사 인물열전] 중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2021년 05월 24일 02:3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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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공내전> 연재 칼럼을 2년이 넘게 70회에 걸쳐 보내주신 전 철도노동자 이영민 씨가 이번에는 조금 가벼운 주제로, 중국현대사의 인물들에 대한 약전을 보내주시기로 했다. 주은래를 시작으로 중국현대사에서 긍정적 의미이든 부정적 의미이든 영향을 미치고 후대에 교훈을 남긴 인물들의 이야기를 진행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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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민의 좋은 총리

    저우언라이,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 위대한 무산계급 혁명가, 정치가, 군사가, 외교가, 당과 국가의 중요 지도자, 중화 인민공화국 개국 원훈, 일관되고 근면하게 일했으며 기율을 엄수했다. 언제나 인민들을 중시하여 사람들은 그를 “인민의 좋은 총리”라고 불렀다.

    중국 공산당 홈페이지인 인민망에 있는 저우언라이 소개 중 머리글이다. 그중 저우언라이를 대표하는 호칭은 “인민의 좋은 총리”일 것이다. 저우언라이는 공산당 초기부터 지도부였으며 난창 봉기 및 전쟁 때에는 군사 지도자였다. 신중국 건립 전에는 군사위원회 부주석 겸 총참모장을 역임하였다. 그러니 위에 쓴 표현이나 이름들은 모두 사실과 부합한다.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과 영혼의 단짝이다. 중국에는 이런 말이 있다. “일을 도모하여 꾸미는 것은 마오쩌둥이고 실제로 이루는 것은 저우언라이이다.” 저우언라이를 생각하면 나는 한왕 유방의 재상이던 소하, 촉한 유비의 승상 제갈량이 떠오른다. 나는 저우언라이가 이들보다 더욱 뛰어나며 두 사람을 합한 정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적어도 중국 혁명에서 승리할 무렵까지 두 사람은 실과 바늘처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유지하였다.

    마오가 이상해진 뒤, 결정적으로는 문화대혁명 무렵부터 마오쩌둥은 저우언라이를 못마땅해 하기도 하였다. 저우언라이가 방광암에 걸려 사경을 헤맬 때 마오는 한 번도 그를 문병하지 않았다. 마오쩌둥은 한때 저우언라이에게 “당신은 우파에서 오십센치만 왼쪽으로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다. 문화대혁명 때 자신이 하는 일에 브레이크를 걸고 린비아오를 비롯한 4인방과 맞서는 데 대한 불만이었다. 덩샤오핑을 적극 보호한 것, 그를 저우언라이 자신의 후계로 삼아 밀어주는 것에 대한 불만도 있었다.

    저우언라이가 사망했을 때 4인방의 방해로 추도식조차 마음 놓고 열 수 없었다. 그래도 마오는 저우의 사망소식에 누운 채 눈물을 종횡으로 흘렸다고 한다. 저우언라이가 죽은 지 몇 달 뒤 마오쩌둥도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출생, 이주, 학생운동

    저우언라이는 1898년 장쑤성 화이안(淮安)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이 저장성 샤오싱(紹興) 사람이었기 때문에 샤오싱에도 그의 동상이 있다. 그래도 공식적인 기념관은 화이안에 있으니 화이안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마오쩌둥은 1893년 출생이니 저우언라이와는 여섯 살 차이가 난다. 마오쩌둥은 나중에 저우언라이를 절대적으로 믿고 의지하게 되는데 호칭을 “언라이”라고 불렀다. 반면 저우언라이는 마오를 “주석”이라고 깍듯이 불렀다. 마오와 저우언라이는 어떻게 해서 운명적 관계를 맺게 되었을까.

    저우언라이는 텐진의 난카이학교를 졸업했다. 약전에는 백부가 화이안을 떠나 랴오닝성 테링(요녕성 철령)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따라갔다고 한다. 1917년 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에 유학하여 처음 마르크스주의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1919년 2년만에 귀국하여 9월에 난카이 대학에 입학하였다.

    그전에 그는 5.4운동 때 텐진 학생운동의 지도부로 활동했다. 1919년, 조선에 3.1운동이 있다면 중국에는 5.4운동이 있다. 5.4운동은 일본 제국주의가 중국의 돤치루이(단기서) 군벌 정권에 차관을 주는 대신 불리한 조약을 맺은 데 대한 항의에서 비롯하였다.

    일본은 1차대전 참전국인 독일의 조차지인 칭다오(청도)등 교주만 지역을 장악하고 지난에서 칭다오까지의 철도도 장악하는 등 중국의 주권을 침해하고 이권을 잠식하였다. 이에 항의하여 5월 4일 베이징에서 대학생들이 처음으로 시위 및 행진 등을 벌였고 노동자들은 파업투쟁 등으로 호응하였다. 그러자 텐진을 비롯한 주요 도시에 운동이 확산되어 시위와 파업, 철시 등이 벌어졌는데 주요 동력은 대학생들이었다.

    그후 저우언라이는 텐진에서 각오사(覺悟社)라는 진보단체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이때 저우언라이는 덩잉차오를 만나 교제 끝에 결혼하게 된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쓰기로 한다.

    근공검학으로 유럽에 유학

    1920년에는 유럽으로 근공검학(돈 벌며 공부하는 것, 즉 유학 경비를 아르바이트로 조달한다는 의미이다. 나중에 베이징대 총장이 되는 차이위안페이, 마오쩌둥 등이 주도하여 시작하였다)의 유학생이 되어 덩샤오핑, 천이 등과 함께 떠났다. 중국에서 근공검학에 참여한 학생들은 모두 1600여명에 달했는데 이 유학생들 중 여러 명이 공산당의 유수한 지도자로 성장하게 된다.

    1921년 저우언라이는 유럽에서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22년에는 소년 공산당을 창립했는데 그후 중국 사회주의 청년단 유럽지부로 개칭하였다.

    그는 사회주의 청년단 유럽지부 서기를 맡았으며 공산당 유럽지부의 지도부로 활동하였다. 1923년에는 국민당 파리본부 주비위원이 되었으며 국민당 유럽지부 특파원과 집행부장 대리 등을 맡아 유럽의 국민당 활동도 주도하였다. 이처럼 저우언라이는 학생운동과 공산주의 운동, 국공합작 시 국민당 활동에서 언제나 지도부에서 활동했다. 이렇게 줄곧 지도부에서 활동했는데도 권위의식이나 관료주의에 빠지지 않은 것을 보면 그가 조직적 품성을 갈고 닦으며 생활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귀국, 공산당 지도부에서 활동

    1924년 저우언라이는 귀국하여 황푸군관학교 정치부 부주임을 맡았다. 황푸군관학교는 소련의 지원을 받아 설립했는데 장제스가 교장을 맡았다. 장제스는 황푸 출신들을 자신의 정치적 군사적 기반으로 삼았지만 린비아오나 천이, 천겅 등 공산당의 유력한 군사지도자들 중에도 황푸 출신들이 많다. 유능한 조직자인 저우언라이가 정치부 부주임을 맡았으니 공산당은 군사 지도자를 육성할 좋은 기회를 잡은 셈이었다.

    그는 국민혁명군 제1군 정치부 부주임과 부당대표 등을 맡았으며 군벌 천중밍을 토벌하는 데에 두 번 참전하였다.

    저우언라이는 중공 광둥위원회 위원장과 상무위원회 군사부장을 맡아 광둥 지역의 공산당 활동을 주도했다. 광둥 위원회가 홍콩과 광저우, 상하이 등을 포괄했음을 볼 때 그 중요성을 엿볼 수 있다.

    1927년 3월 북벌에 나선 국민혁명군이 상하이에 접근하자 저우언라이는 세 차례 노동자 봉기를 지도하여 상하이에 있는 북양군벌이 후퇴하도록 하였다. 5월에는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 겸 중앙 정치국위원이 되어 공산당에서 주요 지도부로 활동했다.

    당시 마오쩌둥은 농민문제에 천착하여 당내에서 비주류의 위치에 있었다. 마오쩌둥은 천두슈의 기회주의를 비판하며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유명한 발언을 하며 혁명무장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었다. 그래도 당내에서의 영향력은 저우언라이가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던 시기였다.

    마오쩌둥이 끝내 중공의 최고 지도자로 발돋움한 것은 당을 이끌만한 새로운 노선을 제시한 데 원인이 있다. 총구 발언처럼 무장투쟁에 대한 혜안, 중국 혁명의 주력은 노동자가 아닌 농민에게 있다는 것, 그리고 힘을 기를 때까지는 유격전을 해야 한다는 등 당을 이끌 수 있는 노선을 정립하고 일관되게 추구하였다.

    정치 군사 지도부로서의 역할

    1927년 장제스가 상하이 정변을 일으켜 공산당원과 노동자들을 학살하여 국공합작이 전면 파열되었다. 저우언라이는 허룽, 예팅, 주더, 류보청 등과 함께 장시성 난창에서 난창 봉기를 일으켰는데 당시 직함이 중공 전적위원회 서기였다. 전적위원회란 적과 무장투쟁 행동을 총괄하는 기구로 서기를 맡았으니 가장 중요한 직책에 있었던 셈이다. 난창봉기는 철저하게 실패했는데 봉기 시작일인 8월 1일이 인민해방군 창건 기념일로 되었다. 난창봉기가 실패한 것은 근본적으로 역관계에서 비롯한 것이지만 코민테른과 리리싼 등 지도부 방침이 잘못된 탓이 컸다. 그 경과를 보면 저우언라이를 비롯한 주더, 예팅등 주요 지도부들이 러시아 혁명의 봉기노선을 그대로 추종했음을 보여준다.

    쭌이회의에서 마오쩌둥을 지지

    1928년 중공 6차 대회에서 그는 정치국 상무위원 겸 중앙 조직부장을 맡았다. 그리고 중앙군사위원회 서기를 맡아 군사부문의 책임자가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상하이에 있는 중공 중앙의 안전과 각 지역 공산당의 무장투쟁 지도, 국민당 통치지역의 비밀공작 등을 주도하였다.

    이 시기 그는 공산당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다. 이때부터 저우언라이는 비밀공작에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저우언라이는 한 번 인연을 맺으면 계속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필요할 때 역할을 부여하는 데 탁월했다. 장즈중을 비롯한 국민당 요인, 궈루구이나 숑샹후이, 류종콴 등 중공 첩자들 외에도 숱한 기의 인사들이 직간접적으로 그와 연결되어 있었다. 저우언라이는 공산당원으로 있다 배신한 국민당 특무인 고순장 일가를 살해하라는 지시를 했다고 한다. 온화한 이면에는 냉혹한 음모가의 모습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31년 12월 상하이에서 활동하기 어려워지자 중공 중앙은 장시성의 중앙 혁명근거지로 이동하였다. 그는 중앙 소비에트 중앙국 서기를 맡았으며 중국 공농 홍군 정치위원 겸 1방면군 정치위원을 맡았다. 그리고 중앙혁명군사위원회 부주임을 맡았다. 직함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광범위하고 분주하게 활동을 이어갔는지 짐작이 간다.

    1933년 홍군 사령인 주더와 함께 국민당군의 4차 포위토벌에 맞서 전투를 벌여 승리하였다. 그러나 5차 토벌에서 국민당에 밀린 공산당은 1934년 장정을 시작하였다.

    1935년 1월, 장정 중 구이저우성 쭌이회의에서 중공중앙 정치국 확대회의가 소집되었다. 왕밍을 비롯한 중공 지도부의 군사적 실패를 비판하고 마오쩌둥이 군권을 잡은 역사적 회의였다. 이 회의에서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을 견결하게 지지하여 새로운 지도력을 세우는 데 관건적인 역할을 하였다. 당내 안팎에서 신뢰가 높은 저우언라이의 지지는 마오에게 천군만마의 응원군이 되었다. 그는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등 주요 지도자로 다시 활동을 계속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마오쩌둥과 호흡을 맞춰 음양으로 마오를 보좌하게 된다.

    중국 공산당에서 저우언라이처럼 부침 없이 일관되게 지도부에서 활동한 인물도 별로 없다. 초기부터 신중국의 총리 시절까지, 심지어 사망할 때까지 그는 늘 중공의 핵심적인 지도부 인사로 있었다. 당과 국가가 그의 실무능력과 조정능력을 늘 필요로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적지 한복판에서 활동하다

    1936년 12월 ‘시안사변’이 일어났다. 장쉐량이 장제스를 시안에 연금하고 공산당과 함께 일치항일할 것을 주장하였다. 저우언라이는 중공의 전권대표가 되어 예젠잉 등과 시안에 가서 장제스와 담판했다. 그리고 장쉐량, 양후청과 함께 장제스로부터 “내전중지, 일치항일”을 관철시켜 2차 국공합작을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적과의 담판에서도 공통분모를 찾아내어 합의점을 찾는 것에 그는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장제스를 죽여 분을 풀자는 당 내외의 요구속에서 그는 침착하고 의연한 태도로 합작을 성사시켰다. 그의 이런 능력은 나중에 닉슨의 중국 방문과 협상 과정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합작이 이루어진 후 그는 국민당 임시수도인 충칭에서 통일전선 사업을 맡았다. 그리고 중공 중앙 창장국(長江局)과 남방국(南方局)을 지도하였다. 그는 사실상 적지인 충칭에서 국공합작이 유지되도록 힘을 썼다. 환난사변을 비롯하여 국민당이 틈만 나면 마찰을 일으켜 팔로군 -국공합작이 이루어지자 홍군은 국민혁명군 팔로군으로 개편되었다. 하지만 독자적으로 작전하며 공산당의 지도를 받는 형식적 개편이었다.- 을 공격하곤 하였지만 충돌이 더 확대되지 않도록 조정하곤 하였다.

    저우언라이는 이 시기 민주동맹을 비롯한 민주당파와 진보인사, 지식인, 애국인사와 외국 인물들과 광범위한 교분을 쌓았다. 세련되고 사심 없는 그의 인간적 매력은 그가 통일전선 사업을 벌이는데 중요한 자산이었다.

    1945년에 그는 다시 중앙정치국 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리고 중앙 서기처 서기로 마오쩌둥, 주더, 류샤오치, 런비스 등과 함께 서기처 성원이 되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항일전쟁이 승리한뒤 그는 여전히 내전을 방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세가 약한 공산당으로서는 실력을 기를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마오쩌둥과 장제스의 담판에서도 그는 회담실무를 도맡아 처리했다. 국민당과의 협상에서 그는 태도는 유연했지만 병력 감축 등 직접적인 이해와 관련해서는 물러서지 않는 단호함을 유지했다.

    그는 줄곧 적지인 충칭 및 난징에 머물렀다. 판사처에서 덩잉차오와 함께 머물며 중공 대표단을 인솔하여 국민당과 담판을 벌이는 가 하면 국민당 통치지역에서 당의 정치, 군사, 통일전선 업무를 계속했다.

    내전기간 마오와 함께 하다

    1946년 그는 중공 중앙군사위 부주석 겸 총참모장을 맡았다. 인민해방군 총사령이 주더이기는 하였지만 사실상 공산당의 2인자가 된 것이다. 내전이 벌어지자 그는 난징의 판사처에서 옌안으로 철수했다. 그후 내전기간 내내 그는 마오쩌둥과 함께 있었다. 옌안을 점령당하고 마오쩌둥이 섬북을 전전할 무렵에도 그는 줄곧 마오와 함께 했다. 본래 주더와 마오쩌둥, 저우언라이는 중요 정책을 의논하여 결정하곤 하였다. 하지만 내전 초기 공산당은 지도부를 셋으로 나누었다. 지도부를 한 번에 잃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마오와 저우언라이, 런비스는 섬북을 전전하며 전쟁을 지도했다.

    주더와 류사오치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화북 해방구에서, 예젠잉 등 실무자들은 화북의 또 다른 곳에서 별도 지도부를 구성하였다.

    그는 언제나 마오쩌둥의 상담역과 당의 실무총괄을 맡았다. 심지어 그는 피난지에서 마오쩌둥과 장칭의 부부싸움을 중재하기도 하였다. 마오쩌둥의 경호원에 따르면 마오쩌둥에게 혼이 난 장칭이 늘 저우언라이를 찾아 하소연하며 상담했다고 한다.

    내전 시에도 협상대표로 활약

    내전 초기 그는 미국의 중재를 요청하여 휴전을 이끌어 내었다. 공산당 중원 해방구의 철수와 동북지역의 철수에서 저우언라이가 이끈 휴전은 해방군의 재기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시간을 벌었다.

    내전 말기 국공 간에 담판이 벌어졌을 때 그는 다시 협상 대표를 맡았다. 이때는 국공 간 전세가 역전되어 공산당이 일방적으로 국민당을 압박하고 있었다. 이때 저우언라이는 회담에서 국민당을 밀어붙이는 한편 결렬책임을 국민당에 전가하는 치밀한 전략을 구사하였다. 그 결과 국민당이 회담결렬을 선언하여 해방군이 창장을 건널 수 있는 명분까지 만들었으니 공산당으로서는 꿩 먹고 알 먹는 결과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국민당 담판대표 다섯명 모두를 공산당에 동조하게 만들어 절정의 공작 능력을 보여 주었다. 결국 담판대표들은 난징에 돌아가지 않고 베이징에 남아 신중국 건설에 참여하였다.

    그는 공산당의 첩자는 물론 국민당의 정치와 군사 지도자들에게 대한 공작을 총괄 지휘하였다. 내전 기간 내내 결정적 국면마다 첩자의 활약이나 기의가 잇따랐으며 저우는 대부분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지휘하였다.

    신중국에서 총리로 활약하다

    신중국 성립 후 저우언라이는 줄곧 정부 총리를 맡았다. 1949년부터 1958년까지는 외교부장을 겸임했으며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중앙정부 부주석, 중앙군사위 부주석을 역임하였다. 정치협상회의에서도 그는 계속 부주석을 맡았으니 마오쩌둥에 이은 2인자 역할을 한 셈이다.

    그는 총리와 외교부장, 그리고 각종 당업무에 여념이 없는데도 경제사업을 직접 챙겼다. 1953년-1957년까지 156개의 공업건설 항목에 관여하였다. 그는 대약진운동 기간에도 마오쩌둥의 뜨거운 머리에서 비롯한 광풍에서 균형을 잡으려 애를 썼다. 대약진운동이 실패한뒤 그는 류샤오치, 덩샤오핑과 함께 경제정책의 전환과 조정을 시도하여 경제회복에 성과를 내었다. 그는 언제나 실사구시를 강조했으며 경제의 균형발전을 추구하였다.

    한국전쟁이 폭발하자 그는 중국 인민지원군의 보급을 책임졌으며 정전회담을 지도하였다. 그는 외교부장으로 중국이 비동맹회의를 주도하도록 하는등 외교적 영향력을 확대하는데 힘을 썼다.

    문화대혁명 기간에 그도 조반파의 공격대상이 되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그는 4인방을 비롯한 조반파, 홍위병에게 공격받는 인사들을 보호하려 애를 썼다. 그는 린비아오, 장칭 등과 치열한 투쟁을 벌이며 혼란에 빠진 정부 기능을 바로잡고 문화대혁명의 광풍에서 흔들리는 당과 국가를 지탱하려 혼신의 노력을 다하였다. 그런 가운데서 미국 및 일본과 관계개선 및 정상화를 위해 진력하여 중국이 UN에 가입하는 성과를 내기도 하였다.

    검소한 모범 총리

    1972년 그는 방광암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총리로서 업무를 놓지 않았다. 그는 1976년 1월 8일 베이징에서 세상을 떠났다.

    저우언라이의 부인 덩잉차오는 그가 사망한 지 한참 뒤인 1982년 이렇게 회고하였다. “우리 부부는 늘 서로 일깨워 주는 사이였다. 당의 기율을 준수하는 데 있어 누구라도 예외는 없다. 누구도 당의 비밀을 엄수해야 한다. 우리는 늘 이것을 명심하자. 이런 내용이었다.” 과연 모범 혁명가 부부의 모습이라고 할 것이다.

    저우언라이의 비서는 또 이런 회고를 남겼다. “우리의 모직물이 아직 조악하던 시기 총리는 국산 제품으로 옷을 지어 입었다. 그는 총리 겸 외교부장이었지만 짙은 남색의 중산복을 십년동안 입고 있었다. 누가 외교부장이니 영국의 모직물로 옷을 지어 입으라고 권하자 그는 웃으며 “아니다. 나는 국산을 써야 한다.” 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가 거주하던 집은 너무 오래되어 난방은 물론 햇볕도 제대로 들지 않는 구옥이었다. 비서가 새로 짓지는 못해도 조금만 수리하자고 해도 저우안라이는 막무가내였다. “부서지기 전에는 어떠한 물건도 들이지 말라.”고 하였다. 저우가 외교 일로 장기간 집을 비우자 비서가 때는 이때다 하여 마당에 포석을 깔고 소파와 커튼을 바꾸는 등 손을 조금 보았다. 저우가 돌아와 집에 오더니 마당에서 집안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저우언라이는 비서를 불러 성을 내며 말하기를 “이것은 내 집이 아니다. 전부 원위치하기 전에는 나는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여 원래대로 돌려놓은 일이 있었다. 저우는 나중에 비서에게 이렇게 이 야기했다. “나는 일국의 총리다. 내가 하는 행동을 모두 따라 배운다. 절대로 낭비하거나 사치할 생각을 하지 마라.”

    아아, 우리의 지도자들은 이런 흉내를 내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는가? 청와대에서 나오겠다는 약속조차 지키지 않는 지도자를 보며 중국의 옛 총리를 부러워 한다.

    필자소개
    해남 귀농. 전 철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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